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국왕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대관식 그 이후

로잘린과 릴리아는 새 왕에게 인사를 드렸다.



긴 나날이었다.

용사 파티에 참여하여


비록 용사는 '동귀어진' 했다지만

그 둘은 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그 둘의 앞 길엔 찬란한 빛만이 비추었다.




어디서 굴러먹은지 모를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피하게 된 티울리파 공주도

다른 왕국에 잘 생기고 멋진 왕자에게로 시집을 갔고


로잘린은 '전신' 칭호를 받으며, 그녀의 병사들보다 언제나 앞장섰다.

릴리아은 '성녀' 칭호를 받으며, 그녀의 신도들에게 찬양을 받았다.


둘은,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20대에 가까운 외모로 미모와 재능을 뽐내고 있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만 하게."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저희는 왕국의 검과 지팡이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옵니다."




새 왕 입장에서는 둘이 은인이었다.

마왕을 무찌른 용사는, 공주와 결혼하여 왕국을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그럴 순 없었다.


선왕, 아버지도 동의했다.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재능도 있는 아들이 아닌 다른 이가 자기 딸을 채가는 것은 못 볼 꼴이었다.



'마왕이 죽은 후, 용사를 처리해라.'



로잘린에게는 별 일 아니었다. 낮은 신분의 꼬마 하나 처리는 쉬운 일이었으니까.

릴리아에게도 별 일 아니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정말 다행이야. 그대들이 국보야. 정말, 그대들이 자랑스럽네."





"모르겠어. 뭔가, 뭔가 부족한 느낌이야."


더러운 임무는 많이 해 와 봤다.

더러운 꼴도 많이 봐 왔다.


"그러게. 요즘 들어서 왜 이렇게 공허한지 모르겠네."


로잘린의 방에서

고급 치즈 몇 조각과 와인 몇 병.


"... 나이가 나이라 그런가?"


"그런 말 마. 너랑 나는 동갑이라고."


언제나 임무가 끝나고, 쉬는 시간동안의 한 잔.

어릴 때부터의 죽마고우 둘이서의 소중한 시간.


서로 깔깔거리며 웃다가도 뭔가가 부족해서

공허한 마음은 알코올로 채우기를 수십 년.



"그런데, 그때, 그... 걔... 정말, 죽였어야 했을까?"


취기가 한 층 올라서였을까.

릴리아는, '그 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서로 마음 툭 터놓고 한 적 없는 이야기.

그냥, 스쳐지나가는 수없이 많은 임무의 목표 중 하나.


그런데, 요즘 들어서 문득, 의문이 고개를 짓쳐들었다.


"... 쓸데 없는 소리긴 한데... 우린 어렸어. 벌써 20년쯤 된 옛날 일이라고. 대체, 갓 성인이 그 어린 애를 어떻게 데리고 다녀야 했다는 거야?"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용사는 약했다.

용사는 어렸다.

용사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용사는


마왕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왕궁에 닥치자마자


'용사의 검'을 들고, 왕궁에 당도했었다.


"곰곰히 생각할수록 이상하긴 했어. 문자조차 익히지 못한 평민 꼬마가 어떻게 그 검을 찾아온 거지?"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마음 속 고민이 터져나와서였을까.

취기가 기억을 열고 입을 열었고

로잘린은 가만히, 릴리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젠, 모르지. 앞으로도 모를 거고. 물어볼 걸 그랬나?"


"글쎄. 그때 너나 나나 그... 걔 이름 뭐였지?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별로 관심도 없었잖아."


순간 침묵이 흘렀다.

조용히 잔에 와인을 다시 따르고 한 모금.


치즈 한 조각을 다시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릴리아에게

로잘린이 다시 말했다.


"모르겠어. 요즘 들어서 갑자기 걔가 자꾸 떠오르긴 하네."


"... 그렇지?"



수없이 많은 이들과 전투해왔다.

어제 칼을 맞댄 이와 오늘 등을 맞댄 적도 많았다.


하지만, 유독 요즘 들어 제일 생각나는 것은 그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꼬마 애 하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약한' 사람에게 자기의 등을 맡기는 것은 너무나도 짜증나는 일이었는데

그때는 어렸는데


그런데 왜 지금 와서 마음 속에 나타나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다시 만나도 또 똑같지 않을까?"


"... 그러려나?"





한참동안 마시고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응? 왜 머리가 안 아프지?"


멍하니 로잘린은 눈을 떴다.


어제 그렇게 마셔댔는데 몸은 너무나도 상쾌했다.

나이는 속일 수 없다고, 외모는 20대 초반에 멈췄어도 점점 숙취를 이기는 건 힘들어져갔는데.


"... 어? 어?"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아니, 자신의 방이었다. 20년 전의.


"로잘린 주인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오늘, 왕국에서 용사 출정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5년이 넘은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사 크로비안. 그대에게 왕국의 명운을 맡긴다."


선대 왕.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출정식 며칠 전 미리 자신과 릴리아를 불러서, 용사의 처분을 명했었지.


인자한 표정으로 왕은 용사에게 말을 걸었고.


"어, 어으... 네... 열, 열심히 하겠습니다."


긴장 탓에 살짝 뒤집힌 목소리로 용사는 대답했다.


다른 모두가 기대에 찬 눈을 보냈고

공주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로잘린은 간신히 엄숙한 표정을 지은 채로, 시간을 죽였고

릴리아 역시, 로잘린처럼 그랬었다. 지금은, 당황한 듯 주변을 바라보고 있지만.


릴리아는?


'...!'


'!'


릴리아 역시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로잘린과 눈을 마주쳐왔다.



"자! 로잘린! 릴리아! 부디, 용사를 도와 마왕을 물리쳐주게!"


""예! 알겠습니다!""


그 때가 반복된다.

모두의 함성소리와 로잘린과 릴리아의 한숨소리가 겹치던 그 때가.




릴리아는 조용히 용사를 바라보았다.

그 때는 멍하니 바닥만 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유심히 용사를 바라보았다.


그 버릇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긴장할 때마다 목에 건 펜던트를 왼 손으로 꾹 쥐는 그 버릇은.

왕에게 인사를 할 때도, 자신들과 따로 인사하러 온 지금도.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왜? 대체, 왜?'


로잘린 역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 하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안심되었다.


릴리아에게 로잘린은 제일 믿을 만한 친구이며, 자신을 지켜줄 존재이고

로잘린에게 릴리아는 제일 믿을 만한 친구이며, 자신을 일으켜줄 존재이니까.



'그래, 그 때처럼, 아무 문제 없을거야.'


릴리아도, 로잘린도, 조용히 마음 속으로 안도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 있으니까

용사가 그 때처럼 걸리적거리더라도, 아무 문제 없을거야.



"잘 부탁드릴게요. 그, 크로비안입니다."


우물쭈물 하는 용사의 모습까지도 기억 그대로였다.


"... 반가워요."


순간, 릴리아는 귀를 의심했다.

로잘린도 멍하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 때는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고, 고개만 까닥였는데.


"... 저도 반가워요. 저는 릴리아, 이 쪽은 로잘린입니다."


평정을 가장하며 인사를 하면서도

머리 속은 계속해서 복잡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인사를 끝내고 자기 짐을 주섬주섬 챙기는 크로비안 앞에서

둘은 그저 시선을 마주치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소재 제공 및 과거글 모음 : https://arca.live/b/regrets/25502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