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향의 하늘에는 명계가 있다.


영혼이 피안으로 가기 전 쉬어가는 고요한 땅. 수천 그루의 벚나무가 뿌리내린 혼접의 둥지.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쉽게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이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찾아오는 손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스락, 바스락.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벚꽃잎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울린다. 영혼의 땅에 찾아온 생자가 신기한지, 허공을 유영하던 몇몇 영혼들이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날아갔다.


지독하게 길던 명계의 계단을 다 오르자, 드넓은 평지와 거대한 가옥이 눈 앞에 펼쳐졌다. 

백옥루, 명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가옥이자 명계의 관리자가 기거하는 곳. 나는 평소처럼 그곳으로 발걸음했다.


"아, 오셨나요? 조금 일찍 오셨네요?"


정문 앞에서 길을 빗질하던 소녀가 나를 눈치채고 뒤돌았다. 귀여운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두 자루 검이 유독 눈에 띄는 소녀였다. 소녀는 빗자루를 정문에 기댄 채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명계의 관리자가 부리는 유일한 수족이자 정원사, 콘파쿠 요우무. 이런저런 마찰도 많이 빚었던 관계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백옥루에서 유일하게 나를 맞아주는 존재였다.


"사정이 있어서 조금 일찍 들렀어요. 유유코 님은 안에 계시나요?"


"평소랑 똑같죠, 뭐. 항상 있던 곳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식사를 먼저 준비할까요?"


"아뇨. 오늘은 금방 떠날 생각이거든요. 식사까진 준비하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그녀와 매일 나누는 문답과 함께 백옥루 안으로 들어섰다. 이젠 안내도 필요 없을 정도로 익숙해진 길을, 요우무는 늘 그렇듯 앞장서 걸었다.


첫만남 때 그녀가 보냈던 경멸어린 시선을 생각하면, 20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녀의 태도도 참 부드러워졌다. 아직 나를 향한 경계심을 지우진 않은 건 아쉽지만, 주인을 섬기는 무사가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을 없애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닐 것이다.


"...저기요."


걷던 중, 요우무는 드물게도 이쪽을 힐긋거리면서 말을 걸었다. 평소처럼 심드렁한 말투가 아닌, 어딘가 켕기는 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는 목소리였다.


"구태여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시죠?"


"..."


그걸 물어보고 싶은 거였나.

난 입가에 감도는 씁쓸함에 잠시 입술을 물었다. 알다마다, 내가 아무리 뻔뻔하다고 해도 그것마저 잊어버릴까.


이제 와서 말하기도 우습지만, 그렇게까지 추한 사람이 되고픈 생각은 없었다. 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우려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네, 물론...믿고 있죠. 무례하게 들렸다면 죄송해요. 유유코 님을 위해서라도, 확인해야 하니까..."


요우무는 자신의 질문이 무례했다고 생각했는지, 이쪽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도리어 큰소리를 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녀도 그렇게나마 냉혹한 성정은 아닌 듯 했다.


"지금까지 제 억지에 어울려 주셔서 고마워요, 요우무 씨. 그간 정말 폐를 끼쳤네요."


"폐라뇨, 그런 말할 필요 없어요. 유유코 님이 당신의 약조를 받아들인 이상...따르는 것은 시종의 의무인걸요."


그녀에게겐 참 고생을 끼쳤다. 20년 간 매일같이 나를 위해 길을 안내해주고, 차와 다과를 준비하고, 식사를 내줬으니, 얼마나 성가셨을까.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런 수고를 끼칠 일은 없었다.


내가 사이교우지 유유코와 맺었던 20년의 약조. 오늘이 바로 그 만기일이었으니까.



ㅡ "유유코 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우린 금세 익숙한 방에 도착했다. 응접실 안, 흐릿한 여인의 인영이 장지문 너머에서 어른거렸다.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고마워, 요우무. 그분을 안으로 들이렴."


성숙함이 깃든 나긋하고 여유로운 목소리는, 자뭇 남자의 마음에 스며드는 매력이 있었다. 

20년, 아니 그 이상으로 들어왔던 익숙한 목소리임에도, 유유코의 감미로운 미성은 여전히 내 가슴 한구석을 간질였다.


"들어가겠습니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그 앞에 보이는 건 성숙하게 영근 아름다운 여인.


느슨한 기모노 아래에 감춘 풍만한 가슴과 둔부는 자칫 우아함을 해칠만큼 요염했고, 아기처럼 자그맣고 뽀얀 얼굴엔 순수한 미소를 한가득 품고 있었다.


사이교우지 유유코.


명계의 관리자이자 백옥루의 주인, 영혼을 달래는 가희이자, 윤회를 벗어난 망령공주. 그리고,


천 년 전, 내가 사랑했던 연인이자,

천 년 후 지금, 나를 잊어버린 매정한 여인.


"오셨어요? 후후, 오늘은 조금 일찍 오셨네요. 잠시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저번이랑은 다른 차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신의 평가를 듣고 싶었거든요."


그녀는 평소처럼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탁상 너머 자리를 권유했다. 나는 묵묵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요우무가 흡혈귀의 시종에게서 구해낸 서역의 홍차에요. 저도 좀처럼 맛볼 기회가 없는 귀한 물건이랍니다? 자아, 어서 드셔보세요."


그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내 앞의 찻잔을 가득 채웠다. 낯선 홍차의 깊은 풍미가 김과 함께 모락모락 솟았다.


"...네, 정말 향이 좋네요."


난 찻잔을 기울여 조심스레 서역의 차를 맛봤다. 평소 그녀가 내주던 차와는 다른, 달콤하고 씁쓸한 향이 혀에 진하게 남았다.


"맛도 진하고 괜찮아요. 너무 달아서 자주 마시진 못하겠지만요."


"그런가요? 그러고 보면, 당신은 너무 진한 맛이나 향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셨죠."


유유코는 찻잔을 홀짝거리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녀는 무엇 하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구나. 무언가를 먹을 때 짓는 저 행복한 표정은, 참 보는 사람을 즐겁게 매력이 있었다.


"...응, 정말 달콤하네요. 조금 끈적하게 입 안에 남지만, 이것도 매력이겠죠. 자주 마실 수는 없겠지만, 가끔 별미 삼아 마시긴 좋겠어요."


유유코는 찻잔을 내려두고 탁상 위에 있는 다과 몇 개를 들어 오물거렸다. 자그마한 콘페이토가 와삭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반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유유코는 분홍빛 눈망울을 반짝이며 내게 부탁했다.


"아, 당신. 흡혈귀의 시종과 어느 정도 연이 있는 걸로 아는데, 나중에 시간이 되신다면 이 차를 조금 더 구해주실 수 있나요? 제가 꼭 다과와 함께 보답해드릴게요."


흔치 않은 그녀의 부탁이다. 평소였다면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난 꺼림칙한 표정으로 입을 우물대며 거절의 말을 찾았다.


"앗, 죄송해요. 무리한 부탁이었나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거절당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는지, 유유코는 내 반응에 적잖이 당황하며 사과를 전했다. 좀처럼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겠다는 의문스런 표정이었다.


설마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고 있는 걸까.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난 조심스레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고 계셨습니까?"


"오늘, 이라면..."


유유코는 부채를 턱에 받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으응, 잠시 고민에 빠져 침음성을 흘리던 중, 그녀는 뒤늦게 탄식을 터뜨렸다.


"참, 바보처럼....잠시 잊고 있었네요. 오늘이 저희의, 마지막 만남이었죠?"


마지막 만남.

이미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가혹할 만큼 시리게 가슴을 찌르는 말이다. 나는 내키지 않는 입술을 열어 겨우 긍정했다.


"네. 오늘이 그날로부터 정확히 20년이 지나는 날이에요."


시간이란 참 어찌 이렇게 가혹할 만큼 짧은가.

환상향에서 그녀와 재회하고 벌써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매일매일, 한 시간 씩, 아침에 만나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냈는데도, 지난 20년 간 그녀와 보낸 시간이 턱없이 짧게만 느껴졌다.


"오늘이 지나면, 저는 더 이상 유유코 님께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했던 약조대로요."


첫 만남 당시 우리가 맺었던 약조, 그 내용은 단순했다.

'20년 간, 매일 한 시간 씩, 나에게 당신의 시간을 빌려줄 것.'


물론 유유코는 이 약조를 극구 반대했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대뜸 전생의 연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찾아와 끈질기게 달라붙는데 좋아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아직까지도 그녀가 내게 툭 던졌던 차가운 말이 귓가에 저주처럼 맴돌았다.


'과거의 제가 당신과 긴밀한 연인이었다고 한들, 지금의 제게 당신은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에요.'

'당신의 미련을 제게 투영하지 마세요. 당신이 알고 있는 옛 시대의 유유코는, 결코 제가 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녀의 냉혹한 거절에도 나는 간청했다. 구차할 만큼 머리를 조아렸고, 다 쉰 목소리로 구걸하듯 빌어댔다. 


'20년. 그게 저와 당신이 알고 지냈던 그 추억의 모든 시간입니다.'

'부디, 그 20년이라는 시간동안, 하루의 극히 일부라도, 제게 허락해주십시오.'

'그 안에, 반드시 당신이 절 떠올리게 만들 테니까.'


그 요청이 얼마나 끈질겼는지, 보다못한 요우무는 칼까지 빼들어 내 목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서슬퍼런 칼날 아래서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억지에 가까운 위험천만한 도박이었지만, 그녀의 친구인 유카리가 나를 도와 설득한 끝에, 이 약조는 기어이 성립되었다.


만약 20년이 다 지날 때까지, 그녀가 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다시는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사이교우지 유유코는 마지못해 약조에 응했다.


"...아쉽네요."


차라락, 유유코는 부채의 살을 손가락으로 쓸어넘기며 중얼거렸다.


"시작은 좋지 않았다고 해도...그간, 당신과의 시간은 귀한 경험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와카, 제가 좋아하는 음식과, 술.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제게 맞춰주었으니까요."


위선일까, 아니면 진심일까.

알 수 없었다. 유유코는 항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에 능했다. 전생에서도, 그녀는 순진한 미소를 가장하여 능구렁이 같은 장로들의 덫을 교묘히 피하곤 했다.


나처럼 우직하고 멍청한 무사 하나를 속이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일 터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와서 위선이든, 진심이든, 그게 뭐가 중요할까.

중요한 건, 결국 나는 실패했다는 사실 하나 뿐인데.


20년이라는 시간동안 모든 것을 다 시도해봤다. 그녀가 좋아하던 음식을 선물했고, 그녀가 좋아하는 와카의 구절을 들려주었으며, 귀한 술 잔에 벚꽃잎을 띄워 같이 마시기도 했다.


그렇게, 빌어먹도록, 모든 발악을 다 했음에도, 결국 유유코는 나에 대한 기억을 어느 하나도 떠올리지 못했다.


"...아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신 거죠?"


마지막 미련을 담아 멍청하게 질문해본다. 당연한 듯이, 유유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고갯짓 하나가 티끌처럼 남은 희망을 참혹하게 구겨 바닥에 내팽겨쳤다.


"...죄송해요. 하지만 역시...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전혀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요. 그건, 그냥..."


난 유유코의 형식적인 사과를 밀어냈다. 20년 간,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것이다.

이젠 체념밖에 남지 않았다.


"그냥...제게 운이 없었던 것 뿐이죠."


나와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 그녀의 입장에선 결코 달갑지 않았겠지만, 유유코는 귀찮다는 내색 없이 진심으로 나와의 시간에 집중해줬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유유코는 그저 방청객의 입장으로 경청할 뿐이었다.

단 한 번도, 그녀는 내가 사랑했던 유유코라는 소녀에게 이입한 적은 없었다.


"...20년 간, 당신과 같이 보낸 시간 속에서 느꼈어요. 당신에게 사랑받았던 시절의 저는, 분명 행복했을 거라고요."


유유코는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위로는, 냉혹하게 선을 긋는 패배 선언이기도 했다.


"함부로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건 알지만...전 당신이 더 좋은 인연을 만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의 정성에 보답하고, 사랑으로 답해줄 수 있는...그런 인연이요."


더 좋은 인연?

끅, 나는 헛웃음이 치밀어오르는 입술을 악물었다. 유유코의 말은 틀린 말 하나 없는 정론이었지만, 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사랑했던 여인의 목소리로, 마치 타인의 일을 대하듯, 나에게 절연을 선고하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 말 못할 비참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이대로 고개를 들으면 내 표정을 그녀에게 들킬까봐, 난 찻잔에 비친 내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내려보았다.


"그러니 부디, 너무 상심 마셨으면..."


이 이상 말을 나누었다간, 이 비참한 자조감이 유유코를 향한 원망으로까지 번질까봐,


"...지금까지, 실례했습니다."


덜컥,

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벅지가 탁상에 살짝 부딪쳐 찻잔이 덜그럭거렸다.


"오늘부터, 다시는...제가 당신의 눈에 띄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는 이제 떠나야 할 때였다.

더 이상 그녀를 괴롭혀봤자, 그건 미련에서 기인하는 추악한 집착일 뿐일테지.


"벌써 가시려고요? 아직 시간은..."


"오늘은 이 얘기를 전해드리려고 온 것 뿐이니까요. 이제는 저도 당신의 말대로, 미련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야겠죠."


그 말에, 유유코도 더 이상 날 잡지 않았다. 난 애써 떨리는 걸음을 감추며 닫힌 방문을 향해 걸었다.


포기하자.

한심할 만큼 약한 변명이지만, 이제는 그것이 서로를 위해서라도 최선의 선택이었다.


먹기를 좋아하여 다람쥐처럼 뺨이 통통하고, 와카를 짓기를 취미로 삼아, 벚꽃 아래에서 노래하기를 즐기던 명랑한 인간 소녀.


눈 앞에 있는 소녀는, 더 이상 그 사이교우지 유유코가 아니었다.

명계와 영혼을 다스리는, 아름답고도 고고한 망령공주일 뿐.


"부디 안녕히, 명계의 공주시여."


다시는 건너지 못할 문턱 너머로 발을 딛는다. 

스스로 모든 막의 끝을 내리듯, 나는 천천히 장지문을 끌어 닫았다.


탁.


"...후우."


쓰다.

어찌 이렇게 쓰디쓴 공기가 있을 수 있을까.


난 고개를 돌려 백옥루 주위의 벚나무를 둘러보았다. 사시사철 지지 않고 벚꽃잎을 휘날리는, 벚나무들. 그 한가운데에, 잎 하나 없이 앙상히 마른 가장 큰 벚나무가 눈에 띄었다.


'슬퍼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도, 이 벚꽃이, 이 나비들이 그 기억을 대신 간직할 거예요.'

'다시 한 번, 이 나무에서 벚꽃이 내리면, 당신.'

'제가 당신에게 돌아올게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유유코는 저 벚나무 아래에서 내게 그 유언을 전했다. 

지독하게 아름답던 벚꽃잎의 비 아래, 유유코가 자신의 목에 비수를 꽂아넣고.

저 나무는 그날 이후 한 번도 벚꽃잎을 피우지 않았다.



"...이제, 끝났어?"


상념을 부드럽게 깨는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우무? 아니, 다른 사람이었다. 난 고개를 돌려 익숙한 미성의 주인을 찾았다.


"...놀리러 온 거야, 유카리?"


"설마, 내가 아무리 당신을 골려먹길 좋아한다고 한들, 이런 날까지 그럴 정도로 비정하지 않아."


사이교우지 유유코의 오랜 친구, 야쿠모 유카리. 어느새 나타난 그녀는 허공에 그려진 경계에서 훌쩍 뛰어내려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천 년에 걸친 나와 유유코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소수의 존재였다. 내가 유유코와 20년의 약조를 맺을 수 있던 것도, 그녀의 도움이 매우 컸다.


"결국 실패했네. 당신."


"그렇지. 뭐...최근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어. 추억을 들먹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요근래엔 별로 그 애를 웃게 하는 것도 못했으니까."


다양한 감정이 한숨에 실려 가슴 속에서 쓸려나간다. 다시 숨을 들이쉴 때, 어쩐지 호흡이 떨리고 눈꺼풀이 뜨거웠다.


"이젠 잊어야지. 사실, 진작에 그랬어야 했어. 내가 알고있던 그 아이는 이미 천 년 전에 사라졌으니까. 같은 외모와 이름을 가진 허수아비에게 집착한들, 무엇을 얻을 수 있었겠어."


"...정말, 이대로 포기할 수 있겠어? 조금 더 생각해봐. 이젠 유유코도 당신을 괜찮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접근해도..."


"아니, 약조는 지켜야지. 지금까지 이미 충분히 구차했지만, 이 이상 추악해지고 싶진 않아."


유카리는 입술을 꾹 악문 채 착잡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녀답지 않은 조용한 반응이었다. 내가 불쌍해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난 애써 소리내어 웃어보였다.


"당분간은 쉴래.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야지. 굳이 환상향일 필요도 없어. 바깥 세상에서도 내기 할 수 있는 건 많을 테니까."


"...마음대로 해봐. 극단적이지만 않으면 뭘 하든 막진 않을게. 가끔이면...내가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 곤란하면 불러도 되고."


"그거 참 든든하네. 고맙다."


그녀의 솔직하지 못한 위로가 고마워, 자연스런 웃음이 흘러나왔다. 유카리는 살짝 입꼬리를 올려 마주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돌아갈래? 아니면...조금 더 여기서 옛 여운을 즐겨볼 거야?"


"돌아가자."


난  망설임 없이 유카리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지상으로 통하는  경계 너머로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명계, 백옥루, 벚나무와 벚꽃, 그리고 사이교우지 유유코.

쉽게 잊진 못할 것이다. 앞으로 수많은 밤을 추억에 아파하며 겨우 잠들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아둔한 미련에서 벗어나, 적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앞으로, 그녀와 내 사이에 벚꽃이 내릴 일은 없을 테니까.



***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다. 5년, 미련을 다 잊긴 부족한 시간이지만, 적어도 이제 더 이상 악몽을 꾸진 않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참 많은 시도를 했다. 인간 마을에 나가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낯선 음식들도 먹으며 하루를 지냈다. 


미련이 독하게 치미는 날이면, 유카리에게 찾아가 담소를 나눴고, 가끔은 같이 술잔을 기울이다 잠에 들곤 했다.


고통과 후유증의 나날들.

하지만 나는 확실히, 과거의 상처에서 나아지고 있었다.




"...콜록."


이른 새벽,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다. 잠들기 전 화로에 제법 많은 장작을 넣고 지폈는데도 추운 날씨 탓인지 불씨가 모두 꺼져 있었다.


환상향에서 이변이 한두번 일어나는 것도 아니라지만, 봄 계절에 이런 느닷없는 한파라니. 해괴한 일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면, 벌써 며칠 째 쌓인 눈이 집 외곽을 뒤덮고 있었다.


하쿠레이의 무녀는 뭘 하는 걸까. 하루라도 빨리 이변을 해결해주면 좋을텐데.

이번 대 하쿠레이 무녀의 게으름은 유카리에게도 많이 들어와서, 그 악명은 잘 알고 있었다. 


"...하아, 추워 죽겠네."


난 결국 침대에서 일어섰다. 다시 잠에 들긴 글렀으니, 화로 앞에서 신문이나 읽을 셈이었다. 이런 폭설 날씨에도 신문 배달은 하는지, 창틀에 이번 달 신간 신문이 걸쳐져 있었다.


난 신문을 들고 들어와, 불씨를 지핀 화로 앞에 앉았다. 그리고 느긋히 신문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다지 특별한 내용은 없이, 평소처럼 실없는 내용들이 있었다. 하쿠레이 무녀의 충격 실체라면서 그녀가 요괴의 돈을 갈취하는 사진이 실려 있었고, 인간 마을에 새로 개점한 식당 위치라던지, 환상향 외진 곳의 경치 좋은 사진들도 수록되어 있었다.


이 신문, 어린 소녀 텐구 하나가 주관하여 보도하던 거였지. 비록 신빙성은 못 미덥다지만, 그래도 읽는 재미는 확실했다. 삼 년 전 무렵, 끈질긴 호객 행위에 어쩔 수 없이 구독한 신문이었지만, 이제 와선 단골이라 할 정도로 푹 빠져 있었다.


"...응?"


신문 마지막 장, 급하게 붙인듯이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이 추가로 달려 있었다. 난 눈에 젖은 종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주름진 신문을 조심스레 펼쳤다.


[특급 속보 ㅡ 최근 계속되는 기이한 겨울 기후, 원인은 이것?!]


물에 번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거기엔 사진이 한 장 있었다. 화사하게 피어난 거대한 벚나무를 향해, 하쿠레이의 무녀가 날아가고 있는 장면이었다.


신기하군. 저렇게 큰 벚나무가 또 있던가? 거의 백옥루의 사이교우 아야카시에 버금가는 크기였다. 


"...어?"


흐릿한 사진을 살피며 그 벚나무의 위용에 감탄하던 중, 나는 온 몸에 오한이 뻗치는 것을 느꼈다.


하쿠레이의 무녀 아래에 얼핏 보이는 기나긴 돌계단, 

그리고, 거대한 벚나무 아래에 빼곡히 들어찬 수천 그루의 작은 벚나무들.

그리고 무엇보다, 살면서 단 한 번 밖에 보지 못한, 저 비상식적인 크기의 벚나무.


"이 나무, 설마..."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한다.


이 나무, 사이교우 아야카시를 닮은 게 아니다.

사이교우 아야카시.

그 벚나무가, 벚꽃잎을 피우고 만 것이다.


혼란스런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난 신문을 다시 구기고, 자리를 박차 일어섰다. 그리고 급하게 손에 잡히는 옷을 걸쳐 입어 문 밖으로 나섰다.


"유카리!!"


난 허공을 향해 다급하게 그 이름을 외쳤다. 사이교우 아야카시, 정말 그 벚나무가 꽃잎을 피운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그 벚나무가 벚꽃을 피운들, 내가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다시 한 번, 나는 그날의 벚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유카리, 유카리! 어서 나와봐. 지금..."


난 목청껏 지르던 소리를 그쳤다. 대답에 응한걸까, 저 너머,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유카리?"


아니, 아니다.

너무 멀어서 보이지도 않은 누군가의 인영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끔씩 바닥에 넘어져 눈 위로 얼굴을 파묻었지만, 저 사람은 꿋꿋히 일어서 이쪽으로 내달렸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이, 필사적으로.


"..."


그리고 마침내, 식별이 가능할 만큼 그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하아...끅, 흐으...흐...!"


나는, 정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아, 하아...! 당, 신...하아, 흐으으..."


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기모노, 그마저도 이곳저곳이 찢어져 위태롭게 살결이 드러나 있다. 

안 그래도 턱끝까지 찬 호흡에 물기까지 섞여 목소리는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 눈 앞에 있는, 참혹한 꼴의 소녀를, 나는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유유코 씨?"


부디 틀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저, 흐으, 저예요. 당신. 제가..."


유유코는 쌕쌕거리며 한참이나 호흡을 골랐다.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리며 입김이 차가운 공기에 섞여 흘러나왔다. 듣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숨소리였지만, 유유코는 내 부름에 응하여 기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다시, 당신에게로...돌아왔어요."


무슨 말일까.

같은 언어로 말을 나누고 있음에도 무엇 하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녀의 존재부터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망령공주께서, 대체 여긴 무슨 일입니까?"


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마치 욕지거리라도 들은 것 마냥, 유유코는 믿기지 않는 듯 표정을 참혹히 무너뜨렸다.


"저, 저에요. 당신. 못...알아보시겠어요?"


"..."


"제가, 말했잖아요. 기억...안 나세요? 벚꽃이 내리면, 당신...당신한테...제가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제발.

그게 아니기를 바랬는데.


도끼를 뒤통수에 쪼갠 듯한 아찔함에,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흐으으, 의미없이 내쉬어진 긴 숨에 입김이 서렸다.


왜.

대체 왜 지금인가.

운명은 정말 단 하나의 짧은 안식마저 내게 허하지 않는가.


"저, 당신...?"


유유코는 한기에 발갛게 부어오른 손으로 기모노 자락을 움켜쥔 채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어미에게 버림받은 새끼 금수같은 눈빛, 하지만 그 속엔, 어미가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기대 또한 있었다.


"...어디까지."


목을 긁는 듯한 쇳소리로, 나는 비참하게 속삭였다. 조금이라도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한 느릿한 질문이었다.


"대체, 어디까지...떠오른 겁니까?"


유유코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대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그녀는 새끼처럼 하찮게 낑낑거리는 소리를 삼키며 대답했다.


"...전부에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당신이 제게 목마를 태워 영지를 산책하던 순간부터,

벚꽃이 내리는 나무 아래,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제 유언을 들어주던 때까지.


사이교우지 유유코는 일말의 착각의 여지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상세히 대답했다. 추억에 젖어 점점 환해지는 그녀의 목소리와 달리, 내 가슴은 천만근으로 짓누르기 시작했다. 


"저, 정말...당신을, 계속 믿고 있었어요."


어느새, 유유코는 감격의 눈물을 그렁이며 벅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푼 흉부가 내 가슴을 짓누를 때까지, 그녀는 내게 안기듯이 다가왔다.


"기억이 없던 제게도, 당신은 계속...저를 위해서 노력하셨잖아요. 이젠...전부 알 수 있어요. 그 이십 년 동안, 당신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절 위해 노력했는지, 그리고...그게 얼마나...외롭고 비참했을지."


마침내, 유유코는 두 팔로 내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차마 놓는다는 생각을 상정하지도 않는, 단호한 힘이었다.


"이젠, 외롭지 않아도 돼요. 정말이에요. 다시, 그때처럼...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같은 침소에서 잠들고..."


그녀가 내뱉는 웅얼거림엔 이미 논리적인 화술이라곤 없었다. 그건 상대가 받아줄 것이라 의심치 않는, 극히 이기적인 아기새의 울음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품에서, 못 다 했던 걸 하면서...계속, 사랑을 이어나가요."


그 이후로, 유유코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채, 벅차오르는 재회의 감격을 눈물로 해소할 뿐이었다. 그녀의 두 팔은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을 다루듯이 내 등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난 무겁게 어깨에 걸려 흔들리던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유코를 향해 들어올려.


"...유유코."


그녀의 두 손을, 내게서 떨어뜨렸다.


"오 년 전에, 우리가 백옥루에서 나눴던 얘기 기억해?"


"당, 신...?"


유유코는 일순간에 지지대를 잃은 자신의 두 손에 당황했다. 그녀는 다시 내게로 두 팔을 얽으려 들었지만, 난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밀어냈다.


"우리 모두 동의했잖아. 20년의 약조는 그날로 끝이라고. 서로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고, 미래를 위해 새로운 인연을 찾아가자고."


"당신, 왜...왜 그래요? 아, 그때, 제가 했던 말 때문이에요? 그건,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요. 아무것도 모를 당시, 제가 멍청하게 지껄인...헛소리일 뿐이었는데..."


유유코는 망가진 듯한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변명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불과 몇 년 전의 자신을 매도했다.


"그건, 제가 아니었어요. 흐으, 당신도 알잖아요. 어떻게 제가 당신을 밀어내겠어요. 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저한테는 당신 뿐인걸요. 그건...그냥, 잠시동안, 멍청한 백치가 되었던, 허물 뿐인 제가 토해낸 아무 가치 없는 망발이었단 말이에요."


유유코는 내 가슴팍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처롭게 몸을 흔들었다. 그건 마치 토라진 애인을 달래려는, 값싼 애교 같았다.


"죄송해요. 마음에...담아두고 계셨죠? 맞아요, 저라도 그럴 거예요. 천 년이나 기다려왔던 정인한테, 그 수고를 알아주기는 커녕, 그런 한심한 소리나 듣는다면...부처도, 역정을 참지 못할 게 당연한데..."


유유코의 표정에 담겼던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조급함을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부풀어오른 가슴을 내게 짓누르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아첨했다.


"...너무,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요. 제가 모자랐던 탓인걸요. 아, 맞아. 대신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모두 해드릴게요. 당신, 예전부터 제 기모노 너머를 가끔씩 엿보던 것도 알고 있어요. 후후, 물론 그때도 싫진 않았지만...지금은, 얼마든지 당신이 원하는대로 할 수 있어요."


"유유코, 잠깐...떨어져."


"매일 밤마다 술시중을 들어드릴게요. 아니, 이건 안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죠? 그러면, 그러면....제가 뭘 해드려야..."


"유유코!"


난 힘을 실어 팔을 휘둘렀다. 그렇게 강한 힘은 아니었음에도, 유유코는 넘어져 눈 위로 주저앉았다. 잠시, 자신이 당한 일을 자각하지 못한 것처럼, 유유코는 의문에 찬 탄식을 흘렸다.


"제발 정신 차려. 약조는, 그날 끝났어. 이제...우린,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거잖아. 왜...대체 왜, 알면서 그래."


스스로 말하면서도 가죽이 찢어지는 고통이 뒤따랐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것이 틀어질 터였다.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하지만 그녀에게 그 사실은, 아직 받아들이기엔 너무 잔혹했던 걸까.


"당, 신. 왜...으윽,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고작, 약조가 끝나고...오 년 밖에 안 지났잖아요. 저희, 아직...모든 걸 돌이킬 수 있는데...왜..."


"소중한 인연이 생겼어."


무릎을 꿇은 채, 비굴한 목소리로 애걸하던 유유코는 내 말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나 비참하게 추락한 그녀의 모습이, 마치 25년 전, 내 모습과 똑같아서, 난 그녀의 고통을 끝내주기 위해 말을 이어갔다.


"내가 말했잖아. 이젠 널 잊고, 미래를 위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겠다고. 난 그날 이후로 계속 노력했어. 그래서..."


부디 알아주길 바랬다. 그녀가 내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체념해줘. 우리의 약조는 이미 끝났고, 내겐 이미 소중한 사람이 생겼어. 물론 지금은 기억이 돌아온지 얼마 안돼서 혼란스럽겠지만, 너도 나중엔..."


"거짓말."


들리지 않을만큼 작게 중얼거리며, 유유코는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의 귀를 양 팔로 틀어막은 채, 미친듯이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거짓말...저한테, 그런 거짓말 하지 마세요. 당신이...그럴 리가 없잖아요. 천 년을 기다렸는데, 천 년을.. 저 하나를 위해서 기다려온 당신인데, 당신이...!!"


그녀의 비명이 주위에 메아리쳤다. 평소의 나긋한 미성은 떠올릴 수 없는 광기에 찬 외침이었다. 그 분위기에 압도당해, 나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아니라고, 해줘요. 어서, 어서요."


"..."


"윽, 흐으, 제발요. 아니잖아요. 그럴 순, 없는 거잖아요. 저희, 지금까지...얼마나 길게, 서로를 기다렸는데...어떻게, 흐, 어떻게..."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없었다. 그저, 그녀가 납득하길 막연히 바라며, 침묵 속에서 시간에 기댈 뿐이었다.


"...누구에요?"


목소리가 갈라지는 비명, 그 끝에 나오는 것은, 되려 지독하도록 차분한 질문이었다.


"당신이, 저를, 천 년의 기다림도 저버릴 만큼, 사랑하게 된 여인이...대체, 누구인 거예요?"


"...말 못해."


"설마, 유카리는 아니죠?"


난 바늘처럼 날카롭게 찔러오는 그녀의 신문에 헛숨을 들이켰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통찰력이 사라지진 않았는지, 유유코는 정답을 알아채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아, 흐, 흐흣, 아하하하...!!"


광기에 가득 차 터뜨리는 웃음은 되려 섬찟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이젠 붉게 물들어버린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엔, 유쾌함마저 담겨 있었다.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 전부 알고 있었으면서도...그 잠깐 사이를 틈타, 당신한테 꼬리를 쳤다는 거죠? 유카리...하, 흐...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자기가 부리는 식신한테서 추악하게 꼬리를 살랑이는 법이나 배웠나 보네요."


"무너질 뻔했던 날 구해준 건 유카리야. 감히, 그따위로 말하지 마."


"아뇨. 무너질 뻔했던 당신을 구해준 건 저예요. 그리고, 무너질 뻔했던 절 구한 것도...당신이었고요."


유유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진 기모노도, 눈에 젖은 무릎도, 그녀는 이제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녀의 눈엔 불안할 만큼 확고한 의지가 반짝였다.


"유카리는...아마 지금쯤, 개화한 사이교우아야카시를 막기 위해 분투하고 있겠죠. 유카리는 분명히 강하지만...사이교우아야카시를 상대한 뒤라면,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탈진을 피할 수 없을 거예요."


"유유코, 너...그게 무슨 말이야?"


"왜요, 알고 싶으신가요?"


유유코는 평소처럼 우아하고 차분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 기세에 눌려, 나는 그만 뒷걸음질쳤다.


살랑,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나비 하나가, 내 무릎에 살포시 앉았다. 벚꽃색을 닮은 아름다운 나비, 하지만 나는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저는, 정말 평생을 후회할 악몽을 가지게 될 테니까요."


사이교우지 유유코의 능력, 죽음.

그녀의 나비가 내 몸에 앉은 이상, 나는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무력하게 죽을 수 있었다.


"유유코, 이런 짓을 한다고, 내가 널 사랑하게 될 일은 없어."


"...어쩌면,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거 알아요?"


유유코는 나를 내버려둔 채,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그녀를 막아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나비는 내게 경고하듯 날개를 팔랑거렸다.


"당신에게 미움받는 건...제 목숨을 잃는 것보다 몇 배는 더한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은...당신이 다른 여자의 곁으로 떠나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처리하고 올게요.

당신을 제게서 앗아가려 들었던, 그 교활한 암캐를.


그리고 그 후에, 당신이 저를 사랑할 수 있도록, 제 모든 노력을 다할 거예요.


"...그러니까, 기다려 줘요."



벚꽃이 다 그칠 때면, 당신.

이제 당신의 곁엔, 저밖에 남아있지 않을 테니까





ㅡㅡㅡ


안녕하세요. 전 테러리스트에오.

얀챈을 동방 패러디로 테러하러 왔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