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의 끝이란 무엇인가. 회귀자의 결말이란 무엇인가. 내가 정녕 눈 앞에 있는 놈을 죽이면, 그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유중혁은 의문을 품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정말 옳았던 것인지.
하지만 너무 늦은 때였다.
유중혁은 또 회귀 우울증과 같은 심한 죄책감에 빠졌다.
우리엘, 제천대성, 심연의 흑염룡…
유중혁을 지지하던 모두가 마지막 시나리오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들의 죽음은 왜 엉겁의 세월을 보내도 무뎌지지 않는 것인가.
유중혁은 다시 검을 쥐었다.
만약 이 세계가 소설이라면, 지금 나는 몇 권쯤에 온 것인가.
그의 찢어진 검은 가죽 장갑 사이로 유난히 검붉은 설화가 흘러내렸다.
1회차, 2회차, 3회차, 7회차, 32회차, 84회차, 442회차, 999회차, 1701회차,…
농축되고 농축된 그의 오랜 설화는 재앙과도 같은 잿빛이었다.
세상의 모든 설화가 맞바람 치는 이 곳에서,
성좌들의 이야기의 마지막 순간이 훤히 내다 보이는 이 곳에서,
그는 확신했다.
이야기의 끝이 멀지 않았음을.
자신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 위한 문장에 도달하였음을.
더 이상의 자책은 무의미했다.
흐르는 검극은 얼음에 맺힌 연꽃처럼 정직하게,
자세는 눈발 속에 피어난 매화의 향처럼 우아하게,
그 힘은 파랑을 뒤엎을 정도로 요란스럽게,
마침내 힘을 모아 그 끝에서는
별들의 유역을 베어버리는 일격이 탄생한다.
1863회차에서는 이미 죽어버린 파천검성이 언젠가 보여주었던 파천검도 최강의 기술.
별들을 짓이긴 공포가 두려움에 떨었다.
[파천검도(破天劒道) 초월오의(超越奧義) 은하참(銀河斬)]
성운조차 베어버리는 최강의 검격이, 마침내 도깨비 왕의 목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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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요동치는 혼돈의 격이 도깨비 왕들을 위협했다.
도깨비 왕들의 설화들은 그 격에 몸서리치며 지평선 너머로 도망쳤고,
유중혁의 설화들은 그의 몸속에서 멸망 같은 눈빛을 쏘아 대고 있었다.
어느새 세 도깨비 왕들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비록 유중혁이 1863회차의 힘을 빌려왔어도, 여전히 전황은 그들에게 유리했다.
1863회차 유중혁의 힘과 은밀한 모략가의 힘의 차이에는 아득함이 존재했고,
지금 유중혁의 힘은 고작 도깨비 왕 하나를 겨우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미약했다.
하지만 그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 하늘의 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오!!! 야 쫄지 마. 어차피 저 새끼 얼마 못 버텨!!!]
한 도깨비 왕이 무거운 공포를 떨쳐내고 유중혁을 향해 뛰어들었다.
[설화, '전쟁을 알리는 거대한 창'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세상의 끝을 향하는 화살'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유중혁은 자세를 고치고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그에게 바람이 들이닥쳤다.
아니, 고작 바람이라고 할 수 없는 거대한 태풍과 질풍이 들이닥쳤다.
[화신, '유중혁'이 스킬, '바람의 길'을 사용합니다!]
다른 두 도깨비 왕이 엄청난 풍압에 잠시 눈을 깜빡거렸을 때,
그들의 눈앞에는 손 하나가 날아오고 있었다.
[어…?]
다른 세계의 멸망을 주도하던, 더럽고도 추악한 손이었다.
유중혁이 걸었다.
가히 멸망을 부르짖었다.
하늘에서 재앙이 내려오고 있었다.
태양은 희망이 아닌 절망을 주었고,
거친 바람은 칼에 스치는 것만 같았다.
유중혁이 다시 한번 그 지옥도를 걸었다.
[거대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설화, '아직 이름이 없는 거대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설화, '운명대적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현재 화신체로는 설화의 총량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설화 붕괴 속도가 가속화됩니다!]
유중혁이 떨려오는 손끝을 거머쥐었다.
코트 자락 너머로 흩날리는 자신의 설화 파편을 뒤로하고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누구보다 유중혁 같이 도깨비 왕에게로 걸어갔다.
[이건 예상 외인데요? 72번. 어떻게 할까요?]
[….]
유중혁이 손이 잘린 도깨비 왕을 향해 걸어갔지만, 다른 도깨비 왕들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다.
분명 그들이 가진 설화로 동시에 공격한다면, 유중혁을 충분히 압살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의 오차라도 생긴다면,
저 빌어먹을 회귀자에게 조금의 틈이라도 주어진다면,
셋 중 누가 죽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오지마!!! 씨발 오지 말라고!!!]
킬킬거리면서 우리엘을 우롱하던 도깨비 왕이 잘린 손목을 붙잡고 악을 내질렀다.
항상 여유로웠던 그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긴박감이 묻어나왔다.
어떻게 했던가.
1863회차, 마지막 시나리오를 그들에게 맡기고
최후의 벽 앞에서 도깨비 왕을 마주했을 때, 나는 어떻게 했는가.
수천 번의 회귀를 한 탓인지, 아니면 나의 설화가 붕괴되고 있어서 인지, 그 기억이 희미하다.
그저 검을 쥐었다.
금이 간 흑천마도를 더 강하게 틀어쥐고,
겁에 질린 도깨비 왕을 향해 더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희미해지고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단 한 가지만이 기억났다.
1863회차의 도깨비 왕의 목을 베었던 그 기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지금 눈앞에 있는 도깨비 왕만을 베어낸다면,
뒤에 있는 두 놈이 곧바로 내게 달려들겠지.
나는 그놈들을 감당할 수 없다.
일격, 단 일격으로 그들을 쓰러뜨려야 한다.
마치 척준경의 일검처럼.
아니, 그보다 더 강하게.
같은 초월오의(超越奧義)라고 해도, 사용자의 격에 따라 그 위력은 천차만별이다.
원래였다면 흉내조차 내지 못했겠지만
1863회차의 힘이, 그동안 쌓아올렸던 거대설화들의 힘이 날 지탱하고 있는 지금,
내 모든 설화를 바쳐서.
포세이돈의 목을 틀어 쥔 은밀한 모략가가 수 백의 성좌들을 일격에 일도양단 했던 그 수준을,
내면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설화들이 날 떠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면 이것이, 회귀를 끝낸 회귀자의 숙명이다.
[파천검도(破天劒道) 초월오의(超越奧義) 은하참(銀河斬)]
유중혁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두 도깨비 왕이 손끝을 움찔거렸다.
'단순한 일격이 아니다.'
마치 은밀한 모략가의 것처럼,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의 혼돈이 울려퍼지는 저 격.
위험하다.
안경을 쓴 도깨비 왕이 낌새를 알아채고, 급히 설화를 펼쳤다.
[설화, '차원을 왜곡하는 자'가 ….]
하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설령 설화가 제대로 발동되었다고 하더라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닥쳐오는 멸망을 고작 설화 쪼가리로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크아아아악!!!]
하늘의 구름을 가르고, 대지의 경계를 가르는 그 검격을,
한 도깨비 왕이 막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어두운 피부색, 안경을 쓴 도깨비 왕이 '72번'이라고 부르는 자였다.
마치 작은 최후의 벽과도 같이, 방대한 설화를 벽처럼 펼쳐 막아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버거워 보였다.
[882번!!! 저 버러지를 챙기고 포탈을 열어라!!!]
[네, 네!!!]
882번, 안경을 쓴 도깨비 왕이 바닥에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도깨비 왕을 들춰 멨다.
그리고 그가 손을 펼치자
곧 차원을 융해한 것 같은 포탈 하나가 생겨났다.
"…도망치는 거냐?"
유중혁이 낮은 목소리로 72번 도깨비 왕에게 물었다.
[그래 너를 너무 얕봤군.]
72번 도깨비 왕이 고개를 숙이고 유중혁의 공격을 막아내던 설화들을 회수했다.
그리고는 저 너머 유중혁의 공격과 함께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히죽거리는, 마치 설화의 맛을 게걸스럽게 탐식하는 듯한 웃음을 지으면서.
[회귀자. 우리가 다음에 왔을 때, 너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겠구나.]
파앗-!
마침내, 세 도깨비 왕은 유중혁의 일격과 함께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멸망의 잿빛을 드리운 하늘은 어느새 갈라진 구름 사이로 청명한 햇빛을 뿜어내었고,
마치 세계를 진정 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산들거리는 바람은 기분 좋게 귀에 스쳤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 무엇도 느끼지 못했다.
[설화가 붕괴합니다!]
[설화가 붕괴합니다!]
[설화가 붕괴합니다!]
[화신체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거대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끝마칩니다!]
[거대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끝마칩니다!]
[거대설화, '아직 이름이 없는 거대 설화'가 이야기를 끝마칩니다!]
[거대설화, '운명대적자'가 이야기를 끝마칩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끝마칩니다!]
[전용스킬, '기사회생'을 발동합니다!]
[인물, '유중혁'이 '가사(假死)'에 빠집니다!]
"유중혁!!!!"
저 멀리서 김독자가 날아와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유중혁을 붙잡았다.
그리고 지상에 착륙한 김독자를 따라, 그의 일행들이 달려왔다.
"중혁 씨!!!"
김독자는 급히 [마왕화]와 [천사화]를 해제하고 유중혁의 상태를 살폈다.
전신에 감도는 산뜻한 푸른 빛.
기사회생의 효과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으나, 유중혁의 신체는 도저히 회복되고 있지 않았다.
유중혁의 손끝은 어느새 설화의 빛을 잃고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김독자는 분명 이러한 현상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본인의 몸에서.
그 순간은 '가장 오래된 꿈'으로써, 지하철에 머물렀을 때였다.
영원불멸의 지옥도는 매우 강한 설화다.
'단 하나의 설화'가 거대 설화에 대처할 수준으로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이 세계는 변태 같을 정도로 균형에 집착한다.
강한 힘에는, 곧 부작용이 잇따른다.
그리고 사용자가 그 부작용을 감당할 수 없다면,
개연성의 후폭풍, 그리고 설화의 소실로 이어진다.
신화급 성좌가 된 나조차도 고작 1701회차의 힘을 빌려올 수 있었다.
설화가 유중혁에게 양도된 지금, 유중혁은 홀로 신화급 수준의 격을 아득히 뛰어 넘는
1863회차의 힘의 대가를 오로지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
이 세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 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야, 야 김독자!! 어떻게 된거야?!"
김독자와 유중혁을 향해 달려온 한수영이 숨을 헐떡이며 유중혁의 상태를 살폈다.
"이 새끼 상태 왜 이래?!"
"수영아, 지금 설명할 시간 없어. 너 빨리 흑염룡 챙겨. 이현성 씨!!! 희원 씨랑 상아 씨랑 같이 성좌분들 좀 챙겨주세요!!!"
"네!!!"
그러지 말아야 했다.
도깨비 왕을 상대하겠다는 유중혁을 말리고,
개연성의 후폭풍을 감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권능을 사용해야 했다.
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는
그 누구의 희생도 없이 영원한 행복에 잠드는,
단 하나의 설화여야 했다.
어쩌면 내가 구원이랍시고 일행들을 멸망한 세계에 내버려두고 도망쳤을 때,
그들도 지금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 세상보다, 내 존재가 멸망과도 같지 않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