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실험체 (4)

 

 

 

 

“……너 말이다.”


“왜요?”


“원래 이렇게 키가 컸던가?”


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릴리트를 데려오고 아직 반년이 채 안 됐을 터였다.

 

그러나 릴리트는 그 몇 달 사이에 훌쩍 커버려 이젠 1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무지막지하게 먹어치우더니 결국 이렇게 됐나…….”


“그렇게 말하니까 제가 돼지가 된 것 같잖아요!”


“먹는 양은 돼지보다 더 많이 먹-”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릴리트가 얼른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입을 틀어막았다.

 

“크아악! 이, 이 자식이!”


“선생님이 나쁜 말을 한 게 잘못이에요!”


“흥, 나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한다. 거짓말은 우둔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아니거든요!?”


릴리트가 그 말 취소하라고 소리치는 동안에도, 그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180일 남짓의 기간 동안 체중은 20KG 이상 늘어났고, 키는 30CM 넘게 자랐다.

 

뿐만 아니라 외형에도 변화가 있었다. 날개와 꼬리가 더 커지고 외모도 조금 더 성숙해졌다.

 

‘아무리 서큐버스라지만 이렇게 빨리 자랄 수 있는 건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지능 쪽이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던 릴리트는 이제 쉬운 글도 쓸 수 있었다. 

 

간단한 셈도 할 수 있었고, 경제의 원리나 역사 지식도 약간이나마 습득했다.

 

“적응 인자의 영향인가……?”


“아, 그거 말인데요. 결국 적응 인자라는 게 뭐에요?”


문득 헤인킬은 그 적응 인자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모처럼의 기회다. 그가 메스를 꺼내 느닷없이 릴리트의 팔을 베었다.

 

“아얏!”


“얌전히 있어. 설명을 위해 너의 피부가 조금 필요하거든.”


그가 능숙하게 피부 조각을 채취한 뒤, 유리 플라스크에 넣었다.

 

“먼저 적응 인자에 대해 설명하려면 인자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인자란 즉

 

어떤 능력이나 성질을 물질로 구현한 것이며 주로 액체나 고체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어려워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요.”


“이걸 봐라. 너의 몸에는 적응 인자라 하는 극도로 희귀한 인자가 존재한다.

 

그 인자를 가진 생물은 어떤 환경, 물리적 위해에 대한 저항력과 적응력을 지닌다.”

 

그가 가스램프를 켜 불을 피웠다. 그리고 그 위에 플라스크를 올려두었다.

 

“잘 봐.”


피부 조각이 열에 익어 연기가 났다. 그러나 곧, 피부가 푸른색으로 변했다.

 

“색이 변했어요!”


“이 피부는 지금 강한 열에 저항하는 능력이 생겼다. 네 몸에 분리된 상태에서도

 

적응 인자가 작동하는 것인데, 이런 케이스는 보고된 적 없을 정도로 희귀하다.”

 

적응 인자를 가지고 있더라도 대부분 위험한 환경에 더 쉽게 적응하는 정도다.

 

그러나 릴리트가 가진 적응 인자의 힘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만약 너의 몸에서 적응 인자를 추출해내면, 넌 능력을 잃게 된다.”


“마법사들은 이런 연구를 하는 거군요.”

“아니, 이걸 연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자 마법은 굉장히 어려운 편이라서.”


보통은 기본 이론을 이해하는 것조차 힘들다.

 

그가 스승과 다른 마법사들에게 마법을 배울 때에도 인자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성과는 사실상 헤인킬이 혼자서 이룩한 것이었다.

 

“즉, 나는 천재라는 것이다.”


“……네에.”


“뭐냐 그 눈빛은? 내 천재성을 의심하는 건 우주의 존재 유무를 의심하는 것과 같다.

 

자! 나를 찬미해라! 칭송하고 또 경외하라! 인자의 마법사, 이 헤인킬을-”

 

“저, 죄송합니다만.”


문이 열리자마자 헤인킬은 얼른 팔을 내리고 뒤로 돌아섰다.

 

“흠흠, 이런 시간에 손님이라니. 넌 누구지?”


“저는 이름 없는 시종에 불과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헤인킬은 눈앞에 선 여인의 정체를 파악했다.

 

온 몸을 덮은 검은 천 옷, 뾰족한 귀, 독특한 음색을 지닌 목소리.

 

“엘프가 내게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왔지?”


“엘프요?”


“당나귀 귀를 가진 숲의 거지들이다.”

 

“저희 종족에 대한 모욕은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그럼 원숭이라고 해둘까?”


헤인킬은 일부러 상대방의 의중을 떠보려고 도발했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말을 이어했다.

 

“당신께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길드를 통하지 않고 날 직접 만나러 온 이유는?”


“이번 일은 비밀리에 처리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자기네 종족끼리만 노는 엘프가 직접 자길 만나러 와서, 비밀스러운 의뢰를 한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 둘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라.”

“일단 따라와 주시지요.”


“아니, 난 의심병 환자라 조금이라도 석연치 않으면 일하지 않는다.”


“선금을 드리겠습니다.”


엘프가 그렇게 말한 후 가지고 온 자루를 바닥에 던졌다.

 

“릴리트, 안을 확인해라.”

“네……우와, 동전이 잔뜩 있어요!”


릴리트가 동전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파온 동전이었다.

 

“엘프는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천국에선 천국의 법을, 지옥에선 지옥의 법을 따라야지요.”


“하! 말재주가 제법이군. 좋아, 선수금을 받았으니 따라주지.”


“괜찮으시겠어요?”


“여차하면 다 죽여 버리고 도망치면 되는 문제 아니겠어?”


“좋습니다. 그럼 두 분, 저를 따라오십시오.”


무슨 의뢰를 할지 조금 기대되는군.

 

헤인킬이 릴리트를 데리고 그녀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

 

 

 

 

 

 

 

 

“이 저택은……분명 빈 곳이었을 텐데.”


“저희가 구입해서 사용하는 중입니다. 부디 저희의 소재를 다른 이에게-”


“의뢰인의 정보를 함부로 나불거릴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계집아.”

 

유령 저택. 그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은 그토록 흉흉한 이름으로 불렸다.

 

과거 어느 부호와 가족이 살았지만 무시무시한 저주를 받아 모두 죽었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헤인킬은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는 미신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사람이었다.

 

“자, 안으로.”


시종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흉측한 정원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보다도 신경 쓰이는 것은-

 

“저희, 감시받고 있네요.”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법이잖아?”


그 말대로, 헤인킬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로 알아챘다.

 

엘프가 숲을 나오는 일은 드물다. 그리고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건 더더욱 보기 힘들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저택의 문이 열렸다. 바로 앞에 중앙 계단이 있었고, 현관엔 무장한 엘프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헤인킬과 릴리트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뭘 꼬나보냐, 숲 원숭이들아.”

 

“…….”


“저기, 선생님? 너무 도발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 까요……?”


“나무를 타면서 숲에 살면 원숭이지. 아닌가?”


헤인킬이 큰 소리로 웃었다. 엘프들이 노려보건 말건 어차피 그들은 그를 해칠 수 없었다.

 

만약 죽일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터.

 

“주인님은 가장 안쪽의 방에 계십니다. 부디 예의를 갖춰주시길.”

 

“어디 늙어 죽어가는 영감탱이라도 데려왔나 보군. 자, 빨리 안내해.”


그들은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다 사라지지 않은 저녁이었지만 안은 밤처럼 어두웠다.

 

“여기입니다. 공주님, 그를 데려왔습니다.”

 

‘공주라고?’

 

문이 열리며 갑주를 입은 엘프 병사들이 그들을 데리고 갔다.

 

커다란 방 안엔 10명도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침대가 있었는데, 막을 쳐서 내부가

 

보이질 않았다. 헤인킬은 이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어머니 나무가 그대를 축복하시길, 마법사 헤인킬 님.”


막이 거둬지며, 그 안에서 어느 여인이 나타났다.

 

릴리트는 보자마자 호흡을 멈췄다. 

 

백옥보다도 하얀 피부, 금강석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 다리에 닿을 정도로 긴 금발.

 

마치 하늘의 여신이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저의 이름은 루-나타니엘. 마키엘과 호하임의 딸이자 엘프를 다스리는 자입니다.”


“내 이름은 헤인킬, 이 녀석은 릴리트. 인간이랑 서큐버스다.”


서큐버스란 말에 근처에 서 있던 병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서큐버스는 가장 증오하는 마물 중 하나였고, 그 혐오는 인간들이 

 

가진 것보다 심각했다. 엘프들은 서큐버스를 보자마자 죽이곤 했다.

 

“당신이 그 인자의 마법사가 맞으신지요?”


“용케 날 알고 찾아오셨군. 그래, 같이 놀고 싶다고 부른 건 아닐 테니 본론부터 말해.”


“인간, 예의를 지켜라.”


겨우 분노를 참고 있던 근위대장이 말했다.

 

“예의라고? 너희 같은 귀쟁이들이랑 대화하는 나의 자비심을 먼저 헤아리는 게 어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근위대장이 이빨을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인킬은 신경도 안 썼다.

 

“그래서 뭘 의뢰하고 싶지? 배란유도제라도 갖다 주랴?”


“저의 병을 고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타니엘이 드레스를 거둬 가슴을 보여주었다. 릴리트는 얼른 눈을 가렸지만, 헤인킬은

 

그냥 그걸 쳐다보았다. 

 

“보이십니까?”


“네 젖가슴? 그래, 모양이 꽤 그럴싸하군.”


“선생님, 그거 성희롱이에요.”


“나 원, 요즘 여자들은 젖이 예쁘다고 칭찬하는 것도 싫어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주사기를 꺼내 목에 주사했다.

 

투시- 헤인킬은 나타니엘의 혈관과 장기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과연, 상태가 영 아니군. 그리고 일반적인 병도 아니야.”

 

“저희들은 이 병을 심장 뿌리 병이라 부릅니다.”


과연 그럴싸한 이름이로군. 그 말대로, 나타니엘의 심장으로 가는 혈관은 뿌리처럼

 

변해있었다. 심장으로 온전히 들어가야 할 피가 다른 곳으로 새는 것이었다.

 

“너희 엘프의 고상한 마법으론 치료할 수 없는 모양이지?”


“네.”


하기야 그렇겠지, 헤인킬은 그들이 몸에 일부러 상처 내는 걸 엄히 금지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즉 몸 내부에 문제가 생겨도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제일 쉬운 방법은 가슴을 갈라, 그 혈관을 제거하는 거다.”

 

“하지만 저희 엘프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시겠지. 어쨌든 날 찾아온 건 정답이었다. 고칠 방법이 있거든.”


“그럼 그 처방을-”


“하지만 두 가지 알아둘 게 있다. 첫째, 약으로 치료할 경우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둘째, 치료제의 재료는 상당히 비싸다. 이 정도면 이해했지?”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손짓하자 시종들이 동전 자루를 가져왔다.

 

“이곳의 돈으로 1,000파온입니다.”


“1, 1000!”


릴리트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껴 쓰면 1년을 버틸 수 있는 돈이었다.

 

“내 장점은 협상할 때 구구절절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지. 의뢰를 받아들이지, 약은

 

매주 가져오겠다.”

 

“시종을 보내면-”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이 약은 제조하고 10분 이내에 투여해야 한다. 공기에 오래

 

노출되면 독성이 생기거든. 그렇다고 제조법을 가르쳐 줄 순 없잖아?”

 

그 말에 나타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까지 약을 가져오지. 돌아가자, 릴리트.”


“네.”


두 사람을 그 길로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엘프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느닷없이 헤인킬이 웃었다.

 

“크하하하하! 와하하하, 우하하하하하!”


“왜, 왜 그러세요!?”


“바보들! 고작 심장 뿌리 병 때문에 그 거금을 들이다니, 진짜 바보 아냐?”


“네?”

 

“심장 뿌리 병의 치료제는 그리 비싸지 않아. 만드는 게 까다로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1,000파온이나 줄 필요는 없지. 나 원, 귀쟁이들이란.”

 

어쨌든 좋은 호구를 잡았다. 덕분에 연구비 부족으로 허덕일 일은 없어졌다.

 

“호구 낚은 기념이다! 오늘 저녁은 고기다!”


“그러다 나중에 칼 맞아요, 선생님…….”


“흥, 위대한 천재 마법사 헤인킬이 고작 칼에 죽을 소냐?”

 

헤인킬은 웃었다. 그러나 릴리트는 웃지 못했다.

 

방금 전에 만난 그 엘프는- 위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

 

 

 

 

 

 

 

 

서큐버스의 수명은 인간보다 조금 더 길다.

 

그리고 인간과 성장하는 방식이 달랐다. 인간과 달리 서큐버스는 한 순간에 성장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다 다시 성장하는 식이었다. 여태껏 릴리트가 크지 못한 건 순전히

 

영양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성장하기에 충분히 나이가 많았다.

 

“하아, 하아아아……!”


가슴이 아프다.

 

헤인킬이 잠든 그 날 밤, 릴리트는 가슴을 붙잡고 식은땀을 흘렸다.

 

“몸이, 이상해……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유년기의 서큐버스는 평범한 식사로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성장기에 들어서면-

 

“아냐, 나쁜 생각하지 마. 나쁜 생각은, 안 돼……나쁜 아이가 되면 안 돼……!”


먹고 싶어.

 

먹고 싶어,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싶어-

 

침이 흐른다. 동공이 수축되고,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육체는 탐하며, 성욕을 깨닫는다.

 

정신은 질투하여, 눈앞에 나타난 경쟁자를 질투한다.

 

적응한다.

 

그것은 즉, 성장을 뜻한다.

 

 

 

 

 

 

 

 

 

 

 

 


서큐버스의 성장기

유년기 – 1차 성장기 – 2차 성장기 - 성체.

외형으론 유년기 때 10살 내외, 1차 성장기 때 10 중후반, 2차 때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영양이 부족하거나 환경 차이로 나이를 덜 먹은 외형이 되기도 함. 현재 릴리트는 1차 성장기 초중반.

외형도 어릴 때 별로 안 예쁘다가도 성장하면서 역벽하기도 함.

설정 놀음이니까 별로 신경 안써도 돼 레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