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아야! 이거 봐봐! 완전 신기하지!"


다름이가 선풍기 위에 스타이로폼 공을 올리더니 채아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


"이게 아빠가 그랬는데... 초능력자들만 할 수 있는거래!"

"아니야. 그건 이과생이면 다 기계로 할 수 있는거야. 문과생도 돈만 있으면 할 수 있어."

"이가샌이 뭔데?"


다름이가 눈을 크게 뜨고 채아를 바라보자, 채아가 다름이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가격했다.


"악! 왜 때려!"

"어린 놈이 세상이 무서운지를 모르는구나."

"넌 6살이잖아! 난 7살이야!"

"때로는 보이는게 전부가 아닐 때도 있는 법이야."


그리고 그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한명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대체 저거 몇 살인가?"

"나도 몰라요. 6살인데 나보다 똑똑해서."


한명오가 목이 타는지 앞에 놓인 주스를 마시는걸 보며, 나는 채아가 어쩌면 유중혁과 같은 회귀자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상상은 이내 어제 차 안에서 유상아의 성교육을 떠올리며 깨지고 말았다.


회귀자면 나랑 유상아가 뭘 하는지 정도는 잘 알테니까.


"무슨 생각 하나?"

"아무 생각도요."


그리고 잠시간의 내 망상을 한명오가 깨버렸다.


"유상아 씨는 언제 오나?"

"둘이 친합니까?"

"...요즘은 좀 친해졌네."


의아했다. 유상아가 설마 한명오랑 친해졌다고?


"착각은 아니고요?"

"...미안하네. 그만하게."

"...상아는 택배만 받고 온다고 했어요."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관문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  *  *


"하하, 그래서 다름이가 이번에 유치원 받아쓰기에서 백점을 맞아왔다니까?"

"우리 채아도 유치원 영어대회에서 금메달을 받아왔어요!"


유상아가 들어오자마자, 즐겁게 아이들의 얘기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괜한 소외감이 들어서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와 채아 옆에 쭈구려 앉았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다름이가 일어서서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걸 본 채아가 입을 비죽였다.


"무슨 조폭도 아니고."

"...너도 유치원에서 애들한테 90도 인사받으면서 나오는거 봤거든?"

"나는 조폭이 아니라 싸움꾼이야. 시라소니나 김두한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주먹을 꽉 쥐는 채아를 보자, 대체 어떻게 내게서 저런 또라이가 나왔을까 의문이 들었다.


"근데 이건 뭐야? 부품들이 막..."

"아, 그거? 다름이가 선풍기가 초능력이다 어쩌고 저쩌고 하길래 선풍기 원리를 보여주려고 다 해부했어!"

"...그거 다시 못 만들면 어쩌려고?"

"상관없어. 어차피 얘네 집 부자잖아."


태연하게 그 말을 하는 채아의 모습을 보며 왠지 울적해졌다.

어린 놈이 벌써부터 돈이 뭔지를 알아버렸구나...


하지만 제대로 된 경제관념을 잡아주는 것 역시 부모의 몫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전부가 돈은 아니야. 그건 명심해야 해."

"나도 그건 알아. 대부분이 돈인게 문제지."

"... 친구도 중요하고... 사랑도 중요하고..."

"돈이 있으면 다 따라와. 친구도 사랑도."

"그건 진정한 친구나 사랑이 아니야."

"돈이 없으면 그런 친구나 사랑도 안 따라와. 요즘 시대에 진짜 우정이나 사랑이 어딨어."


말문이 턱 막혔다.


"그.. 엄마랑 아빠..."

"엄마랑 아빠? 속도위반으로 나 낳고 결혼했잖아?"

"우리 지금도 사이 좋잖...아?"

"하, 엄마랑 아빠랑 공원에서 싸우던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1달이나 지난 일을..."


그러고 보니, 어느새 12월 23일이었다. 내일이 크리스마스 이브.


"너 내일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을 자신 있어? 유치원에서 밀가루 던지고... 그랬잖아."

"산타 할아버지는 참 이상해. 왜 착하고 말고의 기준을 자기 마음대로 정하지?"


오...? 개인적으로 산타 할아버지는 아빠랑 엄마가 아니냐고 대답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듣던 다름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아빠가 그랬는데! 산타 할아버지는 착함을 측정하는 기계를 가지고 있대!"

"그 기계가 착함을 측정하는 기준은 뭐지?"

"착한 일을 하면 점수가 올라가고 나쁜 일을 하면 점수가 내려가!"

"착한 일의 기준은 뭐고 나쁜 일의 기준은 뭐야? 도둑이 부자들의 돈을 훔쳐서 나쁜 일을 했다고 점수가 내려갔는데, 알고 보니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한테 그 돈을 나눠준거지. 그러면 그 행위 자체가 양쪽의 영향으로 점수가 상쇄되는거야? 그러면 그 일에 대한 선과 악의..."


채아가 신나서 선한 악인의 역설에 대해 펼치는 도중, 다름이가 당황했는지 울먹였다.


"...왜 우는데?"

"그럼 나는 선물 못 받아..?"


그 모습을 본 채아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넌 선물 받을거야. 네 산타 할아버지는 항상 너를 제일 사랑하시거든."

"왜? 채아는 두 번째야?"

"내 산타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이야."


그런 채아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지 마. 못생겼어."

"네가 더 못생겼어."

"전에는 엄마 닮았다면서? 엄마가 못생겼다는 말이랑 똑같은거 아닌가?"

"사람은 행실에 따라서 인상이 좌우되는 법이야."

"그래서 아빠가 그렇게 생겼구나."


오늘따라 채아의 말 하나하나가 내 심장을 후벼파는 느낌이 들었다.


*  *  *


"저흰 그럼 가 볼게요! 다음에 봐요!"

"그래, 그래! 여기 이거 양주 챙겨가고!"

"...비싸보이는데요."

"에이, 독자 씨 부담스럽지 말라고 그렇게 비싼 건 안 넣었어! 티냐넬로라고 유명하긴 한데 그렇게 비싼건 아니네!"

"얼맙니까?"

"25만원이었나?"


그 말을 듣고 유상아가 물을 뿜듯이 나는 25만원을 깰 뻔 했다.


"...와인이 25만원이면 정말로 그리 비싼건 아니네."

"...그러시겠죠."


해봐야 4000원짜리 맥주를 사먹는 우리에게, 25만원짜리 술은 신세계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 진짜 가 볼게요."

"그래! 연말 휴가 수리해놓겠네!"

"...감사합니다!"


한명오의 말이 끝나자, 우린 살을 파고드는 추위를 피해 차 안으로 들어갔다.


"한명오랑은 언제 친해진거야?"

"아.. 그게! 육아 얘기도 하고 뭐... 그러다 보니까...!"


유상아가 살짝 말을 더듬었다. 


"의심스러운데... 숨긴게 뭐야."

"그런거 없거든?"


나는 가만히 씩씩대는 유상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예쁘네."

"그러게. 우리도 나중에 꼭 저런 집 사자!"


내가 유상아 쪽을 바라보는게 한명오의 저택을 바라보는거라 착각한건지 유상아가 내 시선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쯤 되면 이렇게 눈치없는 것도 능력이다.


"쯧, 나는 눈 감는다."


채아가 눈치있게 눈을 감아주고, 유상아가 무슨 소리냐며 채아를 바라보는 순간, 유상아와 내 입술이 포개어졌다.


"사랑해."

"... 나도..."


유상아가 얼굴을 붉히더니 이내 들고있던 목도리로 얼굴을 싸맸다. 그 모습이 재밌어서 마냥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출발한다! 채아는 안전벨트 맸지?"

"응! 크리스마스 때 동생 좀 만들어줘!"

"무슨 소리야! 조용히 안 해?"


오늘도 차 안은 시끄러웠지만, 어쩐지 그 소란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나는 계속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