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로 하지."


"엘프를 고르시다니! 역시 물건을 보실줄 아는군요! 만약 대들거나 하면 저에게 오시지요."


"고맙네."


여기저기에 맞은자국들이 그녀를 더 불쌍하게 만들었다.

자국 하나하나에 묻은 핏자국이 흐를때마다 그녀가 낮게 신음했다.


"자 이제 눈을 떠보렴."


그녀가 누군가에게 팔리고, 눈가리개가 막던 시야를 그 누군가가 풀어주었다.

잠시 밝은 시야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떠니? 많이 어지러워?"


그녀 눈앞에 비추어진 이는 오크였다.

험악한 인상이였다.


"음.. 엘프어가 따로 있던가?"


그녀의 얼굴에 묻은 자국을 손수건으로 지우며 그가 말했다.

험악한 인상이였지만, 자상한 손길이였다.


"어? 얘야 정신 차려보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그녀.

눈앞에서 필요한 응급처치를 하려는 그 오크의 모습에 옛기억이 났다.

자상했던 아버지의 기억이 겹쳐보였다.


"끄응..."


"일어났니?"


일어나니 책 냄새가 코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까전 그 오크였다.

이번에는 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있었다.

그 모습에 괴리감이 들었다.


"자. 일단 그냥 누워있으렴."


그의 말에 그녀는 반항을 하지 않았다.

몸이 많이 허약해진게 느껴졌다.


"넌 몇살이니?"


그가 다시한번 책을 넘기며 물었다.

눈은 책에 고정되었지만, 신경은 그녀에게 쏠린듯했다.


"270살.."


"흐익... 그.. 인간의 나이로 말해주겠니..?"


"21살..?"


"보기보단 많이 나이를 먹었구나."


"......"


"이크, 실수했군 미안해."


그가 책을 높은 책장위에 놓고 서재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그녀는 서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불에서 좋은 향이났다.

창밖에는 맑은 햇살과, 새들이 날아다녔다.


"내 저택인데 마음에 드니?"


"네."


그 말에 그는 기분이 좋은듯, 윗입술을 씰룩거렸다.


"이 버릇은 못고치겠어. 예전에 이빨이 윗쪽으로 난적이 있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따뜻한 식사를 주었다.


"...?"


"왜 그러니? 혹시 엘프는 육식을 하니?"


"아뇨.. 채식을 하는데.."


그녀가 의아해한건 그가 들고온 음식이 전부 요정이나 좋아할 채소들인것과

그가 먹으려는 음식들도 전부 같은것이였다.


"저기.."


"맛이 없..나?"


"아뇨아뇨! 그.. 오크시죠..?"


"그런데?"


그가 웃으며 만드레이크를 잘라주었다.

줄기에서는 좋은 향이났다.

그가 준 만드레이크를 먹으며 다시 한번 그를 보았다.


"오크분이면 원래 육식을 하지 않나요..?"


"아 이건 내가 이상한거란다."


"네?"


"난 음... 고기가 싫어서 안먹는거지."


"허어.."


"아."


"아아..우으.. 써.."


그가 건낸 또 다른 채소는 쓴맛이 너무 강했다.

자신도 그걸 아는지 웃으며 그녀에게 다시 무언가를 건냈다.


"맛있을거란다."


잔에 담긴 무언가를 마시니, 달콤한 사과의 맛이 났다.

그렇게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끝내자, 그가 또 서재 밖으로 나가버렸다.


"우응.. 졸려..."


갑자기 눈이 감겼다.

쏟아지는 졸음에 저항하려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몇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일어났니?"


"우음..?"


그가 같은 자리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있었다.

오크치고는 남다른 집중력을 보여주는 그의 모습에 다시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 제일 중요한걸 내가 하지 않았더구나."


"네?"


그 말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가능성이 지나갔다.

지금부터 고문이 시작되는, 지금부터 노동이 시작되는 그런 가능성들이 머릿속를 지나갔다.


"잘못했..."

"네 이름은 뭐니?"


동시에 나온 말

그리고 당사자인 오크는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내가 뭔갈 불편하게 만들었니..? 그렇다면 미안하구나."


"아니.. 때리실거 아니였.."


"그런일은 절대 하지 않을거란다."


"절대로."


그가 다시한번 강조했다.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그녀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제 이름은.. 그게.. 어..."


"이름이 기억 안나는거니?"


"그런거같아요.."


"음.. 그럼 리바는 어떠니? 마음에 들어..?"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녀는 무언가를 느꼈다.

지금 당장은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지만

분명 그녀가, 아니 리바는 언젠가 그걸 이해할것이다.


"제 이름은 리바.."


"응?"


"리바에요."


리바의 모습에 그가 크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큰 송곳니가 미소를 험악하게 만들었지만

그의 웃는 눈이 리바를 간지럽게 만들었다.


"내 소개를 해야겠구만."


그가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한 종이 쪼가리가 나왔다.

그리고 리바는 그것에 묻은 불편하고 불길한 느낌에 본능적으로 몸을 수그렸다.


"아 진정하렴. 이게 뭐냐하면 너와 나의 노예 계약서란다."


"네...?"


"이걸 쓰면, 넌 영원히 내 말을 들어야하지. 어떤것이든."


리바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점점 몸을 떨었다.


"물론. 난 사용하지 않을거고."


"...네?"


그가 그 계약서를 그의 큰 손으로 찢었다.

몇번이고 반복해서 찢었다.

바닥에 뿌려진 계약서를 보며, 리바는 해방감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리바는 무언가 다른 기분을 느꼈다.


"자 내 이름은 잉센이라고 한단다. 잘부탁해?"


그런 리바의 마음을 알 턱이 없던 오크, 잉센은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역시나 오크답지 않은 행동과, 오크답지 않은 이름이였다.


"푸흣.."


"왜? 이름이 좀 촌스러운가..?"


"멋진 이름이여서.. 근데 어울리시지 않아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말장난을 했다.


"어..아! 죄송.. 조심하겠..."


"리바야? 잘 들으렴. 앞으로는 넌 노예가 아니란다. 누군가의 소유물도 아니고, 물론 내 소유물도 아니지, 넌 자유란다. 너의 행복을 바라고 있으니, 걱정하지말고 나아갈 준비를 하렴."


그의 말 하나하나가 리바의 마음속에 전달되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울렸다.

그렇게 우는 리바를 꼭 끌어안아준 잉센.


따뜻하고 익숙한 냄새가 났다.

넓은 그의 가슴에 파묻힌 리바는 그게 이불에서 나던 기분좋은 냄새라는걸 인지했다.

그걸 인지하자, 그녀가 기분좋게 웅얼거렸다.


"아! 미안.. 미안해.. 내가 잠시 무례를.. 크흠!"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힌 잉센은 그렇게 리바의 마음을 울리고는, 다시 나가버렸다.

그런 잉센을 보며 다시 무언가 답답한 느낌이 리바에게 전해졌다.

아까 그가 노예계약서를 찢을때와 같은 느낌이


"다 찢어버렸네..."


바닥에 버려진 종이조각들.

그동안 그녀를 괴롭힌 원인, 그리고 그 결과.

찢겨져 저택 바닥에 나뒹구는 종잇조각에 그녀는 다시 같은걸 느꼈다.


"..."


아무말없이 그녀는 그 종잇조각을 모았다.

한손에 담아질 정도의 작은 조각들이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소중히 침대 옆, 큰 배게 안에 구겨넣었다.


몇분이 지나자, 잉센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