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려한 원화, 제법 마음에 들었던 성우진, 단순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을 넘어서기 위해 짜여진 '소설의 창작' 이라는 내용.


창작 그녀의 연애 공식은 한동안 무언가 창작물을 보는 것에 있어 일종의 권태기를 가지고 있던 필자에게 제법 군침이 돌게 만드는 미연시였다.


군침이 돌게 만드는 미연시였다. 


그랬을 터인데......


필자의 미연시 경력은 백일몽, 아오카나, 연애X로열(중도하차), MUSICUS!, 장갑악귀 무라마사, 유키이로사인 의 순으로 이어진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차렸겠지만, 필자는 등장인물들이 괴로워하는 것이 좋다.


sm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고, 기본적으로 무언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달려나가는.


이른바 눈물과 땀에 젖은 청춘이라는 것을 좋아한다.


왜 그런 것을 좋아하느냐 물어본다면 답하기 곤란해지지만, 굳이 따진다면.


필자는 그런 눈물과 땀이 각 캐릭터들에게 있어 생명을 부여해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라고나 할까.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좌절하고, 다시 딛고 일어서고. 그렇게 눈물을 짜낸 끝에 맛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살아 숨쉬는 등장인물의 첫걸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과정이야말로 그 캐릭터의 생생한 정수임이 틀림없다.


그런 생각을 마음에 품은 채로, 2021년 11월 26일 1시 26분.


필자는 신작. 창작 그녀의 연애 공식을 실행했다.


어딘가 뻔한 캐릭터 조형, 일종의 클리셰를 따르고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익숙한 느낌에 솟구치는 불안감을 한 켠에 밀어두고 다음 에피소드를 기대하며 창작그녀를 찬찬히 정독한 결과.


울화통이 터져버린 것 같다.


분명, 초반 에피소드는 좋았다. 1, 2, 3까지.


어쩌면 4나 5 정도까지는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어디서인가 본 듯한 캐릭터 조형을 참아낼 수만 있다면.


이자식, 오타쿠를 얕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 것이 도대체 몇 번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다.


단순히 키모오타의 기분나쁜 넘겨짚음이라면 좋겠지만, 암만 생각해봐도 2015년도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몇몇 유명 애니의 사건이나 캐릭터들을 가져와서 써먹고 있다는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자세한 예시를 드는 건 키모오타같으니까 자제하겠습니다. 플레이하고 경험해보세요.)


혹자는 클리셰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표절과 클리셰의 애매한 차이는 각 개인의 기준에 따른 것이므로 적당히 넘어가주길 바란다.


필자가 이것을 일종의 표절로 느끼고 있는 이유는 그것 뿐만이 아니다.


그 표절인지 클리셰인지 모를 내용들이 지나간 이후.


그러니까, 공통 루트의 후반부 부터, 히로인 루트의 필력 떨어짐이 눈에 선하게 보이다 못해 속을 갑갑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밑도 끝도 없이, 다른 미연시였더라면 각 히로인 루트에서 소모되어야 할 이야기들을 공통 루트에서 히로인들을 갈아타며 소비하는 것은 물론.


그 탓에 파멸적으로 줄어들어버린 히로인 루트의 분량.


솔직히 말해, 일정 부분이 지나 필력이 떨어지는 것은 같은 글쟁이로써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글이든 중반부 부터가 고행길의 시작이니까.


다만, 이 시나리오 라이터는 기성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필력 문제 이전에, 에피소드 배분의 꼴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중 계속 언급된 현실적인 요소들을 창작그녀에서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러고 싶었더라면 그 한 방향을 우직하게 밀었어야지.


현실의 연애란 극적인 것이 아니며, 쌓이고 쌓여간 호감이(공통 루트) 일정 수치를 넘어서는 시점이(히로인 선택) 연애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소리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거듭 말하지만, 그러고 싶었더라면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소꿉친구에, 사촌 여동생에, 외국계 미소녀 선배에, 성우를 하고 있는 주인공의 오시까지.


온갖 미소녀란 미소녀는 잔뜩 집어넣은 다음, 이 모든 건 주인공이 만들어낸 전설적인 작품 덕... 이라는 미연시 특유의 편의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설정 하나로 떼워버렸으면서.


심지어 스토리 구성는 그딴 식으로 해놓았으면서, 일종의 집착인지 스스로의 자존감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인지 모를


'크리에이터' 남발은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크리에이터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저런 것이고. 너희들 같은 비전문가는 모르는 세계가 있는 것이니 얌전히 내 말이나 들어라.


하는 것과 다름 없게 느껴졌다.


물론, 미연시가 되었든 어떤 창작물이 되었든, 창작을 한다는 것은 1의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10의 이야기를 그려내야 하는 것이니


해당 직종의 전문가가 본다면 개똥 철학처럼 들릴지라도, 나름의 납득을 줄 수 있는 개똥 철학을 선보여야 한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다만, 문제는 이 '크리에이터' 로서의 마음가짐이라는 놈이 남발된 것일까.


필자는 현실이 되었든, 창작물 속의 이야기가 되었든. 


누군가의 신념, 개똥철학, 뭐라 불러도 좋다. 


마음 속에 품은, 함부로 겉에 드러내지 않는 소중한, 스스로에게 있어 강점이자 약점이 되는. 


필자는 그 인간의 생애를 관통할 만한 사고 방식의 결정체가 바로 신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시나리오 라이터 입장에서는 작중 '크리에이터' 로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공유하는 신념.


'크리에이터의 신념'


이라는 것을 광고하듯이 드러냄으로 해당 작, 창작 그녀를 대표하는 테마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의도가 아니었나 싶지만.


솔직히 말해서 좀 깬다.


가장 중요한 씬에서 한번. 딱 한번의 이야기를 위해 꺼내드는 것도 아니었고.


앞서 말했듯 공통 루트의 분량이 밑도 끝도 없이 늘어남에 있어 히로인 루트 돌입 이전, 공통 루트에서 각 히로인의 이야기가 진행될 때 마다 몇 번이고 써먹고, 또 써먹는 꼴이 참...


허벌신념도 아니고 대체 무슨 짓거리인지 잘 모르겠다.


스포가 되니 말은 줄이겠지만, 다회차를 강요한 끝에 보여주는 아이사 루트의 엔딩 역시 그런 맥락의 연장선 상이  아닌가 싶다.


시나리오 라이터의 자기 만족과 오만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닌가.


물론, 내가 작품 평가를 넘어서, 시나리오 라이터를 평가하고 있는 것 역시 일종의 오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개인적으로는 맞아도 싸다고 생각하고 있다.


요즈음 들어 일종의 슬럼프를 겪고 있었던 탓에, 여러가지 의미로 이입하며 기대했던 미연시였는데.


여러가지 의미로 너무하다고 생각한다.


텅 빈 수레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