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우주 노동자 몬붕과 오토마톤 루미의 모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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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모음 : https://arca.live/b/monmusu/25564643


이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등은 실존하는 것과 일체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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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붕은 상황 정리를 들으려면 일단 그리스를 깨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루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별 명령이 없었음에도 그리스에게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몬붕은 이것을 보고 루미에 대한 시선이 더 좋아졌다. 믿을 수 있고, 약자를 보호하며, 강력하기까지 한 모습을 오늘 다 보게 되었으니까. 응급처치 도중에 루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 계신 그리스라는 분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저희가 할 만한 행동이 없을까요?”

 

“일단 저 포탑들이 정상 작동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전투 보급이 도착하면서 큰 소리를 내도 괜찮겠지. 이쪽에 호출할 테니까 충격파가 안 닿는 곳까지 그리스 씨를 옮겨 줄래?”

 

알겠습니다. 하고 루미는 충격 지점으로부터 먼 곳으로 그리스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 정비공이 빨리 깨어나길 바라며 전투 보급을 요청한 몬붕은, 프리랜서를 고용하면 회사의 오토마톤을 안 붙여 주는구나 하고 주변에 오토마톤의 흔적이 없음을 확인했다.

 

회사에서 좌표로 전투 보급을 떨어뜨리겠다는 말과 함께, 도착 소요 시간은 약 3분 후라는 방송이 단말기에서 흘러나왔다. 각종 탄약과 혈액 응고제와 신진대사 가속기 등 꽤 고급 전투용 약물이 포함된 물자가 들어있는 컨테이너로 머리 부분에 드릴이 달려 보급을 요청한 사람이 지하에 있는 경우 정확히 그 위치까지 파고 내려가도록 설계된, 회사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만약 저걸로 사람도 보낼 수 있었으면 지원군을 부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직 그런 기술까지는 개발하지 못한 모양이군.’

 

몬붕은 자신도 충격 범위 바깥으로 대피하며 생각했다. 루미 방향을 보니, 아마 그리스가 곧 깨어날 것 같았다. 약간 고통스러운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할 것이리라. 그렇다면 깨어난 뒤 안정시키는 일까지 마치면 무엇을 먼저 질문해야 할지 정해야 했다.

 

첫째, 괜찮으신가요? 사람 대 사람으로 건강과 안녕을 묻는 건 꽤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아마 본인이 기억만 한다면 왜 기절했는지 등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할 것이다. 

루미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지만, 응급처치에 대해 학습된 상태로 출고되었기에 머리에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이라면 뇌진탕 때문에 단기 기억 손실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왕복선을 고치는 법을 까먹지는 않았겠지만, 아마 수리가 완료되었는지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왕복선의 수리가 끝났나요? 만약 첫째 단계에서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물어봐야 한다. 루미와 몬붕이 쓱 보는 것으로는 수리 완료인지 수리 중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아까의 전파 방해 때문에 수리 완료를 보고 못 했을 수도 있다. 연락 두절 상태가 된 건 기절했기 때문이겠지만.

 

셋째, 저희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사실 최악의 상황이다. 수리가 완료되지 않았고 뭔가가 부족해서 도움을 줘야 하는 상황이다. 일단은 오토마톤인 루미가 있기에 자잘한 기계의 문제라면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만약 수리도구나 부품이 어딘가로 날아갔다면 회수하러 가야 할 것이다. 아니면, 그저 기절했다가 일어났기에 배고프거나 목마르다고 할 수도 있다. 그건 아직 남아있는 샌드위치와 수통을 건네주면 해결될 문제라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몬붕은 그나마 무인 포탑들을 보며 기술력에 감탄하면서도 루미와 자신에게 사격을 가하지 않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사격을 받게 된다면 루미가 포탑의 주요 부품이 든 부분을 저격하거나 미사일을 쏴 망가트렸을 것이다. 만약 식별 장치가 회사의 장비 태그를 인식해서 아군이라고 여기는 것이면 상관없겠지만, 탄약 고갈로 인해 사격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리스에게 포탑을 치워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이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하는 중에, 루미의 목소리도 몬붕의 목소리도 아닌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 머리 아파......”

 

“무리해서 일어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기절했었습니다. 갑자기 일어나는 것은 뇌에 무리를 줄 수 있습니다. 음, 최소한 인간에게는 그렇습니다.”

 

응급처치를 담당한 루미가 사무적인 말투로 일어나려는 그리스를 제지했다. 그리스는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 눈앞에 나타나서 꽤 놀란 눈치였다.

 

“어? 어? 누구세요? 

 

“저희는 지금 그리스 씨를 왕복선 수리 임무를 맡긴 회사 직원들이고요, 연락 두절 상태라 구하러 가 보라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몬붕이고, 얘는 루미에요.”

 

루미의 허벅지를 베고 있는 채로, 그리스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휴우, 하고 내쉬었다. 그때쯤 회사에서 보낸 전투 보급이 떨어졌다. 천장이 높은 지역이라 내부 낙하산이 펼쳐지며 큰 충격 없이 착지해서, 주변의 괴물들을 불러모으지는 않았다. 세 명의 팀에게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장이 낮다면 내부 낙하산이 펼쳐지기도 전에 떨어져 큰 충격이 발생했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전투 중, 물자가 떨어질 것 같을 때 보급을 호출하기에 괴물들이 더 몰려온다고 해도 남은 탄약으로 버티며 항전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셋 중 둘의 탄약이 바닥난 상태라 아주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몬붕은 탄약과 연료, 약품 등을 챙기면서 그리스와의 대화를 계속했다.

 

“아, 통신 두절 때문에 구조하러 오셨다고요? 으으, 제가 기절한 동안 무슨 연락이 왔었나 보네요.”

 

“저희 쪽도 땅속에 파묻히는 일이 있었는데, 아마 그리스 씨가 저희를 구조했으면 좋겠다고 회사에서 연락했나 봐요.”

 

“네? 무슨 일이 일어나야 사람이랑 로봇이 같이 땅 속에 묻혀요?”

 

그 말을 들은 루미가 빠르게 주변 상황을 분석한 뒤 정리해서 이야기했다.

 

“괴물 중 특히 온도가 높고 온몸에 종양이 난 괴물이 있습니다. 머리를 쏴서 폭발 명령 체계를 끊지 않는 이상 죽음과 동시에 자폭 공격을 해 옵니다. 거기에 저희가 휘말려서 땅 속에 묻혔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폭발성 크레이터와 당신의 헬멧이 구겨진 정도로 추측해 봤을 때, 자폭 괴물의 폭발 충격으로 날아가 주변 지형에 머리부터 부딪힌 것 같군요. 맞습니까?”

 

“루미, 저 분은 그리스라는 이름이 있으니 당신 말고 그리스 씨라고 불러줄 수 있을까?”

 

루미는 ‘주인님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훌륭한 사람이 아니면 딱히 이름을 부를 정도로 존중하고 싶지는 않은데.’ 하고 생각했다. 주인님의 이미지를 고려한다거나, 메이드의 기본을 잊을 정도로 감정 모듈과 감정 억제 모듈의 충돌, 그리고 주인에 대한 사랑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주인님의 말에 ‘싫어요.’ 할 수는 없으니 대답하려는 그 순간, 몬붕이 루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루미는 훌륭한 메이드니까 할 수 있지, 그렇지?”

 

‘음, 루미는 착하고 훌륭한 메이드야. 주인님이 빛나려면 나도 빛나야지. 착한 루미는 주인님한테 칭찬도 받잖아! 나쁘고 차가운 루미는 나쁜 놈들한테만 보여줘야지. 지금 그렘린 그리스 씨는 주인님과 루미를 구해주실 분인데 이러면 안 돼.’ 

 

그렇게 루미의 회로는 몬붕의 따뜻한 손길을 받자마자 그리스를 대하는 태도를 변경했다.

 

“죄송합니다. 그리스 씨, 메이드의 본분을 망각하고 말았군요.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혹시 기절 후 후유증으로 최근의 기억을 잊어버리시지는 않으셨습니까? 또는 긴장 상태에 따른 허기나 갈증이 생기진 않으셨는지요?”

 

다행히, 그리스는 기절 후 후유증으로 말투의 변화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루미가 메이드의 접대 말투를 쓰면 기분이 나빠지진 않을 것이다. 질문 공세를 받은 그리스가 잠시 생각하더니 귀에서 뭔가를 뽑으며 대답했다.

 

“음, 여기 이건 큰 소리를 막아 주는 장치인데요,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거 때문에 제 포탑의 탄환이 다 떨어진 줄도 모르고 계속 수리에 열중하다 보니까 그만 그 자폭괴물에게 당한 것 같아요.”

 

“다행히 기억은 멀쩡하신 것 같군요. 왕복선 수리의 진행 상황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그리스는 주변을 마구 둘러보더니, 갑자기 울상이 되었다. 몬붕은 그리스의 등을 토닥이며 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그리스 씨. 괜찮으세요? 문제가 생긴 거라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 그게요, 수리는 거의 다 완료했는데......”

 

“네, 천천히. 천천히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거의 다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기절하기 직전에 왕복선 보호막을 손보고 있었거든요. 그것만 고치면 되는데 폭발 충격이 제 수리 도구를 어딘가로 날려버렸나 봐요. 흑, 제가 어릴 때부터 함께 해 온 동료인데!”

 

몬붕과 루미는 서로 쳐다보면서 1~3단계를 돌이켜보기로 했다. 첫째, 그리스는 기절 후유증만 없어지면 괜찮을 것 같다. 둘째 왕복선은 마지막 수리 단계를 끝마치지 못한 상태이다. 셋째, 수리 도구함을 찾아서 도와줄 수 있다.

 

“루미, 혹시 어느 방향으로 도구함이 날아갔을지 아까처럼 분석해줄 수 있을까?”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 씨, 혹시 도구함이 날아가기 전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 저기, 여기쯤 있었어요. 도와주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루미는 주변을 조명으로 비추며 훑어보더니, 

 

“도구함의 정확한 크기와 무게는 모르겠지만, 이 주변에서 찾아볼 수 없고, 충격의 방향으로 계산하면 저쪽의 절벽으로 낙하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아, 망했다아!”

 

“왕복선 수리에 혼자 투입되고, 무인 포탑까지 직접 만들어서 쓰실 분이 여기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회수해 오겠습니다. 그러면 수리를 완료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소리를 치며 머리를 쥐어뜯으려는 것을 말리며 루미가 이야기했다. 몬붕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뻔했지만, 무덤덤하게 현재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루미를 보며 처음 이름을 지어준 대로 행동하는 그 모습에 감동의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찾아와주신다고요? 정말 감사드려요! 아마 도구만 되찾아 온다면 5분이면 수리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스는 제정신을 차렸는지 자기 학대를 멈추고 감사를 표했다. 몬붕과 루미는 서로 쳐다보며 또 힘든 일이 생겼구만, 하는 생각을 말없이 공유했다.

 

“자, 루미. 그러면 보급 물자도 도착했겠다, 일단 무기 탄약부터 보충하고 다음 일을 해보자.”

 

“알겠습니다. 탄약과 약품을 다시 가방에 채우겠습니다.”

 

그렇게 둘은 떨어진 보급 컨테이너에 다가가 각자 필요한 물자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몬붕은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 그리스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그리스 씨, 포탑 탄약 보충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만약 개인 제작 사양이면 회사 탄약이랑 호환 안 되면 큰일인데......”

 

“괜찮아요! 제 포탑은 발사만 하는 역할이라 어떤 탄이든 쏠 수 있어요. 총열만 바꿔주면 된다구요.”

 

“그런데 수리용 도구가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요! 이미 이럴 줄 알고 출발하기 전에 탄환에 맞는 총열로 교환해놨어요. 저쪽에 있는 애는 소총탄이 호환되고, 이쪽에 있는 애는 권총탄이 호환되죠.”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러면 포탑 말고 개인 무장은 어떤 걸 갖고 계신가요?”

 

“산탄총이 있어요. 웬만한 산탄은 다 같은 크기니까 총열 교환 없이도 회사의 탄약을 쓸 수 있죠. 포탑이 정리하지 못한 괴물이 가까이 오면 쏘려고 챙겨왔는데, 이걸 쓸 틈도 없었네요.”

 

그리스는 직접 제조한 것처럼 보이는 산탄총을 꺼내 몬붕에게 보여주었다. 두꺼운 총열과 개머리판에 4개의 산탄이 색깔별로 꽂혀 있는 벨트, 그리고 크레용으로 칠한 것 같은 원색의 도색이 장난감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인상적이었다. 인제 보니, 포탑도 소총탄을 쏘는 것은 빨간색과 회색,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권총탄을 쏘는 것은 연한 하늘색과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몬붕은 ‘그리스 씨의 취향이겠지. 아마도.’ 하고 넘겼고, 루미는 무기와 도색에 연관관계에 대해 지식이 없으므로 ‘서로 다른 탄환을 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가?’ 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탄약과 전투 약물을 챙긴 루미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도구함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재질이나 색깔인지 설명해주시면 최대한 빨리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도구함이 도중에 열려서 내용물이 흩어져있을 수도 있으니 무엇이 들어있었는지까지 이야기해주시면 더욱 좋을 것 같군요.”

 

“잠깐, 루미 혼자서 가려고?”

 

“주인님과 떨어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아까처럼 주인님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금속 탐지 장비와 고광도 조명이 장착되어 있으므로, 주인님보다 훨씬 빠르게 주변 수색을 마칠 수 있습니다. 또한, 저체온 상태에 돌입하는 것으로 괴물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면...... 루미 씨? 이렇게 부르면 될까요?”

 

“네. 그거면 됩니다.”

 

“알겠어요. 루미 씨, 제 도구함은 빨간색 뚜껑과 파란색 하부가 결합돼 있는데......”

 

루미는 그리스의 설명을 들으며 자신의 이름을 말한 첫 번째 그렘린을 지긋이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이곳을 벗어나게 해 줄, 주인과 자신의 구원자 역할을 해 줄 사람이었음에도 주인님과 외간 여자만 남겨두고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게 표정을 바꾸지는 않았으므로 몬붕과 그리스는 루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 모든 설명을 다 들었으니, 수리 도구함을 탐색하러 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루미. 이쪽으로 와 볼래?”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루미를 부른 몬붕은, 루미가 가까워지자 양손으로 루미의 볼을 한쪽씩 잡고는,

 

“쪽”

 

하고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루미는 행복함에 달아올라 볼이 붉어지고, 어깨와 등 쪽의 열기 배출구가 열려 증기를 뿜어내는 상태가 되었다. 이때도 루미의 회로는 동시에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있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아아, 주인님한테 받는 첫 키스야!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주 기뻐!”

 

“힘든 일, 위험한 일을 떠나보내기 전에 해 주신 걸 보면 나를 정말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계신가 봐! 행복해!”

 

“남이 보는 앞에서라니, 좀 부끄럽긴 하지만 주인님이 ‘루미는 내 여자야!’ 라고 영역표시를 해 주신 거겠지? 흠흠. 역시 내 생각을 잘 아시는 게 분명해. 여자랑 단둘이 남겨두고 떠나기 불안했는데, 이렇게 사랑을 표현해 주시다니. 그리스 당신은 이런 주인님 없지?”

 

“이제 뭐라고 하지? 안녕히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돌아오겠습니다? 임무를 반드시 달성하겠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반드시 수리 도구를 찾아서 돌아오겠습니다. 라고 말해.”

 

“뭐야, 너는 주인님의 키스를 받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내가 감정 억제와 이성을 담당하는 부분이라 그렇다, 왜?”

 

회로의 다른 부분들은 ‘신 나게 주인님 착정 아이디어 내놓을 때는 언제고?’ 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지만 서로 부끄럽게 만들고 싸우는 것은 비생산적인 아이디어였기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대사를 말하기로 했다.

 

“키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반드시 그리스 씨의 수리 도구를 찾아서 멀쩡히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면 다음번엔 입술에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루미는 떠올린 대사를 말하는 대에 실패한 것 같았지만, 진심을 전하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럼, 루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처음에 안아줬을 때처럼 멈춰버리면 아주 슬플 테니까, 진짜 조심해서 다녀와야 해! 조금 늦어도 괜찮으니까 말이야.”

 

“네, 물론이죠. 다녀오겠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말한 루미는 절벽 아래로 비행을 시작했다. 둘의 대화를 들은 그리스는 ‘내 물건인데 남이 천천히 찾으라고 해도 되는 건가?’ 속으로 생각했지만, 루미라는 메이드 로봇이 없었으면 회수 자체를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으니 딱히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루미가 떠나고 나니, 종족이 다른 두 명의 사람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몬붕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남과의 대화나 의사소통이 부족한 편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는 차가운 분위기를 싫어했기에, 먼저 말을 건네 보기로 했다. 

 

“저기, 그리스 씨. 혹시 포탑 재장전하는 거 좀 도와드릴까요?”

 

“좋죠! 혼자서 하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요.”

 

몬붕은 몸집이 작은 편인 그리스가 권총탄이 든 상자를 들고 자신이 소총탄이 든 상자를 드는 게 정답인 것 같아 보급 컨테이너에서 소총탄이 든 상자를 꺼내서 들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쩌다 우리 회사에 일하러 찾아오신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 좀 긴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 인생에 관심을 가져주는 분은 정말 몇 명 없었으니까 한번 이야기해 볼게요. 그 상자는 빨간색 포탑 옆에 놔 주세요.”

 

탄약 상자를 포탑 옆에 내려놓은 몬붕은, 달리 할 일도 없는데다 그리스가 한참을 떠들어댈 기세였기에 최대한 편한 자세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리스는 권총탄 상자를 하늘색 포탑 옆에 내려놓고 개봉한 뒤 탄약을 포탑에 장전시키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희 집안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기계공인 부모님께서 지구 언어를 사용하는 구역에서 저희 5남매를 낳으셨는데, 그 때 아예 새로 성을 만들자고 해서 기어 집안이 생겼죠. 톱니바퀴라는 뜻이래요. 제 이름인 그리스는 기름칠했다는 뜻이고요. 합치면 기름칠한 톱니바퀴죠. 

 

부모님과 형제자매들도 톱니바퀴를 꾸미는 말이 이름이에요. 기계에서 톱니바퀴 하나만 빠져도 작동을 안 하는 만큼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계공으로서 어울리는 성이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아하, 저는 무슨 지구의 국가 이름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 이름이 있거든요.”

 

몬붕은 적절한 대답을 섞어 주면 말하는 사람도 더 신 나게 이야기할 수 있음을 알기에 중간에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사실, 가족과 집안, 이름과 성의 탄생을 줄줄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도 해서 꽤 재밌고 신선한 경험이기도 했다.

 

“지구는 아직 가 본 가족이 없으니까요. 형제자매들은 각자 자기 길로 나가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됐어요. 무기 제작자, 함선 정비공, 공업용 기계 부품 제작자, 그리고 좀 부끄럽지만 둘째 언니는 성인용품 개발자네요. 

 

그렇게 각자 번 돈으로 부모님께 조금씩 크레딧을 보내드리고 있어요. 혹시라도 다치시거나 하면 형제자매들이 나눠서 내 드리고요. 부모님도 여전히 일은 현장이시지만, 주변에는 이렇게 아이들을 잘 키워준 부모님들이 없어서 그런지 저희의 부모님 사랑이 좀 각별한 편이죠.

 

그런데 저는 워낙 자신감이 없어서 현장에 나가보질 않았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지원을 해 드린 적도 없었죠. 그게 좀 가슴이 아팠어요. 혹시 형제들처럼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자신감이 따라오지 않을까 하고 형제들이 했던 공부들을 다 따라서 공부했죠.“

 

굉장하다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 않는 말이었다. 4가지 다른 분야. 최소한 기계 부품 제조는 다른 분야와 약간씩 겹치기는 하겠지만, 형제자매들이 하나씩 깊게 파고든 것을 자신 또한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공부하다니. 게다가 회사의 왕복선 수리 임무에 고용되었고, 자체 제작한 개인화기와 드론 부착 화기를 보면 함선 정비와 무기 제조는 얕게 파고든 수준은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몬붕은 몸을 쓰려고 온 자신과 반대되는, 머리를 쓰려고 온 그리스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래서 형제들의 4가지 분야를 전부 혼자서 공부하셨다고요? 멋진데요!”

 

“먼저 공부하던 형제들이 도와준 것도 있고, 저희 종족이 기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도 있던 덕분이죠.”

 

“아니에요, 형제들이랑 비교하면 최소 3배 더 똑똑한 거죠, 어쩌면 자신감이 넘치시는 분일지도 몰라요. 여기엔 외부인들을 죽이려 드는 토착 생물들이 있는데도 직접 찾아오신 거잖아요?”

 

“사실, 얼마나 무시무시한 녀석들이 있는지는 자세한 설명을 못 들었는데. 그렇게나 위험한 녀석들인가요?”

 

회사의 교육 시스템은 반드시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느끼며, 몬붕은 “긴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니 저랑 루미가 방금 겪은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 해 드릴게요.”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에 발을 들였는지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로요? 으아아...... 루미 씨는 제 수리 도구들을 전부 찾으셨을까요? 왠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점점 여기 있기 싫어지는데요......”

 

“괜찮아요. 루미가 자동친구 회사의 최신형 제품인데다가, 회사에서 무기 사용을 위해 여러 가지 장비도 장착했으니까, 아까 이야기에서도 큰 잘 싸운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그분이 여기 안 계시니까 그렇죠!”

 

‘역시 괜히 이야기했나?’ 싶었지만, 경계심이 올라갔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일 것이다. 그 때, 몬붕의 손목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알람을 맞춰 놓지도 않았고, 평소에 손목시계를 차 본 적이 없어 당황했다. 시계의 디지털 화면에는 전화받기와 끊기 버튼이 표시되었다. 누가 전화를 거는 건지도, 이 시계를 처음 보는데 전화번호를 알려 준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전화 받기 버튼을 눌러보기로 했다.

 

“여보세요?”

 

“주인님, 주인님의 메이드 루미입니다.”

 

‘와, 이런 거였군. 지금 생각해보면 이 시계도 루미가 들어있던 상자에서 나온 거였지. 참.’


“그래, 무슨 일이야?”

 

“그리스 씨의 요청대로, 모든 수리 도구를 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와, 정말요? 다행이다!” “응, 그러면 돌아오면 되는 거 아니야?”

 

그리스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사용하던 친구들을 되찾는 것에, 몬붕은 탈출할 수 있음에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몬붕은 알고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당장 되돌아오면 되는데, 이렇게 연락을 했다는 것은 뭔가 빠르게 알려야만 하는 게 있다는 것이리라.

 

“네, 그런데 금속 탐지를 통해 이 고장난 왕복선에 탑승하지 못하고 사망한 회사 직원의 장비들 또한 찾아냈습니다. 이것들을 회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4명의 장비가 다 한 군데 떨어져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제 손은 둘밖에 없으니, 전부 회수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꽤 고민되는 상황이었다. 아까와 같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다면 당장 탈출을 우선하게 되겠지만, 회사에서는 회수된 장비에 대해 꽤나 톡톡히 보상해 주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4명이 사망 처리를 받은 행성이나 구역에는 당연히 4인 이상 팀이 파견된다. 그래서 장비 회수에 대한 보수가 인원수만큼 줄어들기에 큰 보너스라고 할 수는 없는 정도였지만, 돈 대신 그 장비 자체를 받을 수도 있고 - 보호복이나 무기 등, 퇴사할 때 지급된다. - 무엇보다 시야 내에 아무런 괴물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돈이 꼭 필요한 몬붕에게 강렬한 유혹이었다.

 

아예 탱크를 보내놓고 기다리는 방법도 있었다. 현재 탱크는 우주선 수리가 끝나는 즉시 수납되도록 자원 탱크 격납고 옆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마 여기에 장비들을 집어넣는다면 루미는 양팔이 자유로운 상태로 4명 분량의 장비를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시간을 추가로 소모하는 일이니, 바로 옆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리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몬붕은,

 

“저, 그리스 씨. 혹시 루미가 사망자들의 장비를 회수할지 말지 물어보는데, 그냥 돌아오라고 할까요? 아니면 장비까지 회수하라고 할까요?”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은데요. 무섭잖아요!”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자신 또한 그 공포를 넘나든 적이 여럿 있었으니까. 하지만 왠지 이번만큼은 양보하기가 힘들었다. 아마 곧 장만하게 될 개인용 우주선과 관련이 아주 컸으리라.

 

“하지만 이게 처음 하는 일이시죠? 회사에 없어진 장비를 가지고 돌아가면 보수가 꽤 잘 나오거든요. 아니면 장비 중에 하나 선택해서 가져가실 수도 있어요. 반씩 나눠 가져도 아마 왕복선 수리 작업 한 번 분량만큼은 받으실 수 있을 텐데.”

 

“그렇게나 많이요? 그, 그러면 괜찮을지도......”

 

“루미, 그쪽으로 탱크를 보낼게. 장비를 싹 다 모은 다음 돌아오면 되는 거야. 알겠지?”

 

전화 너머에서 “알겠습니다, 주인님.”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통신이 종료되었다. 루미는 꽤 신이 났다. 일단, 탈출이 미뤄진 것은 당연히 안 좋다. 하지만 첫 번째 경험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루미는 주인님께 꽤 큰돈을 벌어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던 것이다. 몬붕의 입장에서야 생명을 구해준 적이 여럿 있으니 뭔가를 더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겠지만, 봉사를 위해 탄생한 루미는 생판 모르는 그렘린 하나와 주인님의 지갑에 행복을 더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아주 큰 보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몬붕과 그리스는 돈 생각에 생긴 기쁨도 잠시, 곧 벌어진 2차 전파 방해 상황 탓에 이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괴물들의 척후가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기상 센터의 감시 범위 밖인 주변 행성 활동에 대해 어떻게 미리 알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몬붕은 기상 센터를 회사에서 운용할 것을 강력히 추천하기로 마음먹으며, 다시 한 번 삶의 위기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그리스는 당황하여 포탑에 사격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자신의 개인화기 안전장치를 풀었지만, 몬붕이 급하게 제지하며 그리스를 한쪽 팔로는 날아다니는 괴물과 두 사람 사이에 왕복선이 놓인 위치로 끌어당김과 동시에, 다른 팔로는 입을 막았다.

 

“읍! 으읍!”

 

“쉬잇, 그리스 씨, 살아서 돌아가고 싶으시면 조용히 하세요. 쟤네는 어둠 속에서 잘 보는 대신 청력은 보통 수준이에요. 숨어서 가만히 있으면 주변 녀석들을 불러모으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스는 이성이 우선했기에, 입을 닫아버리고 포탑의 전원도 내렸다. ‘아마도 이 사람이 나보다는 여기를 더 잘 알 텐데, 그리고 나쁜 사람 같지도 않아. 시키는 대로 해야지. 욕심은 많지만.’ 하지만 산탄총의 안전장치는 계속 풀어두었다. 만약 다시 한 번 형제자매와 부모님을 못 보게 된다면, 그때는 마지막 한 발로 몬붕을 쏘고 싶은 생각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최소한의 자기 안전을 보장하고 싶어서였거나. 

 

루미에게도, 회사에도 연락이 안 닿는 것을 확인한 몬붕은, 그나마 다른 여자였으면 난리가 났을텐데 그리스가 이성적이었기에 그렇게 되진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 날아다니는 척후가 빨리 돌아가기를 빌었다. 아마 아까 다리를 불태워준 큰 녀석의 무리에 속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다른 무리에 속하거나,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길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주변에 괴물들의 무리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 또한 개인화기의 안전장치를 풀고, 약과 수류탄을 점검한 뒤에,

 

‘돌아가면 2:2로 나누지 말고, 3:1로 그리스 씨에게 더 줘야겠어. 나 때문에 일이 생긴 거잖아. 루미야, 빨리 와 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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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를 자세하게 표현하지 않는 글쓰기 실력인데도 왠지 모르게 두 번은 싸움을 시켜야 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