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잡하기만 한 심정이었다. 하늘은 그런 내 마음을 대변하는지 장댓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난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기에 그저 무거운 비를 맞으며, 또 다른 사람처럼 뛰지도 않으며 천천히 걸었다. 오히려 이 비가 날 쓰려트려 죽여주길 바랄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확실하고 제대로 진행이 될까. 우선 여기서부터 시작해야겠다. 나에겐 여자친구가 있었다. 30살이 넘어도 애인이 없다는 사람이 넘치는 이 사회에서, 난 운이 꽤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녀는 아름답고, 공부는 물론 운동까지 잘하는 팔방미인이었다. 그녀와 난 몇 년간 함께 지냈다. 같이 영화관에 가거나, 공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서로의 집에 가 몸을 맞대고 잠을 청하거나. 기쁠때도 슬플때도 우린 서로 나누며 감정을 증폭하거나 소폭시켰다. 그런 그녀가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성격이 좋다는 이유로 고백했다는 건, 아직도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은 단 몇 분만에 부서지고 짓밟아졌다. 이틀밖에 안 남은 그녀의 생일을 위해, 최근 늦게꺼지 하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선물을 사러 한번도 간 적이 없던 백화점에 갔을 때였다. 그녀가 특히 좋아하는 색, 특히 좋아하는 보석을 찾아 적당한 가격의 목걸이를 사고, 이걸 받으면 평소처럼 순수하게 웃으며 기뻐할 그녀를 상상하며 입꼬리가 귀에 닿을 정도로 미소짓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그녀가 저 멀리 나타났다. 멀리서도 고등학생 시절에 내가 처음으로 준 네 생일선물인 머리핀과 윤기가 흐르는 애쉬 그레이색의 머릿결을 똑똑히 확인 가능했다. 어째서 그녀가 여기 온 걸까란 의문은 기대를 망칠 내 등장의 우려에 가려지고, 난 무의식적으로 다른 고객 사이에 끼여 구경하는 척 했다.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봤을 때-


그녀는 어떤 남자와 팔짱을 끼고 환하게 웃으며 진열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갈색의 눈을 덮는 파마, 180 후반은 될 키, 옷의 윤곽 너머로 보이는 근육, 그리고 웬만한 미남 배우보다 잘생긴 외모. 제 3자가 본다면 그녀와 그는 흔히 말하는 선남선녀, 미인 커플 그 자체였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제 3자가 되고 싶었다. 그렇다면 나도 지금 이렇게 그때의 너희들을 기억하며 슬퍼하진 않았을 테니깐.


어느새 난 자취방에 와 있었다. 침대 하나, 컴퓨터가 놓인 탁자와 과제와 관련된 서적과 소설 몇 개가 꽂힌 책장, 그리고 그녀와 내가 찍혀진 액자. 유리엔 너와 나의 100일 기념이란 글귀가 그녀의 예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목걸이가 든 가방을 침대 옆에 살포시 놓고, 난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꼴사납게 울었다. 옆 방에서 항의가 올만큼. 그럼에도 울음소리는 전혀 가라앉지 않고 내 좁은 방을 가득 채웠다.


또 다시, 난 눈을 감았다. 알람이 울렸다. 시간이 등교까지 20분 남았다는, 평소라면 기겁했을 내용이다. 폰을 들어 알람을 끄자마자,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직도 자고 있어? 얼른 씻고 나와, 오늘 1교시 출석 빡빡하게 하는 교수님이란 말야! 보자마자 빨리 와!]


그녀와 난 같은 과에 재학 중이었다. 듣는 수업도 한 두개를 빼면 다 같은 것이었고.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였다. 


[오늘은 아파서 못 가겠어, 미안. 나중에 점심 시간에 보자.]


즉시 그녀의 걱정어린 문자가 날아왔지만, 그 시점에선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난 가볍게 씻고 바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키패드를 열고, 숫자를 눌렀다. 내 생일, 0811. 문은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그리고 난 목도했다.


젖은 흔적이 가득한 침대 시트와 뜯겨진 분홍과 하늘색의 콘돔 포장지. 그리고 아주 질 나쁜 장난처럼, 배덕감이 가득한 사람만이 할, 내 집에 있는 것과 완전히 같은, 내 투박한 글씨로 마감된 100일 기념 액자에 뿌려진, 흰색과 투명한 점액이 묻은 흔적.


난 바닥에 토를 했고, 내 손으로 건져 변기에 버리고 향수를 뿌린 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선물은 12시 정각에 줄 계획이었다.



예전에 소연갤에서 봤던 글에서 모티브를 따와 써봄. 한 2편인가 쓰고 연중했던 거 겉은데 가능하다면 완결까지 써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