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 아래 단편의 외전


시나리오가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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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끊어버리다.

 

굴레를 끊어냈다. 독자의 삶도 끊어냈다. 생각하기를 멈췄고, 존재하기를 포기했다. 그는 홀로 서있으매, 그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않으며 도망치는 불우한 신이기 때문이다.

 

고개를 떨군 신은 더 이상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지 않고, 삶의 이유를 주지도 못한다.

 

그는 무력한 신이다. 홀로 있는 공간에서 생각이라는 권능을 포기한 채로 자기 자신에게조차 시선을 주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다.

 

그러니 무엇도 바라지 말라. 그에게서 행복도, 인연도, 친절도 기대하지 말라.

 

그건 세상을 무시하는 나약한, 그리고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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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거린다.

 

내 자신을 움켜쥔 채로 난 덜덜 떨고 있다.

 

누군가 다가온다. 내가 아는 사람이다.

 

갓 만난, 어쩌면 오래전에 보았던 그녀가 내게 술잔을 밀었다.

 

“..뭐 더 가져다 드릴까요?”

 

고개를 저으며 난 술을 바라본다.

 

탄산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칵테일.

 

난 술을 조금씩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그러나 너무 빨리 마셔버린 모양이다. 3번 정도 꿀꺽이자 잔이 깨끗이 비워졌고, 몇 번 기침해버렸다.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책상에 엎드리자 바텐더가 당황해한다.

 

난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는 표현을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구역질이 난다.

 

그대로 무언가 죽어버릴 것만 같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는다.

 

내 정신은 절대 올곧지 못하다.

 

사라지고 있다. 말 그대로 내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

 

생각은 조금씩 사라져가는 와중에,

 

책상에 엎드린 채로 나는 지금까지의 일을 돌이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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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이후, 무엇이라도 할 것이라 믿었다.

 

과분하게도 유상아 씨가 나와의 연락을 계속해주었다. 나 또한 그에 부응하듯 틈틈이 취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길을 걷다 쓰려졌다.

 

집에서 일주일 동안 기절해있었다.

 

일어났을 때, 두통이 심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요즘 몸이 저리다.

 

스파크 같은 것이 내 몸을 기어 다니며 심하게 따끔거린다.

 

피부가 물어뜯기는 기분은 절대 상쾌하지 못하다.

 

삶을 지지해주던 무언가는 사라지고, 어느새 난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통장에 남은 돈을 갈아먹으며, 금방 취하고 금방 깬다.

 

그러지 않으면 못 참을 것 같기에. 빈 캔맥주 캔을 쥐어짜듯이 움켜잡으며 난 방구석에서 덜덜 떤다.

 

요즘 미치겠다. 내가 미쳐버린 것 같기도 하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자신조차 잊어버린다면 그것을 보더라도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생각 자체가 나에겐 고통인데.

 

살아서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죽고 싶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세상이 뒤틀리고 있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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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해있던 일주일 사이에 유상아씨와 연락이 끊어졌다.

 

누군가 개입된 것처럼 어색한 단절이었다.

 

아무리 답장을 보내봐도 차단된 것처럼 반응이 없다.

 

찾으려는 시도를 떠올리지만 실행하진 않는다.

 

난 너무 게으르기에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하는 독자이다.

 

그런 존재가 유상아라는 인생에 참견하면 안되는 것이다.

 

내 정신은 올곧지 못하나, 내면의 벽은 드높고 단단하다.

 

그 무엇으로 깨지 못할 정도로, 나조차도 넘지 못할 정도로.

 

그 벽을 올려보던 나는 공허한 공간 속에 스스로를 묻은 채로 술을 목구멍으로 들이켰다.

 

그것만이 내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전부이니까.

 

독자에게 베풀 수 있는 간절함의 보상이니까.

 

그렇게 점점 취하던 도중 문득 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자각했다.

 

책도 보지 않고 하다못해 핸드폰이나 컴퓨터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의아했다.

 

정말로 술만 먹고 살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사람이 일주일을 기절했다면 수분 부족으로 죽어버려야 할텐데,

 

음식없이 알코올만 들이마시면 간이 아프거나 굶주림을 느껴야 할텐데..

 

애당초 길에서 넘어졌는데 왜 집에서 일어난 거지-

 

순간 나는 모든 부분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벽 모서리, 그림자, 창문 너머, 거울, 검은 화면의 스마트폰.

 

그리고 도깨비.

 

어느새 난 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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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마치 날 해석하려는 그런 것이 나를 일깨우고 있었다.

 

기생충일까, 변종 바이러스인가. 혹시 나는 자각조차 못 하던 로봇이었던 것일까.

 

그것이 어쨌건 두 가지는 확실하다.

 

내 몸속에 무언가 있고,

 

그건 내 몸을 전기로 지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정 신 차려 김 독 자]

 

글씨가 내 눈앞에 들이대는 것과 더불어 전기 자극이 머리부터 발까지 흘려내린다.

 

내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온몸 근육이 경련을 시작하여 담에 걸린 느낌을 받는다.

 

뭔지 모르지만, 그것에게서 어떤 것을 전달받을 때마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들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말을 할 수 없다. 그나마 가까운 표현은, 내 삶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

 

심장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심장을 붙잡으며 검은 연기를 내뱉는다.

 

함께 위에서 올라온 탄내와 쓴내가 목구멍에서 올라온다.

 

쓰려져도 집 안에서는 죽을 수 없다. 세상에 전시되더라도 내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당장 방을 박차고 거리로 뛰어들었다. 심장을 움켜쥐며 벽에 기대있었지만, 메시지가 더 이상 또 나타나지 않자 난 해방감을 느꼈다.

 

입에서 흐르는 침을 닦으며, 난 그대로 주저앉았다.

 

기묘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사람의 시선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것들은 내가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벽을 짚으며 그것만을 보았고, 안정감을 조금 느꼈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며 일어섰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벽에 몸을 비비듯 지탱하며 다리를 휘적여 움직인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다른 손으로는 건물을 짚으며 걷다, 열린 문에 손을 넣고 그대로 넘어졌다.

 

바닥과 부딪혀 순간적으로 아파오는 오른팔에 기어가는 신음을 질렸다.

 

“-뭐야? 저기요? 괜찮아요?!”

 

누운 채로 올려본 시야로 구두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부끄럽지만 난 대답이 없이 개처럼 헥헥댔고, 누군가 내 왼팔을 움켜쥐는 게 느껴졌다.

 

아 깜짝아, 뭔가 했네. 그쪽 괜찮죠?”

 

, 잠만잠만. 여기 어디에요?”

 

간신히 일어서 이마를 붙잡으며 붇는다. 정희원이라는 명찰을 단 여자가 핏 웃으며 말했다.

 

취객이 있는 곳이죠.”

 

“..술집이요?”

 

잘 알아듣는 거 보니 그쪽은 취객은 아니네요. 여기는 당신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죠?”

 

뭔 개소리야. 내 시선을 느끼고 바텐더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돌렸다.

 

아이 참 재미없게, 어쨌든 기다려봐요. 응급차 불려줄테니까.”

 

정희원은 소매를 걷은 팔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마 핸드폰을 찾는 것이리라.

 

기묘했다. 날 도와주는 이가 있다니.

 

그러나 그 호의를 받기 꺼려웠다.

 

무조건적 반항은 아니다. 내가 병원에 가보지 않았던 건 아니었기에 그런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날 이해치 못했다.

 

내 오랜 아픔을 가지고 그들에게 풀어두었을 때, 내 상처를 쓰레기의 장난으로 치부했을 뿐이다.

 

화를 내었고, 장난치지 말라는 식으로 날 강압하듯 말했다.

 

그들은 내게 병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슬퍼하는 자들의 병을 모르며, 치료또한 하지 못한다.

 

모든 이들에게는 저마다의 벽을 가지고 있기에.

 

그 벽은 내 것처럼 드높고 단단할 거라 난 믿고 있기에.

 

한 잔만.”

 

그래서 날 위로할 수 있는 건 나뿐일 것이다.

 

“..?”

 

한 잔만.. 칵테일로 아무거나.”

 

그녀가 어이없게 바라보지만, 난 취객이 되야 했다.

 

난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았고, 정희원은 날 이상하게 보다, 고개를 저으며 결국 소매를 걷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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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려오는 팔을 붙잡으며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진상 같지만 점원은 친절을 가졌기에 내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나아지려 노력하지 않았다.

 

여기요.”

 

다시 술이 나왔다.

 

난 바로 그것을 내 입에 털어넣었다.

 

무슨 맛인지 모른다. 연기의 쓴내를 겨우 쓸어내리고만 있다.

 

한 잔 마시고 앞을 보니 알바생은 자기 곧 그만둔다면서 전화하는 것이 보인다.

 

참 아쉽다. 몇 번 더 오고 싶었는데.

 

역시 내가 있을 곳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집뿐인가.

 

“..독자씨?”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난 무언가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꼈다.

 

“..한명오 부장님?”

 

하하. 이거 오랜만이네.”

 

한명오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 뭔가 있어보이는 이름의 술을 시켰다.

 

하지만 난 그 무엇의 불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한순간에 내가 김독자가 아니게 된 것 같았다.

 

마치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것처럼

 

...

 

그보다 기묘했다.

 

길에서 유상아씨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상아씨는 날 알아보지 못했고, 그대로 지나쳤다.

 

카톡에서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는데.

 

말에서 힘든 기색이 보이지만, 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말없이 머리를 글쩍이자 한명오가 배에 손을 얹고 말을 건다.

 

요즘 어떠지? 일은 하고 있고?”

 

전혀요.”

 

그리고 대답처럼 한 잔 마시니 한명오가 낄낄 웃어댄다..는 일이 없었다.

 

그저 약간의 측은함을 가지고 내 눈치를 보며 잔을 기울인다.

 

뭐지.

 

누구지?

 

“..부장님?”

 

, 궁금한 거 있으면 뭐 물어보는 게 어떤가. 도움줄 수 있는 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역시 내 이야기는 지겹기만 하다. 도움 역시 받기 싫고.

 

애초에 그들로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 없다. 멸망 속이 아닌 현실에서라면 말이다.

 

그래서 난 그나마 한명오와 관련있는 걸 물었다.

 

유상아 씨는 어때요?”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잘라진 인연은 의외로 금방 잊히니까.

 

그래도, 대화 주제가 이것밖에 없는데. 내게 선택지는 없다.

 

하지만 한명오의 이상하다는 눈길을 보니 의아함을 느꼈다.

 

유상아 씨는 없어 독자.”

 

..?”

 

나갔어. 소식 못 들었어?”

 

제가 먼저 회사 나갔는데 어떻게 압니까.”

 

한명오는 핏하는 미소를 지었다.

 

저런 양반이었나. 잔을 약간 흔들며 한명오가 말했다.

 

“..솔직히 독자씨는 금방 나갈 것 같았는데, 유상아씨는 의외였지.”

 

제가 뭐가 어때서요?”

 

“7시 정각에 딱딱 퇴근하고 회식 도중에 나가고 주말 출근 거부하고.. 더 읊어줘?”

 

나는 멍하니 있었다.

 

그러고보니 유상아 씨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상사에게 아부하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나도 참 이상하게 살았다.

 

스스로의 객관화가 이렇게 중요한가.

 

커피머신에 누가 장난질한 사건 있었잖아. 당직이었던 독자 씨라는 이야기가 있었어.”

 

그렇습니까?”

 

소문도 많았지. 이상하게 독자 씨가 입사한 뒤로 일이 뭔가 일어나더라고.”

 

난 그게 유상아 씨가 했음을 안다.

 

..근데 몇 개는 내가 어떻게 아는 거지.

 

유상아 씨가 말해줬었는지 헷갈린다.

 

물론 독자씨는 아니였지. 독자씨가 그럴 사람은 아니거든.”

 

그래요?”

 

매일 소설보고 쉬려는 사람이 사건을 일으키진 않거든.”

 

난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마치 그게 다른 사람의 뒷담화를 하는 것처럼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분명 나를 욕하는 것인데,

 

내 자신의 이야기를 갈아먹는데 왜 이리도 편안한 것일까.

 

배에 팔짱낀 팔을 덮으며 한명오가 날 바라본다.

 

어쨌건 유상아 씨는 나도 모르겠어. 다른 거 없나? 취직에 관해서도 조언 가능한데.”

 

회사는 다시 들어갈 생각없어요.”

 

꼭 우리 회사만을 한정짓는 건 아닌데.. 하긴, 독자 씨는 다른 일이 어울릴 것 같아.”

 

입사 시험 만점이잖나? 흐뭇하게 날 보며 한명오는 배를 쓰다듬었다.

 

“..배부르십니까?”

 

? ?”

 

계속 배를 만지시는 것 같아서요.”

 

쓰읍.. 아닌 것 같아. 아무것도.”

 

그런가. 참견할 건 없겠지.

 

그런 거겠지.

 

요즘 내 입맛이 까다로워. 좋은 것만 먹어서 그런가봐.”

 

변명하는 그를 내비두고 난 술잔을 내밀었다.

 

잠시 날 살피던 한명오는 바로 미소짓고 술잔을 가볍게 부딪힌다.

 

나중가서도 모를 사실이지만,

 

이 곳에는 속이 썩어 문드러진 세 사람의 유쾌해 보이는 시체들의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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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알바생의 배웅을 받으며 난 한명오를 메고 나가고 있다.

 

가뜩이나 아침에 쓰러졌었지만, 방금 받은 호의를 무시할 수 있나.

 

역시 세상은 돈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내 호의를 사다니.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야.

 

어깨로 들쳐멘 한명오가 계속 캑캑거리지만, 무시하고 택시를 부르던 중이었다.

 

“..무서워.”

뭐가요?”

살려줘.”

..?”

 

곁눈질로 본 한명오가 크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품이 아니다. 바로 앞쪽으로 쳐내듯이 밀고 아슬아슬하게 뒷덜미를 움켜쥔다. 허공에서 넘어지려다 간신히 잡힌 한명오는 어지러워하다가 곧 주저앉았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한명오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다, 물질적인 모든 것을 뱉기 시작했다.

 

잠시 뒤, 그나마 멀쩡한 눈으로 날 쏘아본다.

 

알코올 토하면서 술도 깬 모양이다.

 

독자씨, 토하면 어떡해?”

 

아닌가.

 

부장님이 하셨습니다.”

농담도 참. 이렇게 멀쩡한데?”

 

그리고 한명오는 자신이 쓰려진 것과 배가 고프다는 이상한 감각으로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명오는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고, 뭘 물어볼 새도 없이 중얼였다.

 

악마가 내 배에 무슨 짓거리를 해둔 것이 분명해..”

 

소름끼치게 절망적이었다. 한순간에 당혹을 깨달았다.

 

그림자에서 악마가 속삭여야 저 정도의 패닉이 올텐데, 무엇이 한명오를 저렇게 공포에 질리게 한 거지?

 

“..부장님?”

아무것도 아니야. ..잠시만, 아무 말도 하지마,”

 

한명오는 주저앉은 채 숨을 헐떡였다. 토사물이 바로 옆에 있는데 저러는 걸 보면 정말로 무언갈 고민하는 것 같다.

 

한명오는 그렇게 흐리멍텅한 눈으로 바닥을 계속 보며 홀린 듯이 말했다.

 

“..아무도 없으니까 말하는 건데, 내가 유상아씨 자전거를 훔친 적이 있어.”

 

궁금하지 않았지만. 나는 한 남자의 고백을 잠자코 들었다.

 

근데도 유상아 씨가 무시해서, 홧김에 찾아갔는데.. 유상아씨 집안이 무시하지 못하는 곳이더라고.”

 

뭔 집안인데요?”

 

“..그냥 이상해. 우리 집안처럼.”

 

글쎼. 이상한 건 한명오 부장 당신이 아닐까.

 

악인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지쳐 보였다.

 

악행도 수고를 들어야 할 수 있는 거랬나.

 

그리고 계속하다 보면 미쳐버리는 거랬나.

 

“..요즘 들어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토사물의 양을 늘릴 뻔했다.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내며 겨우 말해냈다.

 

유상아씨랑 결혼해서요?”

 

“..회사 나간 사람이지만, 부정은 안 하겠네. 근데 그보다는 요즘 딸이 있었으면 좋겠어.”

 

예상치 못한 말이다. 자식이란 건 미혼 남자에게 죽음보다 심오하지 않고 결혼보다도 의미없는 단어일텐데.

 

정말, 내가 사랑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중얼이며 한명오는 일어섰다.

 

괜한 말 많이 했군,”

 

맞습니다.”

 

“..역시 독자씨는 사회생활이 많이 힘들었겠어. 어떻게 살았나?”

 

. 욕먹는 건 익숙하니까.

 

이미 당신네들은 내 벽을 넘지 못하니까?

 

, 여기 돈 받아.”

 

갑자기 쥐어진 돈은 내 기분을 불쾌히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한명오는 한없이 순수한 어조로 말했다.

 

상담비라 쳐둬. 그리고 내 연락처도 있어. 필요하면 불려.”

 

과한 호의는 부담이다. 악의는 사라지고 진심으로 한명오 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누굴까.

 

이 등장인물의 상태를 바꿔저린 존재는 누구인가.

 

독자씨.”

 

?”

 

악마를 조심해.”

 

그리고 떠나가는 날 보는 표정이 얼마나 애뜻하던지.

 

저 양반 정말 왜 저럴까.

 

문득 더 이상 못 볼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누가 이 세상을 이따위로 바꿔둔 걸까.

 

누구야, 악마인가?

 

모른다.

 

어차피 모두가 죽은 세상에서 그런 걸 따질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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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고 난 한명오가 쥐어준 종이 쪼가리를 보았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 0과 1로 이루어진 그것.

 

돈이다.

 

멍하니 보다 대충 바닥에 흘려 던졌다.

 

그리고 주저앉는다.

 

“..흐으으윽.”

 

한명오가 그러했듯, 내 속에 악마가 있는 것 같다.

 

내 죄를 따지고 악몽을 이어가게 해주는 무언가.

 

책임없는 죄책감과 목을 옥좨어오는 절망이 나를 난도질한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속에 있는 건 기나긴 공허뿐이었다.

 

아침에 있던 일을 되돌이킨다.

 

즐거웠지, 웃었지.

 

위안이 되었지. 근데.

 

..왜 이리 추억처럼 느껴지는 걸까.

 

방금전의 일도 아닌, 그 이상의 행복을 바라는 것도 아닌.

 

그저 간직하고픈 일로 남기길 원하는 이 감정은 뭘까.

 

왜 그 사람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 확신하는 걸까.

 

알 수 없다. 내가 미쳐버린 건 꽤 되었는데,

 

..난 왜이 리 모든 것을 피해버리는 걸까.

 

가슴이 답답했다. 아렸다. 상처받은 듯 따끔거렸다.

 

그래서 나는 가슴의 응어리를 펑펑 울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이다.

 

요즘 잠을 자지 않는다.

 

잠에 들때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그 꿈을 기억할 때마다 온몸이 끊어질 것만 같다.

 

알면 안되는 것을 보고 대가를 지불한 것처럼.

 

술을 마셔도, 폐와 목구멍을 태우며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담배를 피워봐도.

 

그 무엇도 내게 위안이 되지 않는다. 고통을 없애주지 못한다.

 

내 원초적 고통은 다른 이를 죽여야만 해소되는 것일까.

 

모르겠다. 내가 멍청한 것인지.

 

그냥 생각 자체를 포기하려고 한다.

 

그렇게 멍하니 있던 그때, 눈에 핸드폰이 들어온다.

 

난 안다. 작가. 작가는 있다. 근데 소설은 어디있는 것일까.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소설을 찾아볼까.

 

적어도 저걸 잡는 즉시 난 필사적으로 그 소설 제목을 쳐보리라.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매우 유혹적이지만, 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그런 건 관심 없다.

 

난 현재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도, 미래도 그 굴레의 반복을 끊어내서라도

 

...

 

개소리다.

 

장담컨대, 난 언제까지 병신으로써 존재할 것이다.

 

내 인생은 원래 그러했으니, 좀 더 그래도 이상할 거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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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창문에 기어들어 온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5.

 

고작 3시간밖에 안 흘렸다.

 

하지만 난 몇 백번을 죽고 살았다.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린 것처럼.

 

벗어나고 싶지만 일어서기도 두렵기에 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제 4의 벽도 없이. 고고하지도 못하게 시선이 죽은 주제에.

 

그것이 옳다고 믿으며 난 혼자인 채 존재했다.

 

그때 무언가 꿈틀거렸다.

 

굴려다니는 소주병을 잘못 보았나 싶어서 자세히 보았다.

 

-꿈틀

 

바닥에서 기어다니는 어두운 형체가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존재들.

 

공포스러우면서도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존재.

 

햇살에 나아가면 죽어버리는 어둠이 내게 시선을 구걸한다.

 

제발 봐달라고, 살려달라고..

 

이제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그것들이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나와 세상이 연결하는 실은 끊어진 지 오래다.

 

난 내 자신조차 돌아보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순간적으로 가슴에 분노가 차올랐다.

 

꺼져..!”

 

모두 사라져, 저리 가. 너희가 누군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

 

애초에 너희만으로 난 살아갈 수 없어. 그러니까..”

 

제발.. 내 인생에서 사라져.”


그것들은 어둠에서 나오려다, 멈춰버렸다.


시선이 느껴진다. 천 년의 시선, 늙은 시선, 반복되는 시선,


내 속에 숨어있던 시선.

 

그러자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원래 없던 것 마냥, 나조차도 어색할 정도로.

 

내 세상의 모든 것은 죽어버렸다.

 

난 한참동안 없어진 것들을 생각없이 보았다.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차올라있었고,

 

나는 그만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이불을 덮었다. 그것들이 누구 때문에 생긴 것들인지는 몰라도,

 

모두 죽어버리니 편해졌다. 오랜만에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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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고 한참을 멍 때렸다.

 

할 게 없어 입술을 들춰 이빨을 내보이기도 하고 수염도 더듬더듬 깎다, 그것을 들었다.

 

묵직하고 공포가 약간 서리는 칼을 들었다.

 

거진 한 달 만이다. 이제는 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너무 아파서 화장실에 주저앉고 서둘려 손목을 지혈했었다.

 

지금은 목이다.

 

나는 쑤셔넣을 위치를 찾기위해 화장실로 갔다.

 

피 비린내를 기억해내며, 거울을 보며 목을 더듬는다.

 

단번에.. 한 번에..”


취기에 섞인 말을  중얼이며, 되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스스로 짚어댔다.

 

그렇게 쳐다보는 거울에서 난 누군가를 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


술에 취한 그대로 확김에 무기를 꺼낸 악마.

 

그 손에 들린 칼도 보았고, 내 얼굴을 보았다.


그게 내 앞에 있다. 어머니를 죽이려고 몇 번이고 칼을 꺼내들던 아버지가 거울 속으로 떠오른다.

 

혐오감과 함께 난 내 목숨이 구속되버린 걸 알았다.

 

가장 용기 있었던 때가 내 절망이었다.

 

한명오 씨의 말을 생각했다.

 

만약에, 나도 자식을 가진다면 어떻게 해줄까.

 

사랑을 줄까. 아니다. 난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다.

 

아마 사랑대신 방치로 아이를 키우지 않을까.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처럼.

 

내가 만난 악인조차 나보다는 선량한 존재였다.

 

이후 아버지를 마주하고는 나는 칼을 내 몸에 대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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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난 술을 끊었다.

 

의지를 가진 게 아니다. 체념과 공허가 그걸 도왔다.

 

나에게서 무언가 계속 빠져나간다. 그럴수록 나는 공허해진다.

 

그것 만으로도 힘들기에,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의문을 가지지도 않았다. 중간에 누락된 것도 돌아보지 않았고, 괴이한 걸 고치지도 않았다.


그저 그리 있었다.


자살로 날 편하게 하는 것도, 취하며 나를 달래는 것도, 병원에서 내 병을 고치는 것도, 사람을 만나 날 웃기게 하는 것도,

 

다 부질없음을 안다. 그저 시선만이 있을 뿐이다.

 

난 내 생각을 잃었다.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하며, 대가로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삶은 고통이기에. 이를 감내하며 사는 것도 내 의무일 것이다.

 

이 세계는 이제 내가 보지 않아도 알아서 살아가고 이야기한다. 내 시선은 곧 해석이고 생명이었으나 내 눈은 죽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살아있는 육신은 석상처럼 가만히 둔다.

 

그렇게 있다.

 

그렇게 있다.

 

죽어버리고 싶다.

 

이게 내 인생에 걸맞는 엔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