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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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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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



1.

오 년간 항상 숨막힐듯 느리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지금에서는 정말 눈 깜빡 할 시간에 지나갔다.

일주일.

그 집을 나선지 일주일이 되는 시간동안, 정우는 약속처럼 카페에 앉아 수진의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늘어놓는 것으로 언제나 하루를 마무리 했다.

다만, 그 시간도 오늘로서 마지막이었다.


"이걸로 끝입니다. 긴 얘기 들어주신다고 고생하셨어요."


"후아, 숨도 못쉬고 들었네."


정우의 말에, 수진이 탁 풀렸다는 표정으로 예의 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씁쓸한 것을 먹으며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

다만, 그것이 무슨 말을 꺼내기 위한 약간의 시간벌이임을 알고 있었다.

느리게, 천천히.

결국 마무리된 그 이야기처럼, 반절 넘게 남아있던 커피를 빨대로 전부 빨아들이고 나서야 수진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하셨네요."


"...그렇죠."


고민 끝에 나온 말이라기엔 참으로 담담한 위로였다.

차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일단 아무렇게나 내뱉는 그런 것.

애초에 위로받고싶어서 꺼냈던 얘기가 아니었던지라 정우는 그다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충분했으니까.

이미 찍혀진 마침표.

이제는 되돌아 갈 수도 가고 싶지도 않은 과거의 일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재잘거리던 둘 사이에 갑작스레 긴 침묵이 찾아왔다.

이야기가 끝낸 뒤에 찾아오는 공백.

정작 오 년의 기억을 전부 쏟아내니, 텅 비어버린듯 안에 남은것이 없어, 정우는 주문한 커피만 천천히 들이키고 있었다.

스물 아홉.

정말, 그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구나.

그 생각이 들자, 마시는 커피만큼이나 씁쓸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괜찮을거에요. 이제 다시 시작한다 생각하면 되죠. 십 억! 으아, 아직도 안 믿기네, 십 억...아저씨 그 걸로 뭐 할거에요?"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애써 화제를 돌리는 말이었다.

돈 밝히는 여자라는 이미지를 싫어했으면서도, 황급히 꺼낸 말이 결국은 돈이라, 수진을 바라보는 정우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위로 올라갔다.


"왜, 왜요. 왜 웃어요! 으씨..."


"아니에요. 으음...글쎄요. 사실 돈 보다는 그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어서..."


괜히 찔려, 틱틱거리는 수진을 진정시키며, 그녀 말대로 이제는 뭘 할까 생각해보았다.

마음 속의 응어리를 전부 토해낸, 이제서야 비어버린 자신이 지금 하고 싶은 것.

그 흔한 어릴 적의 꿈도,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확실한 목표도 없이 살아왔던 자신에게, 지금에서야 그런 질문을 꺼내보았다.

그게 뭘까.

...그건 조금 어려운 것이었다.


"역시, 지금은 잘 생각이 안 나네요. 그런 생각할 시간도 없었어서..."


"천천히 생각해 봐요! 어차피, 이제 남는게 시간인데, 살다보면 하나씩 생기겠죠, 뭐."


그런가.

그렇겠지.

지금으로서는 그 말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슬슬 일어나시죠."


"네."


정우의 말에 수진이 기다렸다는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로서 마지막 만남일 것이라는 생각에 아쉽기는 했지만, 붙잡을 이유는 없었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오후 열 시.

밖은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동생이 많이 기다릴테지.


그것은 일주일간 얘기를 주고받으며, 수진의 입에서 들었던 것이었다.

궁핍한 삶에 허덕이다, 결국 자신과 아픈 동생을 버리고 간 부모.

그 어린 나이에 집안의 유일한 가장이 되어버린 소녀는 당연하게도 철이 빠르게 들 수 밖에 없었다.

정우가 사주는 것인데도, 커피 값에 덜덜 떨던 모습.

이제는 시대착오적이라고 불릴만한 구식 폴더 폰.

아픈 동생 약값 밥값 벌겠다고, 밥 한 술 덜어내고, 옷 한 벌 줄이고, 심지어는 잠까지 쪼개가며 필사적으로 돈을 벌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정우의 과거와 겹쳐보이고 있었다.


자신 또한 그랬던 시절이 있으니까.

그 또한 그 어린 나이에 부모의 막대한 빚을 떠안고 차가운 사회의 밑바닥에 나동그라진채, 발악하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저 약간의 차이라면, 그녀는 자신이 집으로 돌아갈 이유가 있고, 그 때의 정우는 없었다는 것 정도 뿐이었다.


"돈 보냈어요. 동생 약값에 보태세요."


"...고맙습니다."


이제는 헤어질 인연을 마무리하는 말을 꺼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고맙다는 말은, 어째서인지 봄날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일주일의 기억이 조금 되돌아간다.

과거를 잊고 싶어 술을 진탕 마시고 있던, 남에게 과자를 던져주고는 충고하던.

무시하고 지나가도 됬을텐데도 굳이 먼저 아는척을 하던.

돈만 받고 고개만 끄덕이면 됬을 일에, 일주일이나 걸려, 끝까지 얘기를 들어주던.

그런 그녀에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참으로 고마운 참견꾼이다.


"종종 전화해요! 언제, 밥 먹어도 좋구요!"


시원스런 목소리로 정우의 팔을 흔들던, 수진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아, 그러고보니 이번엔 바로 확인 안하네.

돈 보냈다하면 그 자리에서 입금 먼저 확인하던 수진이 떠올라 정우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여러번 '다시 듣기'라는 말을 반복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집에서 방방 뛰는거 아니려나.

약값에 보태기에는 조금 큰 금액일테니, 분명 그럴 것이다.


천천히 정우가 몸을 돌렸다.

이제, 다시금 혼자가 되었지만 처음의 그 날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이제서야 출발선에 선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천천히 찾아보자.

시간은 많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정우 씨."









...

무언가가 등골을 타고 오르는 기분이었다.

뭐야...

순식간에 굳어버린 발은, 마치 뿌리를 내린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 한동안 잊고있었던, 그 가슴을 옥죄는 듯한 통증이 엄습해왔다.

턱 막히듯 답답해져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숨을 의식적으로 내쉬었다.


왜.

갑자기 왜.

왜 다시 나타난거야.


알고 있다.

저 목소리를 잊을리가 없다.

오 년간 자신을 괴롭혀왔던, 끔찍하게 가슴에 맴돌던.

매일마다 악몽처럼 들러붙어, 온 몸을 씹어삼키는듯한 그 소리를 잊을리가 없다.


"정우 씨..."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그 집에서 단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던 이름을 내뱉으며,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떨어지지 않는 발로 억지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 것은 물러나는 만큼 거리를 좁혀왔다.

은은한 가로등의 빛이, 드문드문 그녀의 모습을 비추었다.

어깨보다 길게 내려앉은 칠흑같은 머리.

희고 곱게 그어내린듯한 세밀한 목선.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깎아낸듯한, 미형의 얼굴.

그 얼굴에는 완전히 도려내져 어떠한 변화도 없을 가면에 억지로 인간미를 쑤셔 넣으려한 흔적처럼, 작은 눈물점이 하나 찍혀있었다.


아...

그녀다.


"정우 씨, 할 말이 있어요."


갑자기 다가온 이 끔찍한 시간 속에서도 마주한 그녀의 눈은, 기이하게도 정우가 그간 보아왔던 것과는 조금 달라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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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늘도 분할내버림. 미안.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공포를 쓰고 싶다.

여담으로, 짤은 얀챈에서 한번 봤었던 건데, 정희수 이미지가 딱 저런 느낌이라 올려봄.

문제되면 내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