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붕 학생이라고 그랬죠? 반가워요, 그냥 편하게 아저씨라 부르든 상관없어요."


안경을 쓴 지적인 남성과 얀붕이가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얀붕이는 불편한 표정으로 그에게 답했다.


"얀순이란 여자 일로 보자고 하셨죠? 무슨 관계세요?"


안경 쓴 남자가 말했다.


"저 이런 사람입니다."


그가 내민 명함에 써 있는 글귀


'얀챈 그룹 수석보좌역 김재우'


얀붕이는 그 명함에 써있는 글을 읽고는 흠칫 놀랐다.

얀챈 그룹, 매스컴에는 잘 등장하지 않지만 제계 순위 5위를

유지하는 굴지의 기업. 금융과 첨단 산업 분야의 강세를 두지만,

대외적인 홍보를 잘 하지 않는 터라, 다른 기업들에 비해 오히려

인지도에서는 밀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업에서 비서 중에서도 최고위급 직위의 사람이

매일 갓 복학한 바보 병신 얀붕이일 뿐인 자신을 찾아오던

미친년 얀순이란 여자와의 일로 찾아 오다니...

얀붕이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한참을 그저 말 없이 명함만 바라보는 얀붕이에게 김재우라는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얀순 아가씨는 얀챈 그룹 회장님의 2남 2녀 중 막내이시고...

얘기를 들어보니 얀붕 학생을 마음에 두고 자꾸 폐를 끼쳤다 들었습니다."


얀붕이가 대꾸했다.


"그런 아가씨가 자꾸 왜 절 찾아와서 그러는 겁니까? 원래 뉴스 같은 거 보면

재벌은 재벌들끼리만 만나고, 결혼하잖아요?"


김재우라는 사내는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학생 말이 맞지요, 보통은... 그런데 어떤 계기로 얀순 아가씨가 얀붕 학생을

마음에 두게 되신 것 같은데, 사실 얀순 아가씨가 심리적으로 조금 불안정한 

상태이십니다. 태어나신지 얼마 안돼 사모님께서 돌아가시고, 회장님께선

업무가 바빠 다른 자제 분들 아니면, 일 도와주시는 아주머니들에게만

맡기셨으니까요."  


얀붕이가 테이블로 시선을 깔고는 고개만 휘저었다.


"아무리 딱한 사연이 있다 하더라도, 전 이미 여자 친구가 있는 사람입니다.

재벌의 딸이 저를 좋아한다는 얘기도 믿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저는

그런 상황에서 헤벌레하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 집안에서 누가 저를 반가워 할 것이며,

아니 애시당초 지금 있는 여자 친구를 재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떠나는,

스스로 평생 후회하고 부끄러울 짓은 아예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문제라면, 학생...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보통 그런 경우는

승계권 서열이 높은 경우에 학생이 걱정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긴 하다만,

얀순 아가씨는 막내이시고, 그저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후원하는 정도라면

크게 불편해 하지 않고 학생을 환영할 것입니다. 이건 또 회장님 지시기도 하구요.

그... 저... 여기서 말하는 '부족함 없이' 라는 표현은 회장님 집안 기준으로

부족함 없이지, 일반 분들이 생각하는 기준은 아득히 넘을 겁니다.

두 분이 아무 걱정 없이 관계를 이어 나가실 수 있는..."


얀붕이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소리쳤다.


"아저씨! 요점이 그게 아니잖아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헤어질 이유도 없는

여자 친구를 떠나지 않을 거라니까요! 또 전 그 아가씨한테 조금도 마음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불쾌한 감정은 좀 있군요. 저 이만 일어납니다. 그 회장님께도

그 '아가씨'께도 오늘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전해주세요."


그렇게 얀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갔다.

자리에 남은 비서는 떠나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릴 뿐이었다.


"헤어질 이유도 없는이라... 그럼, 있으면 떠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얀순이가 있는 방을 울렸다.

캄캄한 방안, 그 안에서 얀순은 몰래 찍어 뽑은 얀붕이의 

새로운 사진을 날짜, 항목, 주제 별로 정리하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살짝 문을 열었다. 


"우리 딸, 아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니?"


......,


"그러니까, 얀붕씨가 그렇게 얘기했다고?"


"...그래. 걔가 그렇게 말했다더라. 얀순아, 이제 그런 놈 그만 쫒아다니고,

어디 미국이나 유럽에서 학교 다니며 놀다 오면 안되겠니?

바람 좀 쐬면 네 기분도 나아지지 않겠니 말이야."


얀순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뭐, 상관없어. 그 사람은 내 운명이니까 날 받아 줄 때까지 시도하면 돼.

그리고 외국? 싫어. 유치원, 초등학교는 독일에서, 중, 고등학교는 미국에서

다니다 중간에 한국 와서 난 친구도 없잖아? 그리고 난 이제 

한국 떠날 이유 없어. 얀붕씨랑 같이 가는 거 아니면 나, 안 가"


회장은 작게 한숨 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건 사정이 있어서.. 얀순아, 도대체 그 놈이 뭐라고 그렇게 좋니?

네가 미국에서 다니던 사립학교는 아무나 못 들어 오는 곳인데,

거기서 좋은 친구가 없었니? 눈에 차는 애 말이야."


그러자 얀순이가 히스테리컬하게 소리쳤다.


"싫어! 싫다고! 그런 고고한 척 하면서 위선 떠는 애들, 다 싫어!

김 비서한테 얀붕씨 다시 만나보라 그래, 그냥!"


그리곤 그녀는 문을 쾅 닫고 다시 방에 들어가 버렸다. 썅년이

회장은 그런 그녀를 보며 더 이상 방도가 없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니 팔자가 도대체 어떻길래 왜 우리 얀순이랑... 지까짓 놈이 감히 내 딸을 

밀쳐내? 그 기고만장하고 오만방자한 새끼, 결국 넌 얀순이 소유가 될 거다."


분노가 서린 독백을 하곤 그가 소리쳤다.


"김 비서! 김 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