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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악……."


루크레시아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상대를 너무 얕봤던 걸까. 반사적으로 들어올린 지팡이로 충격을 방어했지만, 그러고도 한참을 날아가 바닥을 구르며 나동그라졌다.


구원자의 사도로서 강대한 힘을 소유한 루크레시아였지만, 지금은 대적자의 힘이라고 불릴 것도 없는 하잘것 없는 힘에 패배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언데드 군단 중 타이런트 개체를 불러 간신히 검은 산양을 막고 있었지만, 타이런트 소드의 검은 픽 소리를 내며 잘려서 날아와 그녀의 옆에 박혔다.


이어서 타이런트 개체의 그 육중한 몸체도 부유하듯 던져져 땅에 부딪쳐 으스러졌다.


이제 검은 산양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루크레시아는 뒷걸음질 치기는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 산양이 장검을 고쳐 잡고는 하늘로 치켜 올렸다.


그것이 아마, 지금의 검은 산양─양한솔─의 수련의 결정체. 매일 훈련을 반복했고, 조디악나이츠 블루시프트의 습격 뒤에는 4일 밤낮을 쉬지 않고 연마했던 기술이었을 터이다. 사도인 루크레시아였지만 그 일격에 직격을 당한다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다시는 느낄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던 두려움이 고개를 드는 순간,


"'아라한'에 이어 '아르콘'까지 깨어난 건가. 수고스러운 일을 만들었군. 루크레시아."


─천지가 개벽했다.



거대한 빛의 기둥이 어둠을 찢었고, 그 안에서 마치 거대한 나무의 줄기 와도 같은 형상을 두른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몸이……움직여지질 않아.'


루크레시아에게 일격을 날리기 위해 들어올린 칼이 움직이지 않는다. 매일 1만번의 연습을 거듭한 자세가 이어지지 않았다.


빛의 기둥에서 걸어 나온 남자. '알렌 버밍엄'은 검은 산양이 들어올린 장검을 눈으로 훑는다.


"'1성'급으로도 그정도의 출력을 낼 줄이야. 생각보다 잠재력이 있던 친구로군."


그는 양한솔에게도 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조디악나이츠 블루시프트의 기사단장, 에스테로사 드 슈발리에가 멘토로서 여기던 관리국 아카데미의 교수. 현재는 실종상태라고 들었었는데.


"에스테로사가 '아르콘'이 될 거라고 믿었는데 말이야."


그가 머리를 쓸어올리자 대기가 떨었다. 양한솔은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자신의 뒤에 있을 제미니아를 걱정했다.


"이 와중에도 쌍둥이자리 기사를 신경쓰는건가……. 상당한 호인이군, 자네."


그가 뿜어내는 소름끼칠 정도의 에너지와 대비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양한솔에게 하나의 제안을 건넸다.


"자네가 이 곳에서 나와 적대한다면 자네와 뒤에 있는 그녀를 없앨 생각이네. 우리의 전력이 아닌 '아르콘'은 상당히 성가신 존재가 될 것이니 말이네."


"그렇……, 다는 말은……."


"원래는 에스테로사에게 했던 제안이지만, 자네라도 따라준다면 모두의 안전은 보장해주겠네. 신생 '아르콘', '우리'에게 힘을 보태주겠나?"


양한솔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지나쳐갔다. 단장의 위치도 추측이 되었고, 제미니아를 지키고 싶은 마음도, 블루시프트를 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짧게 스쳐갔고, 그 마음에 망설임을 만들어내려고 했지만,


"제미니아……선배."


양한솔은 힘겹게 입을 열어 제미니아에게 말했다.


들어올린 그 손에 순간 핏줄이 파열될 정도로 힘을 준 채 소리를 질렀다.


"도망치세요!"


제미니아가 눈을 크게 떴을때, 양한솔의 검은 장검이 크게 내리쳐졌다.


그 충격파로 인해 제미니아는 휩쓸려 날아갔으며, 알렌이 서 있던 자리는 크게 파헤쳐져 하나의 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날려서 굴러간 제미니아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풍경은 지독히도 정말적이었다.


"크……악."


"한솔아!"


알렌은 양한솔의 헬멧을 잡고 들어올려 손으로 짓이기는 듯 했다. 빠직 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조용한 이면세계를 울렸다. 제미니아는 당장 양한솔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엄청난 중력이 내리누르는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자네가 가진 '패배한 대적자'의 힘은 지금은 하잘 것 없네. 내 친우인 '별의 인도자'는 세계를 이주하면서 힘의 9할 이상을 원래의 세계에 두고 왔어. 그게 내가 자네의 전투를 보고 조금은 놀란 이유네.”


"그리고 그 '대적자'의 힘은 어디로 갔을지 예상해보겠나? 그 당시 세계를 버리고 이주한 그를 대신해 내가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나?"


관리국의 기술로 만들어졌을 헬멧이 조금씩 우그러질 정도의 압력에 양한솔은 고통에 몸부림 쳤다. 별의 인도로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알렌이 말하는 대적자의 힘의 정체도 알 수 없었다.


"'아르콘'의 힘을 완전히 가지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무구는 회수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 블루시프트의 양한솔 군."


이윽고, 알렌의 에너지가 더욱 증폭되며 그 손에 힘이 들어가려던 찰나,


하늘을 울리는 굉음에 알렌의 시선이 이면세계의 하늘로 향했다.


"펜릴 유격대. 역시, 꿍꿍이가 있었던 거였나."


함선 외벽이 흰색으로 이루어진 구관리국의 제1번 '강습전대 펜릴'의 강습함 '글레입니르'가 차원계면을 찢고 하늘을 장악했다.


직후, 양한솔은 두번째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글레입니르와 대지가 이어진 그 사이에 불타는 듯한 에너지가 끓어올랐고, 알렌이 나타났을 때와 비슷한 거대한 빛의 기둥이 내리 꽃혔다.


"주절주절 시끄럽군요. 구원기사단장님."


누군가의 손에 의해 알렌에게 잡혀 있던 양한솔이 잡아뜯기듯 던져졌고, 착용했던 헬멧은 그 여파로 파괴되어 파편을 흩날렸다.



빛기둥과 함께 등장한 남자는 양한솔을 가로막고 섰다.


"배신하는 건가, 나유빈?"


"친구의 부탁입니다. 서로 한 번씩 뒤통수를 내줬던 걸로 생각하시죠."


"그럼 실력 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