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로 작업하였습니다. 검수는 하고있지만 놓친 오타가 있을 수도 있으니 찾으신다면 알려주세요.〕 


◀ 이전화


주말의 저녁 식탁일 터인데도 굉장히 조용했다. 분명 4년 전, 버스 전복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만해도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모든 것이 오빠의 빈 자리로부터 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린 세연은 밥을 깨작거렸다. 사고 이후 혼수상태에 빠진 오빠를 떠올리며 세연은 이 어색한 적막을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오빠 보러 갈 시간 있어?"

"...난 도저히 제정신으론 못 보겠더라."

세연의 엄마가 먼저 대답했다. 세연의 아빠는 잠시 휴대폰을 보더니 시간은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보니 난 오랫동안 못 봤다. 다음에 한 번 시간 맞춰볼테니 같이 가자. ...그, 좀 어떻든?"

"응... 여전해. 살은 빠지는 모양이던데."

"...그놈이 빠질 살이 어딨다고."

세연의 아빠가 한숨을 푹 쉬었다. 오빠의 빈 자리는 꽤나 컸다. 이 가족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검도를 배웠던 오빠는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 올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미래가 보장된, 고속도로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갑자기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겨우 하루조차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응. 그럼 다음 휴일엔 방문 예약 해둘게."

"알았다."

세연은 자신의 식기를 치운 뒤에 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4년. 언제 돌아온다는 약속도 없는 오빠가 그저 미울 뿐이었다.




여관에서 나온 유리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기를 몇 분 정도, 여관주인이 지나가더니 말을 걸었다.

"아가씨, 뭐 해? 지나가는 새가 싸는 똥이라도 받아먹으려고? 차라리 음식을 시켜. 서비스로 줄테니까."

"...아, 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생각할 게 좀..."

"그런가. 무슨 걱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라고."

유리나는 감사를 표하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곧 여관에서 카이가 나오며 오늘은 뭘 할거냐고 물었다. 캐릭터가 생성된 후 게임시간으로 48시간은 마을에서 못 나가는 탓에 마을 안에서 해야할 것들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유리나는 이미 정한 곳이 있었다.

"마을회관에 갈 거야."

"거긴 왜?"

"음, 알아볼게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유리나는 일어서서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미 여관주인으로부터 마을회관의 위치는 알아둔 상태였다.




"여기가 기록보관서고입니다. 바르바의 역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지요."

직원이 안내에 유리나는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종이와 양피지의 냄새가 가득했다. 질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양피지들을 죽 둘러보던 유리나가 지켜보던 직원에게 말했다.

"그, 옛날에 크라켄이 왔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요."

"크라켄 말입니까? 그거라면 분명.."

직원이 안내하는 곳으로 가자 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듯한 느낌으로 보존되어 있는 양피지가 있었다.

"이것입니다. 이 마을에서 일어난 영웅적인 이야기라 꽤 중요한 처리가 되어있습니다."

양피지의 제목이 '한 이름 모를 여행객이 마을을 구하다'라는 것을 보고는 유리나가 직원을 바라보았다.

"이 이름모를 여행객..은.."

"안타깝게도 크라켄의 소문만을 듣고 바로 달려온 뒤 토벌에 성공하고는 함께 죽어버린 탓에, 그 누구도 이름을 듣지 못했습니다. 단지 거기에 묘사된 것처럼, 보랏빛의 머리카락에 매우 화려한 마법과 특이한 검을 사용했고, 굉장한 미인이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며 유리나는 기록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눈 앞에 동영상이 오버랩이 되기 시작했다.




크라켄이 마을에 덮쳐온 지 벌써 6일째였다. 우리가 기르던 가축들도 모두 잡아먹혔고, 자칫하면 이웃에 살던 사람이 잡혀가기도 했다. 이 끔찍한 지옥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여행객이 우리가 숨어있던 건물의 문을 두드리고는 들어왔다.

"크라켄이 있다고 들었는데."

"예. 놈은 낮과 새벽 시간대에 포식을 하고는 잠을 잡니다. 아침과 밤이 저희가 도망칠 시간인 셈이지요. 하지만 그 동안에도 누군가가 잡아먹혀갑니다."

"내가 처치해주지. 해안가로 가면 되나?"

그렇게 말하고 여행객은 건물 밖으로 나가버렸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법이 작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이 대낮처럼 밝아졌고, 여행객과 거대한 크라켄이 싸우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싸움은 워낙 격렬해 모두 숨어있던 집에서 뛰쳐나와 산 기슭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어리와 크라켄의 머리 위에서 얼음의 송곳이 만들어져 떨어져내리고 그 위로 번개가 작렬했다. 마치 신화 속의 전투를 보며 우리는 말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5일 밤낮을 싸운 뒤에 결국 기력이 다 한 크라켄의 머리에 늘씬한 모양의 검을 꽂아넣은 채 여행객의 승리로 전투는 끝났다. 하지만 기력이 다 한 것은 여행객도 마찬가지였는지, 쓰러지는 크라켄의 위에서 도망치지도 못 한 채 함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결국 우리는 우리를 구한 여행객의 얼굴도 이름조차 모른 채였다.




영상이 사라지고 난 뒤에 직원이 다가왔다.

"저희는 어쩌면 이 여행객이 13인의 영웅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곤 합니다."

"13인의 영웅이요?"

"네. 한 때 이 대륙에 거대한 마가 들끓었고, 그것을 종식시킨 13인의 영웅입니다. 용사와 성녀를 중심으로 여러 직업의 최강자들이 모여 마를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그 이후에 모두 흩어져 대륙 곳곳에서 모습을 감췄다고 들었습니다."

분명 이 정도의 마법실력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며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나는 곰곰히 생각하고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수도 있겠네요. 그럼 크라켄은 확실히 토벌이 된 거죠?"

"네. 그 이후로 대륙에서 크라켄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학자들도 크라켄은 이 때 사망한 것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저희의 자랑인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저희도 감사하죠."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유리나와 카이는 마을회관에서 떠났다. 마을회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카이가 말을 걸어왔다.

"꼬마 때문이야?"

"음, 뭐 그런 것도 있고. 그냥 좀 안쓰러워서."

"뭐가?"

"가족이 없는 아이에다가, 피는 안 이어졌지만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아저씨의 사이가."

"...너..."

"아마 아저씨가 느끼는 감정이랑은 다르겠지만, 나도 가족이 집에 안 돌아오는 느낌은 잘 알아."

카이는 조용히 유리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분명 불과 몇 시간 전에 게임과 현실을 잘 구분하라고 이야기를 해줬건만, 유리나는 아직도 이곳을 또 하나의 세계로서 생각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으니까 말이야? 미리 사과한다? 미안?"

"...뭐 됐어. 너도 참 가끔 보면 은근히 고집이 세다니까."

유리나는 헤헤 웃으며 걸어나갔다. 방향이 선착장인 것을 보며 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마을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원하는 퀘스트에나 원 없이 어울려주겠다고 생각하며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멀찍이서 멜로디가 보일 때 즈음, 유리나가 손을 흔들며 멜로디를 불렀다.

"멜.."

유리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멜로디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물 속에 빠져버린 탓이었다. 선착장이라고 해도 배가 들어올 정도로 수심이 깊은 곳이었다. 카이가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에 유리나는 이미 멜로디가 떨어진 곳으로 달려나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니 그보다 쟤 수영 스킬 없을텐데?

카이의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마을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누구!! 수영할 줄 아는 사람!!! 사람이 빠졌다!!"




물속은 차가웠다. 유리나는 용기를 내서 눈을 떴지만 약간 어두운 느낌에 제법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저 밑에 멜로디가 가라앉는 모습이 보이자마자 유리나는 어떻게든 몸부림을 쳐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고 있자 눈 앞에서 수영스킬을 배웠다며 알림이 떴다. 알림을 치워버리고는 수영스킬을 발동시키자 몸이 멋대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멜로디의 양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넣고는 위로 건져올리기 시작했다. 중간쯤 올라갔을 때 숨이 부족하다는 경고음과 동시에 생명력이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시야 한 쪽에서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생명력에 의해 유리나의 마음에 조급함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좀 만 더. 조금만 더 가면. 제발. 아무나. 도와줘.

멜로디의 겨드랑이에 넣었던 팔 중 한 쪽을 빼서 수면 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발 누군가 잡아주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하지만 그 손을 맞잡는 누군가는 없었다. 절망의 빛이 유리나의 눈동자에 깃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손가락에 무언가가 걸렸다. 마치 그물 같은 감촉의... 그물?

유리나는 자신의 손이 잡은 것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그물이었다. 생명력은 이제 곧 다 떨어지지만, 팔을 휘두를 정도의 힘은 남아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물이 당겨지며 몸이 해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맙다."

여관주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유리나는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멜로디는 아직도 유리나의 옆 침대에 누워서 곤히 자고 있었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탓이었다. 유리나도 선착장에서 끌어올려지고 난 뒤에 기력이 다해서 여관까지 끌려와서 강제로 침대에 눕혀진 참이었다.

"아니에요. 그보다 멜로디는요?"

"대응이 빨라서 살았어.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어찌 됐을지. 정말이지 끔찍하군."

"뭐, 저도 죽을 뻔 했지만요."

"...정말 고마워. 여관비는 안 받을테니 편히 쉬다가 가줘."

"아니, 그럴수는.."

"마음 속으로 멋대로 정한 거지만 딸의 은인이야. 이 정도는 하게 해줘."

그렇게까지 말하니 유리나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여관주인의 결연한 표정을 보니 더 이상 말리면 오히려 실례인 것 같았다.

"...알겠어요."

"그럼 나는 다시 일하러 가봐야하니, 혹시라도 꼬맹이가 깨어나면..."

"네. 제가 잘 타일러둘게요."

여관주인이 방에서 나갔다. 그와 교대하듯이 카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여관주인이 나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멜로디가 눈을 뜨고는 유리나를 노려보았다.

"...누가 누굴 타이른다고."

"깨어있었구나?"

멜로디가 침대에서 일어서려 하자 카이가 막았다. 비키라며 으르렁거리는 멜로디의 모습은 거의 한 마리의 맹수같은 모습이었다.

"비켜. 난 바다를 지켜봐야하는 의무가..."

"그 크라켄. 죽었다더라."

유리나가 황급히 말했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는지, 멜로디의 표정이 허무함에 일그러졌다.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먼 옛날에, 한 사람이 5일 밤낮을 싸워서 크라켄과 함께 죽었어."

"...그럴리가. 내가 녀석의 머리에 검을 꽂아넣고... 거기서 내 의식은 끊겼는데... 제대로 마무리를 못 냈는데..."

"둘 다 기력이 안 남아서 쓰러졌다던데."

"......"

유리나는 조용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에 이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아이는 자신이 누구라고 대답할까?

"말해줘. 넌 대체, 누구야?"

그 물음에 멜로디는 매우 날카로운 눈으로 유리나를 마주보았다. 이윽고 열린 멜로디의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몰라. 기억이 없으니까. 하지만 멜로디가 되기 이전에는 바이올렛으로서 전 세계를 모험하며 용사와 함께 세상을 구했어. 하지만 모두 흩어지거나, 죽었어. 내 연인이었던 진 역시 죽고 말아서, 나는 죽을 곳을 찾고 있었고. 그러던 중에 크라켄에 대한 소식을 듣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마수를 처치하다가, 죽었지."

멜로디는 길게 한 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크라켄도 이미 죽어있다고? 내가 이미 옛날에 처리해서? 그럼 대체 난 왜 여기에 있는거야? 내가 있어야할 의미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있을 필요도 없는데."

대체 자신을 왜 살린 거냐며, 멜로디는 분하다는 얼굴로 유리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진이라는 사람이 너에게 중요한 사람이란 건 알겠는데, 그 사람이 죽은 건 어떻게 알아?"

"그야 바이올렛일 때 죽은 모습을 내가 똑똑히 봤으니까..!"

그 때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이 멜로디가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었다. 그것을 이미 유리나도 알고 있었던 듯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 네가 바이올렛으로서 죽고 멜로디로 다시 살아났다면, 그 진이란 사람도 어딘가에서 살아있지 않을까?"

"..."

멜로디가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11살의 표정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 결론이 난 듯, 고개를 들고는 유리나를 바라보았다.

"당신들도, 이방인이지? 이 마을은 언제 떠날거야?"

"아마 내일? 수도로 떠날거야."

"...그러고보니 이름."

"아, 난 유리나야. 저기 있는 애는.."

"...저 멍청한 녀석의 이름은 필요없어. 그럼 난 내 방에 갈게. 걱정 마. 얌전히 있을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멜로디는 방 문을 열고는 나가버렸다. 이름을 알려줄 기회마저 박탈당한 카이는 저 꼬맹이 대체 뭐냐고 씩씩댔을 뿐이었다.


=-=-=-=-=-=-=-=-=-=-=-=-=-=-=-=-=-=-=-=-=


이상한 모습의 괴물들을 무찌른 후에 휴식을 취하고, 간단한 식사를 먹고는 다시 이동. 이동 중에 괴물들을 마주치면 또 싸우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동하기를 계속 반복했다. 사람들이 사는 곳은 대부분이 작은 마을같은 느낌이어서 작은 곳은 겨우 몇 집만이 있는 막 개척하기 시작한 개척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

그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고민거리를 해결하고, 다시 모험에 나선다. 처음에는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몰라서 바이올렛은 내심 걱정을 많이 했지만, 함께 다니는 12명과 익숙해지고 나니 조금씩 무리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갓을 쓰고 무복을 입은 사내와 친밀한 관계가 된 것은 어찌보면 좋은 일이었다. 사내의 이름은 블레이드. 하지만 본인은 스스로를 진이라고 지칭했으며, 모두에게도 자신을 진이라 불러달라 부탁했었다.

"이오. 괜찮아?"

"응. 조금 지치긴 했는데, 아직 마법을 쓸 정신은 남아있어."

"아마 앞으로 2시간 정도면 마을이 있을것 같다더라."

"그렇구나. 이번엔 어느 정도 크기래?"

"음, 생각보단 크다고 들은 것 같아."

그런가, 하고 생각하며 바이올렛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은 입술을 살짝 포개고는 부드러운 키스를 했다. 입술을 뗀 뒤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걱정할 것 없다며 그녀를 위로했다.

마을까지 가는 동안 평소보다 좀 더 많은 빈도로 괴물들을 상대해야만 했고, 일행들은 지칠대로 지쳤다. 그리고 마을을 앞에 두고 그들은 허망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미안. 그 마을이 괴물들의 마을이었을 줄이야."

용사의 말에 모두가 무너져내렸다. 겨우 편히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딱 보아도 괴물들은 동물이나 사람이었던 부위들을 하나씩 들고는 그것을 뜯어먹고 있었다. 사이 좋게 지내자고 다가갔다가는 그대로 습격당해 괴물의 밥이 되어버릴 것이었다.

"...처리해야지."

누군가가 말했고, 모두 무기를 들었다. 겨우 모험을 시작한지 몇달 지나지 않았지만, 촌락 규모의 괴물들을 죽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먼저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법이 먼저 발동되었다. 하늘에서 불덩이가, 땅에서 나무와 흙이, 괴물들의 머리 위에서 섬광이, 그리고 멀리 있어서 마법의 범위에 안 들어오는 괴물들에게는 알수없는 보랏빛 마법이 발동되었다. 보랏빛 마법에 적중한 괴물들의 반응은 각자 달랐다. 옆에 있는 동족을 갑자기 죽이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갑자기 쓰러져서는 거품을 물며 경련하는 녀석도 있었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정신 사납게 뛰어다니는 녀석도 있었다. 비명을 지르던 괴물이 다른 괴물의 손에 죽었다. 모든 괴물들이 이변을 눈치챘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땅에서 자라난 나무와 흙들이 괴물들의 몸을 꿰뚫고, 서로를 떨어뜨려놓은 곳에, 불덩이가 작렬해 땅을 크게 파고, 그 사이로 화살이 날아가 당황하고 있는 괴물들의 눈을 꿰뚫었다. 비명을 지르는 괴물들을 향해 달려든 한 여성이 휘두르는 2개의 단검에 괴물들이 순식간에 조각난다.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진 역시 괴물들 한 가운데로 달려들어 늘씬하게 곧게 뻗은 검 두 자루를 휘두르며 괴물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에게 일본도냐고 물었을 때, 그가 말하기로는 일본도보다는 조선환도에 가까운 형태라고 대답했었지만, 기억이 없는 바이올렛은 그것들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마법을 난사한 마법사용자들이 두통을 호소하며 주저앉자 성녀가 다가와 결계를 펼쳤다. 이것으로 왠만한 괴물들은 무방비한 상태의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안전지대가 형성되자 그들을 지켜주던 용사 역시 달려들어 순백색 검을 휘두르며 괴물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순백색이 진홍색이 될 때까지, 그의 검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


유리나는 마을여관 1층의 한 식탁에 홀로 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현실에서는 일요일 새벽 5시가 되어가고 있었기에 저쪽에선 할 수 있는게 없어서 계속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문제는 여기도 심야시간이라 문이 열린 가게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까 멜로디를 구한 뒤에 잃은 생명력과 체력을 채우기 위해 요양을 하면서 수영을 비롯한 여러 스킬도 이미 확인이 끝난 터라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뭐야, 아가씨. 너무 많이 자서 잠이 안 오나? 같이 있던 형씨는?"

"아, 심야시간동안 바깥에서 사냥하러 간다고 일찍 마을 밖으로 나갔어요."

"심야시간에 사냥을 하러 나간다니, 제법 레벨이 있는 형씨였나본데."

"네. 아마 20 정도 된다고 들었어요."

"그 정도라면 이 근처에서 죽을 리는 없겠어.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그러면서 여관주인은 '명심해둬, 아가씨. 절대 자만하지 말 것. 그게 생존의 첫 걸음이야.'라며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식탁 위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노란빛깔의 스프와 기다란 호밀빵과 야채샐러드였다.

"...저, 음식은 안 시켰는데요?"

"서비스야 서비스. 몸 상태가 어떤지 몰라서 일단 환자식으로 준비해놨어. 몸에 무리는 안 가겠지. 우리 꼬맹이는 아까 방에 틀어박혀서는 고기요리를 요청하더군. 정말이지 활기찬 녀석이야."

곤란하다는 듯이 웃어보였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기뻐보이는 미소였다. 유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어주었다.

"그 정도로 건강하면 문제는 없겠네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저도 얼른 기운 차릴게요."

"오. 부탁한다고."

휘적휘적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여관주인을 본 뒤에 유리나는 빵을 찢어 스프에 찍어먹었다. 옥수수의 풍미가 느껴지는 스프에는 따뜻한 감정이 듬뿍 들어있었다. 여관주인이 준비해준 음식들을 다 먹고 치우고 있자니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동이 트는 모습이 보였다. 새해 첫 날에나 동이 트는 모습을 보러 갔던 기억이 나지만, 그것보다 3배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은 현실보다 조금 빠를 뿐인데도 왠지 모르게 신비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있으면 다들 문을 열거야. 오늘 떠난댔지?"

"네. 저녁에 떠날 것 같아요."

"그런가. 그럼 가기 전에 한 번 들리면 한 번 더 대접하기로 하지."

"아하하, 마음만 받을게요. 아마 바쁠 것 같아요."

그런가, 하며 여관주인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카이가 여관에 돌아와서 다음 일정을 확인하는 사이에 유리나는 여관주인에게 신경써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있었다. 대충 해야할 일을 다 정리한 카이가 유리나에게 슬슬 가자고 말했다.

"꼬맹이라도 불러줄까?"

"쉬고 있으면 그냥 내버려두세요. 괜히 깨우기도 미안하고요."

"그런가. 잘 가라. 정말 고마웠어."

꾸벅 인사를 하고 유리나는 카이를 졸졸 따라가며 일정을 물어보았다. 무기점부터 시작해서 여러 상점들을 돌며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한 상점들을 주르륵 나열하는 카이의 모습에 유리나는 안색이 새하얘졌다.

"뭐, 저녁때에 맞춰서 준비는 끝날테니까 말이야."

그 후로는 유리나는 카이를 따라다니며 쇼핑을 시작했다. 무기점에서는 먼저 단검 한 자루와 가벼운 단궁 하나에 화살통과 화살 세 뭉치를 샀다. 그 옆의 방어구점에서는 동작에 크게 방해되지 않는 장비들을 찾았다. 몇 번을 고심한 끝에 가죽장화와 가죽장갑, 그리고 철제 가슴보호대를 구입했다. 겉보기에는 가슴만 가리는 짧은 조끼같은 느낌이었다.

괜히 무거운 철제를 사는건 좀 그렇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카이의 설명에 따르면 고블린이나 오크같은 인간형 몬스터들은 종종 무기를 써서 심장을 공격해오기에 초반에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철제가슴보호대를 사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 말에 유리나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정육점에서 말린 육포같은 보존식들을 사고, 의복점에서 몸을 보호하거나 비가 올 때 몸을 가릴 망토와 로브를 보고, 약방에서 포션같은 회복용품들을 샀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클라리스가 있는 잡화도구점이었다. 그곳에서 부싯돌과 이것저것 캠핑도구들을 구입하자 클라리스가 묘한 표정으로 유리나를 바라보았다.

"사랑의 도피~?"

"아, 아니에요.."

"아하하하. 알아. 알아. 이방인이니까, 어차피 모험을 떠나는 거잖아? 최근 대륙이 좀 흉흉하단 소문도 돌고 있고. 그래서 이방인들이 계속 오는 거라나 뭐라나."

"그런가요.."

"응. 마왕이 부활했단 소리는 못 들었지만, 이 정도로 마물이 나온다는 건 마왕부활의 징조라던가. 누군가 그랬던 거 같아."

뭐, 몸 성히 잘 가라구, 라면서 클라리스가 밝게 웃었다.

"맞아. 이거 가져가. 덤이야. 유리나는 꽤 맘에 들었으니까 선물로 줄게."

클라리스가 건넨 것은 새의 깃털 같은 것이었다. 만져보니 꽤 빳빳한 감촉이었다.

"응, 그건 긴급탈출용 아이템이야. 던전 같은 곳에서 갇혔을때 마지막으로 들른 마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어. 근데 가끔 어느 지역에서는 사용이 안 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고."

클라리스의 설명에 유리나는 감사하다며 깃털을 챙겨두었다. 클라리스가 카이도 부르면서 그에게도 같은 것을 주었다.

"우리 유리나, 잘 부탁한다고, 소년."

잡화도구점에서 나오고 시간을 확인하니 유리나가 게임을 시작한지 게임시간으로 48시간이 곧 지나갈 예정이었다. 이대로 마을 문으로 나서면 딱 시간이 맞을 듯 했다. 어느덧 해가 사라져가면서 마을 곳곳에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어때?"

카이가 유리나의 모습을 조용히 살피며 물었다. 유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많이 생략된 질문이었지만, 어차피 의미는 단 하나이리라.

"최고야."

"그거 다행이네."




멜로디가 천천히 눈을 떴다. 창 밖이 어두운 것을 확인한 멜로디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저씨! 왜 안 깨웠어!!"

"어? 그야 잘 자고 있는데 미안해서..."

"대머리!! 바보!!"

대머리는 상관없잖아? 라며 소리치는 여관주인을 뒤로 하고 멜로디는 자신의 방에서 적당히 챙겨갈 것들만 빠르게 챙겼다. 다행인 것은 잠들기 전에 미리 준비해놨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많은 시간을 쓰지 않고도 떠날 채비가 갖추어졌다. 그 모습을 본 여관주인이 입을 열었다.

"너도 가려고?"

"어차피 혼자 간다고 하면 절대 안 보낼 거잖아."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유리나를 따라갈거야. 그런 형태면 아저씨도 이해해 주겠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그래야 해. 그래서 어디로 간대?"

여관주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안 물어봤는데."

"...그럼 얼른 뛰어야겠네. 관문을 넘어가버리면 그대로 놓쳐버릴 테니까."

그 동안 고마웠어, 라며 멜로디는 손가락을 팅겨 동전을 여관주인에게 날렸다. 핑그르르 날아오던 동전을 허공에서 낚아챈 여관주인은 저 멀리 급하게 달려가고 있는 멜로디의 등을 바라보며 허허 웃었다.

"잘 부탁한다고, 아가씨."

그리고는 손을 펼쳐 멜로디가 주고 간 동전을 확인했다. 그는 눈을 부라리면서 자신이 본 것이 진짜인지 확인했다. 재차 동전을 확인한 여관주인은 소리를 질렀다.

"5플 짜리 동전이라고오오오!!!"




"기다려어어어어!!!"

뒤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맹렬한 외침소리에 관문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막 관문을 통과하던 유리나와 카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소녀의 모습은 둘도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왜... 왜 먼저 가버리는 건데!!!!"

모종의 이유로 하소연을 하며 카이에게 몸을 그대로 부딪히는 멜로디의 모습은 그야말로 육탄전차 못지 않은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머리로 카이의 배를 가격한 탓에 카이가 배를 부여잡고 그대로 쓰러졌다.

"ㅇ...왜...나한테..."

"니가 제일 밉상이니까."

간단한 이유였다. 아직 마을을 나간 것이 아니었기에 데미지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충격은 존재했다. 경비병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멜로디에게 다가갔다.

"자, 밤엔 위험하니까 여관에 돌아가는 편이..."

"아저씨도 허락했어. 나 이 사람들이랑 모험을 떠날 거야."

카이도 모르는 말을 선언하며 멜로디가 가슴을 폈다. 어린 탓에 가슴도 없었지만, 발육 도중의 자그마한 언덕이 그 모습을 뽐냈다.

"...그래? 뭐 그런 거라면..."

"좀 더 말리라고!"

카이가 소리쳤지만 경비병들은 여관주인이 허락한 일이라면 괜찮을 것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 멜로디가 유리나의 앞에 섰다.

"이름까지 알려줬는데, 그냥 가버리면 어떻게 해? 동료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어라? 서로 통성명하는 게 동료가 되는 무언가의 의식이었나?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리나는 미안한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미안. 그런 줄 몰랐어. 그,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랑은 이름을 밝히거든. 그러니까 그런 인식은 조금 틀리지 않을까..?"

옳지, 말 잘한다 내 친구.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뿌듯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가? 뭐, 나는 모르겠어.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내 동료뿐이니까.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잘 부탁해, 유리나."

"결국 따라올 거야?"

뜻을 굽히지 않는 멜로디를 보며 유리나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길고 위험한 모험이 될 것이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제 없어. 오히려 진을 찾는 모험에 그 정도 위험 쯤은 별 것도 아니야."

"어이, 그래도 너 직업도 없잖아? 꼬맹이가 위험한 곳에 따라와서 뭘 하겠다는.."

"직업은 마법사야. 뭐, 지금은 아무래도 레벨도 스텟도 초기화되서 약하지만, 레벨만 조금 올려서 스텟만 효율적으로 배분하면 끝날 일이야. 더 문제되는 게 있어?"

카이는 멜로디가 하는 말을 듣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멜로디는 그의 반응을 다르게 해석한 것인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없는 모양이네. 그럼 따라가도 되지? 기대해. 최고의 마법을 보여줄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NPC가 뭐라고 한 거지? 


YOD 에서의 화폐체계


틸. 철화. 1000틸이 모이면 1실이 된다.
실. 은화. 100실이 모이면 1길이 된다.
길. 금화. 100길이 모이면 1플이 된다.
플. 백금화. 10플이 모이면.....? 


각 화폐는 1 , 5 , 10, 25, 50, 100 의 순서로 동전의 크기가 정해집니다.

틸 철화같은 경우에는 100 이후로는 100단위 별로 커집니다.


다음화 준비중...

오타나 잘못된 문장 같은 지적은 환영합니다. 그냥 댓글도 환영합니다.

저런거 안적어도 그냥 읽어주셨어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