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부순애물 채널

"게, 게일?"


몸을 일으킨 게일이 몽롱한 눈빛으로 볼드를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볼드는 당황한 채 키득거리며 웃는 히프노스를 잠깐 바라봤다가 게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상해. 몸이 너무 뜨거워."


게일의 입에서 매력적인 저음의 끈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볼드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히, 히프노스! 장난 그만치게! 게일을 원래대로 돌려놔!"


"에이 대장~ 걸 수는 있어도 푸는건 못하는거 알잖아? 뭐, 게일친구도 슬슬 내성이 생길테니 금방 깨어날 수도 있겠지."


게일은 여태까지 보여줬던 경계하는 눈빛과는 전혀 다른, 볼드를 향해 애욕이 넘치는 눈을 한 채 입고있던 바지도 스르르 벗고 계속해서 그를 향해 다가갔다. 면속옷 아래로 끈적한 꿀이 떨어진다. 볼드는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제발 이러지 말게..."


이제 볼드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그 둘은 경기장의 벽면까지 도달해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벽면에 밀착된 채 눈을 질끈 감고 게일의 뜨거운 숨을 느끼는 볼드는, 어느새 속옷을 벗어 자신의 손가락에 걸고있는 그를 마주해야만 했다.


"볼드. 나를 어떻게 생각해?"


"게일..뭐 뭐라고 생각하다니. 그래봤자 어제 잠깐 본게 전부아닌가."


"거짓말하지마."


게일이 볼드의 가슴을 거칠게 움켜 잡았다. 볼드는 갑작스런 손길에 간지러움과 더불어 뜨거움을 느꼈다. 자신의 고간에 어느새 힘이 팽팽하게 들어가있는 걸 보고 볼드는 속으로 신의 이름만을 외쳐댈 뿐이었다.


"어제, 당신이 나를 향해 느꼈던 감정을 말해줘."


볼드의 머릿속에 게일과의 만남이 스쳤다. 히프노스에게 잡혀온 젊은 늑대. 걸음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자신이 들어 침대에 옮기고, 깨어난 뒤 짧은 대련. 합을 나누며 노련미를 보이던 사냥꾼 게일. 자신의 목에 올라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게일. 그대로 엎어 매쳤다가 자신의 고간에 얼굴을 박게 된 게일. 아침에 본 게일의 자지. 당황해서 침대에서 떨어지는 게일을 암컷처럼 안아들어버린 모습. 그걸 생각하자, 어느새 볼드의 굵은 핏줄이 박동하는 물건에서 희뿌연 프리컴이 나오기 시작했다.


"응? 볼드. 말해줘."


"게, 게일 이러지 말게..."


게일은 볼드의 가슴을 덮고 있는 옷의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볼드의 하얀 털이 수북한 근육질의 가슴이 드러났다. 볼드는 심장이 미친듯이 뛰는 걸 느끼며 게일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흔한 갈색의 털, 한쪽이 살짝 기울어진 귀. 그리고 최면에 정신을 놓아버린 초점을 잃은, 그러나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자신보단 좀더 밝은 노란색의 눈동자. 살짝 벌어져 타액을 흘리고 있는 주둥이, 목이마른듯 입 옆으로 살짝 삐져나온 혀.


'사랑스럽다.'


볼드가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안고싶었다. 게일을 기쁘게 해주고싶었다. 


"볼드. 나, 볼드의 '욱소르'가 될래."


게일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에, 볼드의 모든 털이 삐쭉하고 서는듯한 전류가 흘렀다.


uxor. 그것은 수컷들만이 존재하는 수인들이 종족을 이을 수 있는 그들의 비밀을 담은 언약이었다. 전사로 태어난 모든 수인들은, 인생에 단 한번 다른 수인의 아내가 되어 그 아이를 임신하여 대를 이을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수컷들만 존재하는 수인들의 경우, '욱소르'가 되기로 한 수인이 그 상대에게 사랑의 증표를 아랫배에 새김으로써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고대주술로 만들어진 자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욱소르가 된 수인은 더 이상 전사로써 살아갈 수 없기에, 그것을 입밖으로 꺼낸다는 것은 전사의 종족인 수인에게 있어 커다란 결심과 사랑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그 단어가, 방금 게일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아 아무리 최면이라지만. 정말 게일이 나를?'


"볼드. 나...나에게, 당신의 사랑의 증표를..."


최면이 풀리는지, 게일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렸다. 볼드가 그런 게일의 몸을 재빠르게 안아 들었다. 자신의 품에서 가쁜 숨을 내쉬는 게일을 보자, 볼드는 사랑스럽고도, 당장 자신의 '욱소르'로 만들고 싶은 기묘한 감정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게일의 눈동자는 최면의 기운이 가셨는지, 지쳐보였지만 동공이 떨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게일의 오른손이 볼드의 아랫턱을 살며시 매만지며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주둥이에 키스를 남겼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볼드가 이 당황스런 상황에 고장난 골렘처럼 꿈쩍도 못하고 있는 사이, 그의 왼 다리쪽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저, 저기...대, 대장."


거기엔 크루크가 언제 다가왔는지 자신의 해머를 볼드의 다리에 댄 채 겁에 질린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이것도 유, 유효타로 쳐주시...나요?"






"정신이 드나?"


게일이 다시 눈을뜨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볼드의 얼굴이 보였다. 게일은 몸을 번쩍일으켜 으르렁거리며 벌떡 일어섰다. 어제와 같이 히프노스를 찾는 게일.


"당장 죽여버리겠어."


"아, 어, 근데, 그전에 옷...옷부터 입게."


볼드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며 게일에게 옷가지를 건넸다. 게일은 볼드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문득 스믈스믈 피어오르는 조각난 기억들에 얼굴이 붉어졌다.


'볼드, 나, 볼드의 '욱소르'가 될래.'


게일은 옷을 재빠르게 입고 번개처럼 달려나가 히프노스를 찾았다. 연습장에서 무라쵸와 낄낄거리고 있던 히프노스가 자신을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게일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와, 게일친구 회복이 빠르네!"


"게일! 근육을 더 성장시키면 금방 깨어날 수 있다!"


"이 미친 도마뱀 자식이!"


게일이 가속한 상태로 히프노스를 향해 붕 뛰어올랐다. 그대로 오른발을 기세좋게 뻗은 게일의 발이 히프노스의 명치에 적중했다. 히프노스는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져 몇바퀴를 굴렀다.


"쿠헥!"


"히프노스! 피할 수 있었다! 왜 안피했나!"


"케헥...아니, 슬슬 맞아줘야 할 것 같아서...근데 지금 후회중이야...크학!"


"내가 잘못생각했다. 탈출이고 뭐고 너부터 포를 떠야 속이 시원할것을."


히프노스는 켁켁거리며 일어나 두손을 들고 항복의사를 표명했다. 게일은 으르릉거리며 어느새 가져온 검을 검집에서 반쯤 뽑았다.


"아니, 이봐. 한 번 봐줘. 나 덕분에 좋았던 것 아냐?"


"그게 무슨 개같은 소리야!"


"히프노스는 개가 아니라 용이다! 방울뱀이 섞인거다!"


"넌 좀 닥쳐!"


무라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술을 빼쭉내밀었다. 히프노스는 킥킥거리며 몸을 일으켜 게일에게로 다가와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너, 볼드대장을 생각해봐."


게일은 순간, 아련한 기억속에 자신이 턱을 끌어당겨 입맞춘 볼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분명, 최면이 아닌 자신의 의지였다. 눈 앞에 보이는 볼드의 얼굴이 너무나 매력적이고, 잘생겼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자, 미친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히프노스가 손끝으로 느껴지는 고동에 미소를 지었다.


"그치? 난 그냥 네가 숨긴 감정을 꺼내봤을 뿐이야. 너, 어제 내가 최면을 걸었을때도 볼드 대장의 모습이 보였지?"


정곡을 찔린 게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쉽네. 게일친구. 내가아니라 볼드대장이 널 포획했다면, 네가 날 좋아해줬을까?"


"뭐?"


"아냐아냐, 미안하다는 뜻이야. 어이 무라쵸! 대련이나 한판 하자."


"좋다!"


슈트를 입은 무라쵸와 곡도를 든 히프노스가 대련을 시작했고, 게일은 그를 멍하니 보다가 연습장 구석으로 가 주저앉았다. 


'내가, 볼드를?'


게일은 멍하니 앉아 볼드를 생각했다.


어제의 대련에서, 볼드의 고간에 얼굴을 박았던게 생각났다. 게일의 폐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강한 수컷의 페로몬 가득한 수컷냄새. 오묘한, 짭짜름한, 성숙한, 위험한, 매료되는, 그런 냄새. 게일은 갑자기 고간에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아, 아냐! 그럴리가 없어. 그렇게 한 눈에.. 몇 시간도 안되서, 그럴리가...없다고...'


볼드처럼 강한 수인이 있었다면, 자신의 부족들은 더 안전했을까? 게일은 볼드와 함께 자신의 마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볼드니, 이전처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잠도 못자며 괴물, 인간들과 싸워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이건 동경이야. 그냥 나보다 강한자를 향한 동경이다.'


"저, 저기...게일...씨?"


얼굴을 부여잡은 채 화끈거리며 상념에 빠진 게일을 부른건 크루크였다. 아까부터 게일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구석에 박혀 있었기에 걱정이 되어 다가온 참이었다.


"응? 어. 무슨일이지?"


"네, 네...저, 저기, 괘 괜찮으신 거죠?"


"괜찮다."


뜨거운 김을 한차례 코로 뿜어내고 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루크는 멋쩍게 인사를 하며 뒷걸음 질을 하려는 찰나, 게일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에게 포획되어 들어온거지?"


크루크는 그 질문에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았다.


"저, 저는..."


한참을 망설이던 크루크가 입을 뗐다.


"아, 아주 어릴 적부터 이, 이곳에 있었어요."


"어릴때 잡혀왔다는 건가?"


"아, 아뇨. 저, 저는 카, 칼스홉트 백작가의..."


게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하기 싫으면 괜찮아. 난 캐묻는게 아니다."


"아, 아니에요. 저, 저는...카, 칼스홉트..."


그때였다. 철책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한참 대련중이던 히프노스와 무라쵸의 표정이 굳으며 행동을 멈췄다. 숙소방향에서는 볼드가 부리나케 뛰어나왔다.


"브레멘 집합!"


크루크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게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인원들이 집합하는 자리로 이동했다. 철책에서 모습을 드러낸건 초로의 노인과, 볼드와 똑같은 백색의 털을 가진 사자수인이었다. 그러나 볼드의 어마무시한 덩치와는 대조적으로 마른 체구에, 어딘가 예민한 분위기를 지닌 날카로운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자였다.


"칼스홉트 백작님께 브레멘 부대의 볼드와 이하 넷이 인사를 올립니다!"


볼드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리자, 다른 수인들도 같은 인사를 올렸다. 멀뚱히 노인을 바라보던 게일은 그 옆에 서있던 사자수인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왼 무릎 뒷편을 무언가가 강하게 가격하는것이 느껴졌고, 당황하기도 전에 다른 수인들처럼 무릎을 한 쪽 꿇게 되었다.


'뭐, 뭐지? 최면인가?'


아니었다. 무릎 뒤쪽이 얼얼한 타격의 열감이 남아있었다. 당황한 눈으로 노인 옆의 사자수인을 바라보자, 그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살짝 혀를차는게 보였다.


"그래. 어제부로 새로운 투사가 왔다고 들었네만."


"예 그렇습니다. 게일!"


볼드의 부름에 게일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칼스홉트는 게일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 인간을 해치운다면 마을로 돌아갈 수 있는건가?'


그러나 게일의 감은, 함께 온 사자수인이 위험하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게일은 잠자코 칼스홉트가 자신의 턱 밑에 지팡이 끝을 대는 것을 참았다. 자신을 향한 경계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볼드. 자네가 보기엔 어떠한가?"


"예! 저희 조에 부족한 전력을 충당시켜줄 재원이라 생각합니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게일이라고했나?"


"...그렇다."


게일의 입에서 불만가득섞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활약을 기대하겠네."


칼스홉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게일은 참으려 했지만 입술이 말려올라가 송곳니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사자 수인이 입을 열었다.


"아직 훈련이 덜 됐나봅니다. 형님?"


그러면서 그가 바라본 것은, 무릎을 꿇은 채 땅을 바라보고 있는 볼드였다.


"아직 예를 갖추는 법을 교육하지 못했습니다. 즉시 교육하겠습니다."


볼드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형님이라 부른 사자수인을 바라보았다.


"씬 에드번 자작님."


'형? 그런데 자작이라고?'


게일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어 그 둘을 번갈아보았다. 자작이라니. 수인에게도 인간의 지위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저 털과 눈 색만 같은 전혀 달라보이는 존재가 볼드의 동생이라니?


"꽤나 말썽쟁이 같은데요. 형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교육할까요?"


볼드가 다시 고개를 땅으로 푹 숙였지만, 게일을 비롯한 수인들은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자작님께 그런 수고를 끼칠 순 없습니다. 저의 부하이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씬 에드번은 게일을 잠깐 노려보더니, 이내 살짝 미소짓는 표정이 되어 앞을 바라본 채 입을 닫았다. 칼스홉트는 이번엔 크루크의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크루크.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느냐?"


그리고 크루크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게일을 더욱 혼란의 도가니로 밀어넣었다.


"네, 네...아, 아버지...괘, 괜찮습니다..."


게일은 이번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히프노스와 무라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눈만 흘낏 게일에게로 돌리고선 고개를 살짝 저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칼스홉트는 손을뻗어 크루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크루크가 바들바들 떨며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더욱 숙였다. 게일은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크루크의 공포심이 공기를 타고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교육'을 받은지 언제였지?"


"하, 한달 전 입, 입니다..."


"그럼, 슬슬 준비를 해둬야겠구나."


크루크가 당장이라도 졸도할것처럼 푸르륵 떨자 게일이 이를 악물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주먹을 까득 쥐었다. 눈치챈 히프노스가 당황하며 꼬리를 살짝 흔들려는 찰나였다. 게일은 자신을 둘러싼 공기들이 위협적이면서도 스산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걸 느꼈다.


"말씀중에 죄송합니다. 칼스홉트 백작님."


"무슨일인가? 자작."


게일은 자신을 노려보는,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주변에 흉흉하게 도는 바람의 기척을 경악스런 눈동자로 바라보는 볼드를 보았다. 씬 에드번이 말을 이었다.


"제게 딱 10분의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갓 들어온 사냥개에게 교육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칼스홉트가 당황한 채 쇄액거리는 바람에 갇혀있는 게일을 보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도록 하게. 나는 그럼 위에서 기다리지."


칼스홉트는 몸을 돌려 지상으로 향하는 나선계단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볼드 부대장."


"예 백작님."


칼스홉트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려 볼드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일 저녁에 마차를 보낼테니 크루크를 올려보내도록 하게."


"예....알겠습니다."


볼드는 눈을 질끈 감으며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크루크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처럼 숨을 가늘게 내쉬고 있었다. 


계단위에서 대기하던 수행원들이 내려와 칼스홉트와 함께 연습장을 떠났지만, 볼드를 비롯한 모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를 풀지 못했다.


"씬 에드번 자작님."


"네, 말씀하세요 형님."


볼드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씬의 능글맞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게일은 제가 책임지고 교육하겠습니다."


"글쎄요? 아까 제가 아니었다면 백작님께 당장이라도 달려들지 않았을까요?"


"제가 막으려고 했습니다."


히프노스가 고개를 들어 대답하자, 씬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순식간에 벌레를 보는것처럼 혐오스러움으로 일그러졌다.


"너는 뭐지?"


"...브레멘의 히프노스입니다."


"건방지게 나와 형님의 대화에 끼어드는구나?"


히프노스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야 저도 입이 달려있으니 말입니다."


게일은 자신을 둘러싼 공기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동시에 자신의 옆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눈을 떴다 뜨니 자신이 수바퀴는 구른채로 바닥에 널부러져 있음을 느꼈다.


"커..헉..."


엄청난 고통에 게일이 숨을 토해내고 몸을 일으키자, 마찬가지로 폭발에 휘말린 무라쵸가 저 멀리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것과, 직격당한 히프노스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구석에 쓰러진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 무슨..."


"히프노스!"


무라쵸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히프노스를 향해 달려갔다.


"눈물나는 동료애구나?"


게일은, 씬이 그런 무라쵸를 향해 검지를 뻗은 오른팔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소름끼치는 바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씬!"


볼드가 고함을 지르며 일어남과 동시에 근육질의 무라쵸가 마치 폭풍에 휩쓸린 허수아비처럼 굉음과 함께 날아가 수바퀴를 구르고 구석에 쳐박혔다. 몸을 부르르 떨던 무라쵸가 이내 히프노스처럼 축 늘어졌다.


"이 자식이!"


게일은 분노에 몸을 맡겼다. 씬이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게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게일의 귓가에 또다시 예리한 검이 수십번 휘둘러지는 듯한 소름끼치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씬! 그만둬라!"


"싫은데요. 형님?"


게일은 바람들이 거세게 자신을 향해 응축되듯 모여오는 것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좁혀지는 바람의 장막을 분노로 예민해진 게일의 감각이 읽어냈다. 공중에서 몸을 기예를 하듯 비틀어 바람의 흐름을 벗어난 게일이 땅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가 벗어난 자리에선 아까의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게일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의기양양해 하기는.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게일! 피해라!"


게일은 다음순간, 공기가 다른소리를 내며 허공에 휘감기는걸 느꼈다.


"이건...무슨!"


말을 마치기도 전에 휘감긴 공기가 마치 화살처럼 표독스런 소리와 함께 게일을 향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게일은 있는 힘껏 땅을 박차 옆으로 튀어오르며, 그런 자신을 향해 내리고 있었던 왼팔을 뻗는 씬과, 그 다음순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볼드를 보았다.


"형님?"


씬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듬과, 게일을 향해 달려든 볼드가 커다란 품 속으로 그를 안음은 거의 동시의 순간이었다. 게일은 볼드의 품속에서 아득한 꿈속의 소리처럼 커다란 폭발음을 들었다.


"보, 볼드?"


게일은 먼지가 자욱이 일어난 매캐한 공기를 마시며 그를 감싼 볼드의 팔이 힘없이 떨어지는걸 느꼈다. 게일을 보며 힘겹게 웃고있는 볼드의 입가에서 붉은 핏줄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괜찮...나. 게일?"


"젠장! 저 자식 당장 찢어버리겠어!"


"무리...일걸세...씬은, 마법사야..."


마법사. 혼자서 수천, 수만을 상대할 수 있다는 살아있는 전설같은 존재. 게일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가볍게 제압한 히프노스와 볼드, 그리고 강한 육체를 지닌 무라쵸까지 일격에 치명상을 입힌 씬은 차원이 다른 강자였다.


그러나, 게일은 지금 볼드의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보며 아까 느꼈던것과 너무나 다른 종류의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살의였다.


"형님?"


한 가지 게일이 유념해야 할 것은 씬 역시도 치밀어오르는 살의를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씬은 자신의 왼손끝이 뻗은 곳에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서있는 볼드의 등을 보며 이를 우드득 깨물었다.


"형님! 어째서죠? 왜 감싸신겁니까?"


"...씬 에드번 자작님...이제 그만하..십시오..."


볼드가 살짝 고개를 들려 반쯤 감긴 눈으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씬의 얼굴에 강렬하게 드러난 살의는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답하세요 형님! 왜! 왜 그 버러지를 감싸신겁니까!"


"게..일은...제가 책임질...저의..."


볼드가 잠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욱소르..입니다..."


볼드의 한마디가 연습장을 에워싼 숨막히는 살기를 단번에 지웠다. 거기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게일과, 망연한 얼굴로 볼드를 바라보는 씬만 남아있었다.


"혀, 형님? 지금 뭐라고 하신겁니까?"


"게일은...저의 욱소르라고 했습니다."


"어째서요?"


볼드는 씬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오르는걸 보았다.


"제가, 제가 형님을 위해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씬..."


"제가 형님을 얼마나 사랑하고있는데!"


씬이 악에받친 고함을 치며, 양팔을 뻗었다. 공기가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거센 움직임을 보이며 연습장의 상공에 모이는게 느껴졌다. 볼드는 게일을 안았고, 씬은 그런 볼드를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 그만 두, 두세요."


파국의 직전, 모든 흐름을 멈춘 것은 크루크였다. 크루크는 겁을 가득먹어 파들거리는 주먹을 꼭 쥔채 씬을 바라보았다.


"허? 지금 나한테 말한겁니까?"


씬이 광기로 번득이는 눈동자를 굴리며 크루크에게 물었다.


"며, 명령입니다. 씨, 씬 에드번, 자, 작."


"감히 재수없는 '반쪽짜리'주제에 나한테 명령을 해?"


크루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무, 물러나지 아, 않으면, 내, 내일 아버지께, 고, 고하겠어요."


크루크가 말을 끝내자 씬이 표독한 독기를 거두고 멍한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내 눈동자가 활처럼 휘어지며 미친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 아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씬이 배를 잡고 웃다가 손을 가볍게 튕기자, 연습장 위를 휘감던 흉흉한 기운의 바람의 구체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씬은 눈물까지 고일정도로 웃다가 크루크를 보면서 처음의 번들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재밌네요. 알겠습니다 크루크 '도련님'. 뭐, 어느정도 교육은 됐겠죠? 아니, 격의 차이를 좀 알았으려나?"


씬은 기지개를 펴고 볼드를 바라보았다.


"형님. 뭐, 잠깐의 여흥이라 생각하겠습니다. 형님같은 수컷이라면 어떤 놈이든 품어봄직 하죠. 경연이 끝날때까지는 봐드리겠습니다."


공동을 나서 계단위로 올라간 씬의 구두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철창이 올라갔다. 게일은 그제서야 볼드의 품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무라쵸, 갔냐?"


"갔다!"


히프노스가 쳐박힌 채로 슬그머니 눈을 떠 묻자 마찬가지의 무라쵸가 멀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피투성이 몸뚱이를 일으켜 먼지를 툭툭 터는 그들을 게일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야, 게일친구. 그렇게 보지말라고~한 번 대들었으면 할일 다한거 아니겠어?"


"마법! 근육에 안좋다! 아프다!"


"...어이없는 놈들."


게일은 기가차는지 피식하고 콧방귀를 뀌고 볼드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붉힌채 입가의 피를 닦고있던 볼드는 슬쩍 게일을 바라보았다가 몸을 돌렸다. 게일은 그런 볼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봐."


"왜, 왜그러나."


"아까 그거 무슨말이야?"


"뭘 말하는거지?"


볼드는 헛기침을 하며 게일의 시선을피했다.


"내가 당신의 욱소르라고..."


"아, 아니! 그건, 그건말일세. 씬녀석을 일단 어떻게든 말리려고 말을 하다보니..."


"세상에 대장! 지금 살려고 게일친구를 이용했다는거야?"


완전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볼드와 게일에게 다가온 히프노스가 히죽거리며 볼드를 놀렸다. 마법에 직격당해서 벽구석으로 날아가 쳐박혀 피를 한바가지 토했어도 남 약올리는일은 멈추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와! 어떡해~ 게일친구 완전 상처받았겠는데? 대장 그렇게 안봤는데 은근히 약은 구석이 있네! 게일친구~ 어쩌겠어. 세상에 수컷들이 이렇게 무섭.."


"그래, 어제 네놈덕분에 내가 그말을 한 덕분이겠지?"


"어라?"


주둥아리를 달싹거릴 힘만 남았던 히프노스는 자신을 향해 매섭게 뻗어드는 게일의 발을 보고도 피할 겨를이 없었다. 쩍하며 찰진 타격음과 함께 히프노스의 몸이 또 허공을 날았다.


"히프노스! 이번엔 왜맞았나!"


"야, 무라쵸. 너는 어디가서 죄짓고 살지마라."


"죄지을 시간에 훈련을 해야 근육이 큰다!"


"...아, 그렇군요."


잠시 후 히프노스와 무라쵸, 게일은 연습장을 나가 자신의 쉼터로 향했다. 연습장엔 크루크와 볼드만이 남았다. 볼드는 잔뜩 위축된 채 땅만 바라보는 크루크를 향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까는 고맙네. 크루크."


"아, 아니에요. 지, 진작에 말을 꺼, 꺼냈다면, 아무도 다치, 지 않을 수 있었는데..."


"괜찮네. 나도 그렇고 히프노스나 무라쵸 역시 연기를 했을 뿐이지 경상에 그쳤지 않나. 자네가 마지막에 막지 않았다면 꽤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겠지."


"다, 다행이에요.."


볼드는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한쪽 무릎을 꿇어 크루크의 얼굴을 바라다 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듯 울망거리는 눈이 볼드의 마음을 아프게했다. 이렇게도 성정이 여린 것이 백작의 유흥거리가 되어 검투사로 싸워야 하는 크루크의 운명이 야속했다.


"내일은 괜찮겠나?"


크루크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볼드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크루크가 달에 한번쯤 백작가로 돌아가 칼스홉트의 '교육'을 받는 날이면 보기 애처로울 정도로 떨며 기진맥진해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해, 해야만 하, 하는 일이니까요..."


"거기서 대체, 무슨일이 벌어지는건가?"


크루크는 고개를 들어 볼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무서운일을 당한다고, 도와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크루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괘,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