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붕은 이전부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얀순이의 고압적인 태도, 사적인 간섭, 끝이 보이지 않는 투정과 불평 불만, 이윽고 매도까지.

얀순이가 나쁜 건 아니었다. 얀붕이가 잘한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사정과 현실의 사정이 얽히고설키며 관계가 극단적으로 치달았을 뿐.

하지만 둘 사이에 이어져 있던 감정의 선을 끊어질 듯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어서 어느 한 쪽에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끊어질 수도 있는 그런 상황.

그렇게 긴장감이 고조되던 어느 날, 사건은 일어났다.


"김얀붕! 제발! 제발! 제발! 아아악!"


"왜 그러는데 또?"


"왜 그러냐고? 왜 그러냐고?! 니가 내 말을 무시했잖아!"


"내가 언제?"


여느 일상처럼 얀순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여 김얀붕을 괴롭히고 있었다.

얀붕은 오늘 있을 일에 대해서 떠올리던 중에 얀순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단 한 번 듣지 못했을 뿐. 특별히 잘못한 건 없었다.

하지만 얀순이에게 얀붕은 이미 감정 쓰레기통 이하도 이상도 아닌 존재.

분노가 이성의 시야를 가린 탓에 얀순은 막무가내로 우기기에 바빴다.


"짜증나! 진짜 짜증나아아! 너도 내가 바보로 보여? 바보로 보이냐고?!"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는 얀순이 모습에선 이미 이성의 조각이란 찾아볼 수도 없다.


"누가 바보래? 누가 너보고 바보라고 한 거야?"


"말 돌리지 말고! 너도 그렇잖아. 내가 답답하고 짜증나고 히스테리만 부리는 여자라서 싫잖아! 그렇잖아!"


"제발 좀, 여기 물 있으니까 마시고 좀 진정해 봐."


얀붕은 항상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차갑게 식혀둔 얼음물을 상시 구비하고 다녔다. 

차가운 걸 목구멍으로 좀 넘기고 나면 얀순이를 어느 정도 진정 시킬 수 있었고, 그럴 때마다 상황을 잘 흘려 보냈기 때문이다.

허나 오늘은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닥쳐!"


퍽!


"...얀순아?"


얀붕은 잠깐 동안 이성적인 판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얀순이가 물을 건네주는 팔을 후려치며 내팽개쳤기 때문이다.

뚜겅이 열려있던 얼음 물통은 허무하게 바닥으로 흩뿌려졌고 지금도 남아있던 내용물이 꼴꼴꼴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요즘 같이 더운 날에는 차갑게 식은 물도 순식간에 기화되기 마련. 얀붕이가 준비해뒀던 얼음물은 이제 빈 통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얀붕이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얼음 물만 마시면 내가 참아주는 줄 알아? 내가 바보야? 김, 얀, 붕! 내가 바보냐고?!"


"...아아아..."


얀붕은 고저를 파악할 수 없는 요상한 신음을 흘렸다.


"아아아 아아아아아―"


"병신이야? 말하는 법도 까먹었어? 뇌에 이상이 생겼어? 짜증나면 말해! 말하라고! 그치만 알지? 얀붕이 넌 나 없으면 못 살잖아. 나 없으면 못 사는 주제에 똑바로 대답 안 해?"


"아아아아아아아!"


"병신, 장애인처럼 우는 거야? 네가 장애인이야? 나 지금 장애인 같은 남친 눈앞에 두고 있는 거야? 제발 얀붕, 얀붕... 김얀붕! 정신 좀 차려! 제바알! 장애인 같이 울지 말고 똑바로 얘기하라고! 응?! 그러니까 니가 병시...ㄴ..."


짜악!


"...어?"


짜악! 짜악! 짜악!


"...카악...!"


따귀를 올리는 소리.

그리고 이어서 연달아 따귀를 올리는 소리는 살벌하기 까지 하다.

얀순은 자신이 무엇에 맞은 건지도 모른 채 어벙한 얼굴로 서있다가 이어서 들어오는 따귀 세례로 거친 기침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는다.


"아파... 아파아..."


"아프냐?"


"야, 얀붕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듯 약간 멍한 얼굴로 붉게 부어오른 뺨을 쓰다듬고 있는 얀순.

그런 얀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얀붕의 시선을 평소와 달리 차갑고 무거웠다.


"...한 대만 더 맞자."


얀순이가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얀붕은 그녀의 멱살을 붙잡고 끌어올려 다시금 따귀를 올렸다.

다시 한 번 짜악!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얀순은 바닥으로 내팽개쳐진다.


"아악!"


"아프냐?"


"야... 얀붕아... 아파... 왜 그래..."


방금까지 얀붕에게 분노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매도하던 그녀는 거짓말처럼 온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감쌀 생각도 못하고 불안한 시선으로 얀붕이를 바라볼 뿐이다.


"아팠구나."


"으, 응... 아파... 너무 아파... 얀붕아..."


아프다고 울먹이던 그녀는 시선을 올려보지만 그곳엔 평소에 보았던 얀붕이의 모습은 없었다.

차갑고, 살벌하고, 공포스러운 남성의 시선만이 그녀에게 내려 꽂히고 있었을 뿐.

얀순이는 그런 시선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고,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서도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평소처럼 한 성깔을 부리며 단번에 몸을 일으켜 얀붕이의 뺨도 한 대 올렸어야 정상일 그녀는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야, 얀... 얀붕아... 나, 나 뺨이... 아프... 거든?"


"응"


"야... 야... 약, 약 발라야 될 거 같... 거든?"


"응"


"나... 다, 다리에 힘이... 안, 안 들어가..."


어떻게든 입을 열어보려 하지만 얀순이의 말은 작게 옹알대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얀붕도 그녀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만 느끼고 대충 응수했을 뿐. 얀순이가 무슨 말을 했는 지는 관심 밖이다.

다만 그녀가 여전히 기를 굽히지 않고 있다는 건 명확했다.


"얀순아... 많이 아프지?"


"응, 응... 아파... 너무 아파...!"


얀붕이가 건네는 말에 감춰진 날카로운 비수를 느끼지 못했는지, 아니면 공포에 이성이 잠식 당한 탓인지.

얀순이는 얀붕이의 태도에서 기회만 엿보다가 이때다 싶어 온갖 불쌍한 척은 다 취했다. 

어쩌면 여자가 지닌 본능, 위기회피를 위한 유전자 덕이었을 지도 모른다.


짜악!


"아악!"


그러나 얀붕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가 침착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그녀의 내숭을 간파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를 아직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파! 아프다고! 그만해! 이 개자식아!"


"아프냐?"


"그래! 아파 죽겠어 씨발! 개새끼! 개좆같은 쫄보새끼! 존나 이제야 본색을 보이네? 여자를 때리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리나 봐? 개찌질한 새끼."


짜악!


"욱! ...씨발!"


가식은 순식간에 벗어던지고, 얀순은 평소의 걸쭉한 입담으로 얀붕을 거칠게 매도했다. 

사실상 모든 수단이 막힌 그녀의 마지막 시도였지만, 그게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음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짜악!


"악! 개새끼야! 그만..."


짜악! 짜악!


"그만! 그만...! 그만 하라고!"


퍽!


"켁! 케흑... 헤윽..."


마지막은 인간의 급소라고 할 수 있는 명치를 주먹으로 가격하자 단번에 허물어지는 그녀.

거칠게 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니 잠깐이나마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난 모양이다. 실제로도 자칫하면 사망할 수도 있는 취약 부위니 말이다.

얀순은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죽음의 공포와 함께 고통이 몰려오는 걸 견디지 못하고 눈물과 콧물, 침까지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닥에 흐르는 침, 인중을 타고 입술까지 흐르는 맑은 콧물,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화장마저 번지게 하는 눈물.

그야말로 추하다는 게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얀붕이도, 당사자인 얀순이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한 명은 신경 쓰고 싶어도 못쓰고 있다는 게 맞겠지만.


"헥, 헤으으으... 카학..."


"와..."


얀붕이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가질 거 다 가지고, 자존심 하나는 소나무 줄기 같으며, 남자친구에게도 자비와 배려가 없던 그녀가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리고 있다.


"하하하...!"


어느덧 약간의 이성을 되찾은 얀붕이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린다.

희열, 감격, 통쾌, 그리고 해방감.

온갖 감정들이 불러일으키는 흥분과 호르몬이 그를 끝도 없이 고양시켰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은 광기마저 비친다. 끝도 없이 얀순이에게 시달리던 그에게는 마약과도 같은 쾌감이다.


"쿨럭! 쿨럭! 야, 얀붕아..."


의지가 완전히 꺾여 버렸는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반항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정신이 들어?"


"야, 얀붕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린 그녀였으나 이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매도는 매를 부르고, 폭언은 폭력을 부르니, 그제서야 자신이 얀붕이에게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두 사람의 우위는 완전히 엇갈렸다.


"잘못했어..."


"응? 뭐가? 갑자기?"


뭘 잘못했다는 건지 얀붕이는 알고 있다. 

하지만 얀붕은 지금의 즐거움을 끝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누구에겐 말이다.


"내가 잘못했어... 나쁜 말만 했던 거, 막말했던 거, 욕했던 거, 전부 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고 있는 얀순이의 모습은 막말로 추했다.

지금까지 얀붕이가 자신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 여긴 그녀였다. 자신의 지위와 능력이 더 우월했기에 그것만 믿고 찍어 눌렀다.

얀붕이는 순순히 받아들였고, 그 행동을 본 그녀는 그가 자신이 좋아서 떠날 수 없다고 착각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얀붕이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그녀를 떠났을 것이다.


"넌 잘못한 거 없어."


"야, 얀붕아."


용서해주는 걸까.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다고 착각한 그녀의 얼굴이 환해지지만 이어서 입을 연 얀붕이의 대답에 다시 시퍼렇게 죽어간다.


"잘못한 건 네가 아니라 나니까."


"아, 아니야! 얀붕아. 넌 잘못한 거..."


짜악!


"아악!"


또 다시 날아오는 따귀를 막지 못한 얀순이는 거칠게 나동그라진다.

성인 남성에게 여러 번 따귀가 올려진 얀순이의 양쪽 뺨은 벌겋게 달아올라 부어있었다. 그게 정상이지만.


"하아... 하아... 얀순아. 아프지?"


"흐, 흑... 얀붕아..."


기어코 오열하기 시작하는 얀순이의 모습을 보며 얀붕이는 더 이상 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애초부터 이런 걸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고, 처음 느꼈던 희열도 그동안 억눌려있던 분노가 해방됨으로서 느껴진 반작용이었을 뿐.

천성이 선했던 얀붕이에게 있어선 이 상황조차 더는 유쾌하지 않았다. 뚜렷해진 이성은 그의 본능을 쉽게 억눌렀고 말이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이 불쑥 고개를 든 얀붕이는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며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제 그만 얀순이를 놓아주어야겠다고 말이다.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엄청나게 아팠어."


"얀붕아...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과하지마. 이미 손찌검은 할 만큼 했고, 네가 신고하면 우리 사이도 그나마 깔끔하게 끊어낼 수 있겠지."


얀붕이는 특유의 천성 탓에 습관적으로 얀순이를 배려하는 결론을 내린다.

자신이 죄인이 되면, 얀순이도 비교적 뒷얘기 없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동정심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애초에 얀순이가 작정하고 자신을 신고해버리면 감방 신세를 피하기도 힘들 것이고, 애초에 이성이 어느 정도 돌아왔을 때부터 각오는 해두었다.

그러나 얀순이는 꽤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내가 잘못했어! 얀붕아. 내가 잘못했어. 나쁜 말해서 미안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푸하하..."


평소엔 그렇게 듣고 싶어도 듣지 못했던 한마디가 이토록 쉽게 나올 줄이야. 어이가 없기도 하고, 조금은 후회가 들기도 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했지만, 그래도 얀붕이의 차가웠던 마음도 약간은 누그러진 듯했다.


아무래도 얀붕이는 쉬운 남자였던 걸까? 

그가 그녀에게 가지고 있던 애정은 아직까지 사그라들지 않은 모양인데, 다만 순수한 애정보다는 애증에 더 가까웠다.

얀붕이도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구박을 듣고도 아무렇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난 이제 널... 사랑하는 지 잘 모르겠는데."


처음 그녀의 뺨을 후려치고, 온몸을 타고 흐르던 짜릿함과 해방감, 그리고 쾌감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감각을 쉽게 잊을 수 없는 만큼, 그는 지금도 얀순이를 향한 애정을 쉽게 신뢰할 수 없었다.


"신고 안 할 게! 그냥 옆에 있어줘! 내가 잘못했어. 평생 받들며 살게. 내가 못된 년이야. 나쁜 년이야. 떠나지 마... 제발...!"


"후우... 대체 넌 뭐냐... 아까까지만 해도 욕하고 달려들더니 이젠 자기 입으로 자기가 나쁘다고 하네?"


"나... 나 병신이야! 정신이 이상해! 헤헤... 내가 나쁜 거야. 내가 나쁜 거... 그러니까... 그러니까 가지마아... 응? 응? 미안해. 진짜 미안해..."


"..."


질렸다. 정말로 질렸다. 이 여자라는 존재에 대해 질렸다.

순식간에 자존심을 던져 버리는 그녀, 그 이상으로 존엄까지 내팽개치는 그녀의 행동거지가 갑자기 소름이 끼친다.

인내에 한계가 와서 그녀에게 손찌검을 했다지만 그것 만으로 이렇게 사람이 180도로 뒤집힌 것처럼 바뀔 수가 있는가?

이건 그냥 아파서, 고통을 피하기 위한 표출이 아니었다. 무언가 다급한 것처럼, 정말로 큰일이 날 것처럼.


가령 인생의 의미 자체가 퇴색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래,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근원적인 공포였음을 얀붕이는 확신했다.

그 대상은 얀붕이 자신.


"다음에 얘기하자. 너 지금 이상하다..."


"아아악! 아니야아아! 안 이상해! 안 이상하단 말이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애애...! 으아앙... 가지마... 가지마아아아... 흐아아앙..."


"...허."


기가 차다는 얼굴로 얀순이를 바라보는 얀붕.

그리고 그런 얀붕을 매우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던 얀순은 얀붕의 표정을 재빠르게 읽어내곤 그렇잖아도 엉망인 얼굴이 더욱 진창이 되었다.

무릎을 꿇고, 그의 팔을 어떻게든 붙잡으며, 천천히 기어가는 그녀.


이건 이미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연인의 상하관계를 넘어서 그냥 계층 자체가 달라진 것처럼 구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의 매체에서 흔히 나타나는 인물들과도 흡사해 보였다.

그렇다. 노예다.


"죄, 죄송했습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모자라서 그랬어요! 뭔가 미쳤었나 봐요! 사랑해요! 얀붕... 아니 주인님! 주인님을 평생 섬길 게요!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제발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 흑, 우에엥..."


"..."


얀순이는 아예 그의 앞에서 큰 절을 올리고 있었다. 

진정으로 예를 다해 올리듯, 경건하기까지 한 그 모습에선 이전의 얀순이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 탓에 시퍼렇게 질려가는 얀붕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주인님을 기분 나쁘게 했다며 얀붕이의 마음에 더욱 부담을 주었을 테니 말이다.


얀붕이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예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한 그녀의 모습을 차마 지켜보기 버겁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으나.

어떻게든 오감을 끌어올려 얀붕이의 눈치를 살피던 얀순이는 그의 절망어린 한마디를 기어코 귀에 담아냈다.


"주, 주인님... 저 버리지 마세요. 주인님이 없으면 안 돼요. 저, 저 얀순이는 주인님의 영원한 노예입니다. 노예라구요. 저 주인님의 재산이에요. 제 것은 오로지 주인님 것. 저 돈 많아요. 가진 것도 많아요. 땅도 있구요. 부동산도 있어요. 다 주인님 거예요. 헤헤... 헤헤헤... 그, 그러니까... 안 버릴 거죠? 사랑해요 주인님..."


기함을 하면서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더니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는 그녀.


쪼오옥.

머리에 떠오르는 내용을 그대로 입 밖에 꺼내던 그녀는 작정하고 그의 노예로서 살아가기로 했는지 이젠 그의 더러운 신발에 키스까지 해댔다.

짧은 입맞춤은 진정성이 없다고 여겼는지 아예 10초 동안 소리가 나도록 빨기까지 한다. 


이게 과연 현대 사회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사고 방식일까?

얀붕이는 매우 심각하고, 고통스럽게 고민했지만, 도무지 답은 나오질 않았다.

그저 지금 자신의 발에 깊은 입맞춤을 하고 있는 그녀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


"너... 정신병원 가자."


"네? 저 정상이에요...! 주인님 제발 부탁이에요 절 떼어 놓지 마세요... 정말이에요. 정말이란 말이에요...! 다 제 의지에요. 제 의지로 주인님의 노예가 되려는 거에요! 주인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게요! 정신병원 갈 필요 없어요. 괜히 주인님한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네가 이러고 있는 게 내게 있어선 충분히 누를 끼치는 거고 민폐야."


그의 말에 얀순이는 살면서 가장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방금까지 보이던 굴욕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당당했던 이전의 모습이다. 

이 모습만 본다면 그녀가 방금까지 얀붕이에게 노예 선언을 했다곤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정신이 나간 것만 같았던 노예의 모습에서, 순식간에 당당한 현대인으로 돌아온 얀순이의 모습에 얀붕이는 머리가 곤죽이 되는 것만 같았다.

어느 게 진짜 그녀의 모습이란 말인가? 진정 그녀는 미친 게 아니었단 말인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이, 이러면 되나요? 당당하고 예의범절한 노예가 요즘 트렌드긴 해요...! 자, 주인님. 언제든 명령만 내려주세요."


"아..."


목줄만 매이고 있었더라면 개나 다름없었을 거라 확신한 얀붕은 문득 뇌리를 스치는 단어가 두 개 정도 떠오른다.


집착과 의존.

마음이 자신에게 완전히 매여버려서 더는 떠날 수 없는 정신 상태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그녀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려면 이 단어들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은 얀붕이는 그 어느 때보다 희망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얀순이를 차마 무시할 수가 없다.

평소에도 이렇게 자신에게 밝은 얼굴을 보여줬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의미 없는 IF를 떠올리며 그는 눈을 감는다.


"너 때문에 나도 미친 모양이다."


"...주인님?"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아니다. 이런 말도 너한텐 사치 같네."


"죄, 죄송합니다... 흑... 주인니...ㅁ..."


"주인님이라고도 부르지 마. 그냥... 이전처럼 하라고."


"...으으음?"


이전처럼 하라는 말을 이해한 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얀순이는 또 다시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대며 눈앞의 얀붕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정말 나 말고 너 데려갈 사람이 없는 건가."


"안 돼요! 주인님이 아니면 안 된다구요! 저는 멍청한 노예에요. 아, 주인님. 제 몸도 마음대로 하세요. 거의 반 년이나 섹스 안 했잖아요. 쌓여있으실건데... 불편하시죠?! 제가 빼드릴 게요!"


기함을 하며 이젠 몸까지 내주겠다고 발악을 하더니, 아예 천천히 옷을 벗어가는 얀순이.

그 모습을 순순히 지켜볼 얀붕이가 아니다. 

순식간에 자신의 윗옷을 벗으며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는 모습은 평소 얀순이에게 보여주었던 상냥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은 여전히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다고 말이다.

분명 그녀라는 인간에게 질리기도 하고, 존엄까지 벗어던지는 행동에 혐오과 죄책이라는 감정이 동시에 고개를 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안다. 자신 말고는 그녀를 품을 사람이 없다는 걸. 


"주, 주인님?"


"그래, 네가 이겼어. 내가 다 잘못했다. 내 죄지. 그러니까 함부로 옷 벗고 다니지 마."


이런 망가진 인간을 끝까지 품고 가려는 인간이 자신 말고 더 있기는 할까?

분명 자신이 챙겨주지 않으면 이 미친년은 아무한테나 다리를 벌리고 다니다 아사할 게 뻔하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쓰리던 속이 풀리는 것만 같다.


"주인님 잘못이 아닌..."


"쉿, 조용히 해. 근처에 모텔까지 가자. 노예인 척하지 말고."


"...네!"


단박에 얼굴이 환해지는 얀순이의 얼굴을 보며 얀붕이는 떠올렸다.

과거에도 이렇게 손을 잡고, 얼굴을 붉힌 채로 어색하게 모텔로 향하던 때가 있었음을.

서로에게 부끄러웠던 첫경험이 비눗방울처럼 눈앞에 아롱아롱 떠오르는 사이, 둘은 천천히 모텔 입구로 향해 걸어들어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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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줘서 고맙다!

이런 얀데레도 있을 법해서 한 번 써봤어

칼만 들고 푸줏간 고기 써는 얀데레는 나한테 안 맞는 거 같아. ㅎㅎ;;

다음에도 좋은 글로 찾아오도록 노력할게


사족//어제 생일 축하 덧글들 너무 고맙고 재밌다는 덧글들도 너무 고마웠음

"[집착] S급의 개화가 확인되었습니다." 는 쓰면서도 장편 연재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내용 구상 중이야.

다만 장편 연재는 얀챈이 아니라 노벨ㅍ아 같은 곳에서 진행되지 않을까 싶네... 미안.

혹시나 그때가 된다면 얀챈에도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만, 홍보가 금지라면 그냥 이 문단은 잊어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