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 기한 내로 각자 짧게라도 본인만의 작품 하나씩 써오도록 하고, 길면 더 좋다. 전부 검사할 거니까 수작 부리지 마라. 오늘은 여기까지.''


  한수영은 손목시계를 바라보고선 자료를 들고 강의실을 나섰다.

 산뜻한 날씨와 그렇지 못한 업무량.

 산더미처럼 쌓인 학생들의 제출물을 일일이 첨삭하고 주석을 달아주는 일만 해도 골치 아프지만, 기존에 연재하던 소설도 써야하기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거기다가 절대 대충 쓸 수 없어서 아직 구상조차 못한 김독자를 위한 소설까지.

 한수영은 저절로 새어나올 뻔한 한숨을 참으면서 자신의 교수실로 향했다.


 '그나저나, 김독자가 요즘 어떤 소설 읽는지도 모르네. 좀 참고할 수 있음 좋을텐데...'


 그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한수영의 눈앞에 옷차림은 조금 다르지만 누구보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저 휘적휘적 걷는 걸음걸이에, 희여멀건한 피부.. 폰을 오른손에 들고선 까딱거리는 것까지... 김독자 맞는 것 같은데?'


 ''김독자..? 너가 왜 여깄냐?''

 -교수님께서 구원의 마왕님이 여기 있다고 하시는데?
 -어디어디?


 그녀의 말과 주변 학생들의 수다에 잠깐 경직되었다가 돌아보는 김독자.


-뭐지? 아까는 안 보였는데?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잠깐 소란이 일어나려던 그때.

 활짝 웃고 있는 김독자의 얼굴을 본 몇 명의 학생들이 숨을 헉 하고 들이쉬는 것이 들렸지만 한수영은 눈을 찌푸렸다.


 '왜 웃지?'


 ''오, 한수영.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나네.''

 ''우연은 무슨 개 ㅍㅡ''

 ''자, 일단 자리를 옮겨서 얘기할까? 지나갈게요~.''


 김독자가 한수영의 말을 끊으며 그녀의 팔을 잡은 채로 빠르게 걸어갔다.

 1분 넘게 빠르게 걸어다녀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따라오자 김독자는 한수영에게 물었다.


 ['한낮의 밀회'를 시작합니다.]

|김독자 : 어디 사람들 없는 곳 아는 데 없어?|
|한수영 : 야 이...어휴...일단 내 교수실로 가자.|
|김독자 : 어느 쪽인데?|
|한수영 : 따라와.|


 김독자가 싱긋 웃으며 팔을 놓고 살짝 물러나 한수영과 거의 나란히 걸어갔다.

 그 모습에 여학생들이 꺅 하는 소리를 냈지만, 한수영은 알고 있었다.


 '저 내숭 보소, 저거.'


 다행히 목적지가 가까웠기에 그들은 인파로부터 벗어났다.

 문을 닫고 돌아서면서 한수영은 김독자에게 물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게 언젠데 또 돌아다니냐? 네가 기니피그야?''

 ''하핫... 그건 그렇고 여기 참 좋네~. 저건 무슨 꽃이야?''

 ''김독자를 가둬두기 위한 91가지 최면약 재료 4번째 꽃. 뭐 그건 됐고, 말 돌리지 말고 여기 왜 왔는지나 말해. 왜 온 거냐?''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한수영의 대답에 김독자는 잠깐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 보러 왔는데?''

 ''뭐?''



...



 나는 한수영의 얼굴을 쳐다봤다.

 살짝 붉어졌다가 돌아왔다가 서슬퍼래지는 다채로운 변화 끝에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지랄 말고 빨리 불어라..?'


 식칼이라도 뽑을 듯한 기세에 나는 허겁지겁 대답했다.


 ''아니 진짜라니까? 일행들 뭐하고 있나 보려고 나왔는데 젤 가까운 곳이 너희 대학인데다가 지혜까지 볼 수 있으니까 일석이조잖아? 그러니까 너 보러 왔단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교수님? 혹시 너만을 보러 온 게 아니라서 실망했어?''

 ''...! 너, 그렇다면? 어쩔건데?''


 급하게 대답하느라 이상한 말까지 붙여버린 내 말을 들고선 한수영이 내 멱살을 잡고 당기면서 말하는 그때, 요란한 소리가 나서 우린 고개를 돌렸다.


 -끼이익.. 콰당!


 돌아보니 한쪽 문이 활짝 열려있고.

 그곳엔 엎어진 이지혜와 반짝거리고 있는 수많은 눈이 있었다.


 ''헤...헤헷....''


 까드득..

 그대로 굳어버린 나를 밀치고 문쪽으로 돌아선 한수영을 보더니 학생들이 하얗게 질려 도망쳤다.

  결국 마지막에 남은 건 우리 둘과 엎어진 채 굳은 이지혜 뿐.

 모두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이지혜가 고개를 돌리고 일어서기 전에 다가간 한수영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지혜...우리 집 가서 따로 좀 보자...?



...



 한수영은 머리가 지끈거려서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잠시 그 자세로 천장을 보던 그녀는 집 옥상에 매달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지혜가 외친 말을 떠올리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내가 제일 늦게 도착했다니까? 나는 애들이 다 문 앞에 모여있길래 무슨 일 있나 하고 간 거였다고! 제대로 듣지도못했는데난억울해애애애애!!


 문 앞에서 눈을 반짝이던 수많은 학생들.

 하지만 반짝이던 것이 과연 눈만이었을지 그때 생각했어야 했는데...

 한수영은 조용히 고개 들어 창문 밖을 슬쩍 내다보았다.


-그 정보 사실이야?
-정말이라니까! 같은 사진이랑 글을 올린 학생이 수십이야!
-이번엔 반드시 인터뷰를 따내고 돌아가자고.

 ''아, 젠장. 엿같네.''


 김독자와 함께 돌아온 시스템 덕에 향상된 청력에 잡힌 기자들의 말소리.

 김독자가 막 돌아왔을 때 안정이 필요하다며 막아선 동료들 때문에 그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그들은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옥상에 매달렸던 이지혜는 기자들이 보이자마자 끈을 뜯고 들어와서 안 들킨 것 같지만...

 시나리오 이후 높아진 관심을 다시금 실감하던 그때, 김독자가 나가서 기자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김독자다!
-질문 몇...
-딱 3가지 질문에만 답해드리겠습니다. 그 후에는 바로 해산해주시죠.


 갑작스러운 김독자의 말에 기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모여서 얘기를 나누더니 한 기자가 앞으로 나왔다.


-김독자 대표님,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이 사진이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긴장이라곤 1도 하지 않은 모습으로 평소처럼 대답하는 김독자의 모습에 안심하던 한수영이었으나.


-방금 전 사진에 더해, 흑염마황과 각별한 사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씹ㅏ...''


 반사적으로 반쯤 튀어나온 욕을 삼켜내는데 김독자가 들었는지 아주 잠깐 고개를 돌려 한수영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는 씩 웃고 다시 돌아섰다.

 그녀가 불안감에 휩싸여 막 '한낮의 밀회'를 걸려는 순간, 김독자가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각별한 사이라...그렇다고 할 수 있죠.


 한수영은 애써 참아냈던 말이 목구멍을 막아버리는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



 내 말에 기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보였다.

 서로를 돌아보다가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거는 기자들이 진정되길 기다리면서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리니 미친듯이 깜박이는 창을 볼 수 있었다.


['한낮의 밀회'를 시작합니다.]

|한수영 : 야|
|한수영 : 미쳤냐?|
|한수영 : 시■놈아|
|한수영 : 각별한 사이? 각.별.한.사.이?|
|한수영 : 대체 뭔 생각이냐?|
|한수영 : 대답 좀 하지?|
.
.
.

 
 미친듯이 올라가는 창을 보다가 슬쩍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걸 참으면서 창을 닫으니 다시 진정된 기자들이 보였다.

 그새 다시 저들끼리 회의를 했는지 모여있던 기자들 사이에서 내게 질문하던 기자가 다시 나왔다.

 ...근데 이게 눈이 저렇게까지 반짝일 일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저만큼이나 관심을 가지면서도 달려들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이전 인터뷰 때의 내 태도가 영향을 미쳤겠지만.


 ''김독자 대표님?''

 ''예. 마지막 질문 하시죠.''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그런 사이가 되셨나요?

 ''시나리오 진행 중에 자주 이탈하게 되었던 것을 채워주는 중요한 존재이기도 했고, 그 사이에서 50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텨내며 기다려줬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인 만큼 확실하게 끊어내서 이후 다시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하려고 이것저것 나와 한수영의 미담을 풀어내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바람이 스쳤다.


 휘릭...콱!


 엑?

 목 뒤쪽 옷이 잡히는 느낌이 들더니 그 상태 그대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고개를 힘껏 꺾어 보니 한수영이었다.

 한수영은 집과 기자들 사이의 중간까지 끌고 가더니 날 놔주고선 가라고 손을 휘젓고 기자들에게 향했다.

 기자들에게 멋쩍게 웃으면서 인사하고 그들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는 걸 바라보면서 집 안에 들어갔다.

 곧이어 집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말없이 그대로 등 돌린 채 한수영을 보면서 나는 침을 삼켰다.

 1시간 같은 1분이 지나고.

 한수영이 그 자세 그대로 말했다.


 ''야...김독자. 이 싯팔 새끼야.''


 이건 제대로 설명 안 하면 죽을 각인데?


 ''야, 한수영 잠깐만 진정하고 들어봐. 각별한 사이라고 해서 너가 기분 나쁠 수 있는 건 알겠는데 확실하게 끊어내야 더 안 끈다니까? 그리고 나중에 '각별한 사이'가 '함께 사지를 헤쳐나온 생사를 같이 하는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동료'라고 말해서 수습할 수도 있다고!''


 잠시 침묵하던 한수영은 뜸을 들이다가 생뚱맞은 말을 꺼냈다.


 ''....너 요즘 무슨 소설 읽냐?''

 ''....아?''



...



 한수영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조용히 닫고 침대에 엎어졌다.

 그리고 몇번 발버둥을 치더니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내가...대체 왜 그랬을까?'


 그녀의 머릿속에 지금까지의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레몬사탕 건에.

 소설 약속에.

 외신왕이 되었던 김독자를 다시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에.

 김독자 하나를 구하겠답시고 모두 모른 척 하는데 기를 쓰고.

 녀석이 돌아왔을 때 바보처럼 우는 동시에 웃으면서 달려가고.

 교수실에서 한 헛소리와.

 '그렇다면? 어쩔건데?'

 그리고 아까 할 말이 없어서 내뱉은 말까지.

 '...너 요즘 무슨 소설 읽냐?'

 여태까지의 수많은 기억들을 읽어가면서 한수영은 잠시 고개를 들고 아바타에 기억을 몰아넣고서 그 아바타를 없애버릴까 고민하다가 베개에 머리를 박았다.


 '그건 안 돼...아, 젠장. 미친 건 나지.'


 집에 끌고 들어와서 김독자에게 말을 걸 때 돌아서서 있었기에 망정이지, 얼굴에 열기가 쏠린 것을 들킬 뻔했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한수영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자신을 나눠서 고민할 것도 없었기에 한수영은 일어나 앉아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나 진짜 김독자 많이 좋아하나보다. 시발, 어쩌냐..''


 한수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생각하다가 포기했다.


 ''그래, 뭐 달라질 것도 없지. 그 새낀 눈치 못 챌 게 뻔하니까.''


 그러면서 시나리오 때의 기억을 돌아보던 그녀는, 문득 카이제닉스에서 나갈 때의 일이 생각났다.


-무슨 장르로 쓸 건데?
-그건 그때 봐서..
-로맨스는 어때?
-...로맨스를 어떻게 3천 편이나 쓰냐?


 ''로맨스...''


 생각해보면 그녀가 써온 글들과 겪어온 나날은 로맨스와 거리가 먼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한수영은 오히려 써 볼 의욕이 났다.


 ''까짓거, 한번 3천 편짜리 로맨스 써 보자고.''


 김독자랑 했던 말도 있고.

 ...그리고 이걸 읽으면서 알아차려줄 지도 모르니까.




*회상한 대화내용 : 전지적 독자 시점 381화 89%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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