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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삽한 본문보다 저게 더 낫고, 깔끔하고, 저걸 읽어야 본문이 이해가 좀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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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사는 수첩을 들여다봤다. 겉표지가 너덜너덜하고, 주인의 이름도 흐려진 수첩이었다.
그들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일치하지 않을 때, 얼마나 큰 복수가 될 수 있을까?
레이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저분하게 잘린 앞머리가 눈을 가렸다. 이번엔 반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거듭 보아도 글귀는 변하지 않았다.
최근에야 글을 뗀 레이사였다. 게다가 글을 읽는 것과 이해하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휘갈겨 쓴 듯 거친 필체의 글귀였지만 읽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레이사는 ‘복수’라는 단어에서 미미한 불쾌를 느꼈지만, 하나하나의 낱말을 분리한 접근일 뿐, 문장의 의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늘 그래왔듯이, 레이사는 가장 친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언니, 언니!”
언니라고 부른 여성은 바위에 걸터앉은 채 대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여성은 저 멀리서 폴짝폴짝 뛰어오는 레이사를 발견하고 검을 내려놓았다.
“레이사! 그렇게 뛰다가 다칠라!”
일어선 여성의 키는 레이사보다 머리 하나 이상 컸다. 여성적인 매력과 검사로서의 근육이 도드라지는 몸태. 그에 어울리게 목소리도 허스키했다. 걱정 어린 외침이 안들린 건지. 레이사는 도도도 뛰어서 거리를 좁혔다.
“언니!”
비명과 함께 와락 안겼지만 소녀의 체구가 작은 탓인지, 여성의 몸이 강건한 덕인지 여성은 두 팔로 안아줄 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래그래, 갑자기 왜?”
“언니! 나 모르는 단어 알려줘!”
“뭔데?”
레이사는 천진하게, 손에 쥐고 있던 수첩을 들여다보면서 발음조차 어려운 단어를 외쳤다.
“시……니피앙이 뭐야?”
하지만 레이사의 말을 들은 여성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너, 그 수첩 어디서 났어?”
“……어! 이거, 그, 그. 주웠어!”
서두의 휴지도 그렇거니와, 에두르는 내용이 거짓말인게 뻔했다. 여성은 한숨을 쉬면서, 날붙이를 관리하는 기름이 묻지 않은 손으로 레이사의 볼을 꼬집었다.
“으으으……! 아아하! 앗하아아!”
여성 딴에는 작은 힘이었지만, 몸집만한 대검을 휘두르는 악력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너, 단장님이 따로 보관하는 그거 빼내지 말랬지. 자꾸 말 안들을래?”
레이사는 볼따구니가 뜯어져나가는 고통과 공포 속에서 외쳤다.
“드으께! 마 자드으께!”
때마침, 레이사와 그 볼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테라! 애 볼 찢어지겠다!”
여성은 그 부름에, 푸근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에이, 단장님. 과장도 참.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다자니이-! 사, 사려져어-!”
“테라! 그만!”
“네네, 으휴. 다음에는 양볼이다, 레이사?”
레이사는 붉어진 볼을 붙잡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라는 한숨을 쉬며 다시금 레이사의 머리를 헝클어뜨렀다. 대검과 수첩을 집어들곤 단장을 따라 갔다.
따로 불러낸다고 해도 이 곳은 사방이 탁 트인 암석지대였다. 유랑 용병단, 좋게 말해서는 그들 길드는 의뢰 수행을 위한 이동 중 잠시 휴식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잡담을 나누거나 낮잠을 자거나, 소일거리하는 무리를 지나 충분히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 단장이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
테라는 고개를 저었다. 단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많이 변했군.”
“모든 게 많이 변했죠.”
일반적으로 모두는 과장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테라가 말한 모두는, 자신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각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말했다.
테라는 스스로 더욱 정진했고 담배를 끊었다. 일이 많아진 단장은 담배를 더많이 태웠다. 많고 많은 길드 중 하나였던 그들은 제국의 훈장과 공인을 받았다. 영원한 번영을 약속할 것 같았던 제국은 아직도 재해복구에 힘쓰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멸망을 예감했던, 전례없이 커다란 게이트가 열렸던 그 사건은 이제 역사가와 서민의 풍문거리가 됐다.
그리고 레이사는.
“조합측에서 연락이 왔다.”
테라가 상념을 그쳤다. 단장이 따로 불러낼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직접 말로 들으니 조금 긴장됐다.
“뭡니까.”
“1급 이상의 능력자를 수배해달라고 했다면서.”
조합 놈들, 쓸데없이 참견은. 테라는 본심을 속으로만 씹었다.
“우리 위상 덕에 길드측에서도 시비없이 넘어간 거 같은데, 원래 단장의 자격으로 요청할 수 있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
단장은 중년 남성의 전형이었다. 미와 추, 양극단에서 중립을 지키는 듯한 남자였다. 그래도 오래 지내온 덕인지, 넙대대한 덩치에도 나름 정감 갔다. 단장은 궐련을 깊이 한 모금 빨았다.
“설명하라 해도 안 할 테지.”
테라는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그들이 같이 한 시간은 헛된 게 아니었다. 단장은 담배연기 속에 한숨을 같이 흘렸다.
“테라. 시간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자는 들어본 적 없어. 네 나이만큼이나 이 바닥 생활한 나도 듣도보도 못했다고.”
단장은 새삼스러운 사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능력자라고 한들 인간이란 개체의 한계에서 작용하는 것이었다. 뛰어난 능력자라고 한들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의 인과율 따위를 조정할 수 없다는 건 아카데미 한 학기만 수강해도 알 수 있는 상식이었다.
“조합 회신 보니까 처음이 아닌 거 같던데. 그 전에도 요청했었나?”
“그러는 단장님은.”
테라는 더욱 음침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사 앞에서와는 전혀 딴판인 어투였다.
“조합에 요청하셨다면서요. 정보 주입자였나, 기억 주입자라나.”
단장은 무던한 얼굴을 찌푸렸다.
“하여간 조합 놈들, 쓸데없이 참견은.”
테라는 표나지 않을 정도로만 웃었다. 그들이 함께 지낸 시간은, 서로를 아는 걸 떠나서 닮아갈 정도의 기간이었다.
“저나 단장님이나 같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레이사가 들고있던 수첩을 단장에게 내밀었다.
“물건 간수 좀 잘해주십쇼. 레이사가 자꾸 들춰보려고 한단 말입니다. 저번에 일기장을 쥐고 있을 땐 얼마나 놀랬는지, 진짜. 글씨 알려준 것도 하도 졸라대니까 알려줬다구요. 맘같아서는 까막눈으로 냅두고 싶은데. 그 와중에 머리는 좋아가지고 금방 배우고.”
“테라,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수첩을 건네 받은 단장은 테라의 넋두리를 단호하게 끊었다.
“무슨 말입니까?”
“너랑 내가 같은 마음이라고.”
테라는 잠시 생각했다. 단장은 묵묵히 궐련을 빨았다. 테라는 감성적일지라도 아둔하지 않았다.
“……구했습니까?”
“아직, 수소문 중이다. 있을 법한 능력자고, 길드에서도 힘써준댔으니까 금방 구하겠지.”
“구하지 않기를 바라겠, 아니. 찾았다면 제게 먼저 말씀해주십쇼.”
단장은 눈동자만 굴렸다. 테라의 대검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제법 날카로워 보였다.
“살면서 기억 조작자 본 적 없나? 네가 먼저 당할 거다.”
단장은 테라의 단순함과 오기를 비웃지 않았다. 사실을 지나가는 듯하게 넌지시 말할 뿐이었다. 테라의 두 눈이, 그 대검처럼 예리해졌다.
“얼굴 풀어, 테라. 안그래도 남자들 도망가는 험악한 인상인데 그러니까 더 무섭다, 야.”
제게 반한 남자가 몇 인데요, 단장님. 원래라면 자연스러운 대답이었겠지만 테라는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레이사에게 이전 기억을 다시…… 그러고 싶습니까?”
“싶고 아니고 간에, 그래야 한다.”
“단장니임-!”
“깜짝이야. 소리치지 마. 너 목 상하고 나 귀 아퍼.”
놀란 것 치곤 태평한 대꾸였다. 테라의 꽉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단장은 선선히 부는 바람 속에 담배꽁초를 흘러넣었다.
“내가 아까 우리 길드의 위상이라고 했었지?”
테라는 반응 없이 분개한 표정이었다. 단장은 건조하게 말했다.
“우린 전과 달라. 더 이상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지 않아도 되고, 조합에다 의뢰 받으려고 굽신거리지 않아도 되고, 도시에선 따듯한 목욕물과 편안한 침대가 있는 그럴싸한 숙소에서 잘 수 있고……, 능력 없는 애송이에게 월급도둑이라고 구박할 필요도 없고.”
단장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비릿하고, 차가운 조소였다. 하지만 테라는 그게 자신을 향하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우리 길드의 위상이야. 훨씬 좋아졌지. 난 이걸 내가 잘해서라고 착각하지는 않아.”
단장의 비웃음은 스스로를 향했다.
“하지만 나는 단장으로서, 그게 어떤 책임을 져야하는 건지 알고 있어.”
단장은 다시 호주머니을 뒤적였다.
“너, 몇 급이지?”
“이제 2급 심사 준비하고 있죠.”
담배갑을 다시 꺼냈지만 담뱃잎 부스러기만 남았다. 단장은 입맛을 다시며 먼 곳을 바라봤다.
“많이 늘었다. 입단할 때는 키만 큰 멀대였는데.”
“단장님은 배 나온 아저씨였고.”
“젊으니까 잘하면 서른 즈음엔 1급 되겠지. 그런데 테라.”
테라는 제국민 평균보다 큰 키였지만, 단장은 평균보다 작은 키였다. 하지만 테라는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는 단장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너. 그 때 레이사가 한 거만큼 할 수 있겠냐?”
테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우리 길드 내에서, 레이사가 했던 만큼 할 수 있는 애가 있냐? 아니, 내가 요새 너무 바쁘다 보니까 진짜 몰라서 그래.”
“단장님.”
“알아, 안다고. 그런 규격 외랑 비교하는 건 무익한 비하고 자학이지. 우리 길드? 솔직히 말해서 수준급은 돼. 어디랑도 비빌 수 있어. 근데, 남들은 우리에게 레이사가 했던 걸 바라고 있어. 우리의 위상은 레이사가 해냈던 결과야.”
단장은 새삼스러운 진실을 얘기하는 건 아니었다. 테라가 그동안 외면했던, 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이야 소화할 만 한 것만 골라받고는 있는데, 제국이 갑자기 드래곤이라도 잡으라고 하면?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어. 저번처럼 대규모 게이트가 열리면?”
단장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던 테라는 천천히 누그러졌다. 아니, 정확히는 바스라져갔다. 움켜쥔 주먹은 허무하게 풀렸고, 긴장하던 등과 어깨는 느슨해졌다.
“정말 그래야…….”
“너는 하나만 봐도 되겠지. 나는 전체를 봐야 해, 테라.”
“……저는 봤어요. 그 때. 제가 옆에서 말렸잖아요.”
테라의 음침했던 목소리도,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다.
“살면서 그런 눈 처음 봤어요. 미워하는, 아니. 진짜 증오. 모든 걸 거부하고 증오하는 눈. 저를 보고 그랬단 말이에요.”
단장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건 테라였다.
“그때야 알았죠. 레이사는 우리를, 저를. 얼마나 싫어했던 걸까요? 길드 입단 하고 나서 그 때까지 어떻게 견뎠을까요?”
테라의 말은 느리게 이어졌다.
“솔직히 레이사가 언니라고 불러줬을 때 좀 좋았어요. 다 저보다 나이 많은 늙다리잖아요. 단장님 말하는 것처럼, 애인은 커녕 가족도 없는 저한테 누가 가깝게 굴었겠어요. 근데, 그때는 니가 진짜 여자냐고 뭐라고 했죠.”
단장은 별다른 말을 않았다.
“저 못 알아볼 때 엄청 뭐라고 했죠. 그러고 병원 가서 진단 받았을 때. 솔직히 좀 기뻤어요. 일선 임무는 안 뛸테니까. 그럼 계속 심부름 시키고 놀 수 있고, 다칠 것도, 죽을 것도 없이, 곁에 오래 있을 테니까. 엄청 이기적이죠?”
하지만 레이사는 그 이후로도 현장 임무에 열심이었고, 특출난 성과를 보여줬다.
그러던 중에, 제국 인근에 대규모 게이트가 열렸다.
“시간에 개입하는 능력자. 예, 없단 건 알아요. 근데, 말하고 싶었어요. 미안하다고. 담배심부름 시키고 앞에서 피워댄 거, 실력 없으면 신발 정리, 무기 정리라도 하라고 시킨 거. 다 미안하다고.”
자기는 왜 지금 레이사한테 잘해주는 걸까. 속죄? 반성? 가족애의 충당? 죄책감? 그도 아니면 순진무구한 소녀에 대한 지배욕?
테라는 속마음을 설명할 수 없었지만, 하나는 확실한 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 기억을 다시 심어준다는 거.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그 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단장이 말했다.
“잔인하지.”
단장의 긍정은 테라의 안정을 부르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한다.”
오히려 한층 추락하는 것 같은 테라였다.
“수첩은 가져가라고 빼놓은 거야. ‘레이사님의 기록’이라고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알잖아. 자기가 먼저 깨닫게 되면, 비싼 돈 주면서 기억 조작자도 부를 일 없겠지. 재수 없는 기억조작자도, 우락부락한 준 2급 여자의 칼 맞을 일 없을 테고. ”
차라리 고백이 더 큰 타격을 줄 거 같지 않아? 단장의 시덥잖은 농담은 아무도 웃기지 못했다.
“읽어봐서 알겠지만 예전에 걔는 틈나는 대로 공부까지 했더라. 네 말마따나 머리는 좋으니까. 많이 알려줘. 그게 레이사를 위한 거고, 우리를 위한 거야.”
테라는 자기가 단장이랑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대화는 곱씹을수록 참담한 기분만 들었다.
그저 걷다보니 길드원들이 보였고, 둘러보니 어느새 야영지였고, 걷다가 옷깃을 붙잡는 손에 멈춰 섰다.
“언니! 언니이이이!”
자기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테라는 고개를 아래로 꺾었다.
“언니! 내가 한참 불렀잖아아!”
테라는 반사적으로 뺨을 바라봤다. 여전히 빨갰다.
“나 기분 안 좋으니까. 목마 태워줘, 목마!”
왜 기분이 안좋은지는 차마 묻지 못했다. 목마는 자기가 타고픈 테라였지만, 하지만 기억을 잃기 전 레이사에게도 안하던 폭거였다. 군말 없이, 작고 여린 몸체를 번쩍 들었다.
“워후우우!”
등 뒤에 둘러맨 대검 탓에 조금 걱정했지만, 레이사는 용케 중심을 잘 잡았다. 테라는 레이사를 목에 태우고 천천히 걸었다.
“언니, 언니.”
테라는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었다.
“왜, 레이사.”
“레이사 님은 어떤 분이야?”
테라는 다리가 꼬여 그만 레이사를 떨어뜨릴 뻔했다.
“갑자기, 왜?”
“엄청 대단한 능력자라고 들었는데, 내가 물어보면 다들 얘기를 안해줘!”
기억을 잃기 전에 레이사는 길드의 위상을 드높이고 번영을 불렀지만, 그만큼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볼을 꼬집는 테라는 온건한 편에 속했다.
“아까는 우리 길드 드워프 아저씨 있잖아. 그 아저씨가 막 혼냈어! 그런 거 물어보지 말라고!”
혼난 거 치고는 천진하게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이었어? 능력은 뭐였어? 진짜 남자에서 여자가 된 거야? 그럼 막 남자처럼 키도 크고 근육도 많았어? 능력자였으니까 인기도 많았겠다! 그치?”
레이사의 말은 모두 의문이었지만, 명확한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길드 안에서 쉽사리 말할 수 없는, 어느 누구는 화제조차 허락지 않는 대화를 유일하게 허락한 테라에게 하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아이의 쫑알거림은 때때로 귀여웠지만, 가까이서 듣고 있노라면 짜증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 테라도 부정적인 감정이 켜켜이 쌓여갔다. 그건 자괴에 가까웠다.
“나도 레이사 님처럼 될 수 있을까?”
짜증은 정당성과 무관하게 외부로 표출할 수라도 있었다.
자괴는, 속을 빠르게 부패시켰다.
“나랑 레이사 님은 이름도 같잖아!”
테라는 우뚝 멈춰섰다.
“너야.”
“응?”
테라는 무너지듯 말했다.
“너야, 레이사.”
테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너는 기억을 잃기 전에, 네가 말하는 ‘레이사 님’이었어. 너랑 그 '레이사 님'은 다른 사람이 아냐. 남자였다가 아카데미에서 능력을 개화하면서 여자가 됐고. 길드에 들어와서 활약한 레이사가, 기억을 잃기 전에 너야.”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면하기에 무등 태우는 자세는 상당히 부적합했다. 테라는 단장이 말을 따르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견딜 수가 없었기에, 도망칠 수 없었고 뿌리칠 수 없었기에. 테라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참고 있던 말을 뱉었다.
당사자는 결코 바라지 않았겠지만, 용서가 없는 헛된 사과겠지만, 설령 그때로 돌아간들 용서해주지 않았겠지만.
테라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고, 감히 용서를 구하고 싶었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레이사는.
“에이, 언니!”
진즉 모든 기억을 불살랐다.
“이름 똑같다고 장난하는 거야? 언니까지 그러기야! 재미 없어, 언니!”
그 둘은 야영지와 조금 멀어졌다. 태양이 뉘엿거렸고 바람은 선선했다. 테라가 몸을 굽히면서 천천히 레이사를 내려줬다.
“활 쏘는 엘프 아줌마가 그랬는데, 나 능력자 자격 시험도 안봤다면서? 나 능력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레이사 님이랑 나랑 같을 수 있어! 하하하.”
두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 연신 테라를 나무라는 레이사였다.
“게다가 레이사 님은 남자였다가 여자가 됐잖아! 나 키도 엄청 작은데? 나 원래부터 여자잖아!”
레이사는 두 팔을 파닥거리며 꺄르륵거렸다.
“응? 제발! 누군지 제대로 말해줘, 언니! 언니?”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인 테라는 레이사와 눈높이가 같았다.
테라는, 자기를 돌아보는 레이사의 얼굴 표정이 왜 갑자기 바뀌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울어?”
레이사는 방금까지 활발함이 사라지고, 얼굴 한가득 불안함을 비쳤다.
“왜. 왜, 울어? 언니?”
레이사가 그렇게 묻고서야, 뺨에 흐르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어, 응? 그, 그러게…….”
말하고 나서 이유가 떠올랐다. 슬퍼서. 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특히 레이사를 앞에 두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테라가 망설이는 사이, 레이사가 더 빨랐다.
“울지 마!”
레이사가 와락 달려들었다. 레이사는 테라의 넓은 품을 꽉 안았다. 테라의 울음에는 소리가 섞였다.
“울지 마, 언니! 응? 뚝! 뚝, 그쳐!”
어른이 아이에게 해도 효과없는 말이 그 역의 관계에서, 더군다나 자기도 울먹인다면 더더욱 설득력과 강제력이 없었다.
하지만 테라는 그런 오류를 말할 수 없었다.
“어, 언니가! 어, 어른이 울면 어떡해……!”
그 둘의 나이 차라고 해봤자 손 하나를 넘기지 않았다. 레이사도 아이처럼 굴지만, 신분증에 적힌 나이론 어엿한 성년이었다.
하지만 테라는 그 사실을 지적할 수 없었다.
“아, 앞으로 안 할게! 절대로 안 물어볼게! 레이사님이 누군지, 아무한테도, 언니한테도! 절대로, 절대 안물어볼게! 일기도, 수첩도, 절대, 절대절대 안훔쳐볼게! 응? 응?”
기억 조작자를 초빙한다는 단장은 그 전에, 레이사가 자각하기를 원했다. 테라는 기억이 돌아온 레이사에게 사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테라는 레이사의 말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흐윽, 응? 울지마아…….”
레이사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테라는 레이사가 기대고 있는 자기 어깨에서 뜨듯한 눈물을 느꼈다.
“미안…….”
힘겹게 말했지만 테라도 모르지 않았다.
자기의 사과는 너무 늦었고, 들을 사람이 없었고,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서 테라는 두 팔로 레이사를 안아줬다.
“윽, 울지마아, 흐윽, 언니이…….”
레이사의 앙칼지고 높은 울음소리는 쉽게 흩어졌다. 테라는 동굴에서 나오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온몸으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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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앙은 기표, 표먼적인 언어. 즉 레이사라는 이름.
시니피에는 기의, 언어에 담긴 의미. 여기선 '레이사'라는 '인물' - 기억, 존재, 의미 등등.
그리고나서 클라이막스나 1부 종료 즈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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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제 깨달았아요. 테라 언니.”
“레이사! 뭐해! 빨리 와!”
“제 능력은 기억, 추억을 댓가로 활용한다고요.”
테라는 숨이 멎는 거 같았다. 그런 기분을 아는지, 레이사는 싱긋 웃었다.
“그 레이사 님도, 아마 이렇게 말했겠죠?”
테라는 그 입을 막고 싶었다. 너를 다시 잃을 수 없다고, 자기에게 더한 죄책감을 주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 말을 자르듯이, 레이사는 검을 뽑았다.
“고마웠어요.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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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어떨까 했는데
괜히 재미 없이 지루하고 길기만 하고 TS는 잘 드러났을런지 모르겠고 순수 창작이 아니라 피드백 요청하기도 뭐하고
좋은 소재 이상하게 비튼게 아닌가 몰루겠음..
하여튼 재밌게 봐주셨음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