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나를 잡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가. 나 같은 단명종과 같이 있으면, 당신만 외로워질 뿐이니까."

"...... 어째서, 어째서 나를 떠나는 것이냐."

"간단하잖아."


연인을 뒤로 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며 떠나가려 했지만, 떠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기에 지금 당장 떠나가야 했다.


그는 수천 년을 살아가는 장생종, 그에 비해 나는 오래 살아도 100년을 겨우 채우는 단명종이다. 그저 그의 제물로 바쳐졌기에 미련도 없는 삶이었으니 이대로 떠나가도 그만이었지만,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속에 응어리진 감정이 눈에서 새어나와 내 뺨을 적시고 있었으니까.


"사랑하니까. 누구보다, 무엇보다 더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떠나가는 거야."

"...... 하. 왜. 왜 그러는 것이냐."


탄식을 내뱉고 미련을 흩뿌린다. 그리고 의문을 던진다.


떠나가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역설적인 이유였고 평생 가져가야 하는 감정이었으니까. 그가 이 감정을 가져가지 않도록, 나만 감내할 수 있도록 속에 담아두고 계속 발걸음을 이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흐르는 눈물이 나를 가두듯, 눈물이 땅을 적셔 늪이 되어 나의 발을 묶었다.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 빨려 들어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몸을 굳힐 뿐이었다.


그 사이에도, 그는 쉴 새 없이 의문을 던지고, 또 던졌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발이 묶인 나에게 한 걸음을 내딛고


"진정으로 나를 외롭다 여겼다면."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며


"떠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


정곡을 찌른다. 가슴 속 응어리를 더 강하게 찌른다.


"...... 잊어줘."

"무얼 말이냐."


하지만 그는 이 세상을 지탱하는 지고한 존재. 그에 비해 나는 초라하고 볼 것 없는 하나의 인간. 나를 잊고 살아가며 세상을 이어가야 하는, 그런 존재다.


"나를."


그러니까, 제발. 나를 잊고 살아줘. 나 같은 초라한 인간 따위, 잊고 살아가라고......


"불허한다."


그가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딛는다. 목소리가 더 가까워진다.


"외로웠다."


목소리가 조금 선명해졌다.


"그대가 고집을 부려, 이 성에 남기 전까지."


다가오는 그에게 멀어지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대의 고집에 맞춰서 살아갔다."


하지만 소용 없다는 듯 그는 나에게 걸음을 맞춰 거리는 전과 같아졌다.


"즐거웠다."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대가 억지를 부리면서 나와 같이 있을 때, 그리고 내가 그걸 받아주며 그대와 같이 있었을 때, 즐거움이란 감정을 느꼈다."


다시금 발 소리가 들렸다.


"처음이었다. 고작 단명종에게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


단명종이란 말에 떠나려는 이유를 기억해낸 듯 난 성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처음이었다. 나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가 나타났다는 것이."


성문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걸으면 이제 그와는 영원히......


"그리고, 처음으로 타올랐다. 열정이라는 것이."


상념을 뒤로 하고 다시 걸으려 했건만, 발이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고작 단명종과의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나 따위는 그냥 잊고 살아가면 되는데. 왜, 왜. 왜.............


"흑백으로 물들던 내 세상에, 색채를 더해주었다."


당신으로 물들어간 건 난데, 미련 없이 떠날 세상에 살아갈 이유를 더해준 건 당신인데.


"그리고, 처음이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목소리도 크게 들린다.


"외로워지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


그 말을 들은 나의 두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더 이상 외로워지고 싶지 않았다. 나와 같이 살아갈 사람을, 누구보다도 원했다.


제물로 바쳐질 때도 들지 않았던 생각이, 그와 함께 있으면서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떠나려고 했었다. 이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게.


"잘 됐네. 그러면, 나 말고 다른 장생종을 찾아서 오래 오래 살아서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니야?"


감정을 삼키며 매몰차게 대한다. 진심을 숨긴 채 어떻게든 정을 떨어트리려 한다.


"불허한다."


하지만 그 말을 바로 무시하듯 다시 나에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오로지 그대만이 나의 삶의 이유다."


또 다시 한 걸음 가까워진다.


"오로지 그대만이 이 외로움을 끝낼 수 있다."

또 다시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대가 없는 세상은, 너무나도 공허하기에."


발소리가 귀에 박힌다. 너무나도 가까워졌다.


"그대가 곁에 없는 나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이기에."


목소리가 더욱 선명해진다. 그의 온기가 서서히 느껴진다.


더 이상 가까워지면 안 된다. 다시금 멀어져야 한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러니, 나의 연인이여."


세 걸음. 그와의 남은 거리.


"내 지고한 존재로서 명하노니."


두 걸음. 체온마저 느껴지는 거리.


"발걸음을 멈추고--"


한 걸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서로 맞닿을 거리, 이윽고--


"내 곁에 영원히 살아가라."


영거리. 그리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그의 체온, 맥박. 심장의 고동소리.


떠나가지 말라는 듯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명령하는 그의 마지막 말에, 나는 애써 삼키던 눈물을 그대로 터트렸다.


"왜....... 왜! 나를, 못 떠나가게 만드는 건데! 나 따위, 그냥 잊어버리면 되잖아!"

'잊히고 싶지 않아.'


"그저 한 순간의 유희였잖아! 그저 한 순간에 타오른 감정이었잖아! 잊고 살아 가라고!"

'영원히 잊을 수 없어.'


"그냥, 나를....... 잡지 말아줘.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이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나만 아프게 해 줘. 당신은 아프지 말아줘.'


"그러니까....... 그러니까......."

'같이 있고 싶어도, 나는 당신을 두고 먼저 갈 운명이니까......'


"제발 나를 보내줘......."


처절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나온다.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를 내치려 했지만, 끝에서는 그저 목이 메어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고집이 센 아이로구나."


...... 처음으로 제물로 바쳐졌을 때, 떠나라는 말을 듣지 않은 나에게 건넸던 말.


그 때 담겼던 감정은 지루함, 귀찮음. 그저 끝도 없는 무미건조함에 물들어있는, 단조로운 감정.


하지만, 지금 담긴 감정은---


사랑


감미로운 목소리. 정이 담긴 목소리. 그러기에 지금은 더 듣고 싶지 않았던 그 목소리.


"그 때, 그대가 성에 남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나?"

"....... '허락한다.' 였어."

"그럼, 지금 내가 할 말이 뭔지는 알겠군."


허리를 감싼 팔을 더 감싸며,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만든다.


"불허한다."


듣고 싶었으나 듣고 싶지 않았던 그 한마디. 나는 그 말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기적이었다. 나로 인해 슬퍼할 걸 알기에 그의 곁을 떠나려던 나의 모습도. 그러면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마지막 말에 응어리진 감정을 털어내던 나의 모습도.


이타적이었다. 내가 고집을 부려 성에 남게 했던 그 때의 그의 모습도. 슬퍼할 미래를 알면서도 나와 함께 있겠다고 하는 그의 모습도.


"그대가 없는 세계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에."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듯 나를 계속 안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대가 없는 세계의 나는, 너무나 외롭고 연약하기에."


모든 걸 감수하고도 나와 계속 있겠다고 하는 그의 모습이.


"나는 그대와, 한날 한시에 죽을 운명을 만들어냈다."


너무나도, 이타적이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너무나도, 미안해졌다.


이내 그는, 영창을 외웠다.


"삶의 끝에 선 자들을 바라보는 명계의 지고한 존재여."


그의 가슴이 고동친다. 그의 심장이 강하게 맥동한다.


강한 힘이 소용돌이친다. 하지만, 내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의 세계와 나의 세계를 반으로 나눠."


고동치던 심장에 이상이 생긴다. 하지만, 편안한 감각이었다.


그 영창이 이어질 때, 그의 힘이 나에게 깃들고 있었고--


"서로에게 나누어 주고, 하나가 되게 만들며"


어느 순간 그 힘의 균형이 서로에게 맞춰졌을 때.


"한날 한시에 합쳐진 그 세계의 끝을 지켜보기를"


그의 영창 또한 끝을 맞이해가며


"인간계의 지고한 존재로서, 선언한다."


나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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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한 게 많을 것이다."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 같다. 그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나를 바라보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을 것이고."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른다. 그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건 말해줄 수 있다."


그런 정신없는 사이에도, 단정할 수 있는 그의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영원토록,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


다시금 눈물을 흘리게 할 만큼, 행복한 말이었다.


"그대가 먼저 떠나는 것도, 내가 그대 없이 홀로 살아갈 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슬퍼했던 이유. 그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사라졌다.


그는 그런 나를 보고, 처음에는 거의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많이 볼 수 있는, 그러기에 더 보고 싶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 없는 내 세상은 허상에 불과하기에."


일말의 가능성, 그와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그 하나의 가능성--


"내 세상의 반을, 내 수명의 반을, 그대에게 주었다."


그 가능성이 내 눈 앞에 증명되었을 때,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 후회하지 않아?"

"무엇을 말인가?"

"고작 제물이었던 여자와 평생을 살아간다는 게."

"그런 걸로 후회할 나였으면, 고집을 받아주지도 않았겠지."


그의 몸에 나를 맡겼을 때, 그는 말없이 내 긴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를 진정시켰다.


"더 이상 그대 혼자 감당할 필요 없다."


외로움을 벗 삼았던 나와 그의 삶이 교차하고


"외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의 삶에 색채를 더해나갔을 때


"영원토록, 그대를 사랑할 것이니까."


우리의 세계는 비로소 합쳐졌다.


더욱 더 세게 나를 끌어안으며,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심장소리를 듣는다. 외로움이 녹는다. 고통이 사라져간다. 행복이 채워진다. 그리고--


"나도. 영원토록,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누구보다도 더 안다는 듯, 뒷말을 들을 시간도, 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처음으로 정열적인 입맞춤을 한다.


그 진한 입맞춤이 끝나고 은색 실이 서로의 세계를 이었을 때, 미처 하지 못한 그 말을 꺼낸다.


"정말로,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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