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 실종된 지 1년이 지났다.

없는 살림에 형설지공으로 공부하여 언제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전액장학금을 받고 로스쿨에 입학한. 가난한 우리 집안의 자랑이었던 형이 어느날 돌연 사라졌다.


어디서도 형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형이 살던 고시원에는 지갑과 휴대폰 외에 사라진 것이 없었고 CCTV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형의 모습만 찍혔지 나가는 모습은 전혀 찍히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몸으로 우리 형제를 키우신 어머니는 그 추운 겨울에 형을 찾는 전단지를 돌리다 폐렴에 걸리셨다.

당장 돈이 없고 빚이 쌓여있어 은행 대출도 불가능했기에, 일단 어머니는 살리고 보자는 생각으로 사채를 끌어다 어머니의 병원비를 댔지만 심신이 많이 쇄약해져있던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셨다.

그렇게 나는 형도, 어머니도, 재산도. 모든 걸 다 잃은 채 빚만 남았다.


오늘도 일수꾼이 집을 한바탕 뒤집고 갔다. 이제 우리 집엔 더 부서질 것이 없기에 별로 상관은 없다.

지갑에 남아있는 만원짜리, 놈들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털어가고 난 뒤 밥이나 사 먹으라고 놔둔 만원짜리로 소주와 번개탄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나는 어머니의 곁으로 간다.

방 문을 닫고 번개탄을 피운 뒤 소주를 깐다.

한병 두병... 번개탄의 매캐한 연기와 소주가 만드는 취기가 괴롭다.

정신이 희미해지자 환상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 머리에 뿔이 달린, 은발에 빨간 눈을 가진 소녀가 서 있다- 그 소녀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번개탄 연기가 사라지며 취기가 싹 가신다.


"오랜만이구나."

소녀가 날 끌어안았다. 달콤한 향기와 소녀가 입고있던 딱딱한 갑옷의 촉감이 느껴진다.

번개탄 연기가 만들어낸 환각이라기엔 정신이 너무나 맑아졌고, 감각도 너무나 생생하다.


"고생을 많이 한 것 같구나. 가엾게도..."

"누구...?"

"나다. 네 형이다."

자신을 형이라 주장한 소녀는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모르는 기억들이 물밑듯이 밀려들어온다.

낮선 세계에 떨어진 형.

형을 용사로 떠받드는 사람들, 마왕을 토벌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국왕.

마왕을 무찌른 형, 그러나 애초에 형을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줄 방법도, 생각도 없었기에, 형을 배신하고 뒤에서 칼을 꽂은 인간들.

죽어가던 형에게 접근하는 마왕,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욕망으로 자신이 가진 힘을 모두 형에게 부여하고... 새로운 마왕으로 등극한 형.

마왕이 된 형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인간들.

대륙을 평정하고 인간들을 마족으로 타락시켜 온 대륙을 마계로 만들어버린 형.


약 100년치의 기억들이 한번에 내 머릿속에 들어오자, 나는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토사물을 게워냈다.

"미안하구나, 아무리 마인드 디펜시브를 걸었다지만 너무 많은 기억을 한번에 밀어넣는 것은 평범한 인간에게 크게 고통스러운 일이겠지."

소녀- 아니, 형이 내 입가에 묻은 토사물을 닦아주며 자상하게 말했다.

"짐의 기억을 넘겨주면서 네 기억 또한 읽었다, 괴로웠겠구나. 이제 짐이 왔으니 더 이상 괴로울 일은 없다."

"혀...형....."

"오냐, 형이 여기 있다."

형의 품에 안겨 흐느낀다.

비록 체구는 작아졌지만 이 따뜻함은 확실히 형의 가슴이다.


"미안해 형, 나 어머니를 살려내지 못했어..."

"괜찮다. 넌 최선을 다했어, 고생 많았다."

"빚을 감당할 수가 없었어. 버는 돈보다 이자가 더 많아."

"빚 따위 신경쓰지 말거라."

형이 내 어깨를 잡고 말했다.

"마왕이 된 이후 끓어오르는 정복욕은 참을 수 없더구나, 짐이 이 세계에 돌아온 것은 물론 너를 보기 위해서도 있지만 이 세계 역시 짐의 손에 넣기 위함이다. 네가 짐의 동생으로써 짐을 도와 이 세계를 정복한다면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더 이상 너를 괴롭힐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세계, 지구를 정복하겠다고?

나는 형의 기억에 나온, 마왕에게 지배당하는 세계를 떠올렸다.

혼돈과 파괴, 지구의 문명 따위는 형의 무력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분명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이 붕괴되겠지.


형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떠냐, 짐과 함께 하겠느냐?"

잠깐의 망설임, 하지만 결국 나는 형의 손을 잡고 말았다.

"착하구나."

형은 내 손을 끌어당겨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형의 입을 타고 차갑고도 뜨거운 마력이 들어온다.

내 몸에 형의 마력이 채워지며, 나의 모습 역시 급격히 변화해간다.

잡일로 단련된 근육이 빠지고 지방이 차오른다.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길어지는 동시에 희끗희끗해지며, 완전한 은발로 변한다.

평범한 검은 눈동자 역시 인간답지 않은 피처럼 붉은 빛으로 변한다.

가슴에는 풍만한 젖가슴이 차오르고, 허리가 로프로 조이기라도 한 듯 잘록해졌으며, 엉덩이가 점점 커진다.

밖으로 튀어나온 남성기가 점점 줄어들고, 몸 속으로 들어와 아이를 품는 기관으로 그 역할을 바꿔간다.

뿔과 꼬리가 자라나며, 귀 끝이 뾰족해짐과 동시에 사고 역시 그에 맞춰 변한다.

내가 몇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간이란 존재가 벌레 이하의 하찮은 미물로 보인다.

이 세계로 와 나를 본 형...아니 언니의 기분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조금 부끄러워진다.


"아름다워졌구나, 역시 내 동생이다."

"...응 언니."

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늘로 날아갈듯한 기분, 나는 가만히 언니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마왕성,

과거 서울의 강남이었던 자리에 세워진 마왕성은 그 크기와 규모에서부터 인간이 세운 건축물과는 격이 다르다. 과거 잠실에 있었던 탑이 초라해 보일 지경이다.


"북미를 아직도 정리 못 했단 말이야?"

"그게, 날씨가 춥고 인간들의 저항도 거세서..."

"거긴 마계에 비하면 한여름 수준이야, 거기다 너네 상대는 인간들이잖아, 걔네가 무슨 발록이라도 돼? 언니의 얼굴에 먹칠을 할 생각이야?"

"죄, 죄송합니다!"

"일주일 안에 싹 밀어버리지 못하면 언니의 저녁상에 올려버릴 줄 알아. 지금 당장 출발해."

나의 협박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악마가 허둥지둥 문을 열고 나간다.

하여튼 얼빠진 놈들, 인간 게릴라 떼거지 하나 정리하지 못하다니. 다 잘라버리고 언니한테 부탁해서 마계 기사들이나 끌어 쓸까보다.


언니가 내게 맡긴 지구 정복 사업은 거의 끝났다.

인류의 태반이 죽었고 반의 반 남은 인류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전부 마족으로 타락했다.

문제는 그 극히 일부가 험지에 들어가 저항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그게 좀 골치가 아프다.

주제도 모르고 여기저기서 들끓는 날파리같은 인간들. 으으, 내가 저런 날파리같은 존재였다니... 정말 생각도 하기 싫다.

같은 마족이었다면 목숨을 걸고 최후의 저항을 하는 그 용기를 높이 사줄 수야 있겠지만, 모기가 목숨을 걸고 피를 빤다고 해서 모기의 용맹을 칭찬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엔 뭐야, 북미에서 지랄이 났으니 이제 아프리카 차례인가?

"들어와."

사령관의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 내세운 나의 도도한 태도는 문이 열리자마자 단번에 풀어졌다.


"언니!"

단숨에 달려가 언니의 품에 안긴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언니다. 저쪽 세계에서 반란이 터지는 바람에 한동안 저 쪽에 신경을 써야했기 때문이다.


"고생하는구나."

"별 거 아냐 언니, 반란은?"

"그 멍청한 놈의 모가지라면 땄다. 이제 오랫동안 여기 있을 수 있겠어."

"진짜?"

"녀석,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 보니 아주 신이 났구나."

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기분 좋게 언니의 손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