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제자리로 돌아가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교과서와 노트를 꺼내고 필기를 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수업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수업이었던 한문 시간에 무슨 수업을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은 ‘한수연’ 이라는 이름의 여자 교사가 들어와 수업을 진행한 것과, 이번에도 국어와 영어 시간에 발표를 했던 ‘이연화’ 라는 여자아이가 발표를 했다는 것과, ‘梁’ 이라는 한자의 획수가 총 11획이라는 사실이었다. 

다행히도 난 평소처럼 무의식적으로 필기를 해 두었기에 성적에 지장이 갈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마지막 시간이라 피곤함이 극대화되어 집중이 풀려 버린 모양이었다.

종이 울리고 한문 교사는 평소처럼 우리에게 인사를 하며 교실을 나왔다. 그리고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양서진’이라는 이름의 안경을 쓴 담임 교사(과학을 담당했다)가 반에 들어와 간단한 조회를 하고, 인사를 한 후 우리를 하교시켰다. 

나는 가방과 소지품들을 챙겨 구교사의 서고로 향했다. 일단은 난 문예부의 부원이기도 하고 그 소녀가 나에게 서고로 방과 후에도 와 달라고 부탁했으니 갈 수밖에 없었다.

학원 수업은 6시 50분에 시작되고 지금은 5시쯤 되었으니 시간을 때우기에도 충분할 것이다. 아무도 없는 집에 가 봐야 외롭고 쓸쓸할 뿐이었으니 남은 시간 동안은 밖에서 보내는 게 나았다.

책을 읽다가 잠에 들어 버리면 소녀는 뭐라고 할까. 나에게 혼을 낼까, 아니면 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줄까. 독서 중의 숙면은 불성실해 보이니 별로 그런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피곤한 채였기에 그걸 지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교실이 있는 본관의 1층으로 내려가 구교사로 향한다. 그리고 최상층까지 계단을 올라가면 복도의 정중앙에 서고가 있다.

나는 서고의 위치를 되새기며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올라갔다. 어느새 나는 어제 방과 후 시간과 오늘의 점심 시간에 왔던 서고에 도착해 있었다.

“어라, 유현이 왔어?”

문을 열고 들어간 서고의 창가에는 여전히 소녀가 앉아 있었다. 나를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인지 한쪽 손에 책이 들려 있었다.

“고마워. 방과 후에도 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와 줘서 기뻐.”

소녀는 살짝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본 채 책을 덮었다.

“학원 가야 해서 오래는 못 있어. 1시간 반 정도?”

나는 가방을 의자에 올려 놓은 후 서고의 책상 의자에 앉았다. 소녀는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방금 전에 말한 시간은 학교에서 학원까지 가는 데 소요되는 시간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방금 전 점심 시간보다는 30분 정도 더 서고에 있을 수 있었으니 소녀도 기뻐할지 모른다.

“으응. 그런데 유현아, 너 피곤한 것 같은데 괜찮겠어?”

소녀는 내가 피곤하다는 것을 겉모습으로 알아챘는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자도 돼?”

나는 소녀가 알아버린 이상 원하는 것을 솔직히 말했다. 피곤한 상태로는 글자도 잘 읽히지 않고 집중도 잘 되지 않는다. 문예부 부원이 부활동을 불성실하게 한다는 것이 약간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원래 문예부에서는 책을 읽어야 하지만... 유현이는 지금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어 보이니까 조금 쉬게 해 줄게.”

소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다행이다. 나는 살짝 한숨을 쉬고선 책상에 엎드렸다. 혹시라도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난 피로를 참느라 기절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소녀가 융통성 있는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피로 회복에는 레몬 차가 좋다고 하니까 끓여다 줄게.”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나는 소녀가 어딘가에서 도자기로 된 찻주전자와 레몬 청을 꺼내는 것을 보고 약간 부담스러워져 소녀를 말렸다. 

잠깐만 잠을 청하면 피로는 풀 수 있는데 굳이 차까지 끓여다 주는 것이 힘들지는 않을까.

“하지만 유현이는 아까 점심 때도 피곤해 보였는걸? 잠만 자고 학원으로 갔다간 쓰러져 버릴지도 몰라.”

소녀는 또다시 어딘가에서 커피 포트와 물병을 꺼내 포트에 물을 붓다가 날 보고 말했다.

“그리고 친구니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그렇게 말하고선 소녀는 내 앞으로 다가와 웃어 보였다.

“그래.. 고마워.”

소녀는 그 말을 듣고도 평소처럼 웃더니, 이내 커피 포트를 서고의 콘센트에 연결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찻주전자에 레몬 청을 넣고 찻잔을 꺼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걱정하지 마, 차 끓이는 데 날 따라올 수 있을 만한 유령은 없어!”

소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딱히 차를 맛없게 끓이는 걸 걱정한 건 아니지만, 나는 피곤해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알았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었다.

이내 커피 포트의 물이 팔팔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렸고, 소녀가 커피 포트를 들어올리는 소리가 났다. 이내 어딘가 큰 그릇 같은 곳에 물을 붓는 소리가 들렸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작은 컵에 액체를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은한 레몬 향이 풍겼다. 소녀는 내 앞에 무언가를 조심스레 내려놓더니 나를 불렀다.

“차 다 끓였어.”

부드러운 그 목소리에 나는 몸을 일으켜 소녀가 내 앞에 놓은 것을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찻잔에는 레몬 조각과 그것을 우려낸 듯한 옅은 노란색을 띄는 따뜻한 물이 담겨 있었다. 찻잔에는 모락모락 흰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마워. 잘 마실게.”

나는 조심스레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 차를 마셨다. 소녀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맛있어하는지 궁금한 것일까.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나는 매우 놀라운 감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몸이 무겁고 현실 감각이 없는 듯한 피로감이 차를 마시고 전부 사라져 있었다. 무거운 듯한 몸은 이제 몹시 가벼워져 있었다. 

“확실히 효능은 있는 것 같아. 피로감이 방금 전보다 덜해졌어.”

나는 내 손에 들고 있는 차를 내려다보며 평소와 같은 어조로 말했다. 너무 호들갑을 떠는 건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항상 나는 표현을 확실히 하면서도 과하지 않도록 신중히 말했다.

“그래? 역시 내 차 끓이는 실력은 대단하다니까. 고맙게 생각하도록 해.”

소녀는 달리 엄청나게 칭찬한 것도 아닐 텐데 기분 좋은 듯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선 자리에 앉은 후 다른 찻잔 하나를 꺼내 차를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근데 말이야...”

“응? 뭐가?”

나는 소문에서 들었던 그 내용을 다시 떠올리며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는 조용히 내 이야기를 앉아서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에 옛날 문예부 부원들의 소설이 있다는 게 사실이야?”

“옛날 문예부 부원들의 소설?”

분명 내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이 서고에는 옛날 문예부 부원들이 쓴 소설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들었다. 지금의 문예부 부실은 신관의 도서관으로 옮겨졌지만, 이 학교는 아마 구한말인 1900년대 중반에 설립되었으니 그 동안 부원들이 쓴 소설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물론 그것들이 최대 100년도 더 넘은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지는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그건 나도 잘 몰라.”

“....그렇구나.”

소녀가 알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다. 결국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야. 혹시 이 서고 어딘가에 숨겨진 공간이 있을 수도 있잖아?”

“숨겨진 공간?”

나는 호기심이 들어 소녀에게 물었다. 없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처음으로 이 서고에 온 것도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응. 원래 이런 오래된 공간에는 비밀스러운 곳이 한두 개 쯤은 숨어 있는 법이니까. 전에 내가 인연을 맺으러 간 다락방도 사람이 잘 가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었잖아?”

확실히 소녀가 날 데리고 간 다락방의 입구는 서가의 끝에 있어 사람의 발길이 잘 닫지 않을 법한 공간이었다. 나는 또 다른 숨겨진 공간이 있을 법한 장소를 생각하며 소녀에게 물었다.

“너는 숨겨진 공간을 다락방 말고는 찾지 못했어?”

“으응. 오랫동안 이 서고 곳곳을 둘러봤지만 그 다락방 말고 딱히 숨겨진 곳은 없었어. 물론 내가 못 찾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선 소녀는 나에게 평소처럼 미소 지어 보였다.

“좋아. 그러면 어디부터 찾아 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소녀가 끓인 차를 마시기 전까지만 해도 피로에 쩔어 곧 기절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피로감이 전혀 들지 않고 쌩쌩한 느낌이었다.

“일단 벽 쪽을 찾아 보자. 그 다락방의 출입구도 벽에 붙어 있었으니까.”

소녀는 이제 본격적으로 모험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빛내며 말하고 있었다.

“흩어져서 찾는 게 좋을 것 같아. 우리 중 누군가가 찾으면 말해 주고.”

“좋아, 드디어 탐색 시작이구나!”

소녀는 기대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서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소녀와 반대쪽 방향의 서가로 향해 소설을 찾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와 소녀는 벽을 더듬어 보고, 바닥을 내려다 보고, 천장을 올려다 보고 곳곳을 두드리고 탐색하며 숨겨진 비밀의 공간을 찾아 다녔지만 숨겨진 공간은 찾지 못했다.

“하아, 하아.. 더 둘러볼 곳은 없어?”

소녀는 유령이기에 지칠 일이 없을 텐데도, 숨을 가쁘게 내쉬며 손으로 부채질을 해 댔다.

“없어...이 소문도 사실이 아닌 것 같아.”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소문의 대다수가 거짓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기껏 고생해서 찾아 다녔는데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으음... 어쩔 수 없네. 뭔가 헛수고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굳이 옛날 문예부 부원들의 소설을 읽지 않더라도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건 가능하잖아?”

소녀는 마치 풍선을 터트려 버려 풀이 죽어 버린 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나를 달래듯이 말하고 있었다. 정작 가장 기대했던 사람은 소녀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응. 그렇긴 하지...”

나는 창 밖을 쳐다보았다. 해는 방금 전 서고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럼 책 읽으러 가자. 오늘은 무슨 소설을 추천해 줘야 할까...”

소녀는 웃으며 서가를 천천히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소녀를 따라 서가를 빠져나가려 했다. 처음부터 문예부 부원들의 소설 같은 건 못 찾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을 지나고, 마지막 책장 앞을 빠져나가기 직전에

“뭐지?”

책장에 꽃힌 책들 사이로 햇빛이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그 어렴풋이 비쳐오는 듯한 밝음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천천히 눈을 떠 빛이 비쳐 들어오는 책장의 책 사이로 손을 뻗었다.

“....? 뭔데? 혹시 책을 찾은 거야?!”

내 말을 듣자 소녀는 금세 눈을 빛내며 나를 돌아보며 달려왔다. 미소 지으며 푸른 체크 무늬의 원피스 치마를 휘날리며, 마치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감상하는 듯이 숨을 죽이고 내가 책장에서 빼내는 것이 무엇인지 눈을 크게 뜬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내가 책장의 책 사이로 손을 뻗어 그 끝에 닿은 것은, 뭔가 까끌까끌한 감촉을 한 얇은 것- 그러니까, 오래된 종이 같은 물건이었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잡아 책장에서 천천히 빼내, 책장 사이에 있었던 물건의 형태를 확실히 확인했다.

“종이 아니야? 그것도 엄청 오래된 것 같은데.”

책장에서 꺼낸 그것을 보고 소녀가 처음으로 한 말은 그것이었다.

확실히 종이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듯 했다. 가장자리는 살짝 뜯겨져 있거나 닳아 있었고, 종이는 본래의 흰색을 잃어버리고 황색으로 빛이 바래 있었다.

“잠시만, 여기 뭐가 쓰여 있어.”

하지만 나는 종이의 상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내 시선이 집중된 곳은, 종이 위에 새겨진 검은 선과 점으로 이루어진 문자 여러 개였다.

종이는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다행히도 그 위에 새겨진 문자가 훼손되거나 빛이 바래지는 않았기에 일단 해석은 가능할 것 같았다.

“책의 페이지는 아니야. 글씨가 인쇄채로는 보이지 않고 글자의 위치도 딱딱 맞춰져 있지 않은 걸 봐서는 사람이 쓴 것 같아.”

소녀는 종이에 새겨진 문자를 보고 나지막이 말했다.

종이 위에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글씨체나 써진 위치를 보았을 때 인쇄를 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에 나와 소녀는 종이 위의 문자가 사람이 직접 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써진 문자는 한자야. 그러니까 이 종이에 써진 글은 한문이라는 건데... 일단 어떻게든 해석해 볼게. 혹시 옛날 부원들의 소설이 있는 위치가 나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다시금 막연한 기대를 품고 종이에 써진 글자를 읽었다. 필기체로 살짝 글씨가 날아간 부분은 있었지만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획의 위치와 형태를 보고 금세 이 글자가 한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유현이 한문 해석할 줄 알아? 대단하다.”

“전문가 수준으로는 못 해. 수업 시간에 배우고 책 좀 읽은 게 전부니까...”

소녀는 내가 한문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대단하다며 미소 지었다. 물론 한문 시간에 해석하는 법을 배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아는 것은 그것이 한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뜻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을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해 볼게.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나는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힘내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한자 사전을 내려놓는 소녀 옆에서 가방에서 작은 노트와 펜 하나를 꺼내 문장을 해석해 적기 시작했다. 

나는 종이를 꺼내고, 오래된 종이에 써진 한자가 무슨 글자인지 천천히 하나하나 해석하며 노트에 그것을 적고 뜻을 해석해 밑으로 적어 내려 갔다.

노트의 종이 위에 검은 잉크가 스며들며, 나는 몇 분 만에 이 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到了酉時二刻夕陽西向

유시 2각(오후 5시 30분 경)이 되어 석양이 서쪽으로 향할 때

當日光自書與書之間時

책과 책 사이로 빛이 통과할 것이며

若光皆至一邊

빛이 끝나는 곳으로 가면

藏古書生輩之書

옛 문인들의 책이 숨겨져 있으리라

當夕之夕陽前

저녁의 석양 앞에

何不改之珍物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으니

내가 해석한 문장은 이것이었다. 

“해석했어.”

나는 나지막이 소녀에게 말하고선, 해석한 문장이 적힌 노트 종이를 보여주었다.

다행히도 해석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누군지 모를 이 문장을 쓴 사람의 글씨체가 선명하기도 했고, 글자 수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고 어려운 표현도 없었기에 큰 피로감은 잘 들지 않았다.

“수고했어. 나도 개인적으로 한번 해석해 봤는데, 유현이가 해석한 거랑 똑같이 나온 걸 봐서 유현이가 해석을 제대로 한 것 같아.”

소녀는 내가 건넨 해석본을 상세히 읽어 보고선 미소 지었다. 소녀의 다른 한 쪽 손에는 작은 메모지가 들려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것이 소녀의 해석본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너도 한문 해석하는 법을 알고 있어?”

“으음, 살아 있었을 때 책을 좀 읽어 봤어. 근데 한문으로 된 글을 읽어 본 지 오래돼서 완벽하게 다 떠오르지는 않아.”

소녀는 멋쩍은 듯이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 서고는 학교에서도 멀쩡히 관리하고 있으니까 새 책들도 많이 들어왔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러면, 석양 빛이 책과 책 사이를 통과해서 빛이 끝나는 지점... 그러니까 그 책장 건너편의 벽에 옛 부원들의 소설이 숨겨져 있다는 거지?”

“내가 제대로 해석했다면, 아마 그럴 거야.”

“진짜? 드디어 옛 소설들을 찾을 수 있는 거구나!”

소녀는 그 말을 듣자 눈을 빛내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옛 소설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뜬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디야? 그 종이를 주웠던 데가 어디였어?”

“으음.... 여기.”

나는 천천히 그 종이를 주웠던 책장으로 다가갔다. 종이를 꺼냈던 곳은 책장의 거의 끝 부분이었고 옆으로는 서고의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로비가 있었다.

“그럼 저 끝으로 가면 책이 숨겨진 곳이 나온다는 거지? 어서 가자!”

“응.”

나는 소녀를 따라 석양 빛이 끝나는 지점인 동쪽 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소녀는 들뜬 채로 푸른 체크 무늬의 원피스 치마를 휘날리며 기분 좋게 걸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다른 동쪽 벽에는, 책장의 틈으로부터 새어 나온 은은한 석양의 빛이 물들어 있었다. 딱히 문도 보이지 않았고, 어딘가 이상한 기운 같은 것도 감돌지 않는 그냥 벽이었다.

“어떻게 하면 열리는 거지? 일단 여기가 입구인 건 확실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도 답을 찾을 수 없어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약간의 물리적인 변화를 줘 보는 건 어때? 밀거나, 당기거나, 두드리거나 하면서.”

소녀는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대답을 했다. 확실히 이런 숨겨져 있는 형태의 방은 복잡한 구조로 잠겨 있을 확률도 있지만 의외로 간단히 설계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스릴러 영화의 고급 주택 지하실에 방공호로 내려가는 문이 벽장 뒤에 숨겨져 있었던 장면과, 옆으로 밀어서 문이 간단히 열렸던 장면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 서고를 뒤질 때 잠금 장치 같은 건 찾지 못했으니 소녀의 말대로 일단 물리적으로 변화를 주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해 봐야겠네.”

그 말을 끝으로 나와 소녀는 동쪽 벽에 ‘물리적인 변화’를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옆으로 미는 손잡이를 찾아 보기도 하고, 벽을 한쪽으로 밀어 보기도 하고, 이음새가 숨겨져 있다고 추측되는 부분을 두드려 보기도 했지만 입구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안 나와. 입구가 드러나지 않아...”

나는 고급스러운 연꽃 무늬의 벽지가 붙은 상아색의 벽을 바라보았다. 겨우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실패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기 시작한 데다 어째서인지 소녀의 차로 억누른 피로감이 다시 올라오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분명 잠금 장치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일까.

“저기, 유현아.”

“응?”

나는 천천히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예측할 수 없는 소녀는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일단 그 종이를 봐서는, 여기가 입구인 건 맞는 것 같아. 유현이도 해석을 정확히 했고, 책장의 틈 사이로 석양이 파고들어가서 끝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니까.”

소녀는 천천히 생각하는 듯이 턱에 손을 받치고선 조용히 말했다. 확실히 이 부분은 석양의 빛이 끝나는 지점이었고, 그것을 증명하듯이 나와 소녀가 선 바로 앞의 벽은 석양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물리적인 변화로 열리지 않는 걸 봐서는... 아무래도 잠금 장치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드러나지 않게 해 둔 것이 아닐까?”

나는 금세 자괴감이 사라지고 다시 평소의 이성을 되찾았다. 소녀의 말대로 이 서고에는 잠금 장치도 없는 데다 입구는 물리적 변화로 열리지 않은 것을 보았을 때 전혀 다른 종류의 장치로 잠겨 있는 듯했다. 

“그럼 무엇을 써야 입구를 열 수 있을까...”

문제는 그 다른 잠금 장치가 무엇이냐는 문제였다. 자물쇠나 열쇠 같은 평범한 것은 아니고, 이런 오래된 건물에 지문 인식이나 홍채 인식 같은 최첨단 기술이 이식되었을 확률은 낮아 보였다. 나는 조용히 몇 분 동안 고민하다가, 이내 입구에 대한 생각을 끝내게 되었다.

- 학원에 가야 할 시간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렸다.

“아... 시간 됐어.”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6시 20분이었다. 10분 내로 출발하지 않으면 학원에 늦을 수도 있을 시간이었다.

“그래? 아쉽다. 유현이랑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일단 입구를 여는 방법은 내일 와서 생각하는 게 좋겠어.”

소녀는 미소 지으며 나와 함께 천천히 책장 뒤의 동쪽 벽 앞을 빠져 나갔다. 나와 소녀는 옆으로 석양을 받는 채로 잠시 동쪽 벽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석양의 빛이 점점 더 진한 주황빛을 띄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내일도 같은 시간에 올게. 수업 시간은 같으니까.”

내일 수업이 시간표대로 진행된다면 분명 오늘과 전체 수업 시간과 교시의 수는 같을 것이었다. 내가 의자 위에 올려 둔 가방을 챙기고 소녀에게 손을 흔들며 서고를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도중에, 

“저기, 유현아.”

“응?”

소녀는 서고의 서쪽 창문 바로 앞에 선 채로 갑작스럽게 나를 불렀다. 내가 돌아 보았을 때 소녀는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유현이 말고 다른 사람들은, 날 보지 못해?”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 소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오랫동안 나 말고는 없었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소녀는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 중에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못 보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찾아보면 나 말고도 있지 않을까?”

나는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답을 소녀에게 전했다. 

분명 유령이라는 것은 영적인 능력이 있거나 오컬트 같은 취미를 가진 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본 사람도 거의 없다. 하지만 거의 없는 극소수가 어쩌다가 우리 곁에 있을 확률은 분명 0까지는 아니었다. 

나도 서고에 오기 전까지는 소녀의 존재를 몰랐던 데다 내가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평소에 유령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컬트에 관심도 없어 유령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던 내가 갑작스럽게 소녀를 만났듯이, 분명 다른 누군가 또한 소녀를 만날 확률은 없다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친구가 한 명밖에 없는 것보다 두 명 이상을 사귈 수 있다는 것이 더 희망적이고 밝은 이야기였다. 계속 혼자인 것보다는 소수라도,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과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은 친구를 바라고 있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혹시 이 학교에도 유현이 말고도 날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네?”

소녀는 눈을 빛내며 기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조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기뻐하는 소녀의 모습은 조금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0%까지는 아니지. 물론 확률이 낮은 건 사실이지만.”

나는 그 모습을 전과 다름없이 가볍게 넘기면서도, 어쩌면 소녀 말대로 학교에도 나처럼 유령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조심히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것도 아주 낮은 확률이겠지만,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정말? 친구가 또 한 명 더 생길 수도 있다는 거네? 너무 기대돼!”

오컬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도, 영적인 능력이 있을지도 전부 알 수 없었다. 남자일지 여자일지, 몇 학년인지, 혹시라도 아주 낮은 확률이기는 하지만 우리 반에도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기뻐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지만.”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극악의, 극소수의 매우 낮은 확률을 뚫고 혹시라도 그 조건을 전부 충족한 사람이 우리의 곁에 있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그런 이미지의 사람은 주변의 인물들로부터 공통점을 찾기 힘들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특별하면서도 동시에 평범한 이 학교의 학생들, 그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아이들만 골라 보내는 상위권의 반인 나의 1반에서 오컬트에 취미를 가지고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쩌면,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듯이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이면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또다시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에게 들은 옛날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도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을 더듬어 봐도 알 수 없었다.

“유현아, 너 혹시...”

“왜?”

오랫동안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 침묵을 유지하던 나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했던 것인지, 소녀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내 친구가 되는 걸 질투하는 거야?”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한 소녀는 마치 나에게 장난을 걸듯이 가볍고 즐거운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소녀가 생전에도 이렇게나 지나치게 자유로운 성격이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소녀의 장난스러운 의혹을 빠르게 차단했다. 

“난 딱히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네 친구가 되든 상관하지 않아.”

나는 내 말대로, 소녀가 나 말고 다른 친구를 사귀는 것에 딱히 연연하지 않았다. 애초에 소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사람은 반드시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기에 평생 동안 소녀와 친구로 지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수명이 긴 사람과 친구를 하는 것도 소녀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다행이네. 나는 친구가 많았으면 좋을 것 같아서.”

소녀는 천천히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는 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지평선 바로 위에 떠 있었다. 이제 푸른 하늘은 서쪽으로부터 주황빛으로 물들어 천천히 보라색과 남색 비슷한 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나도, 유현이도. 혼자보다는 여러 명이 좋을 테니까. 문예부의 부원도, 친구로서도 말이야.”

미소 지으며 말한 소녀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친구가 되어 처음으로 만난 시간을 끝내고 다음의 시간을 기약하며.


“잘 가, 유현아. 내일 봐.”


“응. 내일 보자.”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서고의 문을 열고 천천히 학교를 나왔다. 

학원으로 가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길에 하늘을 보았을 때,해는 완전히 서쪽으로 기울어 하늘은 어두운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이제 해가 진 자리에 밝은 달이 떠오른 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그 풍경은 마치 한 편의 극이 끝나고 다음 극에서 새로운 등장인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광경이었다.

달이 뜬 밤하늘을 뒤로, 길에는 나무가 늘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천천히 나무의 뿌리부터 몸통과 가지의 끝을 천천히 훑어 보았다. 

마치 등장인물이 나올 것을 암시하는 복선처럼, 길가의 나무에는 꽃이 피어날 징조를 보이는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집에 돌아와 잠을 잤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끝마치기 위해 다시금 침대에 누워 불을 끄고 이불을 덮은 채로 눈을 감았다.

나는 어느새 잠자리에서 꿈을 꾸고 있었다.








찬란한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마치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