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동생이 자기 친구를 때리고 있었다. 몇 명인가가 동생과 맞는 녀석을 둘러싸고 때리는 것을 구경 중이었다. 퍽. 퍽. 소리가 경쾌하다. 동생은 사람을 참 잘 때린다. 맞는 녀석도 참 잘 맞는다. 저렇게 맞는데도 소리 한 번을 내지 않는다. 내가 알기론 맞는 녀석도 내 동생만큼 잘 나가는 녀석이다. 나는 동생이 맞는 것도 본 적이 있다. 동생도 소리 한 번을 내지 않았다. 일진 노릇도 하기 참 힘들겠구나 싶었다. 야, 성민아. 저거 니 동생 아니냐. 옆에 있던 친구가 나를 콕콕 찌른다. 나도 이 녀석을 때릴 수 있을까하고 잠깐 상상한다. 두리번거리던 녀석이 나를 본다. 나를 아는 것 같은 눈치다. 나는 처음 보는 녀석이다. 동식이네 형, 안녕하세요. 녀석이 크게 말한다. 형도 와서 보실래요. 친구는 무척 보고 싶어 했다. 나는 가던 길을 간다. 저런 구경 쉽게 못하는데. 친구가 작게 중얼거리며 나를 뒤 쫒아왔다.

 

  컨테이너 박스 세 개가 벽처럼 일렬로 세워져 있다. 철거를 위해 삼 주 전에 들어온 용역사무소다. 험상궂게 생긴 용역들이 간이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운데에 놓인 뚜껑이 없는 드럼통에서는 불이 피어오르고 있다. 용역들의 대부분은 담배를 피우고 있고 네 명 정도가 모여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곳을 지날 때면 숨을 죽이게 된다. 나는 용역들을 흘깃흘깃 훔쳐본다. 친구는 아예 용역사무소 쪽으로 눈을 두지도 않는다. 용역 하나와 눈이 마주친다. 산 속에서 곰을 마주친 것처럼, 숨이 멎는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걷는다.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야.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린다. 친구의 표정을 본다. 내가 원망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눈이 마주쳤던 용역을 본다. 용역이 오라는 손짓을 한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용역에게 다가가자 주변의 시선이 내게로 몰린다. 용역의 앞에 선다. 몇 살이냐. 용역이 물었다. 열여덟이요. 내가 말했다. 근처 사냐. 용역이 물었다. 네. 용역이 내 팔을 잡는다. 나는 움찔한다. 용역의 시선이 내 몸을 훑는다. 많이 못 먹고 다니냐. 내 마른 체형 때문에 그렇게 물은 모양이었다. 나는 용역의 팔을 봤다. 근육질의 구릿빛이었다. 팔뚝에 내 머리도 들어갈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역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나에게 오천 원을 건네주었다. 오천 원은 때에 절어있었다. 담배는 피지 마라. 용역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돈을 받았다. 그리고 친구에게로 돌아갔다. 내 뒤에 꽂히는 시선들이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 들어올 때면 매일 얼굴이 구겨진다. 악취 때문이다. 우리 동네가 요 근방의 유일한 상가 촌이 아니었다면, 우리 동네는 진즉에 망했을 것이다. 높게 매달린 ‘청류동 거리’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의 입구를 알리는 간판이다. 글자에 칠해진 빨간색 페인트가 너덜거린다. 입구를 통과한다. 상가들이 양 옆으로 늘어서있다. 금방 무너질 듯 불안한 상가들에 간판들이 매미처럼 붙어있다. 문들이 호흡을 하듯 사람들을 먹고 뱉어낸다. 친구네 집인 철물점에 도착했다. 친구 아빠가 화를 내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왜소한 남자가 문 밖으로 쫓겨 나온다. 남자는 서류를 들고 있다. 우리 동네에 정장을 입고 오는 사람은 없다. 옷에 악취가 배기기 때문이다. 남자는 버럭 화를 내며 철물점 간판을 째려본다. 들고 있던 서류를 가방에 넣고 다른 서류를 꺼낸다. 그리고 옆에 있는 세탁소로 들어간다. 친구는 남자가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가게 문을 열고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좀 더 걷는다. 단 하나의 가게만이 불이 꺼진 채로 있다. 신흥 전파사다. 문이 잠겨 있다. 창문을 들여다본다. 전선 다발들과 선풍기와 스피커가 뒤섞여있다. 작업대에 붙어 있는 가족사진이 보인다. 남자 한 명과 아이 두 명이 찍혀 있다. 남자는 드라이버를 들고 있고, 아이 두 명은 눈에 불이 들어오는 장난감을 들고 있다.

  시선을 가게 가운데로 옮긴다. 사진 속에 있던 남자와 아이 두 명이 보인다. 남자는 라디오의 커버를 열고 기판을 들어낸다. 니퍼를 들고 전선을 잘라낸다. 부품을 빼고 새 부품을 끼워 넣는다. 신속하고 정확하다. 아이들은 남자의 뒤에서 눈에 불이 들어오는 장난감을 들고 노는 중이다. 큰 아이가 장난감의 등 뒤에 달린 버튼을 두 번 누른다. 눈의 색깔이 빠르게 바뀐다. 빨강, 파랑, 초록, 보라 순이다. 작은 아이도 버튼을 두 번 누른다. 눈이 강한 빛을 내뿜으며 깜빡거렸다. 아이들은 서로의 눈에 장난감을 들이댄다. 남자는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온다. 남자는 기판을 집어넣고 커버를 닫는다. 아이들이 남자의 등 뒤에 다가온다. 큰 아이가 먼저 말한다. 아빠, 성민이 꺼가 더 좋은 거지? 작은 아이도 말한다. 아빠, 동식이 꺼가 더 좋은 거지? 아이들은 서로를 노려본다. 작은 아이가 먼저 말한다. 야, 김성민. 지난번에 나 물 로켓 날리는 거 못 봤냐? 학교에서 1등 했거든? 아빠는 나한테 더 좋은 거주거든? 큰 아이는 우습다는 표정이다. 야, 김동식. 나 고무동력기 시 대회에서 3등한 거 못 봤냐? 트로피도 있잖아. 나한테 더 좋은 거주거든? 남자는 웃으면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녀석들, 아빠가 만들어 준 게 그렇게 좋으냐? 아이들은 동시에 대답한다. 응!

 

  전파사에서 발걸음을 옮긴다. 돌다리가 나타난다. 돌다리 아래로는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나는 강이 흐른다. 돌다리엔 난간이 없어서 취한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다 종종 강에 빠지곤 한다. 검은 물은 가로등 불을 아주 잘 반사한다. 강은 동네 악취의 원인이다. 가로등 불이 비춘 곳은 비누거품과 떠내려가는 쓰레기들이 보인다. 노부부 한 쌍이 강을 내려다본다. 예전에는 물이 맑아서 청류동(靑流洞)이었는데. 노인이 혀를 쯧 찬다. 돌다리를 건너면 다시 상가들이 나온다. 가게 안은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풀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고기 굽는 냄새와 국밥 냄새, 사람들의 술 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하다. 그 곳을 빠져나오면 슬레이트 지붕들과 담쟁이에 잔뜩 뒤 덮인 담장들이 나타난다. 그 집들 한 가운데에 교회 첨탑이 우뚝 솟아있다. 교회 첨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우두머리 같이 느껴진다.

  보라색 소파가 보인다. 우리 집에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나는 우리 집 대문 앞에 도착한다. 대문이 뻑뻑해 잘 열리질 않는다. 힘껏 당기자 거친 쇳소리가 나며 문이 열린다. 나는 고개를 잔뜩 숙이고 대문을 통과한다. 대문의 높이는 내 키보다 낮아 머리를 부딪치기 일쑤다.

  집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안방에서 아빠와 엄마의 실랑이 소리가 들린다. 바닥에 깨진 그릇이 몇 개인가 있다. 나는 빗자루를 쓸어 그릇 조각들을 쓰레받기에 담는다. 부엌에 놓인 탁자를 본다. 어제까지 놓여 있던 철거 계고장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 방에 들어가 교복을 갈아입는다. 나는 과제를 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486 컴퓨터를 킨다. 컴퓨터가 몸을 부르르 떤다. 아빠가 처음 목돈을 만들어 산 것이다. 용하게 아직까지도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다.

  지금 엄마는 빼빼 마른 몸을 소파 밑 깊숙이 숨기고 있을 것이다. 소파 밑에 들어간 엄마는 마치 소라게 같다. 소파의 왼쪽은 장롱에, 오른쪽은 벽에 막혀 있다. 아빠는 소파 안에 들어간 엄마를 때리려고 트로피를 든다. 고무동력기 시 대회 3등 트로피다. 트로피의 길이는 짧다. 엄마가 소파 끝까지 몸을 밀어 넣고 잔뜩 웅크리면, 아빠가 소파 밑으로 아무리 팔을 뻗어도 트로피는 엄마의 손등을 간신히 스친다. 내가 고무동력기를 좀 더 잘 날렸거나, 아빠가 고무동력기를 좀 더 잘 만들었다면 엄마의 머리는 진즉에 박살이 났을 것이다. 아빠가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은 철거 계고장이 날아온 날이다. 그 후로 쌓이는 스트레스는 주먹을 휘둘러도 해소 되지 않았다. 결국 아빠는 트로피를 들었다. 엄마는 재빨리 소파 밑으로 숨었다. 전파사는 손님이 점점 줄었다. 아빠는 일찍 들어오는 날이 잦았다. 엄마는 손님이 없는 날이면 좀 더 오랜 시간 동안 숨어 있어야 했다. 동생은 새벽 2시에 들어와 씻은 후에 바로 잠을 자고 새벽 5시에 집에서 나갔다. 우리 집은 누가 봐도 실패한 가정이었다.

  안방에서 소파 커버를 때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비명을 지른다. 쿵. 쿵. 아빠가 트로피로 커버가 벗겨진 앙상한 소파를 내려찍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이 몇 번째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파가 버티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상 위에 있는 쓰레기를 들고 쓰레기통으로 갔다. 쓰레기통 안에 찢어진 철거 계고장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 집이 부서지는 상상을 했다. 포클레인이 우리 집 지붕을 부순다. 용역들이 남아있는 벽을 부순다. 아빠는 망연자실해 하고 엄마는 엉엉 운다. 동생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무너지는 집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어디로 갈까. 뭘 먹고 살까.

 

  밤을 샜다. 아빠와 엄마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이 철거일인 모양이었다. 동생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집은 꼭 들어오던 동생이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았다. 이 집에서 머리를 감는 게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했다. 동네는 조용했다. 살벌한 공기가 돌았다. 돌다리를 건너자 모든 동네 사람들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돌다리 뒤로 아무도 보내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은 듯 했다. 아빠와 엄마가 보였다. 사람들은 서로 몇 마디씩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아빠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아줌마들과 귓속말을 주고받을 뿐, 아빠에게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같이 등하교를 했던 친구는 하얀 머리띠를 메고 각목을 들고 있었다. 우리 집이 보통 집안만 되었다면 나도 저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혼자 등교하기로 했다.

 

 용역사무소에 도착했다. 살벌한 공기가 돌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제는 보이지 않았던 포크레인 네 대가 보였다. 컨테이너 박스 벽에 나란히 세워진 오함마가 눈에 들어왔다. 용역들은 모두 맹수 같은 눈빛이었다. 나에게 오천 원을 주었던 용역은 용역사무소의 대장 쯤 되는 것 같았다. 용역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용역에게 인사를 했다. 그 상황에서도 용역은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익숙한, 하지만 멀게 느껴지는 모습 하나가 내 옆을 지나갔다. 동생이었다. 동생은 용역들에게 인사를 했다. 용역들은 동생을 보기만 할 뿐, 인사를 받아주지는 않았다. 동생은 용역들과 섞이지 못하고 떨어져 있었다. 동생은 해머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토요일이라 학교에는 4시 반까지만 있으면 되었다. 학교에 와서는 잠이 들었다. 눈을 뜨고 감고 할 때마다 시간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자고 깰 때마다 무너질 누군가의 집을 상상했다. 우리 집은 이미 부서졌을지도 몰랐다. 혼자 하교하는 길은 너무나 조용했다.

  마을 입구를 지나자 넓어진 마을이 보였다. 돌다리를 건너기 전까지 보았었던 모든 상가들이 무너져있었다. 건물의 잔해와 가게의 물건들이 무분별하게 뒤섞여있다. 아직 허물어지지 않는 벽들이 조각조각 솟아있다. 벽에 붙어있는 달력, 시계, 옷, 사진들이 보였다. 벽들은 삶의 파편들같이 보였다. 멀찌감치 포클레인 네 대가 줄지어 서 있고, 포클레인 양 옆에는 오함마를 든 용역들이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벽에 몸을 숨기며 앞으로 걸어갔다. 포클레인의 측면과 돌다리의 측면이 보였다. 동네 사람들과 용역들은 돌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돌다리의 폭이 좁아 포클레인이 쉽게 지나갈 수 없는 듯 했다. 동네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는 포클레인을 마음만 먹고 밀어붙이면, 포클레인은 전복되어 강에 빠질 것이다. 강에 빠질 수 있는 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악취가 나는 검은 물에 빠지고 싶지는 않을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과 용역들은 서로 으르렁거렸다. 동네 사람들이 용역들에게 물건을 집어던졌다. 용역들은 욕설을 퍼붓는 것이 전부였다. 용역들이 포클레인을 버리고 다리를 건넌다면, 훨씬 우세인 것은 동네 사람들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누군가가 나왔다. 아빠였다. 아빠의 손에는 기름통이 들려 있었다. 아빠는 돌다리 한 가운데에 섰다. 아빠는 절규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몸에 기름을 끼얹었다. 동생은 태연하게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빠가 내던진 기름통이 강물에 떨어졌다. 아빠는 라이터를 꺼냈다. 아저씨들이 세 명이 나와 아빠를 뜯어말렸다. 아빠 손에서 라이터가 빠져나갔다. 아저씨들은 아빠를 뜯어말리면서 말했다. 아, 김 씨! 좀 가만히 있어! 김 씨는 가만히 있는 게 제일 도와주는 거야! 아빠는 붙잡힌 몸을 버둥거렸다. 이거 놔아아아. 아빠를 잡고 있던 아저씨 중 한 명이 강물에 빠졌다. 떨어져서 아빠를 지켜보던 엄마는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를 두리번거렸다. 나와 엄마의 눈이 마주쳤다. 엄마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도와줘. 엄마가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나는 앞 뒤 가릴 새 없이 마을 입구 쪽으로 내달렸다. 달리는 동안 일부러 세게 발을 내딛었다. 내가 건물 잔해를 밟는 소리가 아빠의 목소리보다 크길, 그래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길 바랐다.

 

  발이 가는 데로 걸었다. 정신없이 방황하다보니 어둑해져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꿀렁이는 주황색 불빛이 보였다. 불빛은 드럼통에 담겨 있었다. 나에게 오천 원을 주었던 용역의 얼굴과,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나방이 된 것처럼 불빛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불빛 주위를 에워싸고 손을 쪼이고 있었다. 철제 의자의 다리에 내 발이 걸렸다. 나는 힘없이 털썩 넘어졌다. 누군가가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았다. 나에게 오천 원을 주었던 용역이었다. 여기서 뭐해. 용역이 물었다. 나는 말했다. 여기서 재워 주실 수 있나요.

  용역은 일을 한다는 조건 하에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용역은 일을 해야 한다. 라고 내게 말했다. 용역은 나를 우려하는 듯이 보였다. 내가 그 동네에 산다는 것을 마음에 둔 모양이었다.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안다고 용역에게 말했다. 용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일하는 고등학생 중에 김동식이라고 있지 않나요. 내가 물었다. 용역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아, 그 봉……. 이라고 하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나는 용역들 사이에 끼지 못하던 동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숙소를 같이 쓰게 해주십시오. 내가 말했다. 무슨 사이인데? 용역이 물었다. 동생입니다. 내가 말했다. 용역은 그 요구도 어렵지 않게 들어주었다. 나는 용역에게 고개를 숙였다.

  용역은 나를 용역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잔뜩 긴장한 탓인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말이 나왔으나 모기 앵앵 거리는 소리 같았다. 용역들은 사나운 인상을 풀고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 같아보였다. 나는 동생을 보았다. 동생의 눈이 반짝였다. 용역은 나에게 빈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다. 나는 빈 의자에 앉았다. 시선이 나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용역은 내일 할 일에 대해서 말했다. 우리는 내일 강을 건넌다. 용역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돌다리 밑에 흐르는 강을 보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용역은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원의 반은 강을 건너고, 나머지 반은 포클레인과 함께한다. 강물은 턱까지 차오를 것이다. 강을 건너 도착하면 집을 부수기 시작한다. 그러면 주민들은 포클레인에 신경 쓰기보다는 무너지는 집을 지키려고 달려들 것이다. 그 때 포클레인이 돌다리를 건넌다. 주민들이 포클레인에 달려들 수 있으니, 포클레인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최대한 주의하도록. 강을 건넌 사람들은 포클레인이 강을 건널 때까지 무조건 버텨라.

  용역들이 한 곳으로 모였다. 강을 건널 사람들과 포클레인과 함께할 사람들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나와 동생은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 속했다. 강을 건너게 된 용역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강을 건너게 된 사람들과 포클레인과 함께하는 사람들 사이에 마찰이 조금씩 일어났다. 그때 용역이 아이스박스를 가져왔다. 용역들의 눈길이 아이스박스로 쏠렸다. 용역은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아이스박스 안에는 고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용역들의 표정이 풀렸다.

  고기를 먹으면서 용역들은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고, 요새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요즘 유행하는 유행가를 부르게 시키기도 했다. 분위기 때문인지 어렵지 않게 부를 수 있었는데, 잘 부르지 못했기 때문인지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다. 여자 친구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나는 여자와 인연이 없는 편이었다. 때문에 그 이야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대신 용역들은 서로 자신의 여성 편력을 자랑하였다. 나에게 오천 원을 주었던 용역에게 오천 원을 왜 주었는지 물어보았다. 용역은 지갑에서 증명사진을 꺼냈다. 내 또래 쯤 되어 보였다. 아들 생각나서 그랬어. 용역이 말했다. 용역들이 가장 많이 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자신들의 가족사진이었다. 그들은 아들 험담을 하기도 하고, 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자랑하기도 하고, 아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말해주었다. 다들 마지막에는 용역일이 끝나면 나오는 돈으로 가족들과 할 일을 얘기해주었다. 외식을 하거나, 선물을 사주거나, 놀이 공원에 가거나 하는 소소한 것이었다. 나는 아빠도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고 다녔을까. 하고 생각했다.

 동생이 보이질 않았다. 오줌이 마려워 외진 곳에 갔을 때, 나는 동생을 볼 수 있었다. 혼자였다. 동생은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접시에 고기를 담아 동생에게 가져갔다. 뒤에서 어깨를 콕콕 찌르자 동생이 움찔거렸다. 돌아보지도 않았다. 평소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동식아. 내가 소리를 내어 부르자 동생은 그때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형. 동생이 말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나는 접시를 동생에게 내밀었다. 동생은 약간 망설이더니 고기를 집어먹었다. 몇 번 우물거리더니 접시를 입에 대고 고기를 잔뜩 우겨넣었다. 많이 배고팠던 모양이었다.

  용역일 시작한지 얼마나 됐어? 내가 물었다. 삼 개월. 용돈 벌려고 시작했어. 일진 짓 하는 게 보통 돈 들어가는 게 아냐. 동생이 말했다. 왜 혼자 있어? 내가 물었다. 동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기 싫은 것 같아 보였다. 여기 사람들 되게 친절하던데. 내가 말했다. 처음엔 나한테도 그랬어. 동생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울분을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큰일을 하나 해치우고 나면 여기 사람들이 도박을 해. 오늘 사람들한테 형 소개시켜줬던 그 용역 있지, 그 사람이 나랑 해보자고 하는 거야. 근데 왠지 모르게 계속 잃더라고. 불안했지. 그래서 안한다고 하니까, 중도에 빠지면 안 된다고 하는 거야. 남자라면 끝을 봐야한다고. 그래도 빠지겠다고 하니까 그걸 구경하던 아저씨들이 폭력을 휘두르겠다고 했지. 결국 돈을 다 잃었고, 당장 밥도 못 사먹는 처지가 됐어. 그날 새벽에 그 용역 지갑에 손을 댔지. 내 돈만 찾아갈 생각이었어. 그러다가 걸렸고. 난 그 때부터 그냥 도둑놈이야. 여기선 도저히 잘 수가 없어서 집에 들락날락 거렸던 거야. 어제는 새벽부터 준비를 해서 안 들어간 거고. 동생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동생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이제부터 내 옆에서 자. 나랑 같이 움직이고. 내가 말했다. 동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과 함께 숙소로 쓰는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동생을 보자 사람들은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생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구석에 이불을 폈다. 사람들은 내가 이불을 핀 자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이부자리를 피려고 했다. 네가 벽 쪽에 누워야겠다. 내가 말했다.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자리에 누웠다. 동생은 쭈뼛거렸다. 가까이 오기만 해. 한 명이 동생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동생은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동생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때서야 동생은 이불 위에 주저앉았다. 곧 불이 꺼졌다. 용역들은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고서야 조용해졌다. 잠이 쉽게 오질 않았다. 동생이 계속해서 뒤척거렸다. 자냐. 나는 동생에게 물어보았다. 안잔다. 동생이 말했다. 동생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와 동생은 얼굴을 마주했다. 오랜만이었다. 앞으로 살면서 동생과 같이 있거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 뒤로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편안했다.

 

  아침이 되었다. 용역들은 다들 비장한 얼굴로 돌다리 앞에 섰다. 동네 주민들의 얼굴도 같았다. 용역들이 반으로 갈라져 강 쪽으로 내려갔다. 나도 용역들을 따라 강으로 향했다. 강에 발을 담그자 꺼림칙한 이물감이 몸을 감쌌다. 한 발 한 발 강으로 들어갈 때마다 악취는 점점 강해졌다. 강물은 턱까지 차올랐다. 강을 건너는 우리를 막기 위해 주민들이 강 쪽으로 내려왔다. 주민들과 몸싸움에 져서 강에 빠지면 코와 입으로 물들이 들어올 것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몸이 물 밖으로 서서히 드러났다. 옷이 물에 젖어 몸이 무거웠다. 우리에게 다가온 주민들이 표정을 잔뜩 구겼다. 나는 물에 젖은 내 몸을 보았다. 더 이상 더러워질 수 없어 보였다. 용역들과 주민들의 몸싸움이 일어났다. 물에 빠지지 않은 사람보단 물에 빠진 사람이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주민들은 쉽게 몸싸움에서 밀렸다. 주민들이 풍덩풍덩 강에 빠졌다. 용역들은 파죽지세로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내 앞에 하얀 머리띠를 멘 사람이 나타났다. 같이 등하교를 했던 친구였다. 친구는 나를 향해 각목을 휘두르려 했다. 확 씨. 옆에 있던 용역이 오함마를 들어올렸다. 친구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용역 중 한 명이 벽을 향해 오함마를 휘둘렀다. 벽에 균열이 생겼다. 아줌마 한 명이 자기가 맞은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주민들이 벽을 부수는 용역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른 용역이 오함마를 휘둘러 주민들을 위협했다. 주민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체 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벽이 무너지고 걸려있던 것들이 쏟아졌다. 오함마를 벽을 때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동생은 가장 열심히 오함마를 휘둘렀다. 평소에 쌓인 것이 많았던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부수는 것이 즐거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동생이 웃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용역사무소에서는 잔뜩 움츠리고 눈치를 살피지만, 동생은 역시 일진이었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다. 주민들은 용역들을 막기 위해 달려들기도 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기도 하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용역들에게 몰린 틈을 타 포클레인들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주민들 몇 명이 달려들었지만 용역들을 막기엔 부족했다. 다리를 건넌 포클레인들이 포크를 높게 들었다. 포클레인들이 거인의 사지처럼 보였다. 포클레인이 지붕을 깔아뭉갰다. 송판 부서지듯 지붕이 무너졌다. 무너진 자리에서 먼지인지 가루인지 모를 것이 피어올랐다. 나는 우리 집을 향해 걸어갔다.

 

  보라색 소파가 보였다. 집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나는 우리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과 단절된 듯 집 안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함마를 쥔 손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수도꼭지를 향해 오함마를 휘둘렀다. 수도꼭지가 비틀렸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오함마를 한 바퀴 빙 휘둘렀다. 가족들이 쓰던 수저통이 날아가며 수저들이 흩어졌고 그릇들과 장식장 유리창이 부서졌다. 그 다음엔 내 방으로 들어갔다. 옷걸이를 부수자 걸려있던 옷들이 아래로 쏟아졌다. 책장을 향해 오함마를 휘둘렀다. 책장이 앞으로 기울었다. 문제집, 음악 시디, 읽었던 책들과 사진첩들이 갈 곳을 잃은 채 바닥에 뒹굴었다. 책상을 부수고 컴퓨터를 향해 오함마를 휘둘렀다. 파삭 소리가 나며 전기가 튀었다. 숨이 거칠었다. 안방으로 들어섰다. 트로피가 보였다. 트로피만 보였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트로피를 향해 오함마를 휘둘렀다. 트로피 윗부분이 날아갔다. 완전히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몇 번이고 휘둘렀다. 나는 소파 밑을 보았다. 엄마가 소파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엄마는 안심한 표정이었다. 나는 소파에 다가가 소파 뒤 벽을 향해 오함마를 휘둘렀다. 벽이 무너지고 햇빛이 들어왔다. 엄마는 머리를 다시 집어넣고 소파 뒤로 빠져나갔다. 일어선 엄마가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가도 돼. 내가 말했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걸음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엄마의 모습이 흩어지며 사라졌다. 부서진 벽 너머로 보이는 집을 포클레인이 깔아뭉개고 있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나는 집을 빠져나와 벽을 향해 오함마를 휘둘렀다.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휘둘렀다. 혹여 조금이라도 틀이 남는다면 집이 다시 세워질지도 몰랐다. 우리 가족이 다시 뭉칠 수 없도록 가정의 틀을 철저하게 파괴해야 했다. 포클레인이 우리 집 지붕을 깔아뭉갰다. 그 뒤에도 나는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몇 달이 흘렀다.

  겨울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나는 동생과 함께 철거를 계속 했다. 아빠와 엄마는 우리를 찾지 않았다. 찾을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용역사무소는 계속해서 옮겨졌다. 집을 부수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놀이터에서 누군가 쌓아놓은 모래성을 짓밟을 때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두 달 까지였다. 그 후 나는 기계처럼 집을 부수었다. 동네 하나를 다 부술 때마다 용역사무소에서는 도박이 이루어졌다. 나에게 오천 원을 주었던 용역은 도박의 중심이었다. 동생은 용역들이 도박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표정이 달라졌다. 내가 손목을 잡아끌면, 동생은 비수를 품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네 하나를 다 부수고 난 뒤였다.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알아서 들어오겠지, 생각하고 용역사무소로 발을 옮겼다. 용역사무소에서는 도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에게 오천 원을 주었던 용역은 웃으면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 용역에게 말을 걸자 용역은 사무실에서 급여를 건네주었다. 나는 숙소에 들어가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번 돈으로 가장 먼저 엠피쓰리를 구입했다. 음악소리가 충분치 않았다. 버튼을 눌러 볼륨을 높였다. 소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엠피쓰리가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엠피쓰리를 꺼내어 화면을 보니 제일 큰 소리로 되어있어 소리를 높일 수 없는 상태였다. 요새 주위가 조용하다고 생각했는데, 귀가 굉장히 나빠진 모양이었다. 이어폰을 빼고 눈을 감았다. 한 동안 잠이 오질 않았다. 누군가 내 주머니를 뒤지는 느낌이 들었다. 벌떡 일어나 눈을 떴다. 동생이 앞에 있었다. 동생의 눈이 붉었다. 뭐하냐. 내가 말했다. 돈 내놔. 동생이 말했다. 도박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다 잃었냐. 내가 말했다. 내놔! 동생이 소리쳤다. 좀 따지 그랬어. 동생이 내 뺨에 주먹을 꽂았다. 얼얼했다. 나는 동생을 밀쳐내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동생이 뒤를 쫒았다. 주변 용역들이 나와 내 동생을 보고 킬킬거렸다. 동생은 나를 끝까지 쫒아왔다. 내가 지쳐 숨을 헐떡거리자 동생은 나를 쓰러뜨렸다. 동생에게 몇 대를 얻어맞았다. 내놔. 동생이 말했다. 교통비는 좀 남겨줘. 나는 그렇게 말하고 받은 급여를 동생에게 건넸다. 동생은 나에게 이만 원을 던졌다.

  나는 부은 뺨을 어루만지며 발 가는 데로 걸었다. 엄마의 도와달라는 말을 무시하고 도망쳤을 때가 떠올랐다. 어디든 가야했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어디로 가야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익숙한 곳은 청류동 뿐이었다. 표를 끊으니 만 원이 남았다. 버스에 몸을 맡겼다.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으로 향했다. 청류동 방향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막차만이 남아있었다. 버스는 쉼 없이 덜컹거렸다. 버스에서 내렸다. 청류동은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곳을 향해 걸었다. 공사장으로 들어갈 수 없게 막는 것은 안전바 하나뿐이었다. 안전바가 차량을 통제하는 곳이 마을 입구 쯤 될 것이다. 동네의 예전 풍경을 떠올리면서 걸었다. 입구를 통과하면 양 옆으로 상가가 펼쳐져 있다. 신흥 전파사를 지나고, 돌다리를 건너고, 또 상가들이 펼쳐져 있고, 슬레이트 지붕에 담에는 담쟁이가 잔뜩. 그리고 좀 더 걸으면 보라색 소파가

 

  남아 있었다. 인부들이 앉아서 쉴 때 사용하려고 남겨둔 모양이었다. 우리 집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타워 크레인이 있었다. 타워 크레인을 올려다보았다. 높았다. 공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주위는 철골들과 시멘트뿐이었다. 추위를 막아줄 만한 곳은 타워 크레인 조종실 안 뿐이었다. 나는 사다리를 잡았다. 냉기가 손을 파고들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올라갈수록 차가운 바람이 살을 점점 강하게 파고들었다. 팔과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래를 보게 되면 두려움 때문에 떨어질 것 같았다. 조종실 문이 가까워졌다. 나는 조종실의 문을 잡아 당겼다. 다행히도 문은 열려 있었다. 조종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추위가 멎었다. 귀가 나빠서인지 바람 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평선이 보였다. 야경이 아름다웠다. 나는 아래를 보았다. 동네가 한 눈에 보였다. 이 곳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설 것이다. 건물이 세워지면 새로운 가족들이 입주할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일이 끝났다. 몸이 무척 노곤하다. 두 손에 비닐봉지가 들려있다. 한 손에는 아내와 같이 마실 맥주와 안주가, 그리고 다른 손에게는 자식들에게 사다줄 과자와 음료수가 들려있다. 아파트 안에 들어선다. 엘리베이터가 오늘따라 느리다. 조급해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는 가족을 볼 생각에 괜히 두근거린다. 벨을 누른다. 누구세요. 자식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다. 나는 말한다. 현관을 향하는 빠른 발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린다. 자식들이 다리에 안긴다. 다녀오셨어요. 부인은 웃으면서 나에게 말한다. 다녀왔어. 나는 부인에게 말한다. 다녀왔어. 나는 입을 움직여 직접 말해보았다. 멀리 있는 나라의 말처럼 느껴졌다. 공사가 완공되면 나는 꼭 이곳에 새로운 가정을 세울 것이다. 완벽한,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가정을. 꼭.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