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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실연의 아픔을 막 겪은 참이다만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장학금을 놓치면 생계가 곤란해지니까... 나같이 비루먹은 인간에게는 슬퍼하는 것조차 사치다. 아니, 어디 슬픔뿐이 사치랴. 사랑도 내게는 너무 멀리 있다. 내 일생에서 가장 애틋했던 첫사랑도 예지에게는 그저 매일매일 날아오는 스팸메일 같은 것이었겠지. 너무도 예뻤던 그녀의 미소에 홀려 주제를 잊고 만용을 부렸던 한심한 남자에게 딱 어울리는 비참한 아침이다. 앞으로도 내겐 슬픔도 사랑도 허락되지 않은 무채색의 텅빈 나날들이 허락될 뿐이다. 그것이 내게 허락된 삶이니 나는 군말없이 무색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길가에는 꽃잎이 사라지고 초록빛 나뭇잎이 주렁주렁 달린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봄에 시작한 나의 첫사랑의 실연을 비웃듯이 나뭇잎들은 싱그럽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땅바닥에 떨어져 사람들의 발에 짓밟힌 벚꽃잎을 바라보며 착잡한 한숨을 내쉰다.


"하아.. 이제 완전히 여름이 되가는구ㄴ... 응?"


운명이란 녀석은 내 만용의 대가를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받아낼 작정인 모양이다. 학교에 가기 위해 내가 매일 이용하는 버스의 정류장에는 날 홀렸던 그때 그대로 아름다운 예지의 모습이 있었다. 지금 예지를 마주치면 눈물을 쏟아내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다.. 누굴 기다리는지 계속 손목의 시계만 들여다보는 그녀. 얼핏 봐도 엄청 비싸보이는 시계다. 나와 그녀가 사는 세계의 거리를 싫어도 느끼게 된다.

등을 돌려 예지의 모습을 뒤로 하고 반대쪽으로 걸어간다. 오늘은 그냥 자전거 타고 가야겠다.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이건.. 그래. 그저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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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얀붕이에게 내가 다른 남자와 모텔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여버린 후 나는 그날 하루를 꼬박 자괴감에 빠져 보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빨리 그에게 가서 사과와 해명을 해야 했을 텐데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던 얀붕이의 순수한 연모의 눈빛이 다르게 바뀌어 버릴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얀붕이가 나에게 상심과 경멸의 시선을 향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겁쟁이인 나, 안일했던 나, 헤펐던 나를 생각해면 생각할수록 자기혐오는 커져만 갔다. 지금이라도 얀붕이에게 연락하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어제 돈에 혹해서 '마지막으로 딱 한번'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애초에 내 몸만 보고 접근해온 남자들을 전부 거절했다면…


"으으…. 얀붕아.."

그렇게 순수한 감정을 보여줬던 건 네가 처음인데, 나는 너에게 너무도 큰 상처를 준 것 같아. 이제 난 어떡해야 해…


"괜찮아. 난 예지를 믿어."


"핫!!!!??? 얀붕아? 여긴 우리 집인데 네가 어떻게"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건 내가 널 믿고 있다는 거야. 일단 어떻게 된 건지 얘기부터 해줘."


"응… 사실은 말야, 전에 그 선배가 너한테 했던 얘기 전부 진짜야. 나 고등학생때부터 계속 남자랑 자고… 돈이랑 비싼것들 받는 대신에… 그래도 널 만나고부터는 전부 끝내려고 했어!"


"으응. 그렇구나. 역시 난 널 믿고 있었어."


"얀붕아아.."


"네가 역겨운 걸레년이라는 걸 철썩같이 믿고 있었지. 몇년동안 대체 몇놈이랑 해댄거야? 그정도면 보지랑 얼굴이랑 젖통에 정액냄새 배가지고 빠지지도 않겠네. 네 입으로 직접 자백까지 했으니까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어. 넌 그냥 돈에 눈이 먼 창년이야."


"아.. 아.. 미안해애.. 미안해애! 얀붕아아! 제발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줘, 날 싫어하지 말아줘!!

….헉!!!"


꿈… 꿈이구나. 어느새 깜빡 잠들어버렸던 모양이다. 창밖에선 어슴푸레한 여명이 산 너머에서 하늘을 조금씩 밝히고 있었다. 그래, 얀붕이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오늘은 얀붕이를 만나 꼭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



써놓은 걸 보니까 시간대가 좀 헷갈릴 수 있겠다 싶어서 알려드리는 것

얀순이 시점 -> 얀붕이 시점임

다음 전개가 생각나지도 않고 딱히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듯해서 스리슬쩍 튀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