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의 전국무장이자 다이묘 중에 아주 아주 재미있는 인물이 하나 있다. 


혼슈 관동지방의 동북쪽에 위치한 상륙국(常陸国: 히타치노쿠니, 지금의 이바라키현) 일대를 다스리던 


오다(小田)가의 영주였던 이 인물의 이름은 바로 오다 우지하루(小田氏治).


오다 우지하루는 일본의 명문 귀족 집안이었던 후지와라 씨족의 후예이자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일본 관동지역을 아우르던 8개의 명문 호족(우츠노미야, 오다, 코야마, 사타케, 치바, 나가누마, 나스시, 유우키) 중 하나인 

오다 가문의 마지막 영주이기도 하다.

우지하루는 1534년 2월 24일에 태어나 1602년 1월 6일에 별세하였는데, 아버지 마사하루를 따라 출전한 전투 이래 

약 30차례나 되는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했다. 전적은 꽤 초라한 편이다. 대략 정리해 보자면 30전 9승 21패다.

이긴 전투의 경우 규모가 상당히 작은 국지적인 전투에 불과하다. 진 전투는 모두 상당히 규모가 큰 전투이거나 

아니면 역사의 방향을 뒤바꾸는 아주 중요한 전투들이라는 거. 즉 우지하루는 소규모 전투에선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대규모 전투에선 한없이 약한, 말하자면 무능한 장수였다.

전투에만 졌으면 뭐 그러려니 하겠는데 자신의 영지뿐 아니라 자신의 성도 몇 번이나 적에게 빼앗기고 

말년에는 자신의 영지에서 아주 먼 동네로 좌천되어 그 생을 마감했다. 헤이안 시대부터 이어온 명문가인 자신의 집안이 

이 사람의 대에서 완전히 멸망한 건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런데 이 사람, 당대 전국무장 중에서 전투력에 있어서도 외교력에 있어서도 가장 무능한 사람인 건 틀림없는데 

이만큼 ‘인망‘이 두터웠던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모두 깍듯이 예의를 지켰고 

좌천되었다고는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나름 “절친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친한 친구”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오다 우지하루는 특히 자신의 부하 및 백성에게 무한대에 가까운 사랑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느냐면 이 사람의 잘못된 상황 판단으로 인해 본성을 적에게 빼앗기고 나면 

부하들이 복수전을 벌여(물론 우지하루는 본진에 남겨두고) 성을 되찾아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뿐이랴. 보통 적에게 성을 빼앗기면 일본 전국 시대의 거의 모든 서민은 새로운 성주에게 충성과 재산을 바쳐 

목숨을 구걸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우지하루의 백성은 문을 걸어 잠그고 새 영주가 요구하는 세금을 내지 않거나 

지들끼리 무장을 해서 저항하거나 “우지하루님에게 바치지 못한다면 이 공물은 의미가 없어!” 하면서 쌀을 전부 불태워버린 적도 있다.

여하튼 이만큼 부하들과 백성들이 사랑한 영주는 일본 역사를 통틀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먼저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맨날 지는 우지하루였지만 사실 부하에게는 가장 관대하고 공명정대한 주군이었다는 것. 

논공행상에 있어서도 신상필벌에 있어서도 당대 일본의 전국무장들에 가장 귀감이 될 정도로 

부하를 다루는 데 가장 모범적 행동을 보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영민을 향한 사랑 또한 무한대에 가까워서 민생을 직접 일일이 나서서 챙기고 

백성들의 모든 불만을 다 들어주고 해결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간혹 타지 백성과 자신의 백성 간에 갈등이 생겨 싸움이 일어나면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나가 중재하고 백성 편을 들어주었다. 또 자신의 영민이 지나가는 타지 병사나 장수에게 죽으면 

즉각 보복전을 벌이고, 전투에서 죽은 부하나 전란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백성은 마치 자신의 가족을 잃은 양 상심하고 

직접 장례를 치르고 상복을 입고 애도했다고 한다.

일본의 전국 시대는 조금이라도 수틀리는 행동을 하는 전국무장은 적에 의해 멸망하거나, 

부하나 다른 야심을 가진 가족 및 친척이나 백성에게 배신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게 아주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우지하루는 그 생애에 단 한 명의 배신자나 이탈자가 없었다. 가족뿐 아니라 친척도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집안이 멸문을 당해 저 멀리 사누키(현재의 시코쿠, 카가와현)으로 귀양 가도 아무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