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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삽한 본문보다 저게 더 낫고, 깔끔하고, 저걸 읽어야 본문이 이해가 좀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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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사는 수첩을 들여다봤다겉표지가 너덜너덜하고주인의 이름도 흐려진 수첩이었다.

 

  그들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일치하지 않을 때얼마나 큰 복수가 될 수 있을까?

 

  레이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너저분하게 잘린 앞머리가 눈을 가렸다이번엔 반대로 고개를 기울였다하지만 거듭 보아도 글귀는 변하지 않았다

 

  최근에야 글을 뗀 레이사였다게다가 글을 읽는 것과 이해하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휘갈겨 쓴 듯 거친 필체의 글귀였지만 읽기에는 문제가 없었다레이사는 복수라는 단어에서 미미한 불쾌를 느꼈지만하나하나의 낱말을 분리한 접근일 뿐문장의 의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결국늘 그래왔듯이레이사는 가장 친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언니언니!”

 

  언니라고 부른 여성은 바위에 걸터앉은 채 대검을 손질하고 있었다여성은 저 멀리서 폴짝폴짝 뛰어오는 레이사를 발견하고 검을 내려놓았다

 

  레이사! 그렇게 뛰다가 다칠라!”

 

  일어선 여성의 키는 레이사보다 머리 하나 이상 컸다여성적인 매력과 검사로서의 근육이 도드라지는 몸태. 그에 어울리게 목소리도 허스키했다. 걱정 어린 외침이 안들린 건지레이사는 도도도 뛰어서 거리를 좁혔다

 

  언니!”

 

  비명과 함께 와락 안겼지만 소녀의 체구가 작은 탓인지여성의 몸이 강건한 덕인지 여성은 두 팔로 안아줄 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래그래갑자기 왜?”

 

  언니나 모르는 단어 알려줘!”

 

  뭔데?”

 

  레이사는 천진하게손에 쥐고 있던 수첩을 들여다보면서 발음조차 어려운 단어를 외쳤다.

 

  ……니피앙이 뭐야?”

 

  하지만 레이사의 말을 들은 여성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 수첩 어디서 났어?”

 

  ……이거주웠어!”

 

  서두의 휴지도 그렇거니와에두르는 내용이 거짓말인게 뻔했다여성은 한숨을 쉬면서날붙이를 관리하는 기름이 묻지 않은 손으로 레이사의 볼을 꼬집었다

 

  으으으……아아하앗하아아!”

 

  여성 딴에는 작은 힘이었지만몸집만한 대검을 휘두르는 악력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단장님이 따로 보관하는 그거 빼내지 말랬지자꾸 말 안들을래?”

 

  레이사는 볼따구니가 뜯어져나가는 고통과 공포 속에서 외쳤다.

 

  드으께마 자드으께!” 

 

  때마침레이사와 그 볼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테라애 볼 찢어지겠다!”

 

  여성은 그 부름에푸근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에이단장님과장도 참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다자니이-! 사려져어-!”

 

  테라그만!”

 

  네네으휴다음에는 양볼이다레이사?”

 

  레이사는 붉어진 볼을 붙잡고그렁그렁한 눈으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테라는 한숨을 쉬며 다시금 레이사의 머리를 헝클어뜨렀다대검과 수첩을 집어들곤 단장을 따라 갔다

 

  따로 불러낸다고 해도 이 곳은 사방이 탁 트인 암석지대였다유랑 용병단좋게 말해서는 그들 길드는 의뢰 수행을 위한 이동 중 잠시 휴식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잡담을 나누거나 낮잠을 자거나소일거리하는 무리를 지나 충분히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단장이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

 

  테라는 고개를 저었다. 단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많이 변했군.”

 

  모든 게 많이 변했죠.”

 

  일반적으로 모두는 과장의 표현이었다하지만 테라가 말한 모두는자신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각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말했다.

  테라는 스스로 더욱 정진했고 담배를 끊었다일이 많아진 단장은 담배를 더많이 태웠다많고 많은 길드 중 하나였던 그들은 제국의 훈장과 공인을 받았다영원한 번영을 약속할 것 같았던 제국은 아직도 재해복구에 힘쓰고 있었다모든 사람이 멸망을 예감했던전례없이 커다란 게이트가 열렸던 그 사건은 이제 역사가와 서민의 풍문거리가 됐다

  그리고 레이사는.

 

  조합측에서 연락이 왔다.”

 

  테라가 상념을 그쳤다단장이 따로 불러낼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직접 말로 들으니 조금 긴장됐다

 

  뭡니까.”

 

  “1급 이상의 능력자를 수배해달라고 했다면서.”

 

  조합 놈들쓸데없이 참견은테라는 본심을 속으로만 씹었다

 

  우리 위상 덕에 길드측에서도 시비없이 넘어간 거 같은데원래 단장의 자격으로 요청할 수 있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

 

  단장은 중년 남성의 전형이었다미와 추양극단에서 중립을 지키는 듯한 남자였다그래도 오래 지내온 덕인지넙대대한 덩치에도 나름 정감 갔다단장은 궐련을 깊이 한 모금 빨았다

 

  설명하라 해도 안 할 테지.”

 

  테라는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그들이 같이 한 시간은 헛된 게 아니었다단장은 담배연기 속에 한숨을 같이 흘렸다.

 

  테라시간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자는 들어본 적 없어네 나이만큼이나 이 바닥 생활한 나도 듣도보도 못했다고.”

 

  단장은 새삼스러운 사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능력자라고 한들 인간이란 개체의 한계에서 작용하는 것이었다뛰어난 능력자라고 한들 삶과 죽음시간과 공간의 인과율 따위를 조정할 수 없다는 건 아카데미 한 학기만 수강해도 알 수 있는 상식이었다.

 

  “조합 회신 보니까 처음이 아닌 거 같던데그 전에도 요청했었나?”

 

  그러는 단장님은.”

 

  테라는 더욱 음침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레이사 앞에서와는 전혀 딴판인 어투였다

 

  조합에 요청하셨다면서요정보 주입자였나기억 주입자라나.”

 

  단장은 무던한 얼굴을 찌푸렸다.

 

  하여간 조합 놈들쓸데없이 참견은.”

 

  테라는 표나지 않을 정도로만 웃었다그들이 함께 지낸 시간은서로를 아는 걸 떠나서 닮아갈 정도의 기간이었다

 

  저나 단장님이나 같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레이사가 들고있던 수첩을 단장에게 내밀었다.

 

  물건 간수 좀 잘해주십쇼레이사가 자꾸 들춰보려고 한단 말입니다저번에 일기장을 쥐고 있을 땐 얼마나 놀랬는지진짜글씨 알려준 것도 하도 졸라대니까 알려줬다구요. 맘같아서는 까막눈으로 냅두고 싶은데. 그 와중에 머리는 좋아가지고 금방 배우고.”

 

  테라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수첩을 건네 받은 단장은 테라의 넋두리를 단호하게 끊었다

 

  무슨 말입니까?”

 

  너랑 내가 같은 마음이라고.”

 

  테라는 잠시 생각했다단장은 묵묵히 궐련을 빨았다테라는 감성적일지라도 아둔하지 않았다.

 

  ……구했습니까?”

 

  아직수소문 중이다있을 법한 능력자고길드에서도 힘써준댔으니까 금방 구하겠지.”

 

  구하지 않기를 바라겠아니찾았다면 제게 먼저 말씀해주십쇼.”

 

  단장은 눈동자만 굴렸다테라의 대검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제법 날카로워 보였다

 

  살면서 기억 조작자 본 적 없나네가 먼저 당할 거다.”

 

  단장은 테라의 단순함과 오기를 비웃지 않았다사실을 지나가는 듯하게 넌지시 말할 뿐이었다테라의 두 눈이그 대검처럼 예리해졌다.

 

  얼굴 풀어테라안그래도 남자들 도망가는 험악한 인상인데 그러니까 더 무섭다.”

 

  제게 반한 남자가 몇 인데요단장님원래라면 자연스러운 대답이었겠지만 테라는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레이사에게 이전 기억을 다시…… 그러고 싶습니까?”

 

  싶고 아니고 간에그래야 한다.”

 

  단장니임-!”

 

  깜짝이야소리치지 마너 목 상하고 나 귀 아퍼.”

 

  놀란 것 치곤 태평한 대꾸였다테라의 꽉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단장은 선선히 부는 바람 속에 담배꽁초를 흘러넣었다

 

  내가 아까 우리 길드의 위상이라고 했었지?”

  

   테라는 반응 없이 분개한 표정이었다. 단장은 건조하게 말했다.

 

  우린 전과 달라더 이상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지 않아도 되고조합에다 의뢰 받으려고 굽신거리지 않아도 되고도시에선 따듯한 목욕물과 편안한 침대가 있는 그럴싸한 숙소에서 잘 수 있고……능력 없는 애송이에게 월급도둑이라고 구박할 필요도 없고.”

 

  단장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비릿하고차가운 조소였다하지만 테라는 그게 자신을 향하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우리 길드의 위상이야. 훨씬 좋아졌지난 이걸 내가 잘해서라고 착각하지는 않아.”

 

  단장의 비웃음은 스스로를 향했다.

 

  하지만 나는 단장으로서그게 어떤 책임을 져야하는 건지 알고 있어.”

 

  단장은 다시 호주머니을 뒤적였다.

 

  너, 몇 급이지?”

 

  이제 2급 심사 준비하고 있죠.”

 

  담배갑을 다시 꺼냈지만 담뱃잎 부스러기만 남았다단장은 입맛을 다시며 먼 곳을 바라봤다.

 

  많이 늘었다입단할 때는 키만 큰 멀대였는데.”

 

  단장님은 배 나온 아저씨였고.”

 

  젊으니까 잘하면 서른 즈음엔 1급 되겠지그런데 테라.”

 

  테라는 제국민 평균보다 큰 키였지만단장은 평균보다 작은 키였다하지만 테라는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는 단장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너. 그 때 레이사가 한 거만큼 할 수 있겠냐?”

 

  테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우리 길드 내에서레이사가 했던 만큼 할 수 있는 애가 있냐? 아니, 내가 요새 너무 바쁘다 보니까 진짜 몰라서 그래.”

 

  단장님.”

 

  알아안다고그런 규격 외랑 비교하는 건 무익한 비하고 자학이지우리 길드솔직히 말해서 수준급은 돼어디랑도 비빌 수 있어근데남들은 우리에게 레이사가 했던 걸 바라고 있어우리의 위상은 레이사가 해냈던 결과야.”

 

  단장은 새삼스러운 진실을 얘기하는 건 아니었다테라가 그동안 외면했던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이야 소화할 만 한 것만 골라받고는 있는데제국이 갑자기 드래곤이라도 잡으라고 하면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어저번처럼 대규모 게이트가 열리면?”

 

  단장의 한 마디 한 마디에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던 테라는 천천히 누그러졌다아니정확히는 바스라져갔다움켜쥔 주먹은 허무하게 풀렸고긴장하던 등과 어깨는 느슨해졌다

 

  정말 그래야…….”

 

  너는 하나만 봐도 되겠지. 나는 전체를 봐야 해테라.”

 

  ……저는 봤어요그 때제가 옆에서 말렸잖아요.”

 

  테라의 음침했던 목소리도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다.

 

  “살면서 그런 눈 처음 봤어요미워하는아니진짜 증오모든 걸 거부하고 증오하는 눈저를 보고 그랬단 말이에요.”
 
  단장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고개를 숙인 건 테라였다

 

  그때야 알았죠레이사는 우리를저를얼마나 싫어했던 걸까요? 길드 입단 하고 나서 그 때까지 어떻게 견뎠을까요?

 

  테라의 말은 느리게 이어졌다.

 

  솔직히 레이사가 언니라고 불러줬을 때 좀 좋았어요다 저보다 나이 많은 늙다리잖아요단장님 말하는 것처럼, 애인은 커녕 가족도 없는 저한테 누가 가깝게 굴었겠어요근데그때는 니가 진짜 여자냐고 뭐라고 했죠.”

 

  단장은 별다른 말을 않았다

 

  저 못 알아볼 때 엄청 뭐라고 했죠그러고 병원 가서 진단 받았을 때솔직히 좀 기뻤어요일선 임무는 안 뛸테니까그럼 계속 심부름 시키고 놀 수 있고, 다칠 것도죽을 것도 없이곁에 오래 있을 테니까엄청 이기적이죠?”

 

  하지만 레이사는 그 이후로도 현장 임무에 열심이었고특출난 성과를 보여줬다

  

  그러던 중에제국 인근에 대규모 게이트가 열렸다.

 

  시간에 개입하는 능력자. 없단 건 알아요근데말하고 싶었어요미안하다고담배심부름 시키고 앞에서 피워댄 거, 실력 없으면 신발 정리, 무기 정리라도 하라고 시킨 거다 미안하다고.”

 

  자기는 왜 지금 레이사한테 잘해주는 걸까속죄반성가족애의 충당죄책감그도 아니면 순진무구한 소녀에 대한 지배욕

  테라는 속마음을 설명할 수 없었지만하나는 확실한 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 기억을 다시 심어준다는 거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그 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단장이 말했다.

 

  잔인하지.”

 

  단장의 긍정은 테라의 안정을 부르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한다.”

 

  오히려 한층 추락하는 것 같은 테라였다

 

  수첩은 가져가라고 빼놓은 거야. ‘레이사님의 기록이라고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알잖아자기가 먼저 깨닫게 되면비싼 돈 주면서 기억 조작자도 부를 일 없겠지재수 없는 기억조작자도우락부락한 준 2급 여자의 칼 맞을 일 없을 테고. ”

 

  차라리 고백이 더 큰 타격을 줄 거 같지 않아? 단장의 시덥잖은 농담은 아무도 웃기지 못했다

 

  읽어봐서 알겠지만 예전에 걔는 틈나는 대로 공부까지 했더라. 네 말마따나 머리는 좋으니까많이 알려줘. 그게 레이사를 위한 거고, 우리를 위한 거야.

 

  테라는 자기가 단장이랑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대화는 곱씹을수록 참담한 기분만 들었다.


  그저 걷다보니 길드원들이 보였고둘러보니 어느새 야영지였고걷다가 옷깃을 붙잡는 손에 멈춰 섰다.

 

  언니언니이이이!”

 

  자기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테라는 고개를 아래로 꺾었다

 

  언니내가 한참 불렀잖아아!”

 

  테라는 반사적으로 뺨을 바라봤다여전히 빨갰다

 

  나 기분 안 좋으니까. 목마 태워줘목마!”

 

  왜 기분이 안좋은지는 차마 묻지 못했다목마는 자기가 타고픈 테라였지만하지만 기억을 잃기 전 레이사에게도 안하던 폭거였다군말 없이작고 여린 몸체를 번쩍 들었다.

 

  워후우우!”

 

  등 뒤에 둘러맨 대검 탓에 조금 걱정했지만레이사는 용케 중심을 잘 잡았다테라는 레이사를 목에 태우고 천천히 걸었다

 

  언니언니.”

 

  테라는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었다

 

  레이사.”

 

  레이사 님은 어떤 분이야?”

 

  테라는 다리가 꼬여 그만 레이사를 떨어뜨릴 뻔했다

 

  갑자기, 왜?”

 

  엄청 대단한 능력자라고 들었는데내가 물어보면 다들 얘기를 안해줘!”

 

  기억을 잃기 전에 레이사는 길드의 위상을 드높이고 번영을 불렀지만그만큼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볼을 꼬집는 테라는 온건한 편에 속했다

 

  아까는 우리 길드 드워프 아저씨 있잖아그 아저씨가 막 혼냈어그런 거 물어보지 말라고!”

 

  혼난 거 치고는  천진하게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이었어능력은 뭐였어진짜 남자에서 여자가 된 거야그럼 막 남자처럼 키도 크고 근육도 많았어능력자였으니까 인기도 많았겠다그치?”

 

  레이사의 말은 모두 의문이었지만명확한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길드 안에서 쉽사리 말할 수 없는어느 누구는 화제조차 허락지 않는 대화를 유일하게 허락한 테라에게 하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아이의 쫑알거림은 때때로 귀여웠지만가까이서 듣고 있노라면 짜증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테라도 부정적인 감정이 켜켜이 쌓여갔다그건 자괴에 가까웠다

 

  나도 레이사 님처럼 될 수 있을까?” 

 

  짜증은 정당성과 무관하게 외부로 표출할 수라도 있었다

  자괴는속을 빠르게 부패시켰다.

 

  나랑 레이사 님은 이름도 같잖아!”

 

  테라는 우뚝 멈춰섰다.

 

  너야.”

 

  ?”

 

  테라는 무너지듯 말했다.

 

  너야레이사.”

 

  테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너는 기억을 잃기 전에네가 말하는 레이사 님이었어너랑 그 '레이사 님'은 다른 사람이 아냐남자였다가 아카데미에서 능력을 개화하면서 여자가 됐고길드에 들어와서 활약한 레이사가기억을 잃기 전에 너야.”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면하기에 무등 태우는 자세는 상당히 부적합했다테라는 단장이 말을 따르려는 것도 아니었다그저 견딜 수가 없었기에도망칠 수 없었고 뿌리칠 수 없었기에테라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참고 있던 말을 뱉었다.

 

  당사자는 결코 바라지 않았겠지만용서가 없는 헛된 사과겠지만설령 그때로 돌아간들 용서해주지 않았겠지만

  테라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고감히 용서를 구하고 싶었고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레이사는.

  

  에이언니!”

 

  진즉 모든 기억을 불살랐다.

 

  이름 똑같다고 장난하는 거야언니까지 그러기야재미 없어언니!”

 

  그 둘은 야영지와 조금 멀어졌다태양이 뉘엿거렸고 바람은 선선했다테라가 몸을 굽히면서 천천히 레이사를 내려줬다

 

  활 쏘는 엘프 아줌마가 그랬는데나 능력자 자격 시험도 안봤다면서나 능력이 뭔지도 모르는데어떻게 레이사 님이랑 나랑 같을 수 있어하하하.”

 

  두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 연신 테라를 나무라는 레이사였다

 

  게다가 레이사 님은 남자였다가 여자가 됐잖아나 키도 엄청 작은데나 원래부터 여자잖아!”

 

   레이사는 두 팔을 파닥거리며 꺄르륵거렸다.

 

  제발누군지 제대로 말해줘언니언니?”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인 테라는 레이사와 눈높이가 같았다.


  테라는, 자기를 돌아보는 레이사의 얼굴 표정이 왜 갑자기 바뀌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울어?”

 

  레이사는 방금까지 활발함이 사라지고얼굴 한가득 불안함을 비쳤다.

 

  울어언니?”

 

  레이사가 그렇게 묻고서야뺨에 흐르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게…….”

 

  말하고 나서 이유가 떠올랐다슬퍼서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할지특히 레이사를 앞에 두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테라가 망설이는 사이레이사가 더 빨랐다.

 

  울지 마!”

 

  레이사가 와락 달려들었다레이사는 테라의 넓은 품을 꽉 안았다테라의 울음에는 소리가 섞였다

 

  울지 마언니그쳐!”

 

  어른이 아이에게 해도 효과없는 말이 그 역의 관계에서더군다나 자기도 울먹인다면 더더욱 설득력과 강제력이 없었다.

  하지만 테라는 그런 오류를 말할 수 없었다

 

  언니가어른이 울면 어떡해……!”

 

  그 둘의 나이 차라고 해봤자 손 하나를 넘기지 않았다레이사도 아이처럼 굴지만신분증에 적힌 나이론 어엿한 성년이었다.

  하지만 테라는 그 사실을 지적할 수 없었다.

  

  앞으로 안 할게절대로 안 물어볼게레이사님이 누군지아무한테도언니한테도절대로절대 안물어볼게일기도수첩도절대절대절대 안훔쳐볼게?” 

 

  기억 조작자를 초빙한다는 단장은 그 전에레이사가 자각하기를 원했다테라는 기억이 돌아온 레이사에게 사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테라는 레이사의 말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흐윽울지마아…….”

 

  레이사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테라는 레이사가 기대고 있는 자기 어깨에서 뜨듯한 눈물을 느꼈다

 

  미안…….”

 

  힘겹게 말했지만 테라도 모르지 않았다


  자기의 사과는 너무 늦었고들을 사람이 없었고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서 테라는 두 팔로 레이사를 안아줬다.

 

  울지마아흐윽언니이…….”

 

  레이사의 앙칼지고 높은 울음소리는 쉽게 흩어졌다테라는 동굴에서 나오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온몸으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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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앙은 기표, 표먼적인 언어. 즉 레이사라는 이름. 

시니피에는 기의, 언어에 담긴 의미. 여기선 '레이사'라는 '인물' - 기억, 존재, 의미 등등. 


 그리고나서 클라이막스나 1부 종료 즈음에서 


//// 

 저 이제 깨달았아요테라 언니.”

 

 레이사뭐해빨리 와!”

 

 제 능력은 기억추억을 댓가로 활용한다고요.”

 

 테라는 숨이 멎는 거 같았다그런 기분을 아는지레이사는 싱긋 웃었다.

 

 그 레이사 님도아마 이렇게 말했겠죠?”

 

 테라는 그 입을 막고 싶었다너를 다시 잃을 수 없다고자기에게 더한 죄책감을 주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 말을 자르듯이레이사는 검을 뽑았다

 

 고마웠어요모두들.”

//// 



  이러면 어떨까 했는데 

  괜히 재미 없이 지루하고 길기만 하고 TS는 잘 드러났을런지 모르겠고  순수 창작이 아니라 피드백 요청하기도 뭐하고 
  좋은 소재 이상하게 비튼게 아닌가 몰루겠음..


  하여튼 재밌게 봐주셨음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