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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경순양함 벨파스트

로열 경순양함 시리우스

철혈 중순양함 론


"안녕하십니까, 주인님" 


눈을 떠보니 벨파스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 바늘은 내 출근 시간 직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녕"


이번에도 인가, 하고 나는 내 옆의 베게를 쳐다보았다

원래라면 내 머리 밑에 있어야 할 베게 였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리 밑에 있는 것은 또 다른 부드러운 물건이였다


"주인님의 귀여운 잠자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지만

지금 일어나지 않으시면, 지각하실 거에요"


벨파스트는 훗훗, 웃으며 내 머리를 받치고 있던 

그녀의 무릎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내 침대 위에서는 절세의 미녀이자 메이드인 그녀가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선정적인 감정에 젖은 채, 이상한 생각이 들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제는 아니였다

사실 어느 쪽인가 하면, 무서운 감정이였다



요즘 그녀는 밤마다, 혹은 새벽에 내 방에 들어와

무릎 베게를 해주며 즐기고 있었다


비서함이 된 그 날부터 말이다


처음엔 힘들었다

엉겹결에 언성을 높어, 하지말라고도 했지만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인님이 주무실 때부터, 눈을 뜨는 그 순간까지 지켜보는 것

그것이 비서함인 벨파스트의 의무

주인님의 취침엔 아무일도 없어야 하니까요"


...라는 말을 듣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더 이상 말해봤자

아침부터 분위기를 무겁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반쯤 포기한 채,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보니, 내일이 훈련이네"


매일 아침마다, 힘이 빠진 손으로 달력을 가리키며

그녀와 이 날을 확인하고 있었다


훈련이 끝나면, 그녀는 비서함에서 내려올 것이다

누가 비서함이 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아침부터 나를 찾아오는 함선만은 아니길 바랬다


"네, 그렇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꼭 좋은 결과를 따내서

앞으로도 주인님 곁을 모실 수 있는 비서함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이미 비서함이 결정된 것마냥, 기쁜 듯이 이야기하는 벨파스트



그녀는 양손을 포갠 채, 뭔가를 소중하게 들고, 내게 건넸다

그것은 이 방의 열쇠

지휘관인 내가 쓰고 잇는 방의 열쇠였다


열쇠는 내가 무슨 일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비서함이 가지고 있도록 해두었고

그리고 그 열쇠의 새 주인이, 내일 결정되는 바였다

솔직히 말하면, 비서함에게 열쇠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뭔가 비서함만의 증표를 원하길래, 준 것이 그 열쇠였다


과연, 내일의 훈련은 어떻게 될 것인가

비서함은 새로 누가 될 것인가

나는 조금 두려워졌다



"지휘관님, 갈아입을 옷이 준비되었습니다"


내가 생각에 잠긴 틈에

벨파스트는 어느새 내가 입어야 할 제복을

침대 위에 정성스럽게 올려두었다

이런 준비를 철저히 해주는 것은 너무나도 고마웠다

다만, 매일 밤마다 무릎베게를 받는 것이 조금 고역이지만 말이다


"고마워"


그래도 감사하다는 말은 전했다

그녀가 듣고 싶어하는 말이 였기에...


"지휘관님의 메이드로서,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의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면

그녀가 기뻐하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함선도 사람과 다르지 않다

좋아하면 기쁘고, 싫어하면 슬프기에

함선은 사람과 다르지 않은 것이였다


"그럼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건 괜찮은데"


벨파스트는 또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러냐는 듯한 얼굴을 지었다


매일 아침마다, 거절하는데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건가


"벨파스트, 옷 갈아입는 것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했잖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의 몸을 돌보는 것이 메이드의 의무입니다

메이드로서의 업무를 메이드장인 제가 게을리 할 수는 없습니다

지휘관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저 벨파스트가, 모든 시중을 완벽하게 해내겠습니다

탈의, 목욕, 배설 등 일상을 위한 일들은 물론

아침마다, 홍차, 낮 업무, 야간 시중 등 세세한 일까지 

모두 도와드릴테니, 주인님은 제게 몸을 모두 맡겨 주세요"


"...에"



말이 나오지 않는 나를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두 팔을 벌렸다

그녀의 시선은 뭔가 재촉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벨파스트도 바쁘지?"


"네, 그렇지만 고생스럽지는 않습니다

사랑스러운 주인님의 몸을 위해, 내 모든 것을 거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

지나친 생각에 주의를 줘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일단 할 일은 해야겠지


긴장감에 나른함이 싹 가신 몸을 이끌고 움직였다

시간을 보니, 슬슬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하지 않으면 힘든 시간

필사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이것은 일


그러면서


그녀는 함선... 그녀는 함선... 그녀는 함선...

그렇게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벨파스트, 창피하니까 어서 끝내줘"


나는 체념하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 결국엔 받아들이실 거면서, 왜 저항을 하신 건가요?"


"...적응이 안되서 그래"


"음... 곧 있으면 자연스럽게 적응이 가실거에요"


곧이고 뭐고, 앞으로도 적응은 못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를 본떠 벌린 양팔에, 

예쁘고 갸름한 손가락이 감겨드는 것을 느꼈다






"오늘도 자랑스러운 주인님은 패배하고 말았군요"


시리우스는 로얄 기숙사 뒤뜰에서

무릎을 감싼 채,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나를 위로하듯 다정하게 말했다


패배, 라는 부분이 조금 상처를 받게 하는데 말야...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괜찮아"


내일이면 새 비서함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기에 내일 아침엔 벨파스트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아침의 고통은 오늘로서 마지막이다


"내일 돌아오실 때쯤

지휘관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보고를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비서함이 아닌데도

이렇게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시리우스


아마도 그녀의 최우선 목표는

훈련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비서함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자신 있는 듯한 말에 안도감을 느꼈다


이렇게 매일 아침 만나기로 약속해서인지

그녀의 얼굴에는 그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낯익은 방에서 보던 옆모습보다

이렇게 같은 시선이 되어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은 꽤 신선했다


아니... 나는 계속 내 옆에 있어준 함선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건가?

조금 한심해지는데 말야...



"...내일이구나"


아침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내일의 문제도 고민이였다

무거워지는 머리를 더욱 무릎에 묻어갔다


"시리우스의 전투, 자랑스러운 주인님이 봤으면 했는데..."


아직 훈련은 시작도 안 했는데,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다


"미안해"


나는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사과했다

내일이라고 할까, 오늘 저녘에 본부로 출두해야 했다

배를 타고, 몇 시간의 긴 여행 끝에

만나기 싫은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일이란 힘들다


눈에 익을 정도의 귀찮은 일에도 전력을 다해야 하니까

정말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휘관님이 본부에 간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뭐, 보통은 가지 않지

장시간 함대를 비워둘 수도 없는 법이잖아"


명색이 지휘관으로서, 함대를 맡고 있는 신세인데

무리해서 잡아 놓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호출을 당한 것은

전에 비해, 훨씬 평화로워졌기 때문일까


큰 전투도 없어졌고

다른 함대로부터도 딱히 이상한 반응은 감지되지 않았다고 했다


.....평화가 다가왔다... 모두의 노력으로



"세이렌의 활동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것도 자랑스러운 주인님이 노력한 덕분이죠"


"모두의 노력이야,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평화로워진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나는......


"평화란 건가..."


본래라면 희망에 넘쳤을 그 말을...

난 아무 의미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가야 해

준비도 해야 하고 말이야"


무거워진 머리를 억지로 들었다

파란 하늘에 크게 빛나는 태양이 나를 비추었다

그런 빛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도록 허리를 들어 올렸다


"...자랑스러운 주인님"


"응?"


시리우스는 내가 태양을 바라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반응해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내 몸을 그녀의 몸을 향해, 힘껏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갑작스러운 힘에, 허를 찔려, 넘어질 뻔 했다


아니 넘어졌다

단지, 넘어질 뻔한 내 몸을

시리우스가 억지로 지탱해, 자신의 몸에 품었을 뿐


딱딱한 땅바닥에 넘어진 하체와는 다르게

상반신은 어느 부드러운 곳에 안착했다


특히 내 머리는 그녀의 가슴에 닿아있었다

행운 따위가 아닌

그녀가 그렇게 되도록, 가져다 놨을 뿐이였다

내 머리에 감싸진, 그녀의 팔이 나를 놓지 않겠다고 말하듯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시리우스, 아파!!"


나는 고통에 몸부림친 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힘 없는 인간인 내 힘으로는, 그녀의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풀리지 않는 구속과, 더욱 더 강해지는 결속

답답함과 미지근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

그리고 달콤하게 채워지는 향기


"자랑스러운 주인님"


그녀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쓸쓸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시리우스는 설사 전쟁터가 없어진 평화로운 세계가 됐다 해도

전투함으로서의 역할을 마치는 그 날이 온다고 해도

시리우스는 주인님의 곁에서 영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설령 지휘관님이 그 역할을 마치는 날이 올지라도...

시리우스만은, 역할을 잃어버린 당신 곁에서 계속 있을거에요

그러니까 부디...

제발, 시리우스를 버리지 말고, 끝까지 곁에 있게 해주세요

메이드로서가 아닌

시리우스로서 자랑스러운 주인님께 바라는, 단 하나의 소원입니다

제발 이 천한 메이드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잠자코, 그녀의 소원을 들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단지


"그래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그런 무책임한 할 뿐이였다

이 정도면 말해도 될 것 같으니까...


함선은 평화로운 세계에선 불필요한 존재

나는 평화로운 세계에 불필요한 존재로부터 나온 말에

이 정도의 할 말 밖에 없었다



그녀도 분명 알아주고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듣더니, 슬그머니 팔에 힘을 빼는 그녀였기에 말이다

그녀의 부드러운 감촉에서 벗어나자

왠지 체념한 듯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함선들도 분명 생각하는 바가 있을지 모른다

평화로운 세계에 대해 말이다



"...자랑스러운 주인님

바쁘신 와중에 불편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일어서서 머리를 숙이는 시리우스


"괜찮아, 나야말로 늘 하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적어도 말할 수 잇는 만큼의 말을 전하고

이 자리에서 멀어져 갔다

아니... 도망치듯 그 자리를 달려나왔다

고개를 들지 않는, 그녀의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었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





결국 복잡한 마음만 가득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벨파스트는 내가 지휘관실로 돌아오기 전의

얼마 안되는 사이에 옷을 더럽힌 것에 화가 나 있었지만

내 얼굴을 잠시 보더니, 이내 조용해져 버렸다


나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그다지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새 옷을 갈아입고, 언제나 하던 사무일을 하다보니

론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론과 함께

본부로 향하는 배에 탑승했다


훈련 직전이라 바쁜 와중인데도

여러 함선들이 마중나와 주었다


그 중에는 물론 시리우스도 있었다

아침과는 달리, 언제나의 부드러운 미소로

나의 출항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움직였다

여러 함선들이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보니

조금 쓸쓸해졌다


오랜만에 함대를 떠나는 군


문득 론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티르피츠가 지휘관에게 이 말을 전해달래"


"응? 뭐라고 했는데"


"철혈은 모두 지휘관이 무슨 길을 택하든

끝까지 함께 한다"



......무슨 뜻일까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그녀 또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늘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날이네


하지만 이런 날도 이제 끝날거야


본부에서 가면, 간단한 인사 정도만 마치고 오면 돼


문제는 내일


상사를 만나는 건 싫지만...


비서함은 누가 되있을까?


기대도 됬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나는 여러가지 생각을 정리하면서

내 앞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론을 따라하듯이

나도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지금 눈 앞에 닥친 문제에 전력을 다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에 가득한 불안을 구석으로 몰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