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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멸망 전의 인간들이 즐겨했던 미니어처 게임이야. 워해머 판타지라는 이름인데 정보에 의하면 멸망 전의 미니어처 게임들 중 판매 종료되기 전까지 방대한 설정과 세밀한 규칙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해."


"이 미니어처 게임이 각하의 상태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좋은 질문이야 마리 언니! 이 워해머 판타지는 다양한 종족들이 서로의 이념과 목적을 위해 끝없는 전쟁을 치루는 세계관인데 오빠가 말한 여러 단어들을 모두 사용하는 종족이 하나 있어. 그게 바로 제국이라 불리는 인간들이야. 특히..."


닥터가 화면을 바꾸자 그곳엔 검은색 갑옷을 입고 왼손엔 금색으로 된 망치를, 오른손엔 처음 보는 초록색 피부의 괴물의 머리를 들고 있는 강인한 인상의 남자가 나타났다.


"오빠가 말한 카를 프란츠라는 사람도 있었어. 콘스탄챠 언니가 분명 오빠가 자신을 카를 프란츠라고 했었지?"


"맞아. 다프네 씨와 나한테 분명 그렇게 말했어."


"그 카를 프란츠라는 사람은 바로 이 워해머 판타지라는 게임 속 등장인물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내가 현실의 역사를 아무리 찾아봐도 기록을 찾지 못한 게 당연하지."


"그러면 뭐야, 사령관이 쓰러지고 나서 갑자기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게임 속 설정을 기억해내서 망상병에 걸렸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레오나의 질문에 닥터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건 아냐. 오히려 그것보다 더 복잡한 문제이니까. 혹시 언니들은 평행우주 이론에 대해 알아?"


"평행우주?"


"...분명 평행선 상에 위치한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이론이었지. 내 기억이 맞다면 그럴 거다."


"칸 언니 대단해! 포괄적인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면 다르지만 기본적인 틀은 그게 맞아. 어디서 들었어?"


"멸망 전에 어떤 인간 병사가 그런 이론을 좋아했었지. 그래서 기억해두고 있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인간이여서 싸움이 길어져 모두가 피폐해졌을 때 평행우주 이론을 기반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말하며 사기를 북돋아주려고 노력하던 자였지. 허풍선이에 거짓말쟁이라는 비웃음도 받았지만 몇몇 자매들은 그의 이야기 덕분에 정신이 무너지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 멸망 전쟁 때 전사하긴 했지만..."


칸이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긴 사이 닥터가 고개를 끄덕이고 오르카 호 인근 섬의 지도를 3D로 띄운 뒤 반대편에 그것과 똑같은 섬을 만들고 말을 이었다.


"칸 언니 말대로 쉽게 설명하자면 특정 세계로부터 파생되거나 영향을 받은 또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이야. 예를 들어서 콘스탄챠 언니 대신 그리폰 언니가 오빠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거나 칸 언니 대신 레오나 언니가 멸망 전쟁 전부터 살아남은 개체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소리지."


"그럼 우리 꼬맹이 대장이랑 제 위치가 역전된 세계도 있을 수 있단 소리군요?"


"히히. 그 가능성도 있지! 어딘가의 평행우주에선 나앤 언니가 빵빵한 몸매고 메이 언니가 나같은 꼬마인 곳도 있을 수 있는 거야. 좀 심각하게 넘어가자면 철충이 AGS가 아닌 우리 바이오로이드를 감염시키는 세계도 있을 수 있고 아예 멸망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거나 일어났어도 인간의 승리로 끝난 세계가 있을 수 있는 거지."


"뭔가 실감이 안 가네... 하지만 그런 무한한 가능성을 하나의 이론으로 삼았다는 건 대단한 일이야."


"확실히 흥미로운 가설이긴 하지만, 그것이 각하의 몸 상태와 어떤 연관이... 음? 잠깐."


닥터에게 질문을 하던 마리가 평행우주 이론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자신 나름대로 가설을 말했다.


"닥터 양의 말대로라면 그 워해머 판타지라는 미니어처 게임이 실제 역사인 세계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맞아! 그게 내가 말하려 했던 거야. 물론 그건 평행우주 이론이 아니라 다중우주 이론하고 관련이 있는 쪽이지만...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워해머 판타지의 방대한 세계관이 단순한 설정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우주가 있을 수 있고 그 우주에서 이 카를 프란츠라는 사람의 영혼이 이쪽으로 넘어와 오빠의 몸의 주도권을 가졌다는 게 지금 오빠 상태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결론이야."


"터무니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놀라운 가설이군요. 하지만 사령관님의 상태를 따져봤을 때 그 가설만큼 가장 정확한 가설도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요."


"나도 믿기지 않지만... 그것말곤 지금 오빠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래서 이 방법을 뒷받침해줄 증거를 찾으려 애썼지. 그러다가 오빠가 산책을 나갔다가 의식을 잃은 날에 특이한 기상현상이 있었다는 걸 발견했어. 이걸 좀 봐줄래?"


닥터가 다른 사진을 보여주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것은 사령관이 쓰러졌던 날의 밤 하늘을 찍은 사진으로 하늘 위로 두개의 꼬리가 달린 혜성이 지나가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그걸 본 레오나가 혜성을 가리키며 물었다.


"특이한 혜성이 찍혀있네? 이게 그 증거라는 거야?"


"응. 이 혜성도 그 워해머 판타지에서 나오는 혜성이야. 쌍꼬리 혜성이라고 부르는 데 그곳에서 이건 두개의 의미를 갖고 있대. 하나는 제국의 위대한 위인인 지그마라는 사람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엔드 타임, 다시 말해 종말의 때를 상징하고 있어."


"종말의 때... 분명 각하께서도 몇번 언급했던 단어였지. 난 그것을 단순히 철충과의 싸움을 의미하는 뜻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뜻이었군."


"이 워해머 판타지라는 미니어처 게임은 이미 판매가 종료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진 게임이야. 그때 진행되었던 이야기가 바로 엔드 타임이었고 그 결과는 워해머 판타지의 세계가 멸망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해. 카를 프란츠라는 사람도 그때 사망한 걸로 확인되었어."


"잠깐만, 네 말이 맞다면 분명 주인님... 의 몸을 차지한 그 카를 프란츠라는 인간분은 돌아가셨다는 건데 어떻게 지금 주인님의 몸에 계신거야?"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이 엔드 타임에서 카를 프란츠가 죽었을 때 그 영혼이 빠져나왔고 그것이 어떤 방법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로 넘어온 게 아닐까 싶어. 그쪽 세계엔 마법이라는 힘이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가능하지 않았을까?"


"모모 씨랑 백토 씨가 쓰는 마법과는 다른 개념이겠지만... 그럼 앞으로 어떡하죠? 닥터의 가설이 사실이면 지금 주인님은 우리가 아는 그 주인님이 아니에요."


콘스탄챠가 불안감과 걱정을 드러내며 말하자 다른 지휘관들도 이에 동의했다. 분명 사령관의 육체가 변한 건 아니지만 그 정신은 다른 차원의 인간이 차지하고 있다면 자신들이 알던 그 사령관이 아니라는 건 명확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이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던 중 마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나와 레오나는 각하가 편성한 부대를 섬으로 옮겨 방어를 구축하는 임무를 해야하네. 이 일은 오르카 호에 남은 다른 자매들에게 맡겨야겠군."


"슬슬 갈 준비를 해야겠어. 내일 섬에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해야 하니까. 뒷일은 맡겨도 되지?"


"네...! 물론이죠!"


콘스탄챠의 말에 마리와 레오나가 미소를 짓고 밖으로 나서자 칸이 불현듯 사령관의 행방이 궁금해 콘스탄챠에게 물었다.


"그런데 콘스탄챠, 사령관은 지금 어디에 있지?"


"분명... 요안나 씨랑 아탈란테 씨를 만나러 간다고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