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뜬금 없지만.
우리는 지금 충왕종의 뒤에 타있다.
전부 이길영의 '다종 교감'덕분이다.
"앞으로 10분이면 도착할거래요."
"어...."
그러고보니 이녀석도 '절대 용서받지 못할 기만'에게
여러가지로 후원을 받았겠군.
아마 '스킬 강화 패키지'라도 지원 받았나보다.
[#BI-7623 채널이 다시 열렸습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채널 송수신 시스템에 클레임을
걸었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랜덤 박스에서 대체 무엇이
나왔는지 궁금해 합니다.]
아, 저녀석들은 못 봤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저 상자를 기획한 비형도
보통 또라이가 아닌듯 싶다.
실제로 놈은 통신으로 그때는 아직 신입이었다느니,
욕심 적당히 부릴 걸 같은 변명이나 늘어놓고 있다.
다행히 시끄러운 투덜거림은 이현성과
대화를 시작할때쯤 끊어졌다.
"두분다 그렇게까지 관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현성은 철제 방패를, 정희원은 아까 후원 받은
도검 패키지에서 나온 c급 검을
계속해서 불어 닦아대는 중이었다.
[인물 '이현성'과 '정희원'이 당신에게
충성심을 보입니다.]
누가 보면 내가 둘한테 새차라도 뽑아준 줄 알겠다.
"정말이지 여러 의미로 감사드립니다.
독자 씨. 정말 정의스러우십니다."
"아닙니다. 결국 아이템도 제가 거의 다 먹었는데요.
이현성씨야말로 끝까지 한명오 씨를 지키셨잖아요.
그정도는 되야 정의로운 사람이죠."
"하하, 그런가요......."
아마 이현성은 '정의'라는 것에 여러가지로 고민이
많을 것이다.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지만 동시에 정의롭고
싶어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이세계에서는 살아가기 힘들다.
실제로 멸살법의 많은 회차에서 그는 많은이들을 위해
희생했다.
그러니 이번회차에서는 외면하는 방법도 필요하다.
[인물'이현성'이 정의에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게
반드시 정의롭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
누군가 보기에는 내가 이현성을 비꼬는
것처럼 보일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계에서 이말은 여러가지로 의미하는
바가 다를것이다.
"이제 다왔으니 모두들 준비합시다.
길영아, 걔는 못 데려가."
이길영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충왕종을 배웅하는걸 뒤로
하고, 우리는 터널을 따라 걸었다.
중간에 식량으로 쓸 땅강아쥐도 몇마리 잡다보니,
어느새 플랫폼에 다다라 있었다.
주변이 급격하게 밝아지며,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뭐지 이 급박하고 분주한 느낌은?
[유료 정산까지 20분 남았습니다.]
그렇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건가.
"누, 누가 코인 좀 주세요!"
"우리 애가 코인이 없어요! 제발...."
"돈으로 사겠습니다! 제발...."
코인은 대부분 시나리오에서 나온다.
아마 비형이 생존비 패널티까지 추가한건
이걸 노린 거겠지.
이럴 때는 놈이 왜 하급인지 의문이다.
화신들의 시나리오 수행을 부추기고,
그러지 않으면 이런 난장판이 만들어지니
어느 상황이든 놈에게는 이득이다.
"부, 분명 아까는 100코인 준다고 했잖아요!"
방수포쪽에서 몇몇여자들이 철두파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흠, 그랬나? 기억이 안 나는데."
"뭐.......?"
"한 번 더 대주면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어때?"
정희원이 어느새 칼을 뽑아들었다.
이현성도 분노한 표정이었다.
"저 개자식들이 기어이....."
[인물 '정희원'이 특성 개화를 준비합니다.]
아직이다, 조금만더 기다리면 내가 원하는 결과가...
"사, 살려 줘요! 살려 주세요!"
그 말에 일행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이현성이 비통한 듯 고개를 숙였고, 이길영은 덤덤한
얼굴이었으며, 정희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독자 씨."
그리고 유상아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됩니다."
유상아도 곧 고개를 숙였다.
이세계에서 코인은 곧 권력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권력을 나누어도 되는지를 물었다.
아침에 보여준 모습도 나름대로 이세계에 적응하려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녀는 자신의 코인임에도 내게 그것을 좌지우지할
역할을 맏겼고.
그렇다면 나는 그녀에게 도움이될 대답을 하는게
도리이다.
[시나리오 추천을 받은 다수의 성좌들이 채널에 입장
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신입들을 환영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헛기침을 합니다.]
그리고 나와 그녀는 지금 이역에서 가장 코인이 많은
이들일 것 이다.
"오, 독자 씨! 마침 잘 오셨습니다."
우리를 발견한 천인호가 이쪽을 향해 불길하게 웃고는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인물 '천인호'가 '선동Lv2'를 발동합니다.]
"그러고 보니 독자 씨가 코인을 많이 가지고 계셨죠!
아마 우리 중 가장 갑부이실 텐데?"
군중들이 내 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현성에게도, 유상아에게도 사람들이 몰렸다.
"도, 독자 씨라고 하셨습니까?"
"제, 제발 살러주십시오! 제발!"
내게 몰려든 이들은 어림잡아도 20명이다.
2000코인,
솔직히 지금 내게는 그다지 큰액수는 아니다.
그정도야 이틀이면 매꿀 자신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순식간에 금호역의
대악당이 된다.
[인물 '천인호'에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하하, 독자 씨. 저야 코인이 부족해서 이분들을
돕지 못합니다만.....독자 씨는 다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겨우 이런 수작질에 어울려 주는 것도
한 두 번이어야지.
"사, 살려주세요!"
"제발요! 제발!"
세사에서 가장 불쌍한듯한 얼굴과 울며불며
구원을 바라는 눈.
"자자, 이제 10분 남았습니다~"
즐거운 목소리의 비형과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일행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떳다.
"그렇군요. 코인을 달라고요?"
그리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제가 왜요?"
첫 번째 시나리오는 곧 원죄다.
저사람들중 무고한 이들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를 짓밝고 연명한 생에 책임지지 못하는 이들.
"왜, 왜라니!"
"코인이 많으시다면서요! 조금은 주실 수도
있는거 아닙니까?"
천인호가 다시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역시 독자 씨라면 그럴줄 알았습니다."
"....."
"독자 씨는 이곳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랬죠.
독자 씨께서 식량을 사서 지금 죽어야 할 운명이
몇개인지 아십니까?"
"마, 맞아! 당신이 뭔데..."
"이런 씨....내 코인 돌려줘!"
"자, 잠깐만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독자 씨는 그런 분이 아니...."
나는 유상아와 이현성을 제지했다.
지금 저들이 나서도 분위기는 바뀌지 않는다.
"독자 씨, 마지막 기회 입니다.
사람들에게 코인을 돌려주시죠."
이십명에 달하는 무리가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달려들지 않자,
천인호가 지시한 철두파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다들 뭘 망설여? 그냥 죽이고 코인을 뺐...."
나는 곧바로 '부러지지 않을 신념'으로 호를 그었다.
스각!
토막난 팔이 쇠파이프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끄, 끄아아아악!"
붉은 피를 묻혔음에도 검신의 금은 시퍼렇게 빛나며
백광을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외쳤다.
"당신들....진짜 나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됐다고 믿는
겁니까?"
군중들 너머에서 천인호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당신들도 알잖아. 나 때문이 아닌거."
군중들이 금붕어 마냥 입을 뻐끔 거렸다.
나는 먹이를 주듯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그냥 내가 철두파보다 약해보여서
그러는 거야.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까지 고작
저것들한테 벌벌 떨고 있잖아."
"하하, 이보세요 독자 씨. 지금 무슨....."
"그런데."
나는 군중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러자 그들이 놀란 금붕어처럼 물러났다.
하지만 그래봤자 내 어항 안이었다.
"저놈들이 왜 당신들보다 강한지 알아?"
나는 군중들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저놈들이 왜 당신들보다 코인도 많을까?
깡패라서? 설마."
공포라는 균열속에서, 표정에서 표정으로 의문이
번졌다.
"그러고 보니 인호 씨는 어떻게....."
"하하, 다들 아시 잖습니까? 여러가지로 팔기도 하고
또...."
"겨우 그걸로?"
천인호가 입을 닫았다. 나는 다시 한번
군중들을 돌아보았다.
"어제까지만해도 이곳 인원은 총 87명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봐도 채 50명이 안 되는데?
멍청이들아, 제대로 생각좀해, 정말 괴수들
때문에 죽었다고? 그럼 철두파는?"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의문이라는 물안에 확신이라는 잉크가 퍼지기 시작한다.
"서, 설마...."
군중들은 이제 내가 아닌 천인호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까 숨이 끊긴 철두파를 보며 말했다.
"아까 이게 말했지. 날 죽이면 코인이 나올 거라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분하며 머리털을 뽑습니다.]
"저놈들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이, 인호 씨! 설마?"
천인호가 철두파 사이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병장기를 꺼내드는 철두파들에게도
사람들은 이전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하하핫! 이제 7분 남았어요!"
나는 유상아와 이길영에게 무기를 뽑아들게 했다.
"당신들에게 아직 자존심이 남았다면."
신념의 칼날이 붉게 변했다.
"당신들 스스로 싸워."
나는 달려드는 철두파놈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하얀 섬광이 붉어졌고,
누군가가 외쳤다.
"그래, 씨발!"
"이, 이 개새끼들아아!"
사람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아이와 엄마도, 노인도,
모두 살인자였다.
스각!
내게 달려드는 철두파들이 족족 팔다리가 끊긴채
나뒹굴었다.
하나가 나를 올려다보았고,
"살려주...."
그입에 왠 검이 박혔다.
"가서 유상아 씨랑 길영이나 챙겨요."
[인물 '정희원'의 특성이 개화합니다.]
눈부신 광채가 그녀에게서 피어올랐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갔다.
이뒤에서 어떤일이 벌어질지는 뻔했다.
[인물 '정희원'의 특성이 '멸악의 심판자(영웅)'으로
개화합니다.]
[당신은 '웅크린 자'의 특성 개화에 크게 기여
하였습니다.]
[인물'정희원'은 당신의 칼이 되길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뒤쪽에서 붉은 광채가 터졌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현성을 찾았다.
"독자 씨!"
이현성도 나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나도 그를 향해 외쳤다.
"현성 씨, 당신은 무엇을 해도 괜찮습니다!"
[인물 '이현성'이 특성진화를 준비합니다!]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일 투성이다.
"당신은 '정의로운'사람 입니다."
[인물'이현성'의 특성이 진화합니다!]
[특성이 진화함에 따라, 새로운 성흔이 활성화됩니다!]
[인물'이현성'이 성흔 '태산 부수기Lv1'을 발동합니다!]
[인물'정희원'이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이현성이 사람들을 공격하는 철두파를 향해
주먹을 내리꽃았고,
정희원의 칼이 핏빛 오오라를 머금고 궤도를 그렸다.
너무나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물론 싸우는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유상아는 실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견제했고
이길영은 어느새 몰린 바퀴벌레들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희원만큼 학살에 적극적이지도,
이현성처럼 사람들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둘은 그것이 그들의 사명인듯 죽이고, 구했다.
주변 바닥은 거의 무너져 있었다.
그사이로는 핏물이 잔뜩 스며들어 있었고,
이현성이 천인호에게 검을 겨누고있는 정희원을,
정희원이 한 아이를 달래는 이현성을 보았다.
그리고 온몸이 꿰뚫려있는 천인호가 나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하, 하하....당신도 언젠가....."
녀석은 말을 다하지 못했다. 얼굴이 정수리부터 꿔뚫린
시신 한 구가 바닥으로 철푸덕 넘어졌다.
[채널 내 대부분의 성좌들이 희열을 느낍니다.]
그게 끝이었다.
조금 전까지 고기를 먹으며 행복해하던 시간이
꿈이었던 것처럼.
[유료 정산이 시작됩니다.]
곳곳에서 뭔가가 터졌다.
유상아는 울고 있었고,
이길영은 눈을 감고 있었다.
이현성은 자신이 구한, 그중 바닥으로 널부러지지
않은 이들을 보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고,
정희원은 피 웅덩이 속에 주저앉아 있었다.
누군가의 무력감도,
누군가의 외면도,
누군가의 간절한 구원도,
누군가의 격렬한 분노도,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의 일부였다.
"일어나요, 다들."
내 말에 유상아가 오열하며 주저 앉았고,
이길영은 눈을 떴으며,
이현성은 정희원을 향해 다가갔다.
고개를 들어도 천장만이 보인다.
나는 어떠한 거대한 것에 저항하듯 보이지 않는 하늘을
노려보았다.
"시나리오는 이제 시작일 뿐이에요."
이현성이 정희원을 부축하고,
유상아와 이길영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다음 페이지를 넘기듯, 핸드폰을 켰다.
이제 다음 무대는 충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