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피 씨의 적응을 도와주게 되었다. 아마 연령대가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


가냘픈 인상과는 다르게 할 일을 척척 잘 한다.


길이나 조형물, 건물 구조도 잘만 습득한다.


지금은 이것저것 시키고 있는데, 나중에 어떤 업무를 맡게 될진 몰라도 뭘 하든 잘할 것 같다.



"수고하셨어요. 시간이 좀 남았으니 차라도 마시면서 쉬고 계세요."



"그럼 칼 씨는..."



"저야 제 일하러 가야죠."



"혹시 제가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딱히 없지만...하긴 쉬는 것도 눈치 보이려나.



"제가 할 일이긴 한데...그럼 부탁드릴게요."




*




"힘들지 않아요?"



"아니요! 괜찮아요!"



기름과 땔감 나르기. 그냥 단순한 노동이다.


여자라서 양을 덜 주긴 했지만 너무 멀쩡해서 놀랍다.


이 사람이 힘이 좋은건지, 내가 약한건지...



"후! 끝났네요!"



"고생하셨어요. 차라도 좀 드실래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근데 힘이 엄청 쎄시네요?"



"아니 그건 당연히 제가 남자니까요."



그래 이게 상식이지. 아가씨가 특별한 거지 내가 나약한 게 아니다.



"칼! 뭐하다 온....어라."



"아, 양이 좀 많아서 늦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소피 모리라고 합니다!"



"아...이번에 들어오셨다던. 둘이 같이 일하게 된 거예요?"



소피 씨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분명 전에 마차에서 했던 얘기를 떠올리고 있겠지.



"며칠만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요. 수고하세요."



"네!"



"넵."



소피 씨가 있으니 별다른 얘기도 안 하고 가는구나.



"어머..."



?



"어머머머."



왜 이래.



"무슨 일 있어요?"



"저분이 아가씨예요? 엄청 아름다우시네요!!"



뭔가 했더니, 너무 예뻐서 놀란 건가. 눈이 반짝반짝하다.



"아 그렇죠. 굉장히 아름다우시죠."



"속눈썹도 길고 코도 오똑하고...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도 있다니..."



"그렇긴 하죠..."



처음 봤으니 놀랄 만도 하다만, 그 이후에도 소피 씨의 호들갑은 그칠 줄 몰랐다.



"머리를 묶으시니까 되게 청량한 느낌이 나네요!"



"차 마시는 모습이 엄청 우아해요!"



"엘프를 직접 본 적은 없는데, 딱 저런 느낌일까요?"



"아, 예...."



며칠 동안 이 주접을 들어줘야 한다니, 귀에 딱지 생기겠네.



"음...저 분들. 아가씨한테 일부러 져주시는 거 맞죠?"



대련에서 남자들도 쉽게 이기는 아가씨를 보고 하는 말이다.



"저거 연기 아닙니다. 진짜로 못 이기는 거예요."



"네? 여자랑 남자의 힘 차이는 크다고 그러셨잖아요?"



"아가씨는 예외입니다. 아마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강하실걸요."



"그럼...칼 씨도.


지는 거예요?"



"이ㄱ...지죠."



저 아저씨들은 나름 저택을 지키는 사람들인데, 아무런 훈련을 안 받은 나는 아주 처참히 깨지겠지.



"우와...저렇게 아름다운데 또 강하시다니..."



"겉보기엔 호리호리하신데,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 걸까요?"



"그러게요..."




*




"야."



"왜?"



"너 소피 씨랑 친해 보인다?"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 중 나이대가 비슷한 건 서로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지.



"그치. 나이가 비슷하잖아."



"무슨 얘기 해?"



"음..."



'오늘 아가씨가 입으신 옷이 아주 그냥...'


'아가씨는 아직 약혼 안 하셨어요? 얼마나 멋진 분일까요...'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너 얘기."



"응?"



"소피 씨가 네가 너무 예쁘다면서 맨날 찬양을 하거든."



"아...그래? 근데 너 말이야."



"?"



"요즘 왜 내 눈을 피해?"



"아."



아가씨를 이성으로 의식하게 된 후로 눈을 똑바로 보고 얘기하기가 어려워졌다.


그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그게 무슨 소리니. 그냥 바빠서 그래. 바빠서. 나 일하러 간다."



"...그래."




*




아가씨 칭찬 외에도 소피 씨는 말이 많고 쾌활한 성격이라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벌써 이렇게 속내를 드러내는 얘기도 할 정도니.



"...그래서 간절하게 찾아다녔거든요. 어디든지 좋으니까 제발 나 좀 써달라고."



홀로 자식들을 키워오신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게 찾아온 병.


약 값을 벌기 위해 수많은 곳에 지원했지만 나이 어린 여자를 써주는 곳은 없었다.



"나름 독하게 마음먹고 갔는데 메이드장님이 엄청 깐깐하게 생기신 거예요! 솔직히 좀 무서웠죠."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했는데, 내일부터 교육을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마침 미셸 아주머니가 은퇴하며 자리가 나게 됐고, 그 자리에 소피 씨가 들어오게 됐다.


미셸 아주머니는 사람을 고용할 때 항상 그 사람의 사연을 고려했다.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고용해야 쉽게 나가는 일이 없다면서.


그건 표면적인 이유고 실은 미셸 아주머니 마음이 약해서 그렇다.


듣기론 백작님의 유모 노릇도 하셨다던데, 아마 그분의 영향을 받아 백작님이 나를 가엾게 여겨 거둬주신 게 아닐까.


그러면 나는 미셸 아주머니께 정말 큰 은혜를 입은 거구나.



"그분한테 많이 시달릴 줄 알았는데, 정작 그분은 교육받고 오니까 은퇴하셨더라고요. 아무튼 얘기는 여기서 끝!"



"다행이네요. 아버지의 병세도 조금씩 호전되신다니."



"휴...한 달 전까지만 해도 옆집에서 빌리고 그랬었는데. 눈앞이 캄캄했죠."



나는 그때 돈이 없는 건 물론이고 빌릴 옆집도 없었지. 정말 백작님께는 백 번을 감사드려도 모자라다.


그런 백작님의 딸을 나는 지켜야 할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양심이 찔리는구나.



"자! 제 얘기 했으니 이제 칼도 얘기해 봐요. 여기서 어떻게 일하게 된 거예요?"



"아마 백작님께서 저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런 것 같네요."



"가엾게요? 무슨 일 있었어요?"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죄송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소피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죠."



부모님이 돌아가신 걸 설명할 때,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담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엔 그렇게 슬펐는데, 이제는 악몽도 잘 꾸지 않는다.


정신없이 살다 보니 곧 기일인 것도 잊고 있었다. 마크 얼굴도 볼 겸 갔다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