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들의 적은 우리가 아니었다. 백인들의 적은 그들 마음속에 있었다.

- 시팅 불


***


노스다코타의 겨울 밤은 춥고 길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찾아올 수 없는 눈보라 속,

숲 속 레인저 사무소에 두 남자가 앉아 포커를 치고 있었다


- 지랄 맞은 곳이군요.


한참만에 입을 연 것은 로스 새뮤얼슨, 

미 산림청 법집행수사과에서 파견된 수사관이다


그의 투덜거림은 사무소 건물을 통째로 울리는 요란한 블리자드를 향한 것이었다

땔감을 있는 대로 집어넣은 벽난로가 타고 있었지만 

사방의 벽에서 밀려드는 냉기를 완전히 물리치진 못했다


요즘 세상에 벽난로라니, 하고 로스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발전기를 작살내는 -30℉의 추위 앞에선 

좀 원시적일지언정 전통적인 방식이 먹히는 법이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파이프를 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댄 이스트먼, 이 숲을 관할하는 32년 경력의 포레스트 레인저다


- 전적으로 동의하오. 아내가 묻힌 땅만 아니면 진작 떴을 것을.

- 사별하셨습니까. 유감입니다.

- 독감이었소. 빌어먹을 땅에서 태어나 자란 탓이지.


시작부터 원 페어도 없는 손패에 댄은 체크를 하고는 카드를 바꿨다


- 그래, 수사관께서는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시오?

- 아직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파악하기엔 날씨가 방해를 하는군요.

- 지랄 맞지. 아침엔 천국 같다가도 점심 먹을 때쯤 백색 지옥이 되는 곳이니...


'백색 지옥'이라는 댄의 표현에 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탐문수색한다고 이런 날씨에 잘못 돌아다녔다간 

스노모빌과 함께 알래스카 대구 꼴이 될 게 뻔했다


- 코코아 한 잔 새로 끓여 오겠소. 당신도?

- 주시면 감사하죠.


연쇄 살인 수사하러 왔다가 눈보라에 발이 끊겨 

이틀 째 늙은이와 강제 동거하는 처지에도 로스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착한 젊은 수사관을 위해 새 코코아를 끓이러 일어나면서 댄이 툭 말을 던졌다


- 로스, 웬디고라고 들어 봤소?

- 유명하죠. 인디언 전설이잖습니까. 사람을 얼려서 깨 먹는다고.

- 요즘 웬디고 소문이 돌아서 주민들은 집 바깥에 얼씬도 하지 않아요.

  애초부터 눈보라를 의인화한 괴물이니 괜히 나대다 얼어 죽느니

  틀어박혀 있는 게 동사를 피하는 현명한 짓이긴 하지만.

- 전설을 믿습니까, 댄?


댄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로스를 바라보다 대꾸했다


- 내가 믿는 건 사실 뿐이오.

  어떤 미친 놈이 이 한겨울에 도끼를 들고 다니며 

  죄 없는 사람 셋을 죽였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 흉기는 원주민들의 토마호크로 보이더군요.

- 수우 친구들을 의심하는 거요?


로스는 인종차별의 오해를 피하기 위한 방어적인 미소를 지었다


- 의심해선 안 될 사람은 없으니까요.

- 그렇긴 하지만 나는 차라리 그리로 혐의를 돌리려는 짓거리로 생각하겠소.

  토마호크야 공구상에만 가도 구할 수 있는 흔한 물건이고

  뭣보다 인디언 보호구역 천지인 이 곳에서 인디언 무기로 사람을 죽이다니,

  정말 그 친구들 짓이라면 너무 뻔하지 않겠소.

-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요. 

  하지만 역으로 그런 생각의 허를 찌른 거라면 어떨까요?


로스의 질문에 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눈물의 길이라고 들어 보셨소?

- 아, 개척 시대 때 얘기죠? 조지아에서 있었던 인디언 대규모 소개...

- 백 년도 더 전에 이 일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소. 노스와 사우스가 분리되기 전 얘기지.

  금은 얼마 없지만 석탄이니 철광 같은 것 때문에 유럽 이민자가 몰려들었고

  개발 시설을 지을 땅을 확보하느라 원주민들을 짐승처럼 보호구역으로 몰아넣었지.


로스는 이 대륙에 그런 일이 없었던 곳이 더 드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 그 중에 클리프라는 녀석이 있었소. 

  보호구역 이주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젊은 수우 족 전사였지.

  하지만 기병대는 보호구역에 있던 그의 처자식을 인질로 잡았고

  끝내 생포되어 명목 뿐인 재판 후, 그래, 오늘처럼 눈보라가 치는 날 목이 매달렸어.

  유언을 묻는 목사에게 침을 뱉으며 죽는 순간까지 우리 모두를 저주했지.

  이 일대에선 제로니모(아파치족 저항운동가)보다도 유명한 얘기요.


댄은 침이라도 뱉고 싶다는 표정으로 말을 맺었다


- 내 선조도 그 즈음 독일에서 오신 분이오만,

  클리프가 아직도 저 밖에서 사람들에게 도끼질을 하고 있대도

  나는 딱히 어느 한 편을 들고 싶진 않군. 

  다만 내 일이니, 잡기는 해야겠지. 전설이건 뭐건.


5번째 체크에도 신통찮은 패였기에 댄은 그냥 손패를 내려놓았다.

투 페어.

그리고 로스가 공개한 트리플을 보며 투덜댔다.


- 오늘 영 안 들어오는데. 난 여기까지 하겠소.

- 수사도 이만큼만 운이 좋다면 즐거울 텐데요.


좀 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센 눈보라가 

후웅, 훙, 사무소 건물을 통째로 울리고 있었다 


- 지독한 바람이군. 내일은 좀 잦아들어야 순찰을 돌 텐데.

  모빌 엔진이 멀쩡하면 아침에는 시동을 한 번 걸어 봐야겠소.

  정 탐문수사가 하고 싶다면 8시에는 일어나서 같이 움직입시다.

- 그러죠. 출발할 때 말해 주십시오.


댄은 자기 방으로 걸어갔고 로스는 강화유리로 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몽환적인 광경이었다

몰아치는 눈보라 앞에 시야는 10야드도 되지 않을 듯했다

숲이 광풍과 한기의 언어로 포효하고 있었다


뭐지?

분명히 봤는데.

강화유리에는 김이 서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댄은 그것을 닦았다

그리고 창밖 풍경처럼 얼어붙었다


로스는 저 바깥의 가문비나무 숲이 

적어도 10피트가 넘을 키 큰 나무들로 이뤄져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그것을 무슨 관목 덤불처럼 짚고 걸어 오는 사람 형체가 

대체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로스가 듣고 있던 것은 숲이 바람에 울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이 바람과 눈보라의 언어로 포효하고 있었다


후우우우웅

후우우웅


- 세상에, 하느님!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로스는 절로 신을 찾았다

그 때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 로스는 고개를 돌렸다


- 나오지 마시오!


언제 방에서 나왔는지 모를 댄이 문을 벌컥 열었다

맹렬한 강풍이 사무실 안으로 짓쳐들었고 댄은 그 바람보다 더 격렬하게 뛰쳐나갔다

로스는 말리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타앙!

라이플의 격발음이 눈보라를 날카롭게 가로질렀다


라이플을 재장전하며 악몽 속의 거인 그림자와 마주선 

늙은 댄의 널찍한 등짝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열어젖힌 문을 통해 댄이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 그래! 내가 마지막 후손이다!

  나를 찾아 왔느냐, 클리프! 와라, 해!


로스는 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어느덧 주머니 속의 38구경으로 뻗고 있었다

로스는 이를 악물고 열린 문 밖으로 간신히 몸을 빼냈다


- 댄! 그러지 말아요! 들어갑시다!

- 들어가 계시오! 이건...!


후우우웅.


바람 소리와 함께 도끼가 날아들었다



댄의 늙은 몸이 이마에 도끼를 꽂은 채 쓰러졌다

세차게 얼굴을 때리는 설풍에 정신이 아득해지면서도

로스는 창백한 설원 위로 나뒹구는 댄의 시체 너머로 기어이 총을 겨누어 당겼다


하지만 그 너머엔 이미 아무 것도 없었다

한결 잦아든 눈보라만 죽은 레인저와 산 수사관을 감싸고 돌 뿐


멍하니 죽은 댄을 내려다보던 로스는 생각했다


- 보고서는 어떻게 써야 하지...


***


사무소 현관의 CCTV에는 숲 속에서 날아든 도끼에 댄이 맞아 사망하는 장면만 찍혔고

그래서 로스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범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 보고서만을 쓸 수밖에 없었다


날이 개는 대로 로스는 현장에서 습득한 도끼를 본부에 발송했고

150년 이상 된 원주민의 유물이라는 민속학자의 회신을 받았다


로스는 별도의 조사를 통해 댄을 비롯한 네 명의 피살자가 

모두 같은 조상을 둔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도날드 이스트먼, 클리프의 가족을 인질로 삼은 기병대장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수우 족 거주 구역은 

레드페이스(인디언의 멸칭)를 다 목매달아 죽여야 한다는 

백인 우월주의 레드넥들의 난동으로 시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