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닥 


오늘도 의미없이 시간을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을 기약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잠을 잘 때


난 랜덤채팅으로 출근한다.


랜덤채팅 


만든 목적이 어떠하든, 순기능이 어떠하든


지금은 솔직한 욕망의 배출구가 되어, 추악하기까지 한 형태를 띄고 있다.


이상한 목적으로 쓰지 않는 내가,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랜덤채팅이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럼 나는 왜 이상한 사람도 아닌데 랜덤채팅을 하냐...


이유는 간단했다


내 삶의 도피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난 태어나기를 고아로 태어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작점이 달랐다.


보육원을 나오니 뭘 할지 몰랐고, 그러니 닥치는 대로 노가다도 해보고 전단지 알바도 해보고


결국 돈은 좀 못 벌어도 몸과 마음이 편안한 야간 편의점 알바를 하게 되었다.


찬란한 빛을 내는 고층건물 밑에는, 그 빛만큼이나 어두운 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야간 편의점 알바도 그리 쉽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지친 몸을 뒤로 하고 나가서 일, 또 일, 또 다시 일...


지원금을 받아가며 간신히 연명해 가는, 꿈도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삶


좋은 옷, 맛있는 음식, 평범한 가정


남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며, 열등감과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랜덤채팅이었다.


나보다 더 불쌍한 사정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사람 이하로 느껴지는 병신도, 때로는 내 처지를 동정해주는 사람도 만나가면서


동질감을, 위안감을, 안정감을 느껴가며 형태가 어떻든 조금씩 치료되가고 있었다.


이유 모를 크나큰 불평과 불만, 자기혐오들도 말이다.


아무튼 난 이런 이유로 오늘밤도 랜덤채팅에 출근한다.


'오늘은 어떤 사람이 있으려나'


아마 그동안 1년 정도 랜덤채팅을 해본 나로써, 통계에 따른 예측을 해보자면


20명 정도 변태와 사회부적응자 욕쟁이를 만난 후, 정상인이 한 명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기합을 넣으면서 오늘의 랜덤채팅을 시작했다.


#


[당신]: 안녕하세요


침묵이 몇 초간 지속되었다.


'혹시 잠수인가?'


[낯선사람]: 안녕하세요


'일단 서로 인사는 주고받았네'


솔직히 말해서 상대가 뭐하는 사람인지 빨리 알아야 한다.


나와 맞지 않은 사람이라면 빠르게 접고 다음으로 가면 되는거고,


나와 맞다고 판단되는 사람이라면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낯선사람]: 혹시 연예인 얀순이아세요?


먼저 대화 주제를 꺼내주는 사람은 고마울 다름이다.


[당신]: 알긴 알죠, 워낙 유명하니까요


자주 매스컴이나 SNS에서 자주 보이는 사람이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좋고... 아무튼 내가 어둠이라면, 완벽하게 빛인 그런 존재였다.


[낯선사람]: 평소에 그 사람 인터넷에 자주 나오잖아요


[당신]: 네 그렇죠


[낯선사람]: 그 여자 보면서 주로 무슨 생각하세요?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다.


뭘 말하고 싶은건지 모르겠는 사람, 이런 사람은 대부분 솔직하게 타인의 생각을 듣고 싶어한다.


그리고 듣는 답이 원하는 답이 아니라면 나가서 다른 사람을 찾아본다.


[당신]: 개인적으로는 호감인데요


[낯선사람]: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신]: 넷상으로만 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뭐 예쁘고 성격도 좋으신 거 같아보여서요


[당신]: 사람 자체가 호감인? 빛같은 그런 느낌 있잖아요


물론 난 현실에서 빛 같은 존재는 본 적 없다만, 굳이 존재한다면 저런 형태이지 않을까... 싶은 사람이 얀순이라는 연예인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낯선사람]: 얀순이가 연기하는 거 봤어요?


인터넷에서 30초 본 걸 봤다고 할 수 있나...


[당신]: 다 보진 않았고, 그냥 쇼츠나 릴스에서 조금 봤어요


[낯선사람]: 왜 다 안보시고? 조금만 보셨을까요?


...


[당신]: 돈이 없어서요


[낯선사람]: 거짓말, 집에 티비 하나 없다고요?


순간적으로 채팅을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뭐 어쩌라고, 난 거지이고 이건 사실인데


[당신]: 저 집에 티비 없어요, 지금 쓰는 이것도 10년 전 제품인데요


[낯선사람]: 아하...


내 사정이 정말 변변찮다는 걸 조금은 이해했는지 날카로운 기세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낯선사람]: 아무튼 그건 죄송하고요...


[낯선사람]: 그래서 그 30초 영상이라도 보시면서 무슨 생각 하셨어요?


음... 사실 연기하는 연예인보면 뭐... 그냥 별 생각 안 들지 않나


그래도 굳이 뽑자면...


[당신]: 예쁘다는 생각을했죠


[낯선사람]: 혹시 그쪽도 막 성적으로 보고 이러시는 건가요..?


[낯선사람]: 다른 사람들은 엉덩이가 어쩌네, 가슴이 어쩌네 이러던데요


그쪽도... 라는 말이 다소 거슬린다.


랜덤채팅을 하면서 다수 본 적 있다.


같이 특정대상을 씹어대자는, 같이 비하하면서 깎아내리는 걸 즐겨하는 더러운 부류가


[당신]: 그렇진 않은데요...


[당신]: 혹시 님은 그러신가요?


만약 그렇다면 바로 이 채팅은 그만두고-


[낯선사람]: 그럴리가 있나요, 제가 왜요


[낯선사람]: 저 갑자기 엄청나게 심심해졌는데


[낯선사람]: 같이 게임할래요?


난 상대의 나이도 모르고 성별도 몰랐다, 그나마 아는 건 관심사가 연예인 얀순이라는 것 정도


이 사람은 같이 게임할 사람을 찾던 거구나


[당신]: 그거 아쉽네요, 무슨 게임을 하시던간 저는 못 할거 같거든요


[낯선사람]: 엥 왜죠? 혹시 게임 싫어하시나요?


싫어할리가 없어서 환장하지


[당신]: 그건 아니고, 아까도 말했듯이 제가 기기 사양이 변변찮아서 게임하나 안 돌아가거든요


설치는 되는데 무진장 렉이 걸린다고 해야하나...


편의점에서 열심히 일해서 돈 번을 게임칩 사는데 전부 사용했고,


기대하며 설치한 결과 돌아가지도 않으며, 터질듯이 돌아가는 팬 소음에


당근에 비싼 게임칩을 처분하며, 육개장 하나 먹으며 울었던 그 씁씁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낯선사람]: 아 맞다, 아까 그런 말도 하셨죠... 형편이 좀 힘드시다고...


[낯선사람]: 사실 게임은 안 해도 되는데-


게임친구 사귀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는 건가?


[낯선사람]: 전 그냥 좀 더 대화하고 싶어서 그랬거든요


[낯선사람]: 이거 딱 20분 해봤는데, 다들 뭘 원하는지 너무 투명해서


[낯선사람]: 게임으로라도 묶어서 좀 더 대화하려고 했죠


[낯선사람]: 그쪽도 원하는 거 못 받으면 욕하거나 나갈거잖아요


[당신]: 전 원하는 게 없는데요


[낯선사람]: 거짓말


[당신]: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 요구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낯선사람]: 그럼 원하는 게 뭔데요?


[당신]: 그냥 대화하는 게 좋은데요


앞선 변태들과 내가 다르다고 했는데, 과연 믿어는 주려나 


[낯선사람]: 진짜로요?


[당신]: 현실에서 많이 치이고 살아서, 맘 놓고 대화하는 게 전 좋아요


이게 적어도 나에게 있어, 랜덤채팅을 하는 이유이다.


가만히 있다가 나 혼자 미쳐버릴 거 같으니, 같이 쉴 사람을 찾는다고 해야하나


[낯선사람]: 저랑 비슷하네요, 저처럼 외로워요


[당신]: 외롭다니요?


[낯선사람]: 마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는거잖아요.


그게 그렇게 되려나


[낯선사람]: 저도 마찬가지인데, 저랑 친구하실래요?


넷상에서 친구라...


[당신]: 하죠 뭐


[낯선사람]: 우와! 그럼 저희 지금부터 친구인거에요!


이후의 대화는 마치 물 흐르듯 부드럽게 흘러나갔다.


사실 별 이야기는 안했는데, 굉장히 마음이 편해졌다.


과거 보육원에서 몇 번 했던 심리상담보다 편했다.


그리고 이 편안함은 내게만 있는 게 아니었는지, 낯성상대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글씨가


기쁘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시간이 흘러, 어두웠던 방안이 조금은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 하품이 나오기도 했고, 이 사람은 지치지도 않나 이런 생각이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낯선사람]: 그래서 그때 엄청나게 슬펐다니까...ㅠㅠ


[당신]: 음 근데...


[낯선사람]: 왜?


[당신]: 이제 슬슬 저희 해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낯선사람]: 그러니까 왜?


왜냐니... 그야...


[당신]: 저희 대화한지 시간이 좀 됐잖아요, 제가 야행성이긴 하다만 좀 졸려서...


[낯선사람]: 아~ 뭐야, 그런거였어?


[낯선사람]: 하긴 시간이 좀 지나긴 했죠


뭐지 방금은 조금 무서웠다.


심장이 조금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심근경색? 부정맥인가?


[낯선사람]: 그럼 우리 이제 헤어져야 해?


지금쯤 자야, 알바할 때 편할 거 같은데


[당신]: 그래야 할 거 같은데요


[낯선사람]: 우리 여기서 헤어지면 어떻게 다시 만나?


이 랜덤채팅은 앱이 아니라 사이트 형태라서... 친구추가 그런 개념이 없었다.


아마 만날때까지 수백번 서로 돌리는 거 아니면, 만날 방법이 없을거다.


1년 랜덤채팅한 짬으로 이 사실을 말해줬다.


[낯선사람]: 아... 난 다시 만나고 싶은데...


[낯선사람]: 우리 전화번호 교환할까?


가끔 랜덤채팅에도 존재했다.


개인정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전화번호를 교환하자는 사람들이


그리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한 건, 내 특유의 사심없는 말주변 때문인지 몰라도


이 사람이 처음은 아니었다.


[당신]: 전화번호는 개인정보라서 조금...


나도 이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화번호를 덥썩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인터넷에 뿌려버리면 어떡하나


원래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며 망상하는 게 내 나쁜 습관이지만


세상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낯선사람]: 진짜로 다시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방법 없을까...


[당신]: 미안하지만 딱히 없는 거 같은데...


[낯선사람]: 그럼 일단 한 번 만나서 볼까?


왜 대화가 그렇게 되는거지?


사람이 무서워서 전화번호를 안 주는건데, 만나자는 게 더 무섭다는 인식은 없는걸까


[낯선사람]: 아마 날 안 만나봐서, 그런 거 같은데-


[낯선사람]: 나도 네가 마음에 들었고, 한 번 만나서 얼굴 보고 싶은데-


[낯선사람]: 외모나 돈 뭐 그런 건 상관없으니까 한 번 만날래-


뭐라고 뭐라고 계속 말했지만, 귀와 가슴이 먹먹해져 들리지 않았다.


몇 시간을 대화한 나이 성별 이름 모를 사람이 대뜸 만나자는데 더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채팅 종료하기 버튼을 눌렀다.


#


시간은 흘러, 야심한 밤 나 혼자 편의점에 앉아있었다.


할 건 없었고, 심심했으나, sns를 볼 생각은 없어서 아르바이트 중 랜덤채팅을 켰다.


밤이라 그런가 다들 많이 발정이 난 듯 싶었다.


30번 정도 연속으로 변태를 만나니 할 마음이 사라졌다.


백색소음과도 같은 밤의 침묵을 듣는 게 더 유익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진짜 마지막이라는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같이 대화할 친구를 구하러 한 번더 돌렸다.


[낯선사람]: 저번에 저랑 대화했던, 집에 티비없는 사람 찾아요


[낯선사람]: 혹시 너야?


[당신]: 정확히 몇 월 몇 일인데요


[낯선사람]: 2월 11일 


나네


나를 찾는 사람이라, 대화 주제를 보니 그때 그 사람인 거 같네


갑자기 만나자는 게 당혹스러워, 도망치듯 나왔는데


[낯선사람]: 진짜 너 맞아?


[낯선사람]: 내가 처음에 무슨 이야기 했는데?


검증인가...


[당신]: 연예인 얀순이 이야기 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생각하냐고


[낯선사람]: 너맞네너맞구나그때는진짜조금미안했어내가너무급했지너를만나고싶은마음에그만실언을했던거같아우리대화만좀같이하자나가지말아줘그런이야기안할게


...


[낯선사람]: 아 미안 내 말 못 듣고 나가버릴까봐, 좀 흥분해서 적어버렸네


[낯선사람]: 우리 다시 그때처럼 대화하자


[낯선사람]: 내가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막 장기매매나 사기일 수 있어서 그런건 원래 안 주는 거라네


[낯선사람]: 하긴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을 어떻게 믿고 주겠어? 그치? 내가 좀 경솔했어


[낯선사람]: 저기 내 말 듣고 있긴 한거야?


[낯선사람]: 어디 간 건 아니지? 너인거 아니까 기다리고 있을게


[낯선사람]: 응?


...


내가 느낀 감정은 당연하게도 공포이고


그 이유는 상대의 행동에 있었다.


앞서 말했듯 적어도 이 사이트에선 사람을 다시 찾기 힘들다.


그러니까... 날 만날때까지 계속 돌렸다는 거겠지...


몇 번이고... 검증을 해야 믿을 정도로 닳고 닳도록 돌리면서


왜 이렇게까지...


[낯선사람]: 진짜 가버린거야?


[낯선사람]: 어디 화장실 간거지? 물 마시러 가거나 하하


[낯선사람]: 그치?


공포심에 타자를 칠 수 없었다.


그냥 조금 무서워서 분명히 그래서 그런거다


[낯선사람]: 010-XXXX-XXXX


[낯선사람]: 내 전화번호야


[낯선사람]: 저번처럼 오류로 끝나면 다시 만나기 힘드니까 


[낯선사람]: 네 정보는 요구하지 않을게 내 거라도 잔뜩 알고있어줘 그럼 다시 만날 수 있을테니까


[낯선사람]: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발신자 제한번호로 전화거는 방법이 있더라 그렇게 해서 전화해줘


무심코 손이 떨려서 ㅓ를 눌러버렸다.


이 사이트는 글자를 적으려고 타자를 치면 전송과 상관없이...


우측상단에 [상대방 타자중] 이라고 뜬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내가 화면 앞에 있다는 걸 눈치챘다.


[낯선사람]: 어? 지금 이거 보고 있구나


[낯선사람]: 키우던 애완동물이 누르진 않았을 거 아니야, 그런 형편도 안 된다고 했고


[낯선사람]: 아닌가 넌 성격이 따듯하니까 길고양이 한 마리 정도 데려왔을지도


이 사람이랑 대화하면서 알게 된 사실 몇 가지가 있는데


평균이상으로 부유하고, 어쩌면 나보다 더 숨막히는 삶을 살아왔다는 정도


아마 날 몇 번이고 만나려고 돌리면서


친구인 나를 만나려고 돌리면서 많이 지친 것 같았다.


[당신]: 이게 무슨일이야?


[낯선사람]: 우와... 너다


[낯선사람]: 꿈에만 그리는 너가 나타났어


[낯선사람]: 되게 찾느라 힘들었고 외로웠는데


[낯선사람]: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타자로 치기 힘든데, 전화 한 번만 해주면 안될까


#


늦은 밤


눈이 살짝 아프도록 빛나는 LED전등 밑에서 


평소라면 절때 하지 않았을 선택을 했다.


내 폰으로 전화를 했다.


상대방에 폰에는 내 전화번호가 남겠지


이건 힘들게 나를 찾았을 친구에 대한 소정의 보상이기도 했다.


원래 친구의 목적이었던 전화번호 교환 말이다.


전화 연결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받아졌다.


"너야?"


"진짜 너야?"


글자는 소리가 되어 눈이 아닌 귀에 인식되었고,


낯선상대는 전화번호로 기억되어 11자리 숫자로 남게 되었다.


#


누나와 나는 종종 전화를 하며 지냈다.


목소리를 들으니 상당히 아름다운 미성이 들려왔고


상대의 성별은 쉽지않게 추측이 가능했다.


개인정보는 나이까지만 알기로 했다.


전화를 하며 누나의 인생을 듣게 되었다.


솔직히 환경은 부유해서 부족함이 없어 여유로운 삶처럼 보였지만, 은근한 압박과 부담감


일부 악성 팬덤들의 선 넘은 악플 등등은 상당히 거북하게 들려왔다.


솔직히 부유한 환경을 듣고 배부른 것 아닌가,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말을 듣고 금새 접게 되었다.


나는 비록 가난했지만 자살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유했던 누나는 자살을 생각했다.


이건 환경에 상관없이 누나의 정신관이 나보다 많이 피폐해져 있다는 걸 의미했다.


보듬어 줄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야기는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화를 하고 또 하고... 어느덧 알고 만난지 1년이 다 되어갔다.


1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누나는 내게 만남을 강요하지도, 권유하지도 않았다.


마치 그것이 내 발작버튼이자 핵폭탄이라는 듯이 만남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이건 누나가 이 전활하며 서로를 보듬어주는 관계라도 유지하고 싶어하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에 맞춰서 지냈다.


하지만 누나는 정말 이상하리 만큼


내게 집착을 보이곤 하는 것이었다.


"이제 자려고?"


"응, 늦었으니까 이제 자야지"


"그럼 전화는 안 끊고 자면 안돼?"


"어차피 난 아무말도 못 할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숨소리라도 들으려고, 전화료가 걱정되면 누나가 요금제 바꿔줄까? 그것도 부담스러우면 보이스톡으로 할래?"


이러거나


"벌써 밤이네? 너 이제 랜덤채팅하러 가는 거 아니지?"


사실 누나와 전화만 안 했다면 하러 갔을 것 같다.


"너 또 랜덤채팅에서 나같은 사람 꼬시고 그러면 안돼..."


"알았지?"


"나도 너 만나고 더 이상은 그런 거 안 하니까, 너도 나한테만 집중해달라고"


라던가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럼 네 목소리가 몇 초 동안 안 들리잖아"


"화장실에 핸드폰 들고가면 안돼?"


"난 소리 들려도 상관없는데, 혹시 불편하면 음소거해서라도-"


...뭐하자는 걸까


내게도 사생활이란게 있고, 오랜 전화를 버티지 못하고 뜨겁게 발열하는 휴대폰이 내 짜증을 더 심화시킨다.


누나에게 넌지시 전화하는 시간을 줄이자고 해봐도


개거품을 물면서 전화기 너머로 애원과 화를 내니 정신은 아득해져 가기만 한다.


누나가 내게 화를 내거나 하면 얼마 안 가서 햄버거 세트 같은 기프트콘을 보내주곤 한다.


그 전까지는 그냥 불규칙하게 보낸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잘못을 하거나, 내가 거리를 두려고 할 때, 귀신같이 알아차려선 


거지인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는 맛있는 음식을 보내면서


알게 모르게 관계를 주축해가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사와 엮어 너랑 연락이 안 된다면 힘들어서 죽어버릴 거 같다면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단단한 사슬을 말이다.


하... 


거리를 좀 둬야겠다.


#


"뭐 벌써 자겠다고?"


"어, 점심을 좀 많이 먹었나 좀 나른하네"


"아... 알았어 푹자고, 일어나면 꼭 다시 전화해"


"알겠어"


...


꺼져버려 어두워진 화면이지만, 뜨겁게 발열하는 폰을 보면서


그 어두운 액정에 비친 날 보면서 난 무슨 생각을 할까


...


누나와 전화를 안 한지 10시간이 지났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더니 전화가 왔다.


몇 번 울리던 폰을 무시하고 못 하고 결국 집어들었다.


"미안해 자는 걸수도 있는데 너무 불안해서 전화했어"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닌가 싶어서, 보통은 10시 23분 47초나 자진 않잖아..?"


내가 릴스랑 쇼츠를 10시 23분 47초나 봤구나


"자는 건 알겠는데 전화는 켜두고 자면 안될까?"


누나를 보듬어주겠다고 서로를 치료하겠다고 한 다짐 후회한다


이쪽은 망가지고, 저쪽은 더더욱이 망가졌다.


상태가 호전되긴 개뿔, 저 긴 시간동안 나에 대한 의존과 집착만 더 깊어졌다.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그러면 핸드폰이 좀 뜨거워서... 배터리도 빨리 닳아서 충전하면 전기세도 나가고 해서-"


"새로운 핸드폰 값이랑 전기세 말해줘"


"내가 계좌로 보내줄게"


...


"왜 말이 없어?"


"내가 저번에도 그건 부담스러워서-"


"그래 그래서 네가 전화시간을 줄이자고 했지, 난 그건 죽어도 싫다고 했고"


"..."


"누나..."


"나 더 이상은 못 참겠어"


"씨발 힘들어서 못 견디겠다고!"


"그게...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전화기 너머로도 느껴지는 당혹스러움


"앞으로 누나랑 전화를 안 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그러지마 누나 힘들어"


이게 망할 가스라이팅인가 싶다.


"나 전화번호 바꾸고 앞으로 랜덤채팅도 안 할거니까, 나 찾으려고 괜히 애쓰지마!"


"뭐 너 방금 뭐라고-"



길고 긴 1년이었다.


상처받기에도 상처주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


큰 맘 먹고 핸드폰을 바꿨다.


전화번호도 바꿨다.


새출발 한다는 느낌으로 시작하는거다.


오늘도 깊은 밤 편의점에서 혼자서 릴스와 쇼츠를 본다.


즐겼던 랜덤채팅이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쇼츠에 그렇게나 많이 나오던 연에인 얀순이가 슬퍼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누나도 분명 슬퍼했겠지, 어쩌면 죽었을...


기분이 개같아서 폰을 꺼버렸다.


자꾸 나오는 저 연예인만 보면, 다른 우스꽝스러운 영상 몇개를 봐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


목소리가 비슷해서 누나랑 투영해 보이는 것 같다.


딸랑 


야심한 밤에 조금은 반갑게 느껴질 수도 있는 손님이 찾아온다.


"안녕하세요"


손님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인사를 건낸다.


아마 나 말고도 많은 알바생이 그럴거다.


그런데


사람은 곁눈이라는 게 있다.


그쪽을 안 봐도 굳이 보이는 그런 거


손님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약간 부들부들 떠는 듯 보였다.


혹시... 귀신인가 싶었다.


두려움을 억누르면서 알바생으로써 본분을 다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손님, 뭐 필요하신 거라도.."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썼지만, 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연예인이다, 그것도 김얀순


알고리즘이 내가 선호한다고 판단했는지 몇 번이고 빈번하게 나오던 그 사람


온 몸을 꽁꽁 감싸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몇 번이나 봤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


그런데 연예인이고 나발이고, 푹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 사이의 눈으로 날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왔다.


"진짜 너야?"


"네? 손님 그게 무슨-"


"너 맞네, 너 맞아"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하루의 절반 넘게 네 녹음본만 들은 나니까 알아"


"송출음의 차이가 조금은있어도, 이 목소리는 확실해"


이 무렵 즈음 나도 슬슬 눈치를 챌 수 밖에 없었다.


"너 맞지? 나 너무 힘들어서 술 사러 왔는데... 너 맞지?"


"진짜로... 너 맞는거지?"


아주 그리운 사람을 보듯 내 뺨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잘생겼네, 머리속으로 수십 수백번을 그려본 얼굴이지만 역시 진짜는 다르네"


"혹시, 누나야?"


힘들게 입을 열었다.


목멘 소리가 듣기 싫게 비집고 나왔다.


"어 누나야"


#


누나와 나는 잠깐 밖으로 나와 대화를 했다.


누나는 나와 조용히 차 안에서 대화를 하기를 원했다.


뭔 일 생길까 싶어서 따라서 들어갔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누나가 2천원을 주고 산 따듯한 유자차를 홀짝이며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난 뻘줌한 나머지 창밖을 바라봤지만, 누나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느껴졌다.


'나도 감격스럽기야 한데'


'너무 현실감이 없잖아, 나는 초라하기까지 하고'


"있잖아 얀붕아... 나 정말 힘들었다"


"네 이름도 방금 편의점 명찰 보고 알았다는 게 너무 비참하지 않아?"


"난 네 이름도 모르고 매일 밤 너라고만 외치면서 울었다고"


"사람 구해놓고 도망가기 있어..?"


나도 말할 것이 있었다.


"일단 미안해"


"그 동안 힘들었지? 내가 갑자기 연락처 바꾸고 잠적해서"


"그동안 좀 힘들었어서, 누나 기분은 고려 안 하고... 행동했어"


"누나 내가 일하는 곳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나 확 죽어버리려고"


...


"뭐?"


"니는 네가 너무 필요한데, 넌 내가 필요없어도 되는 것 같아"


"그래서 네가 연락 일방적으로 끊은 3달간 죽을까 말까 고민 많이했어"


담담한 목소리로 충격적인 소식을 말하니까, 내가 일으킨 참사가 더욱이 뇌리에 박혔다.


내가 무슨짓을 한 건지...


"그래도 너는 보고 싶으니까... 고민하면서 계속 3달동안 기다렸지"


"넌 내 번호를 아니까, 어쩌면 바뀐 폰으로라도 나한테 전화를 하진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기다렸는데, 역시 안 오더라고... 그래서 그냥 죽어서 귀신이라도 되어서, 내 곁이라도 맴돌려고"


어... 이상하게 조금 졸리네...


"누나 잠시만, 나 잠시 바깥 좀"


"그래서 오늘 술 산거야, 수면제랑 술이랑 같이 진탕 먹으면, 효과가 그렇게 좋다더라..."


"네가 마신 유자차에 원래 내가 먹으려던 수면제를 넣었어"


"연예인이면 뭐해? 돈이 많으면 뭐해? 너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돈을 들이부웠는데도 흔적하나 못 찾았어"


"세상이 그렇게 영화처럼 쉽진 않더라고, 힘들게 찾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봐도 결국 못 찾았어"


"근데 죽으려고 결심하니까 오늘 이렇게 내 앞에 딱 나타난 거 있지?"


"이거 운명맞지?"


"누나가 말했지 외모는 안 본다고, 돈은 내가 많으니까 상관없다고, 성격은 차차 맞춰가면 된다고"


"그러니까 한 번 만나자고 했잖아... 결국 이렇게 보네..."


"누나... 이거 범죄야..."


정신을 잡으려고 집중해봐도 몸에 힘이 점점 빠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범죄... 네가 내 마음 씹창내놓고 도망간 건 범죄 아니고?"


"서로 하나씩 죄 짓자, 그리고 우리 결혼하자"


"대체... 뭐라는..."


이 말을 끝으로 끝내 눈이 감겨버렸다.


"자고 일어나면 아빠가 되어있을거야, 날 거부한다면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되어버릴거야"


"그러니까 지난 내 1년 3개월 보상해줘"


모두가 잠든 야심한 밤, 최신형의 벤츠가 들썩인다.


모두가 일어난 밝은 아침, 한국의 대배우 얀순이의 결혼과 동시에 은퇴소식이 모두에게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