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고종대왕일대기>의 미약한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를 원치 않으시면 닫아주세요. 배경은 대략 18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입니다.


"....자관? 보좌관님?"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젠장, 오늘도 집에 못갔다. 벌써 일주일째다. 


"오늘도 집에 못 가셨어요?"


"네에.... 슬슬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잘 안나네요."


"의원님도 참. 적당히 퇴근 좀 시켜 주시지는. 커피, 마실거죠?"


"부탁드릴께요."


사실 저 말은 틀렸다. 우리의 인자하신 의원님은 한 번도 퇴근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다만 문제는 '감히 네가 집에 갈 수있을 것 같아?'라고 외치는 듯한 어마무시한 양의 업무량이다. 물론 아아주 능력있으신 의원님은 내 일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다. 그도 그럴 것이, 의원님은 내게 주어진 시간의 절반에 두 배에 가까운 일을 했으니까. 그런 의원님을 보좌하려면, 잠을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일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아마 나를 비틀어 짜내면 커피가 흘러나오지 않을까...


제 2의, 혹은 아주의 파리. 순백의 도시. 빛의 도시... 한성을 지칭하는 말은 많지만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빛의 도시'일 거다. 낯에는 순백으로 칠해진 건물들에서 햇빛이 반사되어 마치 빛이나는 것 같고 밤에는 색색의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 바로 아주의 중심-한성이었다. 물론 그 명성도 새벽에는 예외였는데, 당연하다. 새벽에는 잠을 자야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결코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의회-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의원실이었다. 확신하건데 제국의회의 모든 의원들이 이렇게 일했다면 대한은 아마 세계를 제패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해야하는 일은 뭐죠?"


"우선 2시에 있을 정기 국회에서 발안하실 법안 조항 검토하고 연설문 수정하는 게 있고, 어라? 그 외에는 없네요? 별일이네."


아아, 드디어. 오늘은 집에갈 수 있겠다. 


"그리고,"


음? 저 누나 왜 웃지? 불안한데?


"과제 하셔야죠."


그렇다. 내가 두배로 바쁜 이유. 저 '과제' 때문이다. 우리의 의원님께선 모지란 녀석은 절대로 못 쓴다며 과제를 주곤 하셨는데 그 양이 어마무시했다. 인간적으로 원서 읽고 보고서 써오라는 건 너무한거 아니냐고. 음? 근데 과제라고? 이번 주에 있는거 다 했는데?


"네? 지난 번에 다 해서 제출하지 않았나요? 더 할께 있어요?"


"저한테 제출 안하셨잖아요."


"의원님 자리 위에 올려뒀었는데.."


"아....? 보좌관님, 정말 죄송해요.... 아무래도 그거 제가 버린 것 같아요.... 책상 위가 너무 어지러워서 정리하다가, 그때..."


네? 누님 뭐라고요? 울고 싶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우리 천사님 앞에서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아니에요. 그까짓거 그냥 어디 논문에 있는 거 긁어서 내면 되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의원님이 괴물이라지만 논문 내용까지 다 알겠어요?"


"흑, 정말, 정말 미안해요. 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될까요?"


이건 찬스다.


"그럼 이번 연휴에 식사 한 번 사주세요. 그거면 됐어요."


"두 끼, 세 끼도 살께요. 미안하고, 또 고마워요."


해피엔딩이었다. 그런 줄 알았다. 



"자네 지금 나하고 장난하나? 논문에서 긁어오면 내가 모를 줄 알았던건가? 다른 것도 아니고 성균관 대학교 교수의 논문을 가져왔더군. 아주 대단한 애교심이야 그래."


저 괴물에게는 그딴 것도 안 통했다. 설마하니 저 논문을 알고 있을 줄이야. 벌써 15년은 넘은건데.


"왜 말이 없나? 성균관 대학교도 다 죽었군. 논문이나 배껴오는 놈이 성균관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수석이라니. 자네는 항상 아버지께 감사하게나. 자네 아버지가 부탁하지 않았다면 결코 초짜를 내 보좌관으로 쓸 일 없었을테니."


그건 맞는 말이다. 아무리 수석이라고는 하지만,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초짜에게 어떤 의원이 자신의 보좌관을 맡기겠는가. 밥먹듯이 보좌관을 갈아치우는 김가진 의원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김가진 의원이 친우가 아니었다면 결코 그럴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건 다르게 말하면, 나는 절대로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죄송합니다 의원님.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알면 됐네. 그리고 이런 쓰레기 같은 제안서도 다시는 올리지 말게나. 내 보좌관이 되려면 적어도 수석은 되어야 하네. 나에게 기준을 내리라는 개같은 소리 하지 말고. 알았나?"


"예, 의원님."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내 일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고자 계속해서 올리는 인원 충원 요청서는 번번히 까였다. 보통 수석 정도 되면 일이 편한 곳에서 꿀이나 빨며 지내는게 일상이다. 당장 대한당 의원들의 보좌관은 할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9명을 꽉꽉채워넣고 있다. 그런데 여기는 들어오자마자 일에 치여 반 죽어아야되니, 어떤 사람이 오고 싶어 하겠는가. 일단 올해 졸업생 중에는 없었으니 또 일년은 나 혼자 일해야 한다. 그래도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우울한 생각은 털어버리자! 


"내일은 공휴일이니 제발 나가서 사람 좀 만나고 오게나. 한심하게 방 안에만 박혀있는 꼬라지는 더 못 봐주겠거든."


쉴 시간을 주시고 그런 말을 하시던가.



"제가 조금 늦었나요?"


우오, 누님 오늘 너무 예쁘신거 아닙니까. 평소와는 다르게 하늘하늘한 흰 드레스에 모자까지 쓴 누나는 겁나 예뻤다. 사무실에있을 때에도 그랬지만, 마음먹고 꾸민건 상상 이상이었다. 이상하다니까. 이런 사람이 왜 연인이 없지? 나처럼 자기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닐텐데.


"아니요, 딱 맞춰서 오셨어요. 우선 차 한 잔 할까요?"


나는 미리 봐둔 카페로 누님을 인도하며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여기가 요즘 마드모아젤 사이에서 인기라지.


"그래서 보좌관님은 언제까지 저에게 존칭을 쓰실건가요?"


"예, 예?"


"언제까지 존칭을 쓰실거냐구요. 벌써 저희가 같이 일한게 2년이 넘어가는데 너무 딱딱한거 같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사무실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밖에서 만나면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아... 그럼 그렇게 할께요."


"존칭도 하지 마시구요."


"네. 아 아니, 응."


"좋아. 오늘은 내가 사기로 했으니까. 뭐 먹고 싶어?"


"딱히 먹고 싶다고 생각한 건 없는데...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럼 여기 가자. 항상 가보고 싶었어."


"그럼 그래. 그럼 지금 나갈까?"


"아니, 나 잠시 화장실 좀."


"응."


그래. 이거다. 행복하다. 절망만이 가득하던 2년만에 드디어 행복 비스무리한 걸 찾았다. 하늘에서 빛이 한 줄기 떨어지는데 거기에서 누나가 내려오는거 같다. 응? 뭐야 이거 꿈인가?


"한상일, 상일아 괜찮아?"


다행이 모두 꿈은 아니었나보다. 누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졸다니.


"아, 응. 괜찮아."


"많이 피곤했나보네. 역시 나 때문인거지..?"


"아냐, 누나가 무슨 잘못이 있어. 내가 바쁘고 피곤한 건 다 의원님 때문이지. 애초에 이걸 하라고 시킨 것도 의원님이지 누나가 아니잖아?"


그제야 누나가 활짝 웃었다. 아아 우리 여신님은 마음씨가 너무 고와서 문제다 정말. 어디의 악마하고 비교하면 정말....


"호오, 그래 김 군. 자네가 나를 그렇게 열렬히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군. 마침 잘됐군. 이번에 보로서에서 들여온 서책들이 너무 많아 아직 번역이 덜 된 참이었다네. 나 좀 도와주겠나?"


...신은 날 버린게 분명했다.


"예? 분명히 의원님께서 쉬는 날에는 밖이라도 나가서 사람 만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그랬던가? 허나 위정자가 어디 쉴 수 있겠나. 우리가 더 일해야만 다른 이들이 더 쉴 수 있는게 아니겠는가. 흠, 지금이 12시니 4시에 사무실에서 보도록 하지."


자기 할 말만 하고 돌아서는 모습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젠장. 이 입이 웬수지.


"저녁까지 함께하고 싶었는데 아쉽네. 집에 재료 많이 사다 뒀었는데. 저녁 식사는 다음에 초대하도록 할께. 일단 점심 먹으러 나갈까?


뭐라? 저녁을 먹는게 집 가서 먹는거였어? 미친. 사표를 내서라도 오늘 저녁에 빠져 나온다. 


"어떻게든 저녁 먹기 전에 나올께.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뭐? 푸훗. 알겠어. 여기 주소. 빨리 나와야 해?"


어떻게 점심을 점심을 먹었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빠르게 해치우고 난 사무실로 달려갔다. 



"오, 벌써 왔는가? 빨리왔구만."


"하하. 저녁 전에는 끝내야할 것 같아서요."


"음. 그 안에는 넉넉히 끝날걸세."


음? 저렇게 순순히 넘어갈 사람이 아닌데?


"그럼 저는 무엇을 하면 되는 겁니까? 의원님 책상 위에 있는 그 책들을 번역하면 되는 겁니까?"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건 그냥 도서 목록이네. 자네가 해야하는 건 이쪽이지."


그리고 내 눈에 보인 것은, 사람 키의 1.5배는 되어보이는 책들이 무더기로 널려있는 방이었다. 


"이 중에서 한 더미만 골라 번역하고 가게."


이건 하루에-아니, 몇 시간만에 할 수 있는 양이 아닌데?


"하지만 의원님. 오늘 저녁 안에는 끝난다고...."


"저녁 안에는 끝난다고 했지, 그게 오늘 저녁이라고는 하지 않았네만."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김가진 의원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농담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아버지 부탁이고 뭐고, 내가 이번에는 사표내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