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밤은 느긋하기에, 서두르는 건  언제나  사람이다.


요즈음은 꽤 규칙적인 삶을 보냈다.

오전 강의가 있는 날에는 반드시 한 시간 반 정도 일찍 일어나고, 이부자리를 곱게 개어 정리한다. 곧이어 세수와 양치를 마친 후, 커피를 사기 위해 사십분 일찍 집을 나서는 일이 잦다. 빨래는 목요일에 한번. 저녁은 제시간에 꼭 챙겨먹고, 8시 전후로 씻는다.


이런 삶에 리듬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이 꽤 효과가 있었는지, 여유가 생기고, 몸에 생기가 돈다.

때 없이 말 걸어오던 두통은 잠잠해졌고, 감기에라도 걸려본 기억을 더듬는 일이 어렵다. 길을 걸을 때에 땅보다는 하늘에 눈을 맞추고, 눈꺼풀의 무게를 기억해내기 쉬워졌다. 우울을 따분한 농담거리 삼았고, 불안은 형식적인 안부인사가 되었다. 허물을 벗어낸 느낌이다. 어쩌면 박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내 삶의 일정 부분을 통제하는 일이 불안을 해소한다고 믿었다.

나는 내 몸 안에 자그마한 통이 있다고 생각했었고, 그 안에 묵은 때와 같은 불안이 끊임없이 흘러나와서 통 안에 고인다고 믿었다. 나는 언제나 불안이 고이는 것을 경계했다. 내 불행의 근거는 불안이었고, 불안의 증명은 불행이었다.

불안은 식도에서 역류하는 담즙과도 같다.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예고없이 나온다. 머금을 순 있어도, 기꺼이 삼키지는 못한다. 끝끝내 뱉게 되는 것까지도 닮아있는 것이다.

가르치지 않아도 개가 수영하는 법을 알듯이, 배우지 않아도 아이가 걸음마를 떼게 되는 것처럼.

나는 어른이 되면, 저절로 불안을 삼키는 법을 배운다고 믿었다.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나 삼촌 이모, 큰아버지들은 큰 불만이나 걱정없이 사는 것 같아 보였기에, 어른이란 참으로 굳세고도 낯선 단어들을 마음속에 하나씩 품고 사는 사람들이구나. 저 쓰고 질긴 것들을 기어이 삼킬 수 있는, 내 어린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모든 날카로운 것들을 견뎌내기 마땅한 건강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금에서야 생각이 참 어렸구나-싶지만, 당시에는 어른에 대한 동경은 굳건한 것이었다. 친구관계에 관한 것, 기말시험 성적에 관한 것과 같은 고리타분하고 시답잖은 고민들은 때때로 나를 둘러싼 세계의 윤곽들을 흔들리게 할 만한 불안들이었기에, 불안을 품으며 살갗을 부대끼고 살아가는 것 자체에 거리낌을 느꼈다. 불안의 질감은 그토록 불쾌한 것이었다.


성인이 되고서도 변함은 없었다. 불안은 크기와 형태만 바뀌었을 뿐 불쾌한 질감은 여전했다. 떠나간 불안이 끈질기게 달려와 엉겨붙고, 그대로 거푸집에 녹여 굳힌 채 모양만 바뀌어 다시 달라붙었다. 열아홉의 불안, 스물의 불안. 스물하나에 다녀온 군대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매일 불안을 게워내는 날들의 연속에서, 고민과 불안은 체념이 되고,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목이 빠져라 달력만을 쳐다보던 일었다.

전역 이후에도 불안은 혹처럼 달라붙어왔다. 중학교때부터 알던 친구는 간호학과에 다니는데, 4월 즈음에 병원실습을 나간다고 한다.

또 한 친구는, 휴학계를 내고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등학교때부터 알던 친구였는데, 어릴 적부터 음악을 하고 싶어했던 아이었다.

빌라 앞 놀이터에서 공만 차며 놀기만 해도 행복했던, 어린아이였던 우리들은 스물을 넘었고, 덩어리 진 채 달라붙은 허물을 벗어 고이 접어 내려놓고 떠나야만 한다. 아홉살의 불안, 열네살의 불안, 스물하나의 불안들을 그저 그곳에 두고 떠나야한다. 삼키지 못하고 목이 메인 채로, 언젠가는 기꺼이 목젖 너머로 꿀꺽 삼켜 넘길 수 있을 때를 조용히 기다리며 스물 너머로 걸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불안을 삼키는 법을 알지 못한다. 내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탓일까, 여전히 어린아이였던 나에게 남겨져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있는 것 때문일까.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경계에서 난 어디쯤에 머물러 있을까. 아이보다 어른에 더 가까워지기까지에 얼마만큼의 세월을 더 들여야 할까.


분명 힘든 일일 것이다. 일찍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개고, 양치와 세수를 한 뒤에는 커피를 사기 위해 이르게 집을 나서고, 목요일마다 묵은 빨래를 해치우거나 저녁을 챙겨먹고 8시쯤에 규칙적으로 씻는 일 따위로는 긁어내지지 않을. 해결보다는 해소에 가까운, 불안을 삼키는 것보다는 게워내는 것에 더 가까운 일이기에. 결국 또 내게 남은 일이란,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을 상상하고, 습기에 젖어 곰팡이 피는 불행들을 긁어내며,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낱말들을 집어삼키고, 다시금 구역질을 해대는 것.

그리고 다시 아침을 맞이하고, 모든 이름없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불안을 삼킬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대학과제로 에세이써보라길래 수필비슷한건가 싶어서 써봣읍니다 여기도 생각나서 함 올려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