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크리스마스 연휴.


그날은 한 해의 끝을 앞두고 누구나 들뜨게 되는 날이다. 스물넷 인생동안 사랑을 나눌 연인이라곤 하나도 없던 내게도, 이 날은 정말 특별한 날이었다.


누가 믿어주기나 할까. 

변변치 않은 지방대학에, 자취방의 월세도 최저시급 알바로 겨우 땜빵하는 초라한 학생.

주인공이 되기엔 너무 초라하고 한심한, 내게 일어났던 그 마법같은 일들을.


"..."


자취방 매트릭스에 우두커니 앉은 채, 나는 텅 빈 방 안을 차분히 돌아보았다. 몇 달 전까진 한 여인의 존재감으로 소란스럽던 이 방은, 이제 계약 만기를 앞두고 공허하기만 했다.


["선배, 내일 본가로 올라가죠?" - 이하린]


띠링, 핸드폰이 진동했다. 같이 알바하던 후배에게서 온 문자였다. 워낙 성격이 밝고 싹싹해서,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잘 지내는 아이였다.


["응, 남아있는 짐도 다 옮겨야지. 방학 동안은 알바도 쉬고 한동안 집에서 지낼거야. 사장님한텐 이미 말해놨어."]


["오늘 알바 끝나면 놀러가도 돼요? 오늘 아니면 방학 동안 선배 얼굴도 못 볼 텐데." - 이하린]


["알바 끝나면 밤일 텐데, 크리스마스에 무슨. 너 약속 없어?"]


["에이, 오늘은 선배 집에서 술 마시려고 약속 다 비워놨는 걸요?" - 이하린]


그만 웃음이 나왔다. 선배라는 사람을 놀려먹으려는 건지, 평소에 약속 잡을 일도 많은 녀석이 왜 이런 날에 나랑 시간을 보내려는 걸까.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해도, 가슴 한 켠이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녀의 의중에 짐작가는 바는 있었지만, 그걸 확신하기엔 아직 겁이 났다.


["안주랑 술 많이 사와"]


난 대강 답변하고 다시 폰을 집어넣었다. 쓸모 있는 것, 쓸모없는 것들을 죄다 때려넣은 가방 서너 개가 주변에 널부러져 있었다.


정리는 끝이다. 내일 부모님이 차를 몰고 내려오시면, 저 가방들을 싣고 본가로 올라가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되면, 이 좁은 자취방엔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터였다.


"...아쉽네."


값싼 월세가 유일한 장점인 좁아터진 자취방, 정감 갈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이곳에선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당일, 종강을 기념해서 동기들끼리 밤새 술판을 벌인 그날이었다. 애인이 없는 설움을 술로 이겨낸 우리들은 새벽까지 맥주를 들이킨 후에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길, 눈이 얼어 미끄러운 계단을 올라가서 도착한 자취방 문 앞엔, 평소와 다른 이상한 것이 나를 맞아주었다.


그곳에 있던 건, 추위에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있던 한 여인.


허리까지 늘어뜨린 찬란한 금발과, 옛 사극에나 어울릴 법한 고풍스런 복식.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아름답던 그 외모.


무엇 하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여자였다. 평소였다면, 나는 그 여자를 경찰에 신고하고 말았겠지만, 당시 나는 술에 취해서 그런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자취방 안으로 데려왔다. 옷에 묻은 눈과 얼룩은 대충 수건으로 닦았고, 하나뿐인 매트릭스에 눕혀 두꺼운 이불을 덮어줬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러지 못하고 그녀의 곁에서 곯아 떨어졌다.


참 위험한 짓이었다. 그 여자가 누군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집에 들이고 잠들어 버렸단 말인가.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신고하지 않았던 것이 결국 재밌는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내가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날 여기서 머물게 해줘.'


그 이후로 여섯 달이 넘도록, 그 여자와 예기치 않은 동거를 해버렸으니.


"..."


나는 다시 폰을 꺼내들었다. 사진첩, 최근 일 년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천천히 스크롤하며 살펴봤다. 초반엔 시큰둥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노려보던 녀석이,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그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서로 멀었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손가락으로 볼을 찌르며 키득거리는 장난스런 모습도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나와 함께 찍었던 사진 속에서,

그녀는 어쩐지 정말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날이었나?"


그녀가 떠나기 하루 전 날,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줬던 날.

편의점에서 대충 사온 맥주와, 큰 맘 먹고 배달시켰던 치킨으로 보냈던 밤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홀연히 이 방에서 사라져 버렸다.


갑작스럽던 만남만큼이나, 갑작스럽던 이별.


환상향이니 뭐니, 자신은 사실 대단한 사람이니, 내가 능력만 사용할 수 있었다면 넌 눈도 못 마주쳤을 것이니...그녀가 시끄럽게 종알거리던 그 말들을 대부분 믿진 않지만, 확실히 그녀와 지냈던 나날은 하루하루가 동화처럼 비현실적인 날들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녀와 만나고 일 년이 지난 날이었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밤. 이제 여기엔 동화 속 여인은 없고, 한 살을 더 먹은 초라한 남자만이 있었다.


"...왜 갑자기 사라진 거람."


말이라도 하고 가지, 지금까지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준 건 생각도 안 하고, 염치없는 녀석.


어쩔 땐 감히 다가가지 못할 만큼 고아하고 아름답지만, 어쩔 땐 어린아이처럼 귀엽고 바보같던, 그 여자.


"...유카리."

마지막 밤, 나는 그녀가 알려줬던 낯선 이름을 입에 곱씹었다.

혹시 그렇게 하면, 사라졌던 그녀가 다시 지난 날의 크리스마스처럼 나타나지 않을까 해서.


띠링-

갑자기 폰이 울렸다. 난 화면을 켜 메세지를 확인했다. "지금 알바 끝났어요! 바로 술 가지고 갈게요!" 하는, 기특한 후배의 알림이 와있었다.


["빨리 와, 심심하다." - 1]


난 미소를 머금은 채 문자를 보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라는 듯,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비록 지난 크리스마스 만큼은 아니어도, 오늘 밤 역시 잊지 못할 추억이 되겠지.


"...하아."


눈 내리는 밤하늘을 창문 너머로 엿보다가, 눈을 감는다. 혹시 모를 기대감에 자꾸만 표정이 흔들렸다.


방이 너무 휑하진 않나? 이사 전날인데 어때. 매트릭스는? 두 명이 같이 눕기엔 너무 초라하지 않나? 아니, 그건 너무 앞서간 걱정일지도.


나는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곧 노크소리가 울리기 전까지, 조금은 생각을 정리해두고 싶었다.






똑, 똑, 똑.






"...어?"


똑, 똑, 똑.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문은 다시 한 번 균일한 간격으로 가볍게 울렸다. 나는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배 녀석이 벌써 올 리는 없었다. 적어도 앞으로 한 시간은 걸릴 테니까. 그럼 누구지? 택배를 시킨 적도 없었고, 집주인이라면 이미 며칠 전에 만났다. 부모님이 연락없이 오셨을 리도 없었다.


"누구시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 너머로도, 보이는 건 없었다. 질나쁜 장난인가? 나는 괜스레 팔에 쭈뻣 솟은 소름을 쓰다듬으며, 다시 뒤돌았다.


"..."


그리고 자취방 한가운데 그곳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서 있었다.


"...후훗, 놀랐어. 당신?"


아무것도 없었던 방에, 갑자기 나타난 여자 하나.

하지만 내 말문을 틀어막은 건, 외부인의 침입 사실보다도, 그 여자의 정체였다.


"...유, 카리?"


"잘 기억하고 있었네? 후후, 혹시나 잊어버렸으면 어떤 벌을 줄까~ 고민도 했었는데."


갑자기, 어떻게.

왜.


당혹스러움과, 두려움, 그리고 반가움이 뒤엉켜 표정이 멋대로 흔들렸다.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여긴...왜..."


혼란 속에서 내가 뱉은 것은, 정말 바보같은 질문 한 마디였다.


"어머, 만나서 처음하는 말이 그거야? 조금 더 다정한 재회 인사를 기대했는데 슬프네. 하긴, 갑자기 찾아온 건 나니까, 당황스러울 만 하겠지."


그녀는 빙긋빙긋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양산을 꼭 쥔 손가락은 자꾸만 안으로 말렸고, 얼핏 엿보이는 뺨은 차가운 공기 탓인지 붉었다. 그녀는 들뜬 기분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오랜만이야, 당신. 나, 이제야 겨우 다시...당신을 만나러 왔어."


다시 만나러 와?

나를?


"왜, 이제야..."


추궁을 하려던 셈은 전혀 아니었지만, 말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들릴 만한 말이었다. 유카리 역시 내 말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 처음에, 이 세계에서 떠날 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줄만 알았어. 그래서...마음을 전부 정리하고 떠나려 했는데..." 


그녀는 불안한 듯이 들고 있던 양산을 꽉 쥐며 말을 끊었다. 그날의 일을 회고하는 유카리의 표정엔, 깊은 아픔이 배어 있었다.


"...환상향에 돌아간 후에, 당신이 있던 세계와 나의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어. 미련이라곤 전부 떨쳐낸 줄 알았는데...아니었나봐. 정신을 차려보니까, 난 당신에게 돌아가려고 모든 일을 팽개치고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었거든."


천천히, 그녀의 걸음을 내게 가까워졌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는 내 품으로 깊게 안겨들어 떨리는 호흡을 내쉬었다.


"...미안해. 돌아올 수 있었다는 걸 알았으면, 분명, 기다려 달라고 말했을텐데."


"..."


나는 무심결에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토닥였다. 그녀의 갑작스런 부재에 실망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각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분노할 이유는 없었고, 책망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아냐, 괜찮아."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미적지근한 위로가 전부였다.


"후후, 용서해줘서 고마워. 만약 당신이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았으면...정말, 아팠을 것 같거든."


충분히 만족스런 대답이었는지, 유카리는 아이처럼 밝은 함박웃음을 피웠다. 잠시 잊고있던 그리움을 채워주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 그리운 미소를 다시 보게 되니, 이제야 나도 이 상황을 차츰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긴 이야기가 될 거야. 오늘 하루만으로는 끝내지 못할, 긴 얘기."


유카리는 가슴팍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자안이 나를 굳게 응시했다.


"...당신이랑은, 정말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나에 대해서도, 나의 세계에 대해서도...전부 당신이 알아줬으면 좋겠어."


"...예전엔 물어봐도 입 하나 뻥긋 안 하더니, 이제 와서?"


장난스레 농담을 던지자, 유카리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그녀의 섬섬옥수가 내 손가락과 겹겹이 얽혀왔다.


"미안, 그때는...당신을 믿지 못했거든. 믿게 된 후에는...미련이 남는 게 무서워서 말하지 못했고.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은근히, 그녀는 나의 손을 당겼다. 마치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듯이.


"나랑 같이 가자. 당신이 그렇게 궁금해했던...나의 세계로."


"뭐야, 데이트야? 미안하지만 미룰게. 오늘은 선약이 있거든."


애써 재회한 인연의 약속을 거부하는 건 탐탁치 않았지만, 내겐 그만큼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손을 빼고자 몸을 뒤로 젖혔다.


"선약?"


하지만, 유카리는 여전히 내 손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그 작고 여린 손가락에선 나올 수 없는, 완고한 힘으로.


"그런 게 있을리가 없는데? 당신, 뭔가 착각한 거 아냐?"


"...유카리?"


"한 번 확인해봐. 분명 착각한 거일 테니까."


유카리는 그제서야 손에 힘을 풀었다. 어찌나 힘이 셌는지, 붙잡힌 손등이 지끈거렸다. 그녀는 의중을 알 수 없는 깊고 어두운 자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착각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화면을 틀어 방금까지 후배와 나눴던 톡을 확인했다. 별 의미는 없이, 그저 순전한 불안함이었다.


["빨리 와, 심심하다." - 1]


마지막으로 내가 보냈던 메세지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이상한 건 전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석연찮은 건, 여전히 최근 메세지의 곁에 종양처럼 붙어있는 1이었다.


나는 다급히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반복되는 신호음 너머, 자꾸만 좋지 않은 상상이 들었다.


ㅡ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후...


"거 봐, 아무 약속 없지?"


유카리는 내 시도를 비웃듯이 말했다. 그 의미심장한 반응에, 마음 속에 켕긴 불안함이 자꾸만 커져갔다.


"....뭐야? 너, 뭘...한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난 당신을 만나려고 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는데,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너, 하린이한테 무슨 짓 한 거야?"


바짝 마른 입술이 쓰라리다. 혀끝에서 뱉어진 말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가웠다. 유카리는 마치 약점을 얻어맞은 것처럼, 내 목소리를 듣고 크게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나도 안 불러주는 이름을, 그년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거야? 고작, 알고 지낸지 몇 개월도 안 된 그런 경망스런 여자를...?'


"당장 대답해, 너, 그 애한테 무슨 짓을...!"


딱,

손가락이 튕기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손발이 그 자리에 묶였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기이한 힘이 사지를 단단히 옥죄고 있었다.


"별 거 없어. 그냥 주제를 알게 해준 것 뿐이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여러 남자의 침대 위에서 아양을 떠는 그런 탕녀가...당신처럼 깨끗하고 순진한 사람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한 거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딴 소리를...!"


"그래.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당신은 항상 누구에게나 쉽게 신임을 줬으니까. 물론...당신의 그런 면에 반하긴 한 거지만."


꼭두각시처럼 묶여버린 내게, 그녀가 다가왔다. 한 때 꼭 쥐고 싶던 그 아름답고 가녀린 손은, 이제 악마의 갈퀴처럼 내 뺨 위에 얹혀졌다.


"앞으론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


일 년, 십 년, 한 세기를 넘어 몇 번이고 이 겨울이 지나고 다시 찾아올 때까지.

당신이 나를 지켜줬던 것처럼, 이젠 내가 당신을 나의 세계에서 지켜줄게.


천천히, 시야가 흐려진다. 어둑한 창문 너머, 여전히 내리는 눈이 창문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사랑해, 당신. 요괴의 현자의 마음을 뺏었으니, 그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천천히,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수줍은 소녀처럼 붉게 물든 뺨과 귓가가, 어째선지 누군가의 피처럼 보였다.



12월 25일, 그날처럼,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에.

나는, 시리도록 차가운 키스를 받았다.





ㅡㅡㅡㅡ


얀챈 뉴비 받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