얀붕이와 얀순이의 가정환경은 빈말로라도 평범하다고는 할수 없는 지경이었다.


얀붕이의 아버지는 끔찍한 사람이었다. 한 때 전도유망한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몰락해버린 자신의 처지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자신은 능력있는 사람이다' 라는 뒤틀린 욕망을 가정폭력으로 해소했다. 세 남매의 맏이었던 얀붕이는 아직 학교도 다니지 않는 동생들이 얻어맞는 꼴을 도저히 볼 수 없었고, 자기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여린 손으로 아버지의 등에 식칼을 꽂았다. 그 뒤로 가족에게 향한 폭력은 얀붕이가 독차지하게 되었지만, 얀붕이가 했던 생각은 하나 뿐이었다. 동생들이 맞지 않아서 다행이야.


얀순이에게는 애초에 가정이라는게 존재하지 않았다. 편모가정에서 아버지없이 자라던 얀순이가 갖고있던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첫눈이 오던 겨울날 울며 매달리던 얀순이를 내팽겨치고 집을 떠나던 모습이었다. 챙겨주는 친척 하나 없이 보조금으로 근근히 생활하던 얀순이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억지로 다니는 학교 생활은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학교 아이들은 얀붕이와 얀순이를 '거지 동네사는 거지새끼들'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멍투성이로 절뚝이며 학교에 다니던 얀붕이나, 거지꼴로 음침하게 등교하던 얀순이는 그들을 향한 조롱에 저항할 의지조차 없어보였고, 사춘기 아이들에게 피어나곤 하는 가학성에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그런만큼 둘은 서로에게 조금씩 끌리기 시작했다. 둘은 거지동네 놀이터에 서로 처음 만났다. 흔한 그네도 없고 모래바닥에 타이어만 몇개 깔린 놀이터에서 얀붕이는 아버지가 술이 깰 때 까지 맨바닥에 앉아 모래에 그림을 그렸고, 얀순이는 떠나버린 가족에게 집착하듯 혼자 소꿉놀이를 반복하곤 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외진 놀이터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치던 둘은 곧잘 놀고는 했고, 어느샌가 친해진 둘의 사이는 얀붕이가 소꿉놀이에 '아빠 역할'로 조금씩 참여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엄마 역할을 하던 얀순이는 조금 부끄러워 하는 듯 했지만, 그 때 만큼은 무언가 충족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즐거웠다.




-




시간이 지나고 둘은 중학생이 되었다. 남녀 모두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가질 나이가 되었고, 어느 때보다 외모의 권력이 높을 시기인 그 때 즈음 얀순이에 대한 괴롭힘은 점점 희미해졌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괴롭힘 받던 과거는 그녀의 외모 앞에는 '사소한 과거' 정도로 치부되었다. 


반면 얀붕이에 대한 괴롭힘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폭력의 정도는 점점 늘어나 견디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제대로 먹질 못해 왜소한 얀붕이의 체격, 폭력에 익숙해져 벌벌 떨며 저항조차 못하는 얀붕이의 태도는 '괴롭히기 좋은 장난감' 에 안성맞춤이었다.


얀붕이와 얀순이의 관계에는 겉보기에는 별 문제 없어보였다. 놀이터 대신 가족없는 얀순이의 방에서 둘은 곧잘 놀고는 했고, 몇년이나 비슷한 처지를 겪은 사이이니 만큼 둘 사이는 어색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얀붕이의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어느새 학교에서 인기인이 되고, 꾸준하게 노력해 괜찮은 성적까지 받고 다른사람들에게 신뢰받는 그녀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멈출수가 없었다. 성적도 좋고 인기 많고,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신뢰받는 얀순이와, 학교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폭력에 찌들어 동생들에게까지 무시받는 내 모습, 병신같은 내 처지. 마음 깊숙한 곳 까지 뿌리깊게 박힌 열등감은 점점 얀붕이를 좀먹었지만, 얀붕이는 아무 내색않고 웃으며 얀순이를 맞이할 수 있었다. 참고 버티는건 얀붕이가 가장 잘 하는 일이었으니까.



얀순이가 그의 몸에 난 상처를 무시하고 모른척해도 얀붕이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부끄러워 할 까봐 배려해주는 걸지도 모른다고, 조금 고맙다고도 생각했다. '넌 그래도 부모님이 계시잖아, 네가 부러워' 라는 무신경한 소리를 들을 때는 참기 힘들었지만 괜찮았다. 자기는 얀순이에게 가정 얘기를 한 적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얀순이가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얘기를 꺼냈다.


얀붕이가 남몰래 얀순이에게 품던 호감이 산산조각나서 얀붕이의 심장을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참다 못해 아버지의 등을 찔렀던 날, 얀붕이는 전신의 뼈가 으스러질 때 까지 맞았다. 그 때 기분이 이러지 않았을까? 아니면 학교에서 개처럼 끌려다니며 폭행 당했던 날? 아니면 아득바득 지키던 동생들이 나한테 한심하다고 비웃었던 날, 아니면-

혼란스러운 머리 속은 온갖 끔찍한 기억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온갖 끔찍한 상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던 얀붕이가, 간신이 입을 열어 꺼낸 말은


"축하해. 어쩐지 요즘 좋아보이더라."


얀붕이는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갈갈이 찢긴 자신의 마음은 신경쓰지 않았다. 참고 버티는건 얀붕이가 가장 잘 하는 일이었으니까.

한껏 신난 그녀가 뭐라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몸이 통째로 바다속에 잠긴 것 같아서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응! 어렸을 땐 정말 학교 다니기 싫었는데, 요즘은 매일매일 즐거워."


나는 매일매일 지옥같아.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얀붕이도 더 밝게 하고 다녀봐! 웃고 다니면 괴롭힘도 많이 줄어들거야."


애써 웃는다고 아빠가 날 그만 때리지 않았어.


"그리고 얀붕이는 가족들도 있잖아. 가족을 위해서라도..."


나는 걔네들이 전부 산채로 불타 죽었으면 좋겠어.


"아, 내 남자친구도 자기반 애 가끔 괴롭히고 그랬다는데, 편견없이 만나보니까 나쁜 애는 아닌거 같아. 얀붕이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




불 꺼진 방에 엎드린 얀붕이는 자신이 무너져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원래부터 망가져 있던 인생이 드디어 끝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둘 다 이거나.


얀붕이는 몇시간째 소리없이 울었다. 어두운 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나가지 않는다. 술인지 마약인지, 뭔가에 취한 아버지는 잠긴 방문을 두드리며 괴성을 지르고 있다. 얀붕이는 저새끼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적당히 패다가 끝내는 대신 자신을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씨발새끼, 사람 죽일 용기 하나 없는 저 겁쟁이 새끼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고있다고도 생각했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아버지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술에 찌들어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아버지는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을 했다.

동생들은 이제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자기들 할 일을 하고있다. 얀붕이가 얻어맞으며 참지 못해 내는 비명은 윗집에서 부주의하게 내는 발소리나, 일상적인 생활소음과 다를게 없는 것이다. 얻어맞던 와중에 실소가 터져나왔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폐에서 멈추지 않고 끅끅대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동생들은 정신병자 보듯 그 모습을 흘겨보다, 이내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얀붕이는 이제 미친듯이 웃어댔다. 얀붕이도 더 밝게 하고 다녀봐! 문득 그 말이 생각났다. 억지로 웃을 필요는 없었다. 누가 봐도 웃기기 짝이없는 꼴 아닌가, 그동안 뭘 위해서 아버지의 샌드백을 자처했나? 웃고 다니면 괴롭힘도 많이 줄어들거야! 그 말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오늘에야 말로 숨통을 끊어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랬다. 아버지는 소원을 이뤄주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얀붕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



종종 자기 반에 찾아와서 얀순이의 집에서 함께 놀던 얀붕이가 보이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생겼으니 배려해주는 게 아닌가 싶어서 좀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이가 그런거 신경 쓸 사이냐고, 우연히 만나면 장난스럽게 핀잔을 줄 생각이었다.


우연히  얀붕이가 학교에서 안보인다 싶었더니, 벌써 일주일 째 학교에 나오지 않는 말을 들었다.

자퇴한 건 아니라는 선생님의 말에 마음을 놓았다. 자신도 어렸을 적 괴롭힘을 받다가 지금은 잘 지내고 있으니, 얀붕이도 조금만 참으면 멀쩡히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혹시 힘들다고 연락이라도 하면 자기 남자친구한테 부탁이라도 해볼까 잠깐 생각했다.


한달 째 얀붕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뭔가 잘못됬다고 생각했다.



급한대로 얀붕이의 주소로 찾아가 가족들을 만나봤다. 동생들은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내며 대답을 꺼려했다. 사정사정하며 연락이 닿으면 알려달라고 빌던 얀순이는, 그새끼 찾아내면 죽여버릴 거라는 얀붕이네 아버지에 말에 새파랗게 질린 채 집을 나섰다. 

절박한 심정으로 얀붕이네 반에 찾아갔다. 소식을 아는 친구 없냐고 물어보는 그녀에게 얀붕이네 반 아이들은 애비한테 맞아 뒤진게 아니냐며 실종된 얀붕이를 비웃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됬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얀붕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얀붕이와 자신이 같은 반이라고 했다.




-



얀붕이가 사라지고 몇년 간 얀순이는 상실감인가 죄책감인가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에 표류하며 지냈다. 그럭저럭 하던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선생님들도 고아였던 그녀에게 더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남자친구와는 헤어졌지만, 질나쁜 무리와 어울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괜찮은 남자애들을 찾았다며 꺄르르 웃어대는 친구들에게 불려나왔다. 얘들이 생각하는 '괜찮은 남자'란 역겨운 것들이다. 자리 채워주고 시간이나 때우다가 나갈 생각이었다. 전혀 기대되지 않지만 아무 의미 없는 시간으로 어떻게든 하루를 채우면 그걸로 족하다.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도 노골적으로 관심없다는 태도를 보이니 잠잠해졌다.


학교생활에 완전히 관심을 잃고 완전히 탈선한 얀순이는, 모순적이게도 연애든, 흡연이든 음주든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다. 세상 만사가 귀찮고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고등학생이 되서도 아무것도 흥미가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놀이터에 얀붕이가 다시 찾아와 손을 내밀어 줬으면. 다시 텅 비어버린 자기 방에서 함께 놀자고,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번만 더 말해줬으면.


"씨발 왜 이런곳으로 부르는데."


그래, 저 목소리를 한번만 더 들려줬으면.


얀순이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깜짝 놀란 주변에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는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달려나간 노래방 입구에, 얀붕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가 훌쩍 자란 모양이다. 그간 많이 걱정했는데, 잘 먹고 지냈는지 체격도 훨씬 좋아보였다. 뭔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도저히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다시 만나면 말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아...나..어릴 때...얀순이....그게..."


"그래서 어쩌라고."


몇 년만에 본 친구인데 좀 더 다정할수는 없을까? 문득 그녀는 그들의 마지막이 별로 아름답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애써 좋은 기억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끔찍한 생각들이 머리속이 하얗게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얀붕이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볼 일 없으면 꺼져."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예쁜 말만 하던 입에서는 그녀를 향한 폭언이 거리낌없이 튀어나왔다. 자신이 누군지 알고있지만 길거리에서 마주친 돌멩이 마냥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한 그런 얼굴.


머리가 하얘진 얀순이가 한 생각은,  훨씬 성숙해진 얀붕이의 잘생긴 얼굴에 초커가 정말 어울린다는 생각이었다. 옅게 탈색된 금발에 하얀 피부 위로, 검은 가죽에 금속으로 포인트를 준 초커가 묶여있는 저 모습은 정말...


선이 강한 도깨비 문신. 한냐라고 하던가? 대충 걸친 티셔츠에 비치는 한쪽 어깨는 팔꿈치까지 문신이 덮혀있었다. 얀붕이가 사라지고 첫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로 양아치같은 사람은 진절머리나서 기피했지만, 그딴 건 아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만나서 기분이 나빠졌는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는 얀붕이의 옷깃을 힘껏 잡았다.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때려 죽여도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발, 제발 말 한마디라도 들어줬으면. 사과라도 하게 해줬으면. 옛날처럼 돌아가지 못해도 좋으니까 가끔 연락이라도 해줬으면, 제발, 제발요.


얀붕이는 불쾌하다는 듯 얀순이의 손목을 잡아 손을 내팽겨쳤다. 새하얀 손목에 빨갛게 자국이 생겼고, 다리가 풀린 얀순이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주변에서 당황한 친구들이 모여들었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얀붕이도 당황스러울테니 시간이 필요할거야, 하루정도면 되겠지? 이런데 불려 나온거면 여자친구는 없을거야, 분명히 없겠지. 근처에 산다는걸 알았으니까 됬어. 이번엔 내가 더 잘할게. 그때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게.


하릴없이 자국이 남은 손목을 매만지며 얀순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


그럼이만...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