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트레니 은화, 필링 은화, 류트 은화, 가짜 마린느 은화, 팔람 은화, 랜드바르트 독두왕 은화, 미츠핑 대서당 은화, 가짜 미츠핑 대성당 은화, 성 미츠핑 은화, 미츠핑 성탄제 은화, 그리고 이건..."


 (중략)


 "미츠핑 주교구에서 발행되는 은화는 특히 종류가 많아."


 (중략)


 "그런데 왜 이렇게 화폐가 많은 거야? 복잡한 것도 정도가 있지."


 "새로운 나라가 생겼다가 몰락하고 또 생겨나고, 게다가 지방 권력자들이나 교회 권력도 화폐를 발행하는 데다 그 위에 화폐 위조가 끊이지 않거든. 류트 은화만 해도 원래는 가짜 트레니 은화라고 불렸었는데 유통되는 숫자가 너무 많아지니까 결국은 독자적인 화폐가 됐지."



[그림1: 16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이 사용한 편람. 그림은 스칸디나비아의 각종 달러 은화들이다. 졸 많네..;]



본인이 인터넷으로 아는 동생 중에,


굉장히 똑똑하고(우등생)

잘났고(여친 소지)

이중적이며(오타쿠용과 우등생용 이미지를 분리해서 사용한다)

부러운(아버지가 1세대 건담 매니아인 교수로 아들 병 핑계로 휴가내서 PMP에 애니를 담아 본댄다)

녀석이 하나 있다.


근데 이 녀석이 어느날 본인에게 갑자기 묻는 거다.


[형님, 늑대와 향신료에 나오는 가짜 은화가 화폐가치가 있는 겁니까?]




엥? 이게 뭔 소리? 당연히 있지!


그러자 날아온 반문.


[그거 위조 아닙니까?]





늑대와 향신료는 본인이 본인 친동생의 추천으로 보다가 그 자리에서 본인을 열광하게 만든 작품이다.

 

처음 고백컨대 본인은 꽤 오래 전부터 경제사와 화폐사 자료 수집 중이다. 이 사실 모르는 사람 꽤 많을 거다.


아직 초보거든...;


여하튼 그런 관계로 본인은 이 애니메이션과 소설(전권 구매)에서 가짜 은화는 무난히 이해하고 넘어갔다.


근데 본인보다 문학-문화쪽으론 좀 더 똑똑할 것 같은 친구가 이걸 묻기에 좀 당황해버렸다.


근데 생각해보니까.ㄱ-


일본어로 '니세'가 '가짜, 위조'라는 뜻이 있댄다.


게다가 현대 한국인들에게 있어 가짜 화폐'라면 장난감 돈 아니면 위조화폐 밖에 연상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본인이 이 포스팅을 한번 마련해봤다.


사람들 오지도 않고 쥔장도 관리 제대로 안 하는 이글루지만 나도 가끔은 포스팅이 하고 싶단 말이지. 


(모처럼 맘 잡았는데 댓글 안 달면 골룸)




우선 간단히 설명하자면, 늑대와 향신료에 나오는 '가짜 주화'는 바로 '도안 모방 주화'다.ㄱ-





본론:


"모방해서 만든 것이면 위조 아닌가효?"


그거하곤 경우가 좀 다르다.ㄱ-


발행권 없는 새키가 화폐 만들거나, 순도를 낮추거나, 도금한 가짜 화폐를 만들거나, 화폐 가장자리를 깎아낸다던가 하면 중세서양에서도 여지 없이 범죄행위로 분류되며 형벌은 시대정신에 맞게 교수대에 목걸기다. 아니면 손이 잘리거나, 끓는 물에 산 채로 다이빙하게 된다.ㄱ-


하지만 '모방 화폐'는 말 그대로 화폐 발행권자가 잘 나가는 옆 동네 도안을 모방해서 찍어낸 것이다. 어쨌든 정당한 발행권자가 찍은 화폐다.


존심이 있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실례가 넘치고도 넘친다.




[그림2: 독일의 초기 페니히 은화. 왕이 꽤 미남이시다.]


이 초기 페니히 은화에 사용된 도안은 무려 프랑스와 영국 것이다.ㄱ-;

독일 고유의 도안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부터다.

그래도 인물은 독일인이다만.

[그림3: 이베리아 반도의 금화. 뭐가 이리 어지러워?]


무어인의 금화와 카스티야의 금화를 비교해보기 바란다. 종교가 달라도 얄짤없다.


화폐는 발행해야겠는데 독자 도안이 없었던 발행권자들은 대개 옆 동네 애들 것을 베꼈다.


의도적으로 "잘 나가는 애들 것"을 베끼기도 했고 말이다.


(즉, 영향력이 강한 주화일수록 모방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현상은 유럽만의 것이 아니다.



[그림4: 조선통보. 대왕세종 - 역사를 순정만화 속성으로 이해하는 작가에 저주 있기를! - 에 안 나오려나?]




자세한 건 그림에 설명까지 붙었지?


(물론 이건 한국 최초의 화폐는 아니다. 최초의 화폐는 건원중보인데 이건 99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때부터 우리가 흔히 아는 '엽전' 형태가 나타난다. 간단히 말해 조선통보처럼 "보름달 안에는 깍두기"다.)


이제 원본을 비교해보자.




[그림5: 중국과 일본의 주화.]


세심하게 살펴볼 것도 없이 정말 많이 닮았다. 이런 현상은 범세계적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좀 더 놀라운 것들로 사진 퍼레이드를 벌여보자.


잘 나가는 화폐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확인해봐야 안 되겠는가.



[그림6: 주화①, 그림7: 주화② 어느 조폐국인지는 모르겠지만 성형외과 광고 이미지로 쓰면 딱 좋겠다.]


요놈들이 어디서 만들어진 주화 같은가?


생긴 건 말할 것도 없이 로마주화다. 닮은 수준이 아니라 문외한은 분간 못할 경지에 오른 놈도 있다! 









정답: 1번은 아라비아, 2번은 인도(!)다.ㄱ-;;;;; 


 [그림 8: 고대 아테네 주화의 모방 화폐들과 그 발행처. 스캔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건 애교다.]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를 감안하여 늑향의 [가짜 마린느 은화]와 [가짜 미츠핑 대성당 은화]의 정체를 추정해보면.ㄱ-


답은 간단하다.


어느 발행권자들이 [마린느 은화]와 [미츠핑 대성당 은화]를 모방해서 자기 은화를 제조했단 거다.ㄱ-


소설에 언급되다시피 시간이 지나서 이게 정식화폐로 인정 받는 거고.ㄱ-


이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데, 그냥 간단히 개념만 이해하고 넘어가시라. 본인도 잘은 모른다. 낄낄.


(중앙은행이 모두 관리하는 현대와 달리, 중세의 화폐발행권자는 한둘이 아니다. 지금도 영국은 지방마다 통화가 가지각색이다. 런던에서 사용하는 돈과 채널 제도에서 사용하는 돈이 다르다!)




저작권: 이 사진은 모두 웅진출판사의 [비주얼박물관 - 화폐 편]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이 있다. 책 후미에 저작권자들이 명시되어 있는데, 이걸 다 가려내 적자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 관계로 과감히 생략하고 출처와 인용만 명시한다. 일단 확실한 것은, 내가 찍은 사진은 절대 아니란 거다.


뱀다리1: 화폐 순도는 시대와 화폐종류의 변천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90%짜리도 있는가 하면 2%짜리 - 소설에 언급되는, 로렌스도 알아차릴 은화 - 도 있다. 그리고 정치한다는 놈들이 이득을 보기 위해 - 늑향 1권의 국왕처럼 - 수시로 낮췄기 때문에 그래프를 그려보면 화폐가치는 지그재그를 그리면서도 장기적으로 볼 때 꾸준히 하락한다. 이런 단세포 머저리들. 마르크 블로크 저 [서양의 장원제]라는 책에 간단히 언급되어 있으므로 참고요망.


뱀다리2: 이걸 도서에 넣어야 하나, 애니메이션에 넣어야 하나?ㄱ-


뱀다리3: 포스팅 하다보니 점심시간이 다 끝났다. 오늘은 굶는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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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roid.egloos.com/2506024

이글루스에 2010년에 올라왔던 꽤나 유익한 글인데 이글루스가 얼마 후에 폐쇄된다니까 여기 퍼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