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부순애물 채널

"우리 사귀는거 맞죠?"


사자는 그렇게 묻는 여우의 사랑이 담긴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저 미소를 띄울뿐이었다. 그들이 한창 헝크러졌던 침대 위에는 갈색과 붉은색의 털이 낙엽처럼 떨어져 있다. 다시 이곳에 들어오기 전으로 돌아온 듯 정갈한 셔츠차림에 넥타이를 올린 사자는 아직까지 헐벗은 여우에게 다가가 안아주고 입을 맞췄다. 


"연락할게."


"치, 그렇게만 말하고."


여우는 문 밖을 나서는 사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사자는 빙긋 웃었고, 철문이 닫혔다. 쾅. 도어락 소리. 밖에서는 다시 열리지 않을 문 밖으로, 구두가 복도를 걸어 멀리 떠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우는 침대에 누웠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온기와, 그의 체취가 남은 이부자리의 곳곳에 몸을 뒹군다. 휴대폰을 열어 사자와의 다정한 시간이 담긴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까의 열희가 생각나 부르르 떤다.


그런데 손끝에, 단풍같은 털들 사이로 노란색의, 짧은 털 하나가 붙어있다. 여우는 미간을 찌푸린다. 침대에는 사자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이 섞여있었다. 분명 둘만의 시간이었는데,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한 기분이 불쾌했다. 몸을 일으켜 다시 현관으로 향한다. 사자가 뿌린, 향수의 탑노트가 은은히 퍼져있다. 문을 연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멀끔한 대리석 위엔 방금 나간 그의 구두자국조차 남아있지 않다. 




"늦었네."


발코니에서 야경을 보며 와인을 마시던 호랑이가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사자를 보며 말했다. 사자는 넥타이를 끌러 손에 들고 싱긋 웃는다. 


"그러게. 일이 바빠."


외투를 벗고, 가방을 둔 채 주방에서 호랑이와 같은 잔을 들고 온 사자가 그의 맞은편에 앉는다. 두 수컷은 서로를 마주보며 싱긋 웃었다. 점멸하거나 긴 선을 긋는 도로의 불빛들을 와인잔에 담아보던 사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호랑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왜?"


"그냥. 귀여워서."


사자는 예전에, 이러면 세상을 삼키는 것 같아. 하며 와인잔으로 세상을 탐망한 뒤 붉은 렌즈를 찰랑이다가 단숨에 삼키곤 했다. 그 바보같으면서도, 야망있는 수컷의 모습이 호랑이의 눈에는 귀여웠다. 행동의 의미를 꿰뚫리자 부끄러워하는 사자. 호랑이는 그런 사자의 손을 잡고 침실로 향한다. 익숙하게, 셔츠를 벗기고, 호랑이는 그의 목덜미에 키스한다. 그리고, 사자의 품에 안긴 채 갈기를 쓰다듬는다. 사자는 호랑이를 품에 안고 눈을 감은 채 따뜻한 체온을 즐긴다. 호랑이의 눈이 가늘게 떠진 채 노기를 띄고 있는것도 모른채로.


사냥. 호랑이는 사냥을 하고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들의 원시가 산과 들을 누비며 먹잇감을 찾듯. 호랑이의 손끝은 무르익은 단풍같은 사자의 갈기를 헝크러트리며, 아까부터 느껴진 묘한 다른 것의 체취를 찾는다. 아침에 안았을때 느낀 향수가 아직도 탑노트에 머무를 리 없다. 일이 바빴다는 그의 말이 맞다면 말이다. 마침내 갈기 속에서 떠오른 손 끝에 이질적인 붉은 털 한올이 걸려온다. 몸을 섞으며, 호랑이는 사자가 안고왔을 상대의 모습을 상상한다.


키는 자신보다 작으리라. 다리를 구부려 사자의 온 몸을 핥던 호랑이가 허리춤에서 강해진 체취를 느낀다. 사자는 움찔거리면서도,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빛으로 호랑이를 내려다본다. 호랑이는 입안에 사자의 것을 삼키며 생각한다. 풋내나는 어린 것의 타액냄새가 덮인 사자의 물건을, 자신의 향으로 씻어낸다. 뿌리끝까지 닿아있지 않은 향에, 주둥이도 작았을 모습을 떠올린다. 호랑이는 사자를 올려다본다.


"왜?"


대답대신 호랑이가 사자의 몸을 떠민다. 침대에 앉은 채로 사자는 호랑이가 가운을 벗고, 탄탄한 몸매를 드러내는걸 보며 눈을 반짝인다. 호랑이와 사자의 몸이 포개진다. 숨이 섞인다. 같은 와인의 향을 풍기는 혀가 엉긴다. 사자는 어렴풋이, 이 익숙함 속에 숨어있는 날선 감정을 느낀다.


호랑이는 생각한다. 한 때는, 사자가 호랑의 전부였던 적이 있다. 사자의 존재가 자신에게 너무나 커서, 그와의 순간이 꿈이 되고, 그를 생각하는 것이 기쁨이고, 함께 한 기억이 삶이 되었던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제 사자를 멀찍이서, 자신의 손바닥 위에 가늠해 놓고 보게 되었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둘은 허물같은 법으로도, 관습과 예의로도 얽히지 않은 수컷들. 둘만이 정해놓은 규칙으로, 언제든 어겨 사라질 수 있는 관계. 누군가는 목줄을 쥐어야 한다고 호랑이는 생각했다.


"당신밖에 없어."


사자가 그런말을 하며 올라탄 호랑이의 손을 잡는다. 표정은, 황홀해 보인다. 호랑이는 사자가 어떤 체위를, 어떤 부위를, 어떤 플레이를 즐기는지 모두 알고있다. 만족시켜줄 수 있다. 게다가 섹스 바깥으론, 사자는 호랑이를 떠날 수 없다. 계속된 사랑 속에서 목줄을 잡은 쪽은 호랑이였다. 그렇다고 호랑이는 사자를 좁은 우리에 가두어 사육할 생각은 없었다. 


'섹스, 수컷들에겐 배설이잖아요.' 


누군가 그랬다. 호랑이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몸 아래 배를 깐채로 애교섞인 말을 건네는 이 모습을 보라. 목줄을 완전히 쥐고있으니, 가끔은 이런 일탈도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호랑이는 언젠가, 자신보다 더욱 완벽한 수컷이 나타나 사자를 매료시켜, 목에 깊은 상처가 날지라도 끊고 사라질 그의 모습이 두렵다. 이 관계의 목줄이란 것은, 둘 중 하나라도 돌아서게 된다면 어떠한 힘도 없는 허무한 것이기에.


"알면 잘 해."


그럼에도, 호랑이는 그런 사자를 여전히 사랑한다. 아마 사자는 몇 주, 아니면 몇 달이 지나 다시 붉은털을 가진 어린 것을 찾거나 다른 수컷과 몸을 섞을지 모른다. 언젠간 파멸일지도 모를, 어떠한 접점 하나 없는 이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 호랑이는 사자의 품안에 안겨 목덜미를 부빈다. 자신의 향을 애처롭게 새긴다. 어쩌면 목줄을 잡힌 것은 자신일지도 모른다. 사자가 일부러, 자신을 흐트리려고 혹은 시험하려고, 이렇게 허술하게 흔적을 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랑이는 차라리, 그렇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바보같은 수컷인 사자가 아무것도 종잡히지 않는 완벽한 타인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사자는 어느새 잠든, 호랑이의 얼굴을 보며 볼에 입을 맞추다가,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혀로 부드럽게 핥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열어, 밀린 메시지를 확인하던 그의 눈에, 손등에 박히듯 남아있는 붉은 털이 보였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자는 바람을 후, 하고 불었다. 붉은 털은 팽그르르 입김을 타고 공중에서 춤을 추더니 이내 빛이 없는 바닥 어딘가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