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황녀님의 편에 서겠습니다.

그러니.

살아남으십시오. 꼭."



너는 나에게 그리 말했다.

아무도 잡지 않았던 나의 손을. 따스한 온기로 가득 채워주듯 맞잡으며.

너는 나에게 눈을 맞추고,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내 편이 되어 주겠다는 말. 맹세로 여겨도 되는 것이야? 정말?"


황제의 씨를 받았으나, 천한 궁녀의 몸에서 낳았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기에.

나는 습관처럼 몸에 배인 의심을 의문으로 포장해 너에게 다시 되물었다.

너조차 나를 배신하거나 모욕한다면, 난 더이상 살아갈 용기를 되찾을 수 없어.

그러나 너는.


"하하하! 황녀님. 그럼, 새끼손가락이라도 걸어서 약속도장이라도 받을까요?"


내 마음을 꿰뚫어보듯, 오히려 다정한 눈빛을 반짝이며 내 새끼손가락을 멋대로 가져갔다.

네 새끼손가락이 나를 옭아맨 그 순간부터.

나는 맹세했다.


"약속!"

"...약속."


널 절대 놓지 않으리라.

절대.



*



베르니아 폰 다이너라운이 황위에 오르고 정확히 93일째 되는 날 아침.

선황제의 적통이자 황위계승서위 1위였던 다르온 폰 다이너라운은 역모 및 반역수괴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고 34분 만에 형이 집행됐다.

다르온 폰 다이너라운의 혈족은 물론 문초 과정에서 그와 티끌이라도 연관되었던 귀족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해 전부 신분이 박탈되거나 중형을 선고 받고, 황도에서 500km 떨어진 외딴 해안가로 유배를 가거나.

혹은, 피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죄를 뉘우쳤다.


베르니아 폰 다이너라운이 황위에 오르고 100일이 되는 날 아침.


그녀는 옥좌에 앉은 채로. 차갑도록 시린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대신들에게 통보했다.


"국정도 안정되었으니, 짐은 정인과 미뤄두었던 국혼을 하려하오."


여황제의 담담한 선언에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록 태어난 배는 다르나, 같은 피를 타고난 오라비의 육신이 땅에 묻혀 채 썩지도 않았을 시간.

철천지 원수, 정적의 죽음을 마치 기념비로 삼아서.

앓는 이가 빠지고 목에 박혔던 가시가 빠져 후련하다는 듯 영광스럽고 기쁜 날을 맞이하려 하시다니.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여제', 베르니아 폰 다이너라운.

2살 갓난아기인 자신의 조카에게 아비의 죄를 대신 물어, 훗날 생길지 모를 일을 방지하겠다는 이유만으로 혀를 잘라 외딴 섬에 유폐시킨 잔혹한 인간.


"......."


선황을 섬겼던 최측근인 궁무대신을 비롯해 모든 대신들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여황제의 허리춤에 찬 검이.

검집에 고이 숨을 죽이고 있어도, 날카로운 검 끝이 목을 겨누는 듯 한 두려움에 감히 내밀지 못했다.

천한 궁녀의 소생이 옥좌를 거머쥐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소중한 목숨이 잘려나가는 것을 통해 다시 증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가르친 스승조차 베어버린 잔혹한 검이 두 번 다시 뽑히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됐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궁무대신이 마지 못해 고개를 조아리고 읍소하듯 외치자, 다른 대신들도 뒤따라 외쳤다.

대신들의 외침에 여황제, 베르니아의 푸른 눈동자에 흡족함이 서렸다.


"고맙소."



*



빛 한 점 들지 않는 황궁의 지하실.


끼릭- 철컥-


굳게 닫혔던 쇠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을 섞어 만든 합금 너머로 한 여성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니아 폰 다이너라운.


갖고온 작은 등불을 벽에 걸고, 쇠문을 닫은 베르니아.

푸른 눈동자가 쇠사슬에 손과 발이 묶여 시체처럼 늘어진 한 남성을 응시했다.


또각또각.


축축하고 어두운 곳과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구둣굽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 왔는데... 이제는 아는 척조차 해주지 않는 것이냐?"


무릎을 구부려 고개를 숙인 사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미약한 미동이 느껴졌다.

그 미동에 화답하듯,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환한 미소를 꽃피우듯 지은 베르니아.

어느새 양 손으로 사내의 얼굴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살피는 그녀.


"그래. 미안하구나. 내 너를 이 곳에 가두어서. 허나, 너라면. 너라면 내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할 것이라 믿었다. 응. 아프지 않느냐? 사슬을 좀 더 느슨하게 하라 명할까?"

".....워...."

"뭐? 응? 좀 더 크게-"

"손... 치워..."



사내의 검은 눈동자. 분노와 악독함으로 물들여진 사내의 적대감을 바라보던 베르니아의 푸른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방금 전까지 다정하게 안위를 물어보던 동일인이 맞는지 싶을만큼.

그러나, 베르니아는 사내의 얼굴을 쓰다듬는 두 손의 움직임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소중한 사람의 따스한 온기를 놓치기 싫은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야위었구나. 벌써 100일 째 묶여서 식음을 게을리하니 이리 된 것이야."

"......"

"조금만 기다리거라. 모두 마무리 되어가고 있다."

"무슨... 일...이 마무리.. 돼... 널... 지키려고... 가르친.. 그 검으로... 누굴 죽이려고..."

"아르한. 쉿. 힘들면 더 이상 입을 열지 말거라."


절그럭. 지잉!

사지를 묶은 쇠사슬이 푸른 빛을 내며 진동했다.

베르니아의 푸른 눈동자와 똑같은 차가운 푸른 빛이 어두운 지하실을 밝게 비추다가 이내 사라졌다.

사내, 아르한의 볼을 쓰다듬던 베르니아는 짐짓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벗어나려 애를 쓰는 것이냐. 아플터인데도."

"...후회해."

"무엇을?"

"그 날을... 너의 편이 되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던... 그 날을... 후회해..."

"......"


아르한은 핏줄이 서린 눈을 들어 베르니아를 죽일듯 노려보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자에게 배신 당해 만들어진 비참하고도 끔찍한 눈빛.

베르니아는 사내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무릎을 펴 일어섰다.


"잊은 것이냐?"

"......"

"살아남으라 말했다."

"....."

"나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꿋꿋이 살아 남으라 했던 이는 바로 너였다."

"....."

"사람에게 배신 당하고 욕보여 의심투성이였던 나를 달랬던 사내도 바로 너였고."

"....."

"믿지 못하는 나에게 약속을 빙자해 나의 새끼손가락을 멋대로 가져간 것도 바로 너였다."


베르니아는. 조용히 다시 무릎을 굽혀, 차가운 목소리와는 정반대의 달콤한 웃음을 꽃피우며 말했다.


"아무도 없는 빈털털이인 나의 곁에. 처음으로 서주었던 이도 바로 너였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 소녀에게 처음으로 검을 휘두르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 이도 바로 너였다."

"....."

"네가 나의 스승이 되어주어서, 내 편이 되어주어서 고마움을 느끼게 만든 존재도 너였고. 

지옥같은 삶 속에서 날 구원해준 이도 바로 너였다.

살아남겠다는 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군세를 일으켜 옥좌를 강탈하도록 마음 먹게 만든 이도.

너였다.

아르한."


베르니아의 차갑고 시린 푸른 눈동자. 그 속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귀기와 광기마저 일렁거렸다.


"이제 칭찬해줘. 아르한. 너와 약속했던대로. 나는 살아남아 옥좌에 올랐느니라."

"....."

"칭찬 받으면, 상을 주었잖아. 사탕이었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이든... 그래. 함께 황궁 뒷편의 시장에서 사탕을 사주었던 것처럼."

"...황...녀님..."


차라리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혈한처럼, 그 모습을 유지해주었으면 좋으련만.

보통 사람과 궤를 달리하는 베르니아의 그릇된 감정을 눈 앞에서 목도하던 아르한은 고통 섞인 신음을 섞으며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아르한. 약속해줘.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 아아. 아아... 아..."


베르니아는 잘려나간 아르한의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바라보며 절망 어린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잠깐 잊고 있었다.

100일 전.

그녀를 가로 막기 위해 나타난 아르한과의 격전에서.

그녀는 스승의 손가락을 잘라내어버리고 검을 부수어 이 곳에 유폐했었다.

잊고 있었다.


"아....."

"......"

"아르한."

"....."

"아르한. 함께 올라가자꾸나. 세상 사람들 모두 네가, 스승이 죽은 줄 알고 있느니라."

"....."

"내 편이 되어주겠다는 맹세. 그 맹세는 다행히...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으로 하지 않았더냐. 다행이구나. 천만다행이야. 자. 일어서거라. 얼른."


진심으로 기뻐하듯 웃음꽃을 피우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베르니아를, 아르한은 심연처럼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들어 바라보았다.


네 편에 서겠다는 맹세는.

아직 유효했다.

영원히. 유효할 것이다.



*



베르니아 폰 다이너라운이 황위에 오르고 107일이 되는 날 정오.


제국제일검이자 황실근위기사단장 아르한 페이너스와 베르니아 폰 다이너라운 황제의 국혼이 성대하게 치뤄졌다.


죽은 줄 알았던 그가 갑자기 멀쩡한 모습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나고.

아무도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여황제의 정인이 바로 아르한 페이너스라는 사실에 의외로 당황하지 않는 이들도 많았다.

107일 전. 생사를 걸고 격전을 벌였던 두 사람이 국혼을 치룬다는 사실에 더 놀라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르한."

"......"


왼손이 아닌 오른손 약지에 결혼반지를 낀 베르니아는 찬란한 웃음을 꽃피우며 말했다.


"나의 편이 되어주어서... 고마워."


아르한은 조용히 고개를 내렸다.

7일 전까지 있었던.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잘라낸 베르니아의 왼손을 매만지면서.


".......황녀님의 편에... 서겠사옵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