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결투표(自決投票)

 

(1) https://arca.live/b/yandere/19195399

(2) https://arca.live/b/yandere/19250159

(3) https://arca.live/b/yandere/19277921

(4) https://arca.live/b/yandere/19314649

(5) https://arca.live/b/yandere/19364216

 

(6) https://arca.live/b/yandere/19402051

(7) https://arca.live/b/yandere/19443306

(8) https://arca.live/b/yandere/19498859

(9) https://arca.live/b/yandere/19550684

(10) https://arca.live/b/yandere/19592379

 

 

0.

 

삐걱.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자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살포시 눈을 감고서 박선정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오늘 규칙 제정이 누구였더라?]

[아, 저에요. 한 바퀴 돌았으니까.]

 

이시연의 목소리, 그리고 뒤따르는 강문희의 목소리.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규칙을 추가해야 할까요?]

[글쎄다…….]

 

박선정은 그녀들에게 퉁명스럽게 답했다.

 

“솔직히 이젠 그다지 상관없을 것 같은데.”

 

어떤 규칙을 제정하든 간에 백은하와 성란, 그 두 탈락자들을 제어할 수는 없다.

 

아무리 치밀하게 세워봐야 자신들의 손발만 묶을 뿐이었다.

 

“뭐, 그냥 애초에 돈이나 번다고 생각해야지. 대충 상식적인 걸로 넣어.”

 

찬성표를 던진 규칙이 제정되면 투입한 카드 한 장당 만 원씩 돈이 들어온다.

 

지금 상황에 있어 규칙 제정이 가지는 의미는 그것뿐이리라.

 

[으음, 그럼 이런 거라든가?]

 

그녀의 말에 박선정은 살짝 실눈을 뜨고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스크린은 손으로만 터치해야 된다.’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는 제약이었다.

다들 불만은 없는지 수긍하는 분위기다.

 

[저기… 카드 투입은 얼마까지 해도 돼?]

 

그런 와중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토해볼 것도 없이 박루미의 것임에 틀림없었다.

 

[글쎄. 은하랑 성란이가 가진 카드가 열 장이니 그 이상은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걔들을 뚫고 카드를 열한 장이나 투입할 방법은 있고?”

[그건 없지만…….]

 

이내 나온 강문희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했다.

어차피 카드가 많다고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일단 걔네들을 뚫을 방법부터 생각해야 우리한테 정확히 몇 장이 필요한지를…….”

[한 장.]

 

일단 다른 이야기부터 확실히 정리하자고 말하려던 박선정이었으나

갑자기 끼어든 이시연에 의해 그 말이 끊기고 만다.

 

[한 장이면 돼.]

“선생님, 내 말이 안 들린 거야? 지금 하나만 써도 나머지를 투입 못하면 쓸모가 없다니까?”

 

설령 카드가 수백 장 있어도 그걸 쓸 수 있느냐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애초에 한 사람에 4장씩 남겨둔다면 서랍에 박혀있을 백이란의 것까지 합쳐 21장이다.

이미 최대한인 11장보다 훨씬 오버다.

 

[아니, 한 장만 빼고 전부 써버려도 된다는 소리란다.]

“…뭐?”

[아, 참고로 전원 합쳐서 한 장만 남아있으면 되니까.]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박선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 장으로 투표를 이길 수 있다.

이시연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쪽에 투명인간이 있는 이상 찬성표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된다.

 

“혹시 저쪽도 카드를 넣을 수 있다는 걸 잊고 있진 않겠지?”

 

하지만 백 번 양보해서 카드를 일고여덟 장 투입한다 쳐도

저쪽이 열 장의 반대표를 던져버린다면 의미가 없다.

 

[물론 기억하고 있지.]

“그럼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어쩌면 이쪽이 다섯 장을 넣고 저쪽은 네 장밖에 넣지 못하게 하는 모종의 전략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찬성표 하나만으로 상대를 뚫어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으리라.

 

지난번에는 성란이 아예 투표 자체가 불가능하던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통했던 것이다.

 

[정확한 방법은 아직은 비밀이야. 새어나가면 곤란하거든.]

“흐음, 선생님은 우리 중에 누가 배신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뭐, 그렇진 않단다. 다만 상세를 알고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신경이 쓰이지 않겠니.]

 

박선정이 퉁명스럽게 말했으나 그녀는 능청스럽게 넘길 뿐이었다.

 

[그 애들이 엄청 방심하지 않으면 힘들거든.]

“그래, 뭐, 일단은 믿어볼게. 허튼 짓이면 어디 두고 봐.”

[결행은… 일단 이틀 뒤라고 생각해둘까.]

 

더 캐물어도 유의미한 답은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박선정은 한숨을 쉬며 조금 물러났다.

 

이틀 뒤에야 탈락자 투표를 할 수 있다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분명 그녀도 나름 생각이 있어서 결정한 기간일 것이다.

 

백이란에게 그렇고 그런 마음을 품고있든 아니든 일단 탈락자 투표가 개시되지 않으면

이시연으로서도 무슨 짓을 할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 그럼… 오늘은 카드를 전부 써도 괜찮은 거지…?]

[그래도 내일 투표를 위해서 한 장씩은 남겨두는 게 좋지 않겠니?]

[알겠어, 선생님…….]

 

박선정 역시 서랍을 열어 네 장의 카드를 꺼낸 뒤 투입구에 차례차례 밀어넣었다.

 

그런데 시간이 딱 걸려버렸는지 네 번째 카드는 도로 밀려난다.

이내 스크린에 떠오른 문자가 변화했다.

 

[찬성] 16

[반대] 0

 

“……뭐,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응? 선정이 언니, 무슨 문제라도 있어?]

 

박선정은 길게 한숨을 빼었다.

 

“나, 방금 시간이 부족해서 세 장밖에 못 넣었거든. 혹시 다섯 장 넣은 사람?”

 

그러나 통화방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런 거였구나.]

 

뒤이어 이시연이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만약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다.

 

─탈락자도 규칙 제정에서 표를 던질 수 있다.

 

이러면 대충 두 가지 사태의 발생을 예측해볼 수 있었다.

 

우선 첫째로 플레이어들에게 꼭 필요한 규칙이 방해로 무산되는 것.

이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다.

 

지금 상황은 박선정도 오히려 규칙을 정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으면 편할 거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탈락자들이 자기 입맛대로 규칙을 추가할 수 있다는 것.

 

물론 이미 탈락한 사람은 규칙 제안자로 선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규칙 제안자의 방에 들어가서 스크린을 조작할 수는 있다.

 

어제만 해도 백은하가 규칙 입력을 이용해 강문희를 놀려대지 않았던가.

 

그때는 규격에 맞지 않는 규칙이라 기각되었을 뿐이지

절대 자격이 없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직 괜찮다.

만약 그 두 사람이 각자 한 명씩 마크해서 투표를 못하게 한다고 해도 3:2로 이쪽이 우위다.

 

그러나 게임이 진행되면 그것이 역전되는 순간이 온다.

 

만약 이 광기가 입법권까지 집어삼킨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박선정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혀를 차곤 통화방을 떠나가는 인물들을 차례차례 지켜볼 뿐이었다.

 

 

1.

 

[…언니, 어쩌실 거예요?]

 

강문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 모인 통화방이 닫히고 거의 바로였다.

 

“어쩔 거냐니?”

[탈락자 투표 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꽤나 진중했다.

그야 투표 때마다 폭탄이 터졌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대체 누구를 탈락시켜야 할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어렵네 이거.”

[저는 그나마 이시연 선생님이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 여우의 이름이 불린 탓에 박선정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하필이면 선생님을?”

[그래도 학생들에게 나름 다정하신 분이시니까요.]

“야, 너 그거 속고 있는 거다? 그거 완전 가면이야.”

[아니, 그래도 여태껏 봐온 걸 생각하면 그럴 사람은…….]

 

너무나 순수한 소꿉친구의 말에 이마를 짚고 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 전에 성란 그년한테도 비슷한 소리했던 거 알지?”

[그, 그건 그렇지만…….]

“이 멍청아. 차라리 그냥 전부 잠재적 적이라고 생각해둬.”

 

그녀는 남을 의심하는 법을 좀 배워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박루미 걔가 나을 수도 있고.”

 

첫날밤 성란이 백이란을 덮친 걸 보고 뚜껑이 열려서 규칙이고 뭐고 그녀에게 덤벼든 여자가 아니던가.

 

백이란에게 음습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오히려 독점하려들다 탈락자 간에 내분이라도 일으켜준다면 환영이다.

 

“하지만 솔직히 박루미는 살려두고 싶은 마음도 크단 말이지.”

[그래요?]

“투명인간이 남아있으면 탈락자들을 상대할 때 훨씬 편해지잖아?”

[확실히 그것도 그러네요.]

 

솔직히 말해서 딜레마에 가까웠다.

 

박루미가 너무 유능했다.

남아있으면 여러 전략을 짜기에 수월해지고

떨어져도 탈락자들 간의 분열을 유도해볼 기회가 생긴다.

 

…사실 후자는 유능하다고 봐도 좋은지는 모르겠다만.

 

“뭐, 제일 확실한 건 내가 탈락해서 그년들을 제압하는 거지만 말이야.”

 

그것은 그다지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아, 그, 그렇네요. 언니 말이 맞아요.]

“……미안. 방금 말은 취소로.”

 

그러나 이윽고 돌아온 강문희의 반응에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이 발언은 그때 백은하가 했던 말과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강문희의 지뢰를 밟고 말았던 것이리라.

 

다른 문제에 정신이 팔려서 그녀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질 않았다.

 

[아, 아뇨! 언니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멍청아. 이럴 때는 불안해지는 게 정상이야.”

[그래도…….]

 

오히려 저쪽이 사과하려는 기세였다.

 

[선정이 언니는 전에 이란이를 포기해주셨잖아요. 그런 사람한테 이런 마음을 품는 건…….]

“…너 진짜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호구 소리 듣고 지낼 텐데.”

 

하지만 자신을 위해 그리 생각해준다는 건

그다지 나쁜 기분이 아니었기에 박선정은 피식 웃었다.

 

“아무튼 걱정이 되는 모양이니 이번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 중에서 골라.”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며 말을 잇는다.

 

“다만 다음번에는 나를 탈락시켜야 해.”

[…어째서인가요?]

“그때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탈락자가 규칙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게 되니까.”

 

여기서 한 사람이 더 탈락한 상황이라면 아슬아슬하긴 해도

머리를 굴리면 일단 대항해볼 수는 있는 단계였다.

 

하지만 탈락자가 네 명이 되면 생존 플레이어와의 비율이 역전된다.

 

그러면 규칙 제정이고 탈락자 투표고 사실상 박살난다고 봐야한다.

 

[네, 알겠어요.]

 

뒤이어 약간 떨떠름하게 수긍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로서도 꽤나 불안할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백은하를 박선정보다도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리라.

 

아무렴 백이란의 여동생인데 그런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겠는가.

그때는 박선정조차도 속아넘어갔다.

 

그런 믿음마저 배신을 당했으니 박선정을 의심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강문희 본인은 ‘불안’이라고 여기는 것 같지만 박선정이 보기에 이건 충분한 의심이었다.

 

뭐, 그래도 남을 의심하는 법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라 다행인가.

 

솔직히 조금은 가슴이 쓰라리기도 했지만

박선정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었다.

 

 

2.

 

어두운 방에서 백이란은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공간.

 

여러 사람의 것이 뒤섞여 마구 질척이던 냄새는 이미 코에 익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전 여덟 시부터 열한 시.

이 시간은 그날의 탈락자 투표를 개시할지 말지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요컨대 이 문란한 생활을 계속 이어나가고자 하는 성란과 백은하는

현재 투표함을 지키고 있는 중이라는 소리기도 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백이란에게 주어진 완전한 휴식의 때.

 

물론 그 두 사람이 한시도 빠짐없이 그와 몸을 겹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때만큼 언제 덮쳐올지 걱정하지 않고 평안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이란아, 잠시 괜찮겠니?”

“선생님?”

 

그러던 중 스르르 문이 열린다.

 

실루엣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방문객이 목소리를 내어 자신을 알렸다.

 

이시연은 안쪽으로 들어오다가 방의 냄새를 맡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애들도 참… 정도를 모르는구나.”

“…냄새가 많이 심하죠?”

 

백이란은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은 다음 손짓하여 그녀를 의자에 앉게 했다.

 

담배 냄새가 다른 음습한 냄새의 틈을 파고들어왔다.

그 냄새가 코를 다시금 환기시키며 후각이 그녀의 희미한 체취를 감지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부탁할 게 좀 있어서.”

“부탁이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백이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욕실 쪽에 좀 문제가 생겨서 도와줬으면 해.”

“정확히 어떤 문제인가요?”

“아, 이게 뭐랄까. 말로 설명하긴 힘든데… 직접 보는 게 훨씬 빠르겠다.”

 

그리 말하며 이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백이란도 그녀를 따랐다.

 

이내 바깥으로 나와 벽을 따라 욕실로 향하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제야 그녀가 무언가 작은 크로스백을 매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 뒤를 따라가며 백이란은 곰곰이 생각에 빠진다.


왜 하필 자신을 부르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남자 손이 필요하다든가 하는 일은 아닐 테다.

그런 건 최소한 평균 이상의 근력을 가진 남자에게나 부탁할 일이겠지.

 

뭔가 치료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나 싶기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런 일이었다면 누가 다쳤으니 와달라고만 해도 되었을 것이다.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으니 일단 따라가기로 한 백이란이었다.

 

딱히 경계심은 없었다.

탈락자들과 다르게 이시연은 규칙에 제약을 받는 플레이어니까.

 

폭력을 휘두를 수도 덮칠 수도 없는 상대에게 경계를 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적어도 백이란이 생각하기에는 그러했다.

 

이시연이 패널에 손을 얹자 욕실의 문이 열렸다.

 

안쪽으로 들어서면 작게 탈의실이 있고, 그 너머에 문이 하나 더 있어 욕실과 이어지는 구조였다.

 

“저기, 누구 있는 거 같은데요?”

“괜찮아. 용건이 있는 건 탈의실 쪽이니까.”

 

그 안쪽의 문에 사용중 팻말이 걸려있고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려오는 통에 백이란은 당황했다.

 

30분 정도 뒤면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점심시간이 다가오니 그 전에 씻어두고 가려는 것일까.

 

하지만 이시연은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를 안쪽으로 불러들였다.

 

“지금 씻고 있는 거 문희란다.”

“그, 그래요…?”

 

그러다가 문득 이시연이 그런 말을 해오기에 백이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곳에 있기가 영 불편했다.

 

아무리 문을 사이에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자가 안쪽에서 씻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도 자신의 연인이라고 하니 더더욱.

 

“그래서 제가 필요한 일이라는 게 뭔가요?”

“아, 그렇지. 이제 말해줄게.”

 

얼른 할 일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백이란은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보더니 이시연은 씨익 웃으며 벽 한쪽에 놓인 바구니로 손을 뻗었다.

 

“선생님, 뭐하시는 거예요?!”

“흠. 문희는 이런 속옷을 입는구나.”

“얼른 내려놓으세요!”

 

주최 측은 그들을 납치하며 환자복과 비슷한 복장을 입혔지만

각자의 속옷이나 이시연의 비녀 같은 자잘한 것들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이시연이 남친이 보기에는 어떠냐며 강문희의 팬티를 들어올린 상황에는

그런 걸 깊게 생각할 틈 따위가 없었다.

 

그저 얼굴을 붉히고 당황하며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이시연은 그 모습에 귀엽다는 듯 쿡쿡 웃더니 다시 그것을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자, 그러면 이란아. 질문을 좀 해볼게.”

 

그러고는 이번에는 바구니에서 새하얀 상하의를 꺼내더니 그것을 뭉쳐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점심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아니?”

“아마… 30분쯤이요.”

 

나오기 전에 본 시계를 떠올려보면 얼추 그 정도였다.

 

“그리고 점심식사는 무조건 참석인 것도 알지?”

“그거야, 뭐, 규칙 정할 때 저도 있었으니까요.”

 

그 규칙을 정한 건 성란이 탈락하기 전이었으니 백이란도 당연히 통화방에 있었다.

 

“참석하지 않으면 저번에 루미가 당했던 걸 생각했을 때

엄청난 고통을 받거나 피를 줄줄 흘리거나 그런 패널티가 있지 않겠니.”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더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박루미는 팔로 폭력을 휘두르려 했기에 팔이 박살났다.

 

만약 전신에 모두 적용되는 그 규칙을 어긴다면 신체가 갈가리 찢길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애초에 강문희의 옷은 왜 챙긴 것이란 말인가?

 

“……잠깐.”

 

그러다가 백이란의 뇌가 무언가 결론을 도출했다.

규칙. 점심식사. 복장.

 

“선생님…?”

“역시 이란이는 머리가 좋구나. 알아차린 모양이네.”

 

시설은 홀을 중심으로 하여 방들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어느 방이든 나가려면 홀로 가야만 한다.

그리고 홀에서는 반드시 지급받은 의복을 착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시연이 그녀의 옷을 가져간다면 강문희는 욕실을 나올 수 없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시는 건가요…?”

“그건 네가 신경쓸 게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니?”

 

그것은 곧 그녀가 점심식사에 참석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얼마나 큰 패널티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그 규칙 위반을 피할 수 없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저는… 선생님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니? 그거 참 고마운 말이구나.”

 

이시연은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핥았다.

먹이를 노리를 뱀과 같은 시선에 백이란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본능이 위험을 외치고 있었다.

위기감이 강제로 뇌를 가동시켰다.

 

“원래는 조금 더 온건하게 갈 생각이었단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너무 과격하니까 이대로면 내 이미지가 흐릿해질지도 모르니.”

 

만약 그녀가 강문희를 죽이고 싶은 것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충분히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이 정도는 강하게 나가야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겠지.”

 

굳이 백이란을 불러왔다는 것은 분명 협박을 위해서.

무언가 요구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시연은 다시금 쿡쿡 웃더니 손끝으로 그를 가리켰다.

 

“이란아. 일단 입고 있는 것부터 전부 벗어보렴?”

 

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3.


『게임 7일차 결과』


[규칙]

1.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2. 백이란과의 성행위를 금한다.

3. 12시부터 13시까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함께할 것.

4. 홀에서는 처음에 지급된 복장을 완벽히 착용해야 한다.

5. 스크린은 손으로만 터치해야 된다.


[탈락자]

- 성란

- 백은하


[백이란]

- 소지금: 124,000

- 투표권: 5



아직 탈락하지 않은 히로인은 안전하다는 선동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


댓글에 결말을 정해놓고 쓰냐고 물어보던데, 기본적으로 결말이나 굵직한 전개들은 정해놓고 쓰는 타입임.

세세한 부분은 그때그때 결정하는 일도 꽤 많은 편.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전개나 결말을 본래 계획에서 수정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원래 나름 괜찮다 싶었던 전개를 쓰는 거라 내 머리에서 그 이상이 나오기가 쉽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