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에게서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한다. 너희는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런 동족을 함께 데리고 살아야 한다.]

-레위기 25:36


 많은 장붕들이 알다시피 중세에는 기독교에 의해 이자를 금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늘은 그 통념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325년, 로마의 국교로 기독교가 공인되고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제 파편화된 교리와 종교체계를 통합하려는 목적으로 최초의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다


 이때, 20개의 교회법이 제정되어 효력을 발휘하는데


 기독교에서 제도적으로 고리대금업이 금지된 것도 이때이다


 좀 더 정확히 파고 들자면, '성직자가 월 1% 이상의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했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성직자를 규제한 규정이었고


 9세기에 가서야 에큐메니칼 평의회는 이를 평신도들에게 적용하기로 결정한다



 그렇다면 그 사이 일반 중세인들은 무엇을 따랐을까


 


 바로 로마법이다


 서로마는 이미 멸망했지만 그들이 속주에 뿌린 법과 소속감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며


 중세인들은 여전히 로마가 멸망하지 않고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로마법은 교회법, 관습법과 함께 중세를 지탱하는 법이었고


 해당 법을 집대성한 유스티아누스의 법전에서는 8.33%가 넘는 이자를 받는 것을 고리대금이라고 정의했다



 즉, 9세기 경 에큐메니칼 평의회가 고리대금 금지 규정을 평신도들에게 확대하기 전까지는


 성직자만 아니라면, 저 이율 이하로만 받는다면 처벌 받지 않았던 것이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하지만 9세기에 교회법으로 고리대금이 막혀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통념대로 대금업이 완전히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가 버린 것일까?


 

 


 여기서 등장하는게 문과라면 수도 없이 봤을 토마스 아퀴나스다


 그는 고리대금업을 정당한 대가도 치루지 않고 돈을 받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세 이자하면 당연히 들어봤을 소리가 왜 또 나오냐하면


 중요한 것은 '정당한 대가'이기 때문이다



 만약 장붕이가 누군가에게 큰돈을 빌려준다고 해보자


 그런데 상대가 그냥 돈만 들고 도망갈지도 못 갚을지도 모른다


 이때, 장붕이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되므로 그 위험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



 이게 interest로 보통 이자로 번역되며


 위험에 대한 대가, 해당 금액을 다른 곳에 투자하지 못하는 기회비용, 관리 비용등 서비스 제공의 수수료의 사유로


 중세에서 허용되었던 이자이다



 그리고 금지되었던 것은 usury, 이자 혹은 고리대금으로 번역되는 것으로


 중세에 고리대금을 금지했다는 문구가 여기서 온 것이고


 이게 유대인들에게 맡겨진 대부업이다



 그런데 그 정당한 양이란게 대체 얼마란 말인가?


 이는 여러 논란을 낳았고, 교회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다


 상인들도 겨우 그런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돈을 빌려주는 좋은 사업을 온전히 유대인들에게 넘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고안된 것이 contractum trinius라는 방식이다



 돈이 필요한 장붕이와 부유한 상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장붕이는 상인에게 1년간 1000원을 빌리고 싶어하고 상인은 10%를 이자로 받고자 한다


 그런데 이는 고리대금업이며 시행했다간 둘 다 이단심문관과 삼자대면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 상인은 장붕이에게 1000원을 1년에 걸쳐 '투자'한다


 투자를 받았으니 그에 대한 이익금을 돌려주는 것이 합당하다


 그런데 상인은 300원을 받을 권리를 다시 장붕이에게 판매하고 장붕이는 수수료로 150원을 지불한다


 그리고 장붕은 이 투자가 실패할 경우에 대한 보험을 상인에게 팔고, 50원을 받는다


 이제 장붕은 1000원을 얻었고, 상인은 100원을 얻었다


 이후 투자금 환수의 명분으로 1000원을 다시 상인에게 돌려준다면


 교회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뜨고 고리대금이 시행된 것을 보게 된다


 세가지 모두 개별적으로 보면 교회법상 합당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1300년대에 고안된 이 방식은 당시 급증하던 상업 거래와 맞물려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이자의 혐오를 낮춰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것을 본 교회의 반응은 가지각색으로


 법으로는 금지 못해도 극렬히 반대하며 비판했던 교황이 있는가하면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앞장서서 돈을 빌리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1500년대,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는 이 방식으로 빌린 돈을 상환하기 위해 '어떤 문서'를 발행하게 되고



 그런 사태에 꼭지가 돌아버린 어떤 성직자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 영향을 받아 같이 종교개혁을 한 영국을 시작으로


 교황청에서 벗어난 국가들은 이자를 합법화시켰고 이는 다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교회법이 더 이상 힘을 못쓰고 금융업이 융성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contractum trinius은 이자의 합법화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방식이지만


 놀랍게도 현대의 이슬람 금융기관들은 이 방식을 부활, 더욱 복잡화시켜 사용하고 있다


 거긴 샤리아에 의해 아직도 모든 이자가 불법인 곳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