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지하 3층까지 바닥은 일정한 격자로 이루어져 있었어. 

그런데 지금 이 바닥 패턴은 미묘하게 다르군. 이 부분이 대각선으로 굽어져 있어."


파티원들의 깊은 한숨이 들린다.

누구는 장탄식을 내뱉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돌맹이를 주워서 천장에 던져본 뒤 소리를 유심히 듣는다.


"이중 천장인가. 소리가 미묘하게 달라. 트랩인가. 소리에 반응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용사님, 이 정도면 진짜 결벽증 아닙니까?"


참다 못한 전사가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앞에 씻팔이라는 소리를 감추었지만, 내 예민한 두 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용사님은 그저 신중한 것 뿐이에요. 그렇죠?"


우리 파티의 힐러를 담당하고 있는 성녀.

그녀가 미소를 짓자 전사는 안면근육을 풀고 헤실헤실 웃었다.

성녀는 남의 마음을 녹이는 미모와 육감적인 몸매, 인자함을 골고루 지니고 있었다.

무릇 남자라면 마음이 녹아내리기 마련.


"용사님,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그 말에 나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도움? 지랄하고 있네.'


다른 파티원들은 감쪽같이 속았지만 나는 속일 수 없다.

세간에서 나를 부르는 호칭은 불패, 무적 같은 유치한 것들이다. 

허나 내게 마땅히 붙어야 될 수식어는 오로지 '신중한' 이다.


이 신중한 내가 성녀의 이변을 눈치 챈 건 정확히 5일 전, 아니, 127시간 38분 전이다.


던전에 입장하기 전.

내 주관으로 공략법과 48가지 대처법을 숙지시키고 파티 전원의 장비, 포션, 스킬 등을 점검한다.

총 이틀이 소요되는 브리핑.

파티원들은 매번 피로를 호소했지만 나는 그들의 귓구멍 속에 강제로 내용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잠깐의 저녁 시간.

수프를 끓이는 도중 나는 성녀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숙인 것이다.

파티원들은 나의 지독한 브리핑 때문에 조는 거 아니냐고 웃어 넘겼다.

그 웃음 소리에 놀랐는지 성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는 웃지 못했다.

직감이 말하고 있다. 


'무언가 달라졌어.'


눈빛? 말투? 자세? 정확히 꼬집어 낼 수 없지만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내 직감이 호소하는 것과 정반대로 성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혹자는 별 일 아니겠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안일함이 파국을 만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다시 던전 지하 4층. 

현실로 돌아온 나에게 성녀가 염려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세운 99가지 가설 중에 최악을 확인해야만 한다.

바로 악마가 성녀의 몸에 빙의한 경우다.

정화 작업을 주로 했던 성녀인 만큼 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세 발자국 앞으로 가서 시야를 밝혀줘."


성녀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가서 손을 펼쳤다. 

환한 구체가 떠오르며 일자 복도를 밝혔다.


"엇."


외마디와 함께 성녀의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파티원들은 모두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나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바닥에 있는 대각선 패턴의 끝. 그 곳에 바로 무게 감지 트랩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장을 확인한 건 눈가림이었다. 사실 이중 천장 같은 건 없었다.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성녀가 알아차릴 까봐 페이크를 준 것이었다.

시선 분산의 의도도 있었고.

그야 나는 신중하니까.


그리고 이건 입장 전 브리핑 때 설명한 것.

돌대가리 파티원들은 귓등으로 듣지만 

항상 내 말을 귀담아 듣던 성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미묘한 변화가 있기 전에 말해둔 건데, 이걸 모른다?'


내 의심을 더욱 가열시킨다.

물론 까먹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확인해야만 한다.


"함정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 내가 구하러 갈게. 잠시 기다려."


파티원에게 일러두었다.

그리고 각자 해야할 일, 대처법이 적힌 메뉴얼을 전했다.

물론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함정에 대한 부분은 지워 놨다.


지금까지 패턴으로 보아 저 아래에는 

사람 몸을 꿰뚫는 가시창 혹은 몬스터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 두 개가 다 있을지도.


물론 성녀의 안위는 걱정되지 않는다.

여긴 던전 초입. 만에 하나를 가정해서 함정 설계자가 누군지도 미리 파악해 두었다.

신중한 나는 고블린 언어까지 통달했고 이 던전의 함정 설계자 고블린 '바퀴쓸개'가 작성한 '함정 설치법(3)'을 통째로 외웠으니까.

던전 설계도까지는 몰라도 함정 설계자의 성향은 간파하고 있다.


이 함정은 성녀 수준에 견주어 봤을 때 치명상을 입힐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 

따진다면 0.001%의 확률은 존재한다. 

성녀는 배리어를 항상 두르고 있으니 허접한 가시창에 당했을 리는 없다.

0.001% 확률을 뚫고 몬스터에게 당할 수는 있지.

비명소리라도 들린다면 바로 뛰어내려서 구할 심산이다.


예비용 성검을 바닥에 꽂아 넣고 밧줄을 성검 손잡이와 내 몸에 각각 묶고 내려간다.

성검의 특성상 절대 뽑힐 리가 없다. 

엑스칼리버니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는 파티원을 신뢰하지만 그 점 때문에 배신할 수 있는 확률을 낮추고 싶지 않았다. 

엑스칼리버에는 타인이 만질 경우 충격파가 터지도록 '절도 방지 마법'을 걸어 두었다.


'하이드'


은신 마법을 쓰고 함정 아래로 내려간다.

10분 정도 내려갔을 때, 성녀가 만들어낸 빛 구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걸걸한 욕설이 들렸다.


"아~ 씨발. 담배 맛 왜이래? 잎담배는 원래 이런가."


성녀의 목소리. 그러나 말투는 완전히 달랐다.

조금 더 내려가자 그녀의 모습이 온전히 보였다.

부러진 가시창과 머리가 터진 몬스터들 옆으로 성녀가 앉아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언제 슬쩍했는지도 모를 전사가 가지고 있던 파이프 담배.

그걸 입에 물고 다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용사 새끼 주인공이라고 비위 맞춰 줬는데 슬슬 짜증나네. 그냥 죽일까?"


뭐?


"TS 빙의라니. 이왕이면 검성 손녀 몸으로 해주지. 

이 풍만한 몸으로는 븝미쟝 말투 쓰면 안 어울리잖아. 

신중한 주인공 새끼도 의심할 거고"


빙의라는 단어에 내 눈이 커진다.

그리고 TS?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븝미쟝?


"아, 맞다. 그걸 확인 안 해봤지."


내 생각이 미처 이어지기도 전에 성녀의 손이 자기 하반신으로 향한다.


"오우 야쓰."


내 의심이 맞았다.

저 년은 사탄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