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가 철원에 군사적인 이유로 편입된 게 아님


당시 인구가 만오천 = 당대 면 하나 인구라서 에잇 하고 줘버린거.


그리고 김화-금성 사이 지형이 험하지 않아서 남대천변이 비무장지대 되더라도 가장자리로 도로 뚫을 수 있었음. 거기 말고도 마현리에서 진현리로 가는 도로도 있어서 지금처럼 금성지구에 행정공백이 생기는 사태까진 막을 수 있음.


금성지구 전투 이전에도 남한군은 금성면 중심지를 점령하고 있지 않았음. 전선이 원남-원동면 중심지 일대에 있었고, 그대로 휴전이 일어났다면 금성지구에 사는 인구는 여전히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 그래도 63년 당시 김화-금성 일대의 인구가 3만쯤은 되었을지도 모름.


여기서 그 일대를 가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만은, 괜히 금성-화천-춘천(북한강수계) 간의 교류가 강을 이용한 적은 횟수뿐이 없는 게 아님. 주파령 구간 생각보다 길고 험해서 양 지역 오가기 쉽지 않음. 그거 빼고 생각해도 걍 화천시내가 더 멀어서.


그리고 금성지구 전투를 졌다, 빼았겼다,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났다 말하는 사람들은 7월공세때 백암산-재안산 일대를 재탈환한 참전용사분들께 죄송하지 않음? 5만이 넘는 사람들이 그 땅을 중공군에 맞서서 조금이라도 지키려다 죽었음. 그 결과가 현재의 전선인거고 그분들의 노고를 패전이라고 씌우면 안 된다고 봄. 모두가 최선을 다해 만들어낸 결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