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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카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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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카다피
معمر القذاف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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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평가
3.1. 긍정적인 평가3.2. 부정적인 평가
4. 영향5. 여담

1. 개요 [편집]

معمر محمد أبو منيار القذافي

무아마르 무함마드 아부민야르 알-카다피 (Muammar al-Gaddafi, 1942년 6월 7일 ~ 2011년 10월 20일)란, 과거 리비아를 지배했던 독재자이다. 소속 정당은 무소속.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축출될 때까지 무려 42년간 리비아를 지배했던 인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돌아버린 행보로 '사막의 미친 개', '아랍의 망나니'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본인 스스로는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왕중왕'(King of Kings of Africa)으로 불렀다.

2. 상세 [편집]

본래는 반미 진영의 대표적인 독재자였고, 나름대로 개발도 시도하고 있었지만, 2000년대 초반 사담 후세인이 '핵을 만들었다'란 명목으로 축출당한 이후로는 핵을 포기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 꽤나 관계가 개선되었었다.



2009년에 집권 후 처음으로 UN 총회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처음에는 UN 창설 뒤 터진 65차례 전쟁을 해결하지 못한 무능함을 질타한 데 이어 5개 강대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안전보장이사회 체제를 신랄하게 까버렸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뜬금없이 "UN 본부를 뉴욕에서 리비아로 옮기자"라고 말하더니 본회의장에서 헌장을 어서 던져버렸다. 이날 남긴 말만 해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핵무기를 조사하려다 암살됐다.", "신종플루는 백신을 팔아먹으려는 제약회사들의 수작이다.", "아프리카 식민지배 피해 배상금으로 7조 7700억 달러를 내놓아라.", "오바마는 아프리카 혈통이니 우리 아들, 영원히 대통령 해먹어야." 등등. 이런 소리를 1시간 반씩이나 하고 있으니[1] 다들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고, 그 결과 다음 차례였던 어맹뿌가 연설을 할 때는 빈 자리로 가득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에 의하면 카다피는 평소에는 말이 없지만, 군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한 시간, 두 시간이 넘게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2011년 아랍의 봄으로 리비아 내에 반정부 여론이 커지기 시작하고, 이에 카다피가 이들을 대상으로 내전을 선포하자 서방 국가들이 리비아에 무력 개입을 하며 끝내 정권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 리비아 시민군에게 사로잡혀 집단 구타당하고 암컷타락 당하는 등 심각한 학대를 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향년 69세.

3. 평가 [편집]

3.1. 긍정적인 평가 [편집]

  • 석유 국유화를 통한 경제 성장
  • 복지 정책 증진과 문맹률 감소, 농업 발전, 교육·의료 전면 무상화.
  • 2000년대 이후 반미에서 돌아선 외교 정책과 대량학살무기 폐기, 해외 투자 적극 유지[2]
  • 흑인 민권 운동 지원, 넬슨 만델라 등 80년대 흑인 인권 운동 지원
  • 자마히리야를 통한 나름대로의 선거 제도 및 지방자치제도 구축
  • 세속주의 추구,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탄압

3.2. 부정적인 평가 [편집]

  • 42년간의 철권 통치 및 인권 탄압
  • 전세계에 골고루 숨겨둔 비자금과 부정부패. 이 여파는 2021년 현재까지 이어져서 전직 프랑스 대통령인 니콜라 사르코지가 카다피에게 500만 유로를 받은 혐의를 받고 조사를 받기도 했다.
  • 테러리즘 지원 및 테러 사주, 테러리스트 보포
  • 핵실험 및 대량학살무기 제작[3]

4. 영향 [편집]

사후 시신이 정육점의 냉동 창고에서 민간인들에게 공개 되다가 # (혐짤 주의), 25일 리비아의 한 사막에 비밀리에 묻혔다. 매장 지역은 기밀로 처리된 데다 사막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라고.

그러나 사후 리비아가 내전을 치루고 ㄹㅇ로 막장이 되면서 카다피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혁명 이전에는 단 한 명의 카다피가 있었지만, 리비아 혁명 후엔 수백만 명의 카다피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며, 지역이나 마을 단위로 쪼개져 내전을 벌이는 리비아의 현실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심지어 리비아 혁명에 첫날부터 참여한 청년조차도 그때의 행동을 후회하며 카다피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분위기에 물 타서 카다피의 둘째 아들인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가 정계 복귀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 리비아 법원은 그의 대선 출마를 불법으로 규정했다가 끝내는 출마를 허용해줬다고.

한편 카다피 축출 이후 혼란에 빠진 현 리비아 정국에 개탄하고 있는 몇몇의 리비아인들은 그렇다고 예전의 카다피 시절로 역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카다피 정권으로부터 숙청, 탄압당한 경력이 있었고, 최근 리비아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리비아 국민군(LNA)의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 최고 사령관을 지지하기도 한다. 다만 서방과 아랍권의 외교계 일각에서는 하프타르 역시 카다피와 별 반 다를 것 없는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28세에 정권을 장악하여 장기집권을 펼쳤던 카다피와 다르게 하프타르는 이미 70대 고령이라서 리비아의 내전 상황을 종식시키고 리비아의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카다피처럼 종신 독재자가 되지 못 하고, 대신 과도 정부에 가까운 통치를 펼치다 다른 LNA 인사들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줄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물론 2021년 기준 현재는 둘 다 압둘 하미드 드베이베 임시 총리에게 지지율로 발리고 있는 실정이긴 하다. 두 사람의 지지율을 합쳐도 드베이베 총리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수준.

5. 여담 [편집]

의외긴 하지만 친한 성향이었다. # 이 시기 리비아는 한국의 건설업체 해외수주 규모 3위에 해당되는 교역상대국으로서 한국은 리비아의 건설수주를 통해 막대한 국익을 챙겼는데, 카다피가 대놓고 리비아 내에서 한국 기업들에게 특혜를 주면서 한국은 리비아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다 2010년대 한국 측에서 리비아에 대한 첩보 활동을 벌이다 발각되면서 단교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직후 한국 측에서 이명박의 형인 이상득을 특사로 파견해 카다피와 면담을 나눈 뒤에야 외교 관계가 정상화됐다고. 여담으로 이 면담에서 카다피는 이상득에게 "한국은 리비아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음에도 교과서나 언론에서 나를 왜 그렇게 비하하느냐?"라면서 서운하다고 하기도 했다.

리비아 반군에 의해 점령된 카다피의 요새 안에서 미국 前 국무부장관 콘돌리자 라이스의 사진첩이 발견되었다. '흑인 여왕' 이라고 호칭하면서 일종의 이상상처럼 여겼다고. 카다피 본인도 이러한 사실을 거의 숨기지 않았고 콘돌리자 라이스가 리비아를 방문했을 때 그녀의 해외 외교영상들을 짜깁기해서 만든 '기괴한' 동영상을 감상시켜주기도 했다고 한다. 콘돌리자의 말에 따르면 기괴하긴 했으나 성적인 느낌은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미 정부는 콘돌리자의 방문 일정을 리비아 쪽과 외교 협상을 하는 줄다리기 카드 중 하나로 써먹었다.

흑인 민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80년대 넬슨 만델라와 아프리카 국민회의가 서방에서 테러리스트와 테러 조직으로 몰릴때 유일하게 지원한 국가가 리비아였으며, 로디지아의 반정부 무장 세력도 지원하였다. 이 때문에 나토의 리비아 공습에 대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극렬히 반대했다.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리비아 혁명 당시 망명을 제안하기도 했고, 현재도 카다피의 비자금을 숨겨주고 있다. 미국 흑인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미국 흑인의 이중국적 취득에 큰 도움이 되었고, 흑표당을 지원하기도 하는 등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도 깊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 흑인 래퍼의 적지 않은 수가 나토의 리비아 공습을 비난했다.

생전 입었던 옷들 수준이 ㄹㅇ 믿을 수 없을 만큼 돌아버린 수준이다. 잘 몰?루겠다면 직접 가서 보자. #

썬글라스를 즐겨 꼈는데, 본인의 미래가 너무 밝아서 가리개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총알 나갈 때 화염 일어난 게 밝긴 했다.

카다피는 특유의 곱슬머리로 유명했는데, 사실 카다피는 탈모가 심해서 이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착용했던 것이다. 탈모가 워낙 심하다보니 모발이식 수술까지 한 적도 있다고 하며, 죽기 직전까지도 가발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뉴스위크지에 따르면 혼자서 40개의 훈장을 자신에게 셀프 수여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딴 카다피(가 주는) 인권상이 있었다. 역대 수상자로는 넬슨 만델라, 피델 카스트로, 우고 차베스 등이 있다. 2010년 수상자는 튀르키예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제9회 한국 불교인권상 수상자다.

생전 건강의 비결이랍시고 갓 짜낸 낙타 젖을 매일 마신다고 밝혔는데 낙타 젖은 우유보다 지방은 많고 비타민은 적다. 게다가 비살균된 가축의 젖은 브루셀라를 유발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한데 카다피는 갓 짜낸 것을 그대로 마셨으니.. 그러다 보니 평생 복통과 설사를 달고 살았으며 업무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들락날락 거렸다고 한다.
[1] 본래 1인당 연설 시간은 20여분으로 제한되어 있다.[2]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끝내 유엔과 유럽 연합이 리비아 전쟁 때 카다피를 쉽게 배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도 했다. 잘한 건 맞는데 끝내는 그를 죽음으로 이끈 셈.[3] 물론 2000년대 들어 전부 폐기처분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