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쉴 수 있는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한때는 이곳을 안락한 보금자리라고, 이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공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먹고 싶은 걸 언제든지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살을 에는 비바람은 한낱 창문 밖 풍경에 불과하며, 나를 해하려 드는 위협은 무엇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인생 전부를 바쳐서라도 손에 넣고 싶은 낙원일 테고, 또 누군가에게는 죽어서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극락일 테지.


 하지만 영겁의 세월을 이 낙원 속에 갇혀 지내온 나에게 있어선, 이곳은 애완조를 가둬둔 견고한 새장. 관상어를 넣어둔 비좁은 어항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똑똑.



"들어간다."



 으리으리한 문 너머로 들려온 강직한 목소리에 벌써부터 숨이 턱하고 틀어막혔다.


 끼이익! 


 이윽고, 용이 머리를 들이박아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만 같던 철문이 비명 같은 금속음을 내지르며 천천히 그 주둥이를 벌렸다.



"식사다."



 온기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저 서늘한 음성은 언제 들어도 등에 오한이 돋아났다.


 가뜩이나 시체처럼 창백한 인상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족속들이라 오해받아 온 것이 우리 일족인데.


 피붙이인 나조차 이렇게 느낄 정도면, 남들에겐 그녀가 대체 어떤 괴물로 여겨질지 쉽사리 상상이 가질 않았다. 



"레어로 구운 드래곤 스테이크. 처녀의 생피를 한 방울 넣어 간한 버섯 스튜. 후식으로는 산양의 피로 만든 선지 푸딩. 모두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준비했다."



 좋아하는 것들이라. 


 좋아하긴 했다. 수백 년 동안 똑같은 것만 계속 처먹이기 전까진.


 아무리 우리 일족에게 있어 요리라는 것이 피를 조리한 무언가 수준에 불과하다고 해도, 세상만사 정도라는 게 있지.


 몇 차례 불만을 제기해 볼 생각도 해보기야 해봤으나, 맨손으로 드래곤의 머리를 잡아 뜯는 인물에게 감히 반찬 투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담력은 그리 대단치 못했다.



"자, 먹어라."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엄포에 안 그래도 바닥을 기는 식욕이 지층까지 곤두박질쳤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그러자 황새걸음으로 의기양양하게 방 안에 들어온 방문객의 행색이 두 눈에 오롯이 들어왔다.


 하늘에 드리운 뇌운과도 같이 사나운 윤기가 감도는 회색빛 머리카락.


 낮달처럼 창백한 피부와 그늘 속에서도 음영이 확실한 이목구비. 


 얼핏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유심히 보면 극도로 응축된 강인함이 알음알음한 자리한 육체는 장인이 빗어낸 예술품을 보고 있는 듯했고.


 온갖 휘황찬란한 장식이 주렁주렁 매달린 무거운 의복은, 착용자의 높은 지위와 권위적인 성격을 불필요한 미사여구 없이도 명확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다.


 긍지 높은 밤피르. 그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핏줄이라 칭송받는 레스타 가문의 제17대 가주. 


 레스타 드 클라우디아. 


 피의 일족이라면 선망하지 않을 수 없고, 피의 일족이 아닌 이들이라면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


 참고로 나는 둘 다에 해당했다.


 나아게 있어 그녀란, 가슴 깊이 선망하고 있는 동시에, 몸서리치게 두려워하는 인물이기도 했으니까.



"가주님····."

 


 용기 내 읊조린 나직한 부름에 나를 주시하는 날카로운 눈동자가 일순간 진홍빛을 띠었다.



"단둘이 있을 때는 누나라고 부르라고. 내가 입이 닳도록 말했을 텐데."


"미, 미안. 누나····."



 은근슬쩍 호칭을 고치려 한 시도가 이번에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번에야말로 이 낯간지러운 호칭을 바꾸겠노라고 굳게 다짐했건만.


 거센 분노로 한순간 붉게 물든 누이의 동공을 마주 보니, 모처럼의 결의가 봄 눈 녹듯 맥없이 사그라져 버렸다.



"다 먹을 때까지 똑똑히 지켜볼 테니. 어쭙잖은 잔꾀는 꿈에도 생각 말도록. 피는 우리의 양식이자 힘의 근원. 편식은 하루빨리 뿌리 뽑아야 할 저열한 습관이다. 이번에는 특별히 내가 손수 떠먹여 줄 테니. 잠자코 입을 벌리도록 해라. 어리석은 동생이여."



 오늘만 특별히는 얼어 죽을. 당장 어제도 한 땀 한 땀 입 안에 쑤셔 박았으면서.


 어떻게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저런 거짓부렁을 태연히 입에 담을 수 있는 걸까.


 감탄이 나올 정도로 뻔뻔한 행태에 힘겹게 잡아 늘린 입꼬리가 점차 뻣뻣해져만 갔다.



"누나. 지금 한창 바쁘다고 들었는데. 좀 어때? 괜찮아?"



 표정 관리를 하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최근 타 가문과의 분쟁 때문에 가주인 누님이 여러모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건, 사용인들의 대화를 엿들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듣기로는 수백 년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가문끼리의 혼담이 모종의 사유로 엎어져 버린 탓이라고 하던데.


 늘 방 안에 갇혀 살고 있는 나로선, 그 자세한 내막을 알 방도가 없으니,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쌓여만 갈 뿐이었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잔말 말고 식사에 집중해라."


"으, 으응····."


  

 살이 베일 것만 같은 서슬 퍼런 목소리. 입을 틀어막는 단호한 숟가락질이 대화의 맥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누이와의 대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내가 하는 말을 들을 가치조차도 없다는 듯 흘려버리기 일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용납하지 않으니, 대화하는 입장에선 가히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식사를 끝마치면 늘 하던 대로 문을 엄중히 단속해 둘 테니. 내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도록. 명심해라. 너는 나 이외엔 그 누구와도 만나선 안 되고, 말 한마디도 섞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걸." 



 벽을 상대해도 이것보단 융통성 있는 대화가 오고 가지 않을까.


 아직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말문을 틀어막아 버리는 걸 보아하니, 누이도 내가 지금부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은연중에 눈치챈 모양이었다.



"자, 아~ 해라."



 경험상, 이럴 때는 섣불리 입을 놀렸다간 자칫 더 큰 화를 불러 모으기 십상이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주는 음식을 얌전히 받아먹으며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좋아. 그 자세다. 간만에 말귀를 잘 알아먹는군. 칭찬해 주도록 하지."



 별안간 머리를 쓰다듬어졌다.


 나잇살 먹을 만큼 먹어놓고, 밥 잘 먹는다고 칭찬을 받고 있으니. 뭐랄까. 자괴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차라리 내 손으로 직접 먹을 수라도 있었다면, 그나마 덜했을 텐데.


 간신히 맞춘 누이의 비위를 이제 와서 거스를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식사하는 내내 그러한 불편한 공기도 함께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달그락. 달그락.


 식사를 끝마친 뒤, 식기를 정리하는 소리만이 드문드문 들려오고 있는 가운데.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진 누이의 표정을 기반 삼아, 벼르고 벼르던 주제를 슬슬 꺼내보기로 했다.



"잘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순순히 말을····."


"누나. 나 방에서 나가고 싶─"



 쾅! 콰드드드득!


 내뱉은 말을 미처 매듭짓지도 못한 찰나, 단단한 무언가가 부서지고 으깨지는 소음이 온 사방에 메아리쳤다.


 거센 충격에 잠시 아득해진 시야. 그 너머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희뿌연 한 장막 속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선명한 붉은 색채.


 조금 전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분노로 들끓고 있는 누이의 진홍빛 눈동자였다.



"····!"



 침대 위에 몸을 뉜 나를 잡아먹을 듯이 넘어뜨린 채, 치켜뜬 눈을 단 한 순간도 감지 않은 그 모습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집념이 일렁이고 있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저기 깨지고 금이 간 벽과 장식품.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진 접시 조각들.


 그 뒤편에는 그녀가 나를 위해 구비해둔 고급스러운 서적들이 갈가리 찢겨 하늘하늘 나부끼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해봐."


"크윽! 누, 누나····!"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커, 커헉!"



 멱살을 움켜쥔 힘은 사실 그리 대단하다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에 한마디에 넘실거리는 살의는 절로 심장이 멎고 호흡이 고단해질 만큼, 거칠고 난폭했다.



"누나가 말했잖아. 가히 셀 수 없이 말해왔잖아. 바깥세상은 위험하다고. 너처럼 힘도 없고 연약한 아이가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녹록지 않다고."



 낭패였다. 


 누이의 일인칭이 '누나'로 바뀌었다는 건, 그녀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신호.


 저 상태의 누이는 어지간한 일로는 결코 화를 푸는 법이 없고, 그 화에 잇따르는 잔열도 상당히 오래가는 편이었다.



"잘 봐, 너의 이 추한 외모와 나약한 육신을. 일족의 수치라는 비난조차도 아까운 추레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을. 이런 너를 같은 피가 흐른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수백 년 동안 보살피고 또 보듬어온 게 누구지? 나야. 그래, 바로 나라고. 이 세상에서 너를 사랑해 줄 오직 단 한 사람. 너의 누이. 레스타 드 클라우디아라고."

 


 내 용모가 얼마나 추악한지, 밤피르로서의 내 자질이 얼마나 미천한지에 대해선, 지난 수백 년 동안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왔다.


 빛에 환멸 받는 우리들 밤피르는 유리에 몸이 비치지 않는다는 종족 특성상, 타인에게 평가받는 것 말고는 자신의 용모를 확인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으니까.


 같은 피가 흐르는 친족에게조차도 이토록 멸시받고 동정받는 나다. 


 이런 내가 누이가 말했던 험난한 바깥세상에서 그리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되리라는 건, 이제 막 유치가 빠진 어린아이도 쉬이 알 수 있을 법한 사실이었다.


 그 점에 한해서만큼은, 나를 염려하는 누이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갈망했다.


 안락함과 평온함. 모든 것이 보장된 모사품이 아니라, 불편함과 거북함. 그 속에서 내 손으로 직접 파헤쳐 올리는 진실된 삶을.



"아무래도 벌이 필요한 것 같군. 두 번 다시 그런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처절한 벌을."



 제복의 옷깃을 천천히 풀어 헤친 누이가 불온한 숨을 뱉으며 엄슬한 선언을 읊조렸다.


 또 벌인가. 그래, 언제나의 벌이로구나.


 체념으로 이완된 몸을 완전히 놓아버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누이의 눈을 피해 몰래 숨겨둔 은제 숟가락을 굳세게 손에 움켜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