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어느순간부터 나는 시간의 흐름에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가끔, 아마 한 달에 한 번정도, 하루가 반복될 때가 있다.

하루가 반복되는 조건도,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시점도 무작위적이다.

때로는 어떤 시점을 두 번 이상 반복하거나 하루보다 더 전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조금 이상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만, 플레이어가 게임 속 세이브 파일을 저장하고 불러오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일 적에, 친구들에게 하루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을 꺼낸 적이 있었으나,

모두 내가 농담을 하고 있는 줄 알며 믿어주지 않았다.



그들의 반응으로부터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을 겪고있는 사람이 오직 나뿐이라는 것이다.

아마 그 이후부턴 남에게 언급한 적 없었을 것이다. 미치광이 취급받아 좋을 것 없으니 말이다.







하루가 반복된다고는 하지만 반복되기 전과 세세한 부분까지 같은 이야기로 흘러가진 않는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추론해본다면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겠지.






한 달에 한 번씩 시간 감각이 조금 기묘해진다는 점만 뺀다면, 나는 여느 학생과 다를 게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굳이 따진다면 오늘만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으로서, 남들보단 특이한 편에 속할 것이다.


이제 고등학교의 인연은 사라지고,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겠지.





나는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설레는 마음을 붙들고 익숙한 복도를 지나 익숙한 교실에 들어가, 나무의 결마저 익숙한 의자에 걸터 앉았다.




교실은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기인한 섭섭함을 못 참고 눈물을 터트리는 자와 영원할 것만 같던 지긋지긋한 루틴에서 벗어나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는 자 둘로 나뉘었다.


내 옆 자리의 그녀만 뺀다면.



그녀는 창 밖을 바라보며 오직 그녀만의 적막함 속에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고등학교 생활도 이걸로 끝이네. 넌 지금 어떤 기분이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녀는 익숙한듯 여전히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난 조금 시원섭섭해. 뭐, 어쨌든 너도 3년동안 수고 많았어. 난 이제 수업시간에 쳐다볼 사람이 없어서 심심할 것 같네."



쳐다보는 거냐고.




태클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내 옆 자리에 있는 긴생머리 그녀에 대해 설명할 시간을 조금 갖자면,

이름은 김얀순.
이 학교의 전교회장.
그리고 3년째 같은 반인 녀석이다.

예체능을 비롯한 모든 성적은 압도적 최상위권, 외모나 신체 스펙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건 단순한 추측일 뿐이나 씀씀이를 보건대, 그녀의 집안은 상당한 부호일 것이다.
또한 취미는 농구, 좋아하는 음식은 닭강정에, 싫어하는 음식은 딱히 없음.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냐고 묻는다면, '3년이란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라고 답하겠다.


내게 만화 속 주인공같은 그녀에 대해 무언가 특이한 점을 꼽으라 한다면 남들이 말할 만한 진부한 것들은 뽑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에겐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꽤나 오랜시간 관찰한 결과, 시간이 과거로 돌아갔을 때 행적이 과거에 비해 많은 부분이 달라지는 사람은 그녀만이 유일했다.
이른바, 그녀는 특이점이었다.

'그녀는 이 현상의 비밀을 파헤칠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라는 가설은 나의 관심을 그녀에게 끌어내는 데 충분했다.
못해도 처음 만났던 1학년 때까지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에게 보내는 관심은 정방향만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눈치를 차렸을 땐, 그녀도 나 못지 않은 관심을 보여왔다.

다만, 그 관심의 형태가 기이하다는 점이 문제다.
집중하고 있을 때 어느샌가 뒤에서 내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던가, 학급 반장을 선출할 때 항상 나를 추천한다던가.. 뭐 대강 그렇다.

때론 비정상적인 그녀의 관심이 부담감을 양성하게 할 때도 있었다.

그녀에 대한 관심이 그녀로 인한 부담감을 못이겨 더이상 그녀에게 불필요하게 치근대는 걸 멈추게된 것은 꽤나 오래전 일이다.



내가 누군지도 모를 독자에게 그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동안, 졸업식이 모두 끝나고 대부분이 집으로 귀가하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 집으로 향하려 발을 내딛었을 때,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시간 남으면 잠깐 나좀 잠깐 볼래?"



맘같아선 도망가고 싶었지만, 차마 마지막일지도 모를 부탁을 거절하기에는 마음에 찔려 그녀를 먼저 보낸 뒤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그녀가 말했던 장소에는 그녀와 나 단 둘밖에,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찾아온 것을 알아차리곤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3년이면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



그녀는 긴생머리를 축 늘어뜨리며 어딘가 어스레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3년 내내 계속 고민해봤어. 너만 보면 느껴지던 묘한 기분이 과연 어떤 감정인지."

그녀는 숨이 차는지 크게 숨을 들이쉬고 할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금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건 사랑이라고 생각해. 아니, 이건 사랑이야. 확신할 수 있어."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더이상 너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어."

"왜 하필 너냐고 묻는다면, 깨닫고 보니 내가 살아갈 이유는 이제 너에게밖에 없었어.
난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진 그저 로봇처럼 하루를 보냈어. 시키는 일만 매일매일 반복하는 로봇.
근데 고등학교에 오고 너를 만난 뒤, 처음으로 '인간다워지는 법'이라는 걸 알게 됐어.
모두가 나와 인간 사이에 압도적인 벽이 있다며 잘 만든 AI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취급을 하고 있을 때, 오직 너만이 나와 두 눈을 마주치고 있었어."

"너를 만나기 전까진 내게 대부분은 그저 이론일 뿐이었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야하나?
근데 너를 만나고 취미도, 좋아하는 음식도, 화내는 법도, 크게 웃는 법도, 때론 짓궂은 장난엔 정색하는 법도 알게 됐어."

"그동안은 몰랐지만 이제서야 알 수 있어. 나를 나답게,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 수 있게 해주는 건 너뿐이라고.
내겐 너밖에 없단 걸. 난 오직 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단 걸.
이제서야 깨달았는데 이제 더이상 못 만난다니, 이대로 끝내는 건 싫었어.
마지막이 돼서야 깨닫다니. 푸흐, 참 바보같지?"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넌.. 나 어떻게 생각해?"

"ㄴ.. 내 입으로 직접 말하는 건 이상하지만 그래도 나 정도면 남들보다 예쁜 편이고 성적도 최상위권에 집에는 평생 놀고 먹어도 부족하지 않을 돈도 있어."

"누굴 데려와도 꿀리지 않을 자신 있어."

"그.. 그러니까! 나.. 나랑 한 번 사귀어보진 않을래..? 후회하게 만들진 않을게."



그녀가 직접 말했던대로다. 내가 이 상황에서 '완벽'이라는 개념에 가장 근접한 사람을 밀어낼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금 내 동물적 감각이 '그녀에게 다가가면 안된다'고 날카로운 소리로 경고하고 있다.
귀를 찌르는 그 신호는, 도저히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새어나오고 심장이 옥죄어 오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는 포식자, 나는 피식자였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곳부터 치미는 불안감이 나를 질식시키고 있다.



그녀의 결의에 침을 뱉는 것만 같아 잠시 약해질 뻔 했으나, 나는 끝내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다.






그순간 그녀는 누구보다도 슬퍼보였다.

굳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실연이란 건.. 조금 아프네. 조금 많이. 가슴이 찢어질 것만같아."

"첫 시도부터 될 거라곤 생각하진 않았는데도, 기대는 하지도 않았는데도."


지금까지 대답만 해온 내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대답이 아닌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다름아닌 방금전, 상황에 맞지 않은 단어를 하나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언급한 '첫 시도'에 대해 되물었다.


"응, 이번이 처음이야. 그리고 다음은 두 번째겠지. 물론 너에겐 항상 처음이겠지만."

"정신병자의 말도 안되는 허언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난 원하는 때로 시간을 돌릴 수 있어.
난,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로 돌아갈 거야. 너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완벽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3년을 너와 같이 보내고 네게 다시 고백할게."

"남부럽지 않은 연인이 될게.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다음 번에도 실패한다면 뭐, 마음이 많이 아프겠지만.. 그래도 계속 반복하겠지?"

"확률이 0이 아니라면, 성공할 때까지 하면 돼."


"이 아픔마저도 사랑하고 있어. 소중한 추억이 될 거야."
"나중에 또 보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이 장소에서 처음으로 내게 얼굴을 보인 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뒤로한 채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3년 전, 고등학교 첫번쨋날로. 시간은 오전 8시.'



내가 뭐라할 새도 없이, 그녀가 혼잣말을 끝내자 서서히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노이즈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완전한 암전이 찾아왔다.













방금 전까지 고등학교 건물 옆에 있었던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교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칠판 앞에는 익숙한 선생님께서 익숙한 이름 석 자를 적고 계셨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달력 쪽으로 눈을 향했고, 달력의 상단 부분엔 크게 2021이 쓰여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가 말한대로 3년 전인 고등학교 첫날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왜 그녀만이 반복되기 전과 항상 다른 행동을 취하게 되는지 깨달았다.

인간의 기억은 항상 왜곡된다.
그녀가 아무리 비상할지라도 과거를 완벽히 재현해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떠난 교실에, 내 자리와 조금은 떨어진 곳에서 머리카락의 끝부분이 어깨에 살짝 닿을 정도로 짧아진 그녀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앞에서 멈춰선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꺼낸 젤리를 내게 건네곤 통상적인 첫만남용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저기, 넌 어디 중학교에서 왔어?"

"난 김얀순이야. 바로 옆에 있는 ○○중 출신. 앞으로 잘 부탁해."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거슬러 온 그녀가 내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첫만남 때의 그녀는 저런 성격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던 그녀는 좀 더 무뚝뚝했다. 지금보다 더 차가웠다.

그녀의 원대한 계획은 시작됐다.



그녀가 쓴 로맨스 소설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주인공도, 주인공의 연인도, 주인공을 둘러싼 배경도,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말도. 다만 주인공과 그의 연인이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아직 공란인듯하다.



아직 내 감각이 그녀를 거부하고 있는 이상, 그녀와 자주 엮이는 것은 꺼리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까지고 나를 쫓아올 것이다.

오직 둘만의 술래잡기가 되겠지.


누군가 달리는 두 다리를 멈추지 않는 이상 끝없이 이어질 학창생활에, 과연 내 발버둥이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겠다.









꽤나 오랜만에 안부를 전하는 것 같다.

지금은 2학년, 즉 회귀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작정 다가오진 않았다.
아마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테지.
저번과 대조되는 점이 있다면 그녀의 성격이 조금 활발해졌다는 것과 전교회장을 포기하고 나와 학급 임원으로서 같이 일하고 있다는 것이 있을 것 같다.
딱히 반장이나 부반장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나, 그녀의 추천으로 선 투표에서 어쩌다보니 같이 당선되었다.


그녀가 변했기에, 대부분의 것이 변했다. 반의 분위기라던가 친구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방식이라던가.


그녀는 아직  과거의 기억을 가진 자가 오직 그녀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난 그녀에게 들켜 좋을 일은 없다고 판단해 저번 생활과 최대한 비슷하게 행동하고 있다.

그녀가 언제, 어떤 연유로, 얼마만큼 시계침을 돌릴지 나로썬 예측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안부를 적은 지 1년 반이 지났다.

결국 그 날이 찾아왔다.
고등학교의 졸업식 말이다.

그녀에 대한 반감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이번에도 그녀의 용기를 걷어찰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이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 이번이 2번째야."

"다시 시작하려고 시간을 되돌렸어, 3년 전으로. 역시 이번도 실패네."

"2번째면 조금은 덜 아플 줄 알았는데, 저번이랑 똑같네."
"실패했다고 해서 이번 3년이 모두 물거품이 된 건 아냐. 네게 2번 연속으로 실연당한 것도 내겐 소중한 추억이 될 거고 3년동안 너의 모습을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는 것도 은근 즐거웠어."

"3년 뒤에 다시 봐."


그녀는 그때처럼 내게 쓴웃음을 보이며 시간을 되돌렸다.




더 쓰고 싶엇으나 역량 부족으로 유기ㅈㅅ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