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reader/37286855?category=%EC%B0%BD%EC%9E%91&p=3


그렇게 유상아와 뜨거운 밤을 나누고, 김독자는 그대로 필름이 끊겼다. 

젠장, 너무 과했나. 

눈을 떠 보니 출근 시간을 훌쩍 넘긴 10시 30분. 

한명오 연구소장에게서 몇 줄의 문자가 와 있었으나, 그 내용은 오늘 몸이 아프다 들었으니 병가로 처리해 주겠다는 사소한 내용뿐이었다. 


".. 으으.."


주인 없는 남의 집에 혼자 있었던 건가. 

배가 고팠다. 

구겨진 양복 상의를 주섬주섬 걸쳐 입고 김독자는 유상아의 집을 나섰다.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김독자는, 구슬프게 울어대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너도 나처럼 아무것도 없구나.."


미야옹- 


김독자가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자, 고양이는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와 그 손등에 살며시 몸을 부볐다. 

이게 '간택' 당했다고 하는 건가. 

고양이를 키워보는 건 처음인데.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조그맣게 하품하는 고양이를 들쳐안고 김독자는 걸음을 빨리 했다. 


*


"으어어어.."


배가 고팠던 김독자는 집에 오자마자 배달을 시켜 오므라이스를 주문했다. 

한수영이 죽은 이후로 일부러 오므라이스를 잘 먹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오므라이스를 먹고 싶었다. 

그렇게 배달 온 오므라이스를 한 입 먹으려다, 김독자는 자신을 쳐다보는 고양이를 보고선 잠시 고민하다 집에 있던 생선 도막을 접시에 담아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생선을 좋아한다던데, 이거 먹으려나."


고양이는 김독자의 눈치를 슬슬 보며 생선에 입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먹으면 그 다음에 먹으려는 생각인가- 하며 김독자가 오므라이스를 한 입 먹자, 곧 고양이도 생선 도막을 따라 먹기 시작했다. 

다행히 잘 먹는구나. 

안도하며 김독자는 식사를 마쳤다. 


"어라."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김독자가, 고양이가 발을 저는 것을 보았다. 

길고양이인만큼 이런 저런 상처를 달고 있을 줄은 알았으나, 발을 저는 정도인지는 미처 몰랐는데. 

당황한 김독자가 허둥대며 고양이를 안고 병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있던 김독자는, 그 좋아하던 '멸살법'도 볼 생각을 못한 채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보호자분."


곧 검사를 마치고 나온 고양이가 냐옹- 하고 울며 그의 품에 안기자, 평온을 되찾은 김독자는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닙니다. 이 약을 한 달 정도 발라주면 나을 겁니다."


하고 의사가 내민 약을 받아들고, 김독자는 집으로 향했다. 

고양이의 다리에 약을 발라주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난 김독자는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야. 

생각하지 마. 

그 사람은 죽었어.

치료를 끝마치고 그렇게 침대에 누워 잠이 들려던 김독자의 폰에 하나의 메시지가 울렸다. 


띠링- 


".. 뭐야."


무심하게 화면을 쳐다본 김독자의 눈이 이내 놀라 커다래졌다.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다. 정신 차려라, 김독자. 누굴 살릴 것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분명히 발신 번호 표시 제한 문자였지만, 그 무뚝뚝한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았다. 

잘못 보낸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이름을 똑똑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일생에 다시 없을 기회지.

맞는데.. 


막연히,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되살리고 감동적인 재회를 했다고 치자.

그럼 그 다음엔?

어쩌면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설령 기억한다고 한들 내가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데.. 


"어떡해야 할까, 고양아."


그녀를 다시 보고는 싶은데, 내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였을까봐 두렵다. 

이기적인 건 안다. 

그리고 찌질해보이는 것도 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셈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의 그는 자신이 그리도 혐오하던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미야옹-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는 김독자의 손바닥에 몸을 부비며 이따금씩 울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소파에 누웠던 김독자는 까무룩, 잠에 들었다. 

또 다시 똑같은 꿈을 꿨다. 

어린 자신의 눈 앞에서 차에 치여 저 멀리 날아가는 한수영의 몸뚱이.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안심시키려는 듯 짓는 희미한 미소. 

그리고..

그리고.. 


"허억!"


이번에도 구하지 못했다.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김독자는 항상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그렇게 깨어나곤 했다. 

꿈에서 어떤 수를 써 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매번 자신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드는 피 흘리는 한수영의 미소를 이제는 잊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만. 그만. 그만.. 제발.. 제발 그마아아안!"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하는 김독자의 앞에, 고양이가 괜찮냐는 듯한 눈빛으로 걸어왔다. 

김독자의 희고 고운 손가락을 핥아주며 울지 말라는 듯, 그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그런 고양이의 샛노란 눈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뜻모를 위안을 얻었다. 


"고맙다.."


그러고 보니 이 고양이, 한수영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고양이를 들여다보며 김독자는 한수영이 읽던 책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고통 받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두려움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분명히, 그런 말이 있었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자는,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지금 자신의 꼴이 꼭 그러하지 않은가. 

그래, 살아 있다면 무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손이 닿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꼭.. 겁쟁이같다고. 


"주여, 우리에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들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김독자는 결심을 마쳤다. 

꿈에서는 수백 번 기회가 있었지만, 모조리 실패했었다. 

지금은 다르다. 

꿈의 기회가 아니라, 진짜로 현실을 바꿀 기회가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만회할 기회였다. 

잠시 심호흡을 한 후 김독자는 숨을 들이마셨다. 


"스읍- 후우.."


그리고는 휴대폰을 집어들고 한명오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세 번 울리고 나서 전화가 연결되었고, 한명오가 '어 독자 씨, 무슨 일인가.' 하고 말하기 전에 김독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소장님. 가장 먼저 해동할 사람, 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