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늘 설레기 마련, 로열 네이비의 메이드장인 벨파스트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후우…….”


톡톡, 옅은 한숨과 함께 조심스레 단장을 마친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 살짝 미소를 그리며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나아가니, 그 목적지는 바로 지휘관실이었다.


오늘은, 새 지휘관이 부임하는 날이었으니까.


이전 지휘관, 벨파스트의 입을 빌리자면 ‘구제 불능의 오물’인 그 인간은 말 그대로 하수구의 찌꺼기보다 못한 행동거지를 보여주다 그대로 구속되었다.


전 지휘관이 보여준 한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그대로 나열하자면 여백이 부족할 정도였다. 그 증거로 그가 구속될 때 동정하는 사람은 모항 내에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벨파스트는 그 한심한 작자 덕분에 특히나 골머리를 썩였다. 때문에 이번에는 조금 극단적인 수를 사용하기로 마음 먹어, 이토록 이른 아침에 일어난 거다.


시간은 오전 6시, 대게 일과의 시작이 7시에서 8시 사이인 만큼 급할 필요도, 애초에 이 시각에 일어날 이유도 없었지만, 새로 부임한 지휘관의 성실함을 알아보겠단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벨파스트는 성실함은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척도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그녀는 늘 성실하게 살아왔고, 성실한 이들을 가까이했다.


사실 새벽에 도착했다 했으니 지금껏 자고 있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다. 다만, 그녀가 조금 극단적이라는 것이 문제였지.


부디, 이번 지휘관은 성실하고 됨됨이가 갖춰진 사람이길 바라며,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똑똑.


굳은 의지와 함께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문틈 아래로 빛이 비치는 것을 보아 그가 깨어있단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똑똑.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다시 한번 침묵, 결국 보다 못한 상황에 그녀는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렸다.


“실례합니다.”


끼이익, 하는 비명은 들려 오지 않았다. 전 지휘관이 열심히 저지른 비리 덕에 지휘관실은 호화롭기 짝이 없었으니까.


굳게 다짐했다. 그 어떤 광경이 들어오더라도 무표정으로 일관하겠다고, 그 어떤 꼴을 보더라도, 당황하지 않으리라고.


그리고, 그녀의 다짐은 5초도 지나지 않아 깨져버렸다.


그 까닭이 부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이전 사건으로 크게 뒤집혀 엉망진창이어야 할  방 내부는 정갈하기 짝이 없었고, 짐은 이미 풀어 놓은 지 오래였다.


이는 그가 성실하다는 하나의 지표였으니, 그녀에게 있어 긍정적이면 긍정적이지 당연히 부정적으로 작용할 이유는 없었다.


거기에 차림새는 또 어떤가, 정갈하게 차려입은 군복, 깔끔히 다려진 그 매무새를 보아 한참 전에나 준비를 마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지금 벨파스트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건, 어지간한 일에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그녀의 정신을 강타한 신선한 광경의 정체는 바로.


“…….”


사내, 그러니까 지휘관으로 부임한 그 남자가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그게 전부였다. 스캔을 마친 지휘관은 다시금 시선을 돌려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태도였다.


“…….”


군복을 입고 있고, 짐도 이미 다 풀어놨다. 분명 벨파스트가 바라보고 있는 새로 부임한 그는 지휘관이 맞았다.


그런데 그는 대체 왜,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마친 그는 대체 왜.


바닥에 누워 있을까.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기에 머리가 부족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명석하면 명석했지, 멍청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냥, 그냥 어이가 없었다.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강타한 듯한 느낌이 들어 벨파스트는 무심코 머리에 손을 얹어 보일 정도였으니.


대체 이게 무슨 광경일까. 이 남자는 대체 왜 이른 시간에 준비를 마쳐 놓고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으며, 대체 왜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바닥에 누워있고, 그것도 모자라 대체 왜 나를 보고도 모른 척 아무 말 없을까.


하나하나 나열하니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런 상황에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억지로라도 감정을 억누르며 점잖은 척 인사하기, 그게 전부였다.


“……인사가 늦었군요. 로열 네이비의 메이드장, 벨파스트라고 합니다.”


치맛자락을 살짝 집어 올린 벨파스트는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우아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그 자세는 그녀의 품위를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라 할 수 있었다.


또한, 인사라는 행위 자체도 그녀에게 있어 정신을 가다듬기 충분했다. 격식을 갖춰 인사를 마친 그녀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그를 훑기 시작했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우선 앳된 외모. 비록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귀엽다 단언할 정도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살짝 곱슬기가 도는 옅은 회색의 머리카락은 무표정과 시너지를 이루어, 무언가 병약하다는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무릇 회색은 생명력이 없는 색으로 유명하니까.


다음은 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대충 가늠해보면 150cm에서 155cm 사이 어딘가라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나이가 어린 걸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만 봐서는 성인이라 부르기에 무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전부 제치고, 역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여전히 바닥에 누워 휴대폰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


단순한 행동에 불과했지만, 그 뜻은 명료했다. ‘나는 너에게 일절 관심이 없다.’ 당연히 벨파스트는 이해했지만, 납득은 하지 못했다.


아니, 다시 돌아보니 이해도 할 수 없었다. 멀쩡한 침대를 내버려 두고 바닥에 누워있다니, 저 무슨 괴기한 행동인가.


“혹시 어떤 연유로 바닥에 계신 지 여쭈어보아도 좋겠습니까.”


의문을 해소함과 동시에 그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기 위한 질문이었다. 다시금 고개를 들어 그녀가 사내, 그러니까 지휘관을 바라보니, 그는 조용히 휴대폰을 껐다.


“여기가 더 시원해.”


“…….”


너무나 담백한 대답에 벨파스트는 당연히 이어지는 말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지휘관은 어느새 눈을 감아 버렸고, 어색한 침묵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오해하지 않게 미리 말해두는데, 성인 맞아.”


“……아.”


시선을 의식한 걸까. 낮게 읊조렸다. 허나 애써 무게를 담았어도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앳됨은 숨길 수 없었다.


나름 배려를 해준 걸지도 모르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정황은 도리어 벨파스트에게 혼란을 가중시켜줄 뿐이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눠봤자 말려들 뿐,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이해한 벨파스트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럼 저는 이만.”


그리고 탁, 조용히 문을 닫은 벨파스트는 수립한 정보를 조합하기 시작했다.


분명 앳돼 보이는 지휘관이지만, 성인이라 주장함, 새벽 5시부터 깨어있을 정도로 성실하지만 어째서인지 바닥에 누워있고, 소통의 의지는 없어 보임.


“……이게 대체.”


혼란만 가중될 따름이었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미 상대방을 알아보겠다는 의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분명 그 자리에 계속 있어 봐야 늘어나는 건 침묵뿐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가만히 머리에 손을 얹은 그녀는 이 난잡한 정보를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혼자보다는 여럿이 낫다는 건 지당한 사실이니까.





***





“……그게 전부라고?”


“네. 더 이상의 정보를 얻기는 무리라 판단해, 물러났습니다.”


다과회로 돌아온 벨파스트는 모두에게 정보를 공유했지만, 무언가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나같이 지휘관의 기괴한 행동에 당황을 감추지 못할 뿐.


“……그래도, 나름 성실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네요.”


순백의 드레스가 눈에 띄는 그녀, 일러스트리어스가 차분히 홍차를 들이켠다. 그녀의 행동에는 우아함이 양껏 묻어있었지만, 살짝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본디 굉장한 통찰력을 가진 그녀다. 허나 이토록 단편적인 정보라면, 거기에 그 정보가 난잡하기 짝이 없다면, 제아무리 그녀라도 불가능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은 넉넉한 참이니, 천천히 지켜보죠. 아직 저희가 직접 본 것도 아니잖아요? 상부에서 이번에는 기대해도 좋다 말하기도 했고요.”


미미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일러스트리어스의 말을 받아주는 이는 바로 후드였다. 점잖은 목소리로 나긋나긋 말하는 그녀에게서는, 오직 여유만이 느껴졌다.


“……그래. 아직 취임식이 시작한 것도 아니니,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로열 네이비의 수장인 퀸 엘리자베스는 그리 말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따금 어린애다운 모습을 보여주긴 해도, 나름 한 진영의 수장인 만큼 생각 또한 많아 보였다.


“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그 말을 끝으로 다과회는 끝났다. 비록 의문은 남아있지만, 어차피 직접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다르기 마련이니, 다들 자기 눈으로 보고 판단하기로 한 것이다.


지극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소문에 휩쓸려선 진실을 목도하기 어렵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걸 따르지 않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마침내 취임식, 불온한 시선은 여전히 거둬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소녀들은 전원 자리에 모여 있었다.


기대와 불안,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그가 단상 위로 걸어 나오고, 전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작았다. 벨파스트의 설명만으로는 그러려니 했지만, 막상 직접 보고 나니 그 체감이 더욱이 크게 다가왔다.


그들이 당황이 서린 눈으로 지휘관을 바라보지만, 막상 그의 시선은 그들을 향하지 않았다. 멍한 눈으로 저 멀리를 바라보던 그는 마이크를 몇 번 두드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열심히 할 생각 없어, 친해질 생각도 없고, 그게 전부야.”


“……?”


술렁이는 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동요는 모두의 것이었다. 허나 그들이 당황하든 말든, 지휘관은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덕분에 동요는 더욱이 커졌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어느새 장 내를 가득 채웠지만, 지휘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갔다.


그게 전부였다.




***





“음…….”


방에 돌아온 벨파스트는 테이블에 걸터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던 지휘관이 사라지고 지나지 않아 나타난 새 지휘관. 허나 알 수 없는 행동과 말투, 그리고 속마음.


전 지휘관을 구속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부는 말했다. 이번 지휘관은 괜찮을 거라고,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기대해도 좋을 거라고.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물론 만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 단정 짓는 건 아직 이르지만, 여태껏 보여준 행동을 보아하면 이번 지휘관은 이전 지휘관과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 불안했다.


첫 만남 때 관심이 없다는 티를 내긴 했다만, 저렇게 대놓고 친해질 생각도, 열심히 할 생각도 없다고 못 박은 건 너무나 예상 밖의 행동인지라, 감히 당황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품위 이상으로 예의를 중시하는 그녀인 만큼, 이는 굉장한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대체 어떤 연유로 저런 행동을 보이는 걸까. 그의 행동 원리를 알아보고자 머리를 굴렸지만,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벨파스트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니까.


우리에 대한 적대감일까. 벨파스트는 문득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느껴지는 건 무(無)와 허망함이었지, 적대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그 허망함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


무심코 여러 가정을 하게 된 벨파스트였지만, 답은 역시 하나.


알 수 없었다.


“후우…….”


느지막이 한숨을 내뱉은 벨파스트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앉아서 생각만 한다고 해서 무언가 바뀌는 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해결해줄 거다. 그가 어째서 이런 난잡한 행동을 보이는 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정말로 유능한 사람인지는, 시간이 알려줄 거다.


그래.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벨파스트는 생각했다.













시간의 흐름은 참으로 격렬하다. 벨파스트에게는 찰나처럼 느껴졌지만, 그가 지휘관으로 부임한 지는 어느새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까.


하지만 기대대로, 벨파스트는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새 지휘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가만히 방에 앉은 그녀는, 차근차근 수집한 정보를 나열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은 지휘 능력, 확실히 뛰어났다. 이전 지휘관의 폐급이라 불러도 무방한 쓰레기 같은 전술 지휘와 달리, 그의 지휘 능력은 가히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상부가 대체 어떤 까닭으로 기대해도 좋다고 했는지 벨파스트는 이제야 이해했을 정도니까.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특히 이틀 전에 일어난 메탈 블러드 교전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승리는, 그에 대한 호의적인 의견을 대폭 증가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말 그대로 압승이었다. 로열 네이비 측 부상은 미미하다 못해 없는 수준이라 보아도 무방했지만, 메탈 블러드는 궤멸적이다 못해 파멸적인 수준의 피해를 보았다. 벨파스트는 단언할 수 있었다. 아마 한동안은 그들을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하지만 지휘 능력보다 더 뛰어난 건, 바로 큐브 적성.


정체불명의 물체인 ‘큐브’는 함선 소녀들의 근원이자 힘 자체였다. 그런 큐브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성정 큐브의 적성도가 높은 인간이 필수 불가결한데, 이번 지휘관은 그 정도가 특히나 심했던 거다.


덕분에 모항의 소녀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강했나 놀랐다. 그동안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힘을 온전히 끌어내니, 전과는 궤를 달리하는 수준의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당연하게도, 벨파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제 불능의 오물’인 그 인간은 평생 이루지 못할 업적이었다.


더불어 업무 능력 또한 나쁘지 않았다. 지휘 능력만큼 막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못한다고 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었다. 10점 만점에 7점 정도. 평균 이상임은 확실했다.


허나 칭찬은 여기까지, 분명 평균을 훌쩍 뛰어넘은 능력을 갖고 있는 지휘관이었지만, 단점 또한 존재했으니까.


그는 일전에 말한 그대로 열심히 하지도, 함선 소녀들과 가까워지려 하지도 않았다. 정말, 철저한 수준이었다.


물론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충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분명 그저 딱 정해진 업무만, 정말로 딱 할당량만 하고, 그 뒤는 아무것도 건들지 않았다.


어찌 보면 조금 개인적인 성격이지, 큰 문제는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휘관이라는 중직에 있는 이가 보여주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는 행동이었다. 그의 마음가짐이 어떻든 간에, 결국 그는 이 모항의 지휘관이었으니까.


하지만 가까워질 생각이 없다는 것이 허세가 아니었는지, 그는 철저히 선을 그었다. 비서함은 고사하고 로열 메이드의 시종마저 거부하는 지금의 사태는 벨파스트를 필두로 한 메이드대의 자부심에 크나큰 모욕이었다.


비단 메이드대 뿐만이 아니었다. 때문에 현재 모항 내에 대부분의 함선 소녀들은 거리를 멀리하는 그에게 의문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품었다.


미미한 수준의 치욕과 대부분의 의문, 그것이 그들의 품은 감정의 정체였다. 분명 자존심에 상처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궁금했다. 그는 대체 왜 우리를 멀리할까.


물론 최악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이전 지휘관과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수준으로, 그는 유능했다.


이 모든 걸 종합해, 벨파스트는 지휘관에 대한 현재 평가를 이렇게 내렸다.


“성실하지만, 성실하지 않은 사람.”


하염없는 의문이 잔뜩 따라왔다. 이 중책에 올라와 놓고, 어째서 그렇게 행동하는 걸까.


대체 어떤 이유로 그렇게 움직이는 걸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벨파스트는 아직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으니까.


단지, 많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토록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제대로 활용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메이드대의 시종마저 거부하며 개인적인 교류를 거부하는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그 의문에 대한 열쇠를 찾기 위해, 벨파스트는 오늘 그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똑똑.


지휘관실 바로 앞에 선 벨파스트는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렸고, 두꺼운 나무 문에서 울려 퍼지는 적적한 노크 소리는 복도를 가득 채웠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벨파스트입니다 주인님. 혹시 들어가도 좋을까요?”


노크에 이어 입을 뗐지만, 메아리 되어 허공에 맴돌 뿐,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직 표본이 적긴 하지만, 적어도 여태까지 보여준 행동에 의하면 지금 시각에는 지휘관실에 있는 건 분명했다. 방 안에 켜져 있는 전등이 이 생각을 훌륭히 뒷받침하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결국 벨파스트는 조금의 실례를 무릅쓰고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덜컥,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벨파스트는 시야에 그를 담는다.


일방적인 구도였다. 문이 열렸건만, 지휘관은 벨파스트에게 일말의 눈초리도 주지 않았다. 아니, 누가 문을 열었는지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주인님.”


대답하지 않았다. 지휘관은 말없이 서류를 들여다봤고, 벨파스트는 앞으로 한 걸음 옮겼다.


“주인님.”


“…….”


다시 한 걸음, 그녀가 다가간다. 지휘관은 대답하지 않는다.


“주인님.”


다시 또 한 걸음. 그녀가 다가간다. 지휘관은 말없이 서류를 넘긴다. 그게 전부였다.


“……주인님.”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 서로가 지척에 닿았을 무렵, 지휘관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멍하니 비어있는 검은 눈동자가 벨파스트의 푸른 눈동자와 뒤섞인다. 그 흉악한 수준의 어두움에, 벨파스트는 무심코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아.”


뒤늦게 정신 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지휘관은 어느새 서류에 고개를 박은 지 오래였다. 당황한 벨파스트가 다급히 걸음을 옮기니, 지휘관은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왜.”


탁, 거칠게 펜을 내려놓은 지휘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열린 대화의 장에 벨파스트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우선 거짓말보다는 진심이 더 와닿으리란 사실은 분명했다. 피부로 느껴지는 이질감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주인님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돌직구였다. 벨파스트의 본심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런 벨파스트의 진심을 들은 지휘관은 잠시 눈을 감았다. 찰나였지만, 벨파스트는 저도 모르게 약간 긴장하고 말았고, 곧 기대에 보답받았다.


“……내가 왜 네 주인님이야?”


“……네?”


바로 그 순간, 벨파스트의 동공이 격하게 수축했다.


로얄 메이드의 메이드장, 그 직책은 벨파스트의 자부심이자 존재 가치였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이 메이드장이라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지휘관은 그 자부심을 정면으로 깨부수는 말을 던졌다.


당황이라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벨파스트는 잠시 호흡을 잊어버렸고, 사고는 진즉에 멈춰버렸다.


이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지휘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는 텅 비어버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현실에서 아득히 멀어졌다는 증거였다.


그런 그녀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지휘관의 짧은 한마디였다.


“……미안해.”


“……네?”


“내가 조금 심한 말을 한 거 같네.”


짧지만 강렬했다. 명백한 사과의 뜻은 벨파스트의 동공을 가득 채웠고, 이내 따듯해졌다.


“벨파스트라 부르면 될까?”


“……네. 그렇습니다. 주인님.”


전시 상황 이외에서 지휘관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벨파스트는 살짝 당황했지만, 그와 동시에 미미한 수준의 만족감 또한 함께 느꼈다.


그에게 나름 인정받았다는 증거 같았으니까.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벨파스트의 말을 끝으로 지휘관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서류를 바라봤고, 오늘은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벨파스트는 실례합니다. 한 마디와 함께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탁, 문이 닫히고 벨파스트는 방으로 돌아오는 걸음을 재촉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얻은 게 많은 하루였다. 자신을 왜 주인님이라 물을 때는 적잖게 당황했지만, 이내 사과한 것을 보아 악의를 담아 던진 말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뿐이랴, 전시 상황 이외에는 다른 이들을 쳐다도 보지 않던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시선을 교차했다. 굉장한 성과였다.

 

솔직히 조금 의외이기도 했다. 정해진 업무 이외에는 손도 대지 않는 그였기에, 이름을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색다르게 다가왔으니까.

 

어쩌면 모항 내 모두의 이름을 외우고 있지는 않을까. 벨파스트는 생각했다.

 

방으로 돌아온 벨파스트는 책상에 앉아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오늘 일로 지휘관에 대한 평가가 조금 수정된 것이다.

 

“성실하지만, 성실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슬쩍, 입꼬리를 올린다.

 

“그래도 뭐,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

 

 










“정말 놀랍네요…… 저희가 이렇게나 강했던 걸까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일러스트리어스가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자리의 이들은 대체로 공감을 표하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의 성과였다. 압승이라 말하기도 죄스러운 이 압도적인 상황은, 이전에는 상상하는 것이 사치인 그런 광경이었으니까.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른 사람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강화된 신체는 곧 민첩함으로 이어져 기동력을 상승시켰고, 강화된 의장은 곧 공격력으로 이어져 세이렌을 말 그대로 도륙 냈다.


더불어 뛰어나다는 수준으로 표현 불가능한 전술 지휘 능력까지, 금상첨화였다.


때문에 지휘관의 이미지는 나날이 치솟아 올랐다. 그를 의심하거나 비하하는 의견은 하나둘 사라져 이내 완전히 증발해버렸고, 이제 모항 내에 오가는 이야기의 절반은 지휘관에 대한 칭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휘관님은 지금……?”


“또 지휘관실에 계시겠죠.”


후드의 질문에, 벨파스트가 낮게 읊조렸다. 기분이 영 좋지 않다는 증거였다.


“혹시, 지휘관님과 사적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이 있나요?”


“딱 다섯 마디 나눠봤습니다.”


“역시 그런가요…….”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이상할 정도로 거리를 두는 그에 대한 걱정.


처음으로 만난 제대로 된 지휘관이기에 친목을 도모하고 싶었지만, 꾸준히 무시로 일관한다. 함선 소녀들은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하인 주제에 건방져! 내가 만나주겠다는데 왜 자꾸 무시하냐고!”


“어쩔 수 없습니다. 폐하. 조금 진정하시길.”


땍땍대는 퀸 엘리자베스를 달래려 애쓰는 워스파이트였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불가능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다과회 초대에도, 그는 아무런 답변이 없었으니까.


차라리 거절이라면 그나마 나았을 거다. 허나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것은 ‘나는 너희들에게 관심이 없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어, 그녀의 기분을 참으로 언짢게 했다.


“벨파스트! 하인이랑 대화 해 봤다며, 뭐라고 했어!”


벨파스트는 그와 유일하게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인물이었다. 덕분에 벨파스트는 여러 차례 무슨 대화를 나눴나 추궁당하기 일쑤였고, 지금의 광경도 그중 하나였다.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짧고 굵게, 벨파스트는 경험을 그대로 전했다.


“별거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가 성인이 맞다는 것과 바닥이 더 시원하다는 둥, 딱히 영양가 있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묻어두기로 했다. 이는 그녀의 이기심 때문이 아닌, 행여나 그의 발언이 와전되어 안좋은 소문이 퍼질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흐음…….”


벨파스트의 발언을 들은 모두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답답할 따름이니까.


“……포미더블?”


“아, 네. 부르셨어요. 일러스트리어스 언니.”


와중, 유독 격하게 표정을 찡그린 소녀가 있었다. 일러스트리어스가 이를 눈치채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포미더블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표정이 영 안 좋네. 무슨 일 있니?”


“…….”


“숨기지 말고, 타박하지 않을 테니까.”


“……그게.”


언니의 거듭된 걱정에 포미더블은 옅은 한숨을 내뱉었고, 이내 자신의 고충을 쏟아냈다.


사정은 이러했다. 방문을 닫는 걸 깜빡하고 잠시 어디를 다녀왔는데, 그 사이 자신의 음반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


의아한 소식이었다. 고풍스러운 클래식이나 잔잔한 노래를 선호하는 메이드대와 달리, 그녀는 홀로 록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었으니까.


애초에 가져갈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물며 로얄 네이비의 아가씨들이 남의 물건을 탐할 작자는 아니니 더더욱.


“음, 네가 잃어버린 건 정말 아니지?”


“……네. 똑똑히 기억해요. 열려있는 방문과 사라진 제 음반을요.”



잔뜩 풀죽은 포미더블의 목소리 때문일까. 어느덧 사람들은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가 자리에는 그녀와 일러스트리어스, 그리고 벨파스트만 남게 되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누군가 훔쳐 간 건 아닐 테니까요.”


“……그런가요.”


시무룩한 목소리와 함께 대화는 끝났다. 일러스트리어스의 위로를 받으며 포미더블은 사라졌고, 이내 벨파스트는 혼자가 되었다.


“음…….”


홀로 남은 벨파스트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어떤 일을 해야 효율적일지 계산을 시작한 거다.


가사는 진즉에 끝냈다. 할 일은 딱히 없었다. 방금 막 전투를 마치고 온 참이니 방에 들어가 쉬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겠지만, 어째선지 그러기 싫었다.


그를 만나기 위한 명분이 생겼으니까.


전투 후 보고 따윈 필요 없다고 선언한 지휘관이었지만, 벨파스트는 도리어 뻔뻔히 머리를 들이밀기로 했다. 고리타분한 성격 때문이라 우기면 그만이니, 딱히 리스크도 없었다.


생각은 곧잘 행동으로, 벨파스트는 차분히 걷기 시작했다. 불안감에서 비롯된 약간의 망설임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그를 만날 명분을 얻었다는 것이 더 컸다.


“주인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똑똑, 문 앞에 도착한 벨파스트는 늘 하던 대로 노크와 함께 한 마디를 덧붙였고, 늘 그랬듯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주인님. 벨파스트입니다.”


한 번 더 똑똑, 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차분히 노크했다.


“…….”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결국 그녀는 또다시 허가 없이 문을 열었다. 처음에야 망설여졌지, 이제는 자책감도 희미했다.


허나 기대와는 정 반대, 지휘관은 자리에 없었다. 행여나 바닥에 누워있을까 차분히 눈동자를 굴렸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혹시 화장실일까. 귀를 기울였지만, 물소리는커녕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즉, 이 방에는 오직 그녀 혼자만이라는 뜻이었다.


“…….”


벨파스트는 잠시 고민했다. 이것을 기회로 여겨 이 방을 잠시 뒤져볼까. 자신은 메이드장이고, 결정적으로 일전에 주인님이라 불러도 된다는 반 허가를 받았으니 명분도 타당했다.


운이 좋으면 여러 가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겠지만, 만약 운이 나쁘면 기껏 얻어낸 칭호마저 박탈당할 수 있었다. 아니, 도리어 매도당하겠지.


하나, 둘, 셋. 찰나의 시간 아래,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그럼, 쓰레기부터 정리할까요.”


리스크를 짊어지기로 한 그녀는 책상 바로 옆 쓰레기통부터 확인했다. 아무것도 관심 가지지 않는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걸까. 쓰레기통은 텅 비어있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책장, 사뿐히 고개를 들어 그의 책장을 확인한 벨파스트였으나,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전술 교본은 기초적인 것만 구비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전부 클래식이나 고전 소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거듭 말하지만 그는 지휘관이다. 나라를 지키는, 로얄 네이비의 자랑스러운 지휘관.


허나, 그는 지휘관이라는 직책에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는 무언가 반항이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대체 뭘까. 이 이질적인 느낌은, 가설이 여럿 세워졌지만, 뾰족한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쯤 되니 처음에 한 말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열심히 할 생각이 없고, 함선 소녀와 가까워질 마음도 없다. 허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골머리를 썩이던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한 물건이 있었다.


“……이건.”


익히 보진 않았지만, 자주 들어 익숙한 물건이었다. 왜냐하면, 이따금 포미더블이 추천한 적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하지만 격한 의문이 따라왔다. 그렇다면 이 물건이, 대체 왜 여기 있을까.


사라졌다고 말한 포미더블의 음반이, 대체 왜 지휘관의 방에서 나온 걸까.


“……이게 대체.”


이번에는 아무런 가설도 세워지지 않았다. 그냥, 그냥 작금의 사태를 이해할 수 없어 잠시 멍하니 음반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방 가득 클래식과 여러 음악을 채워둔 그였지만, 록 음악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즉, 그는 포미더블의 음반을 훔칠만한 이유가 없다는 거다. 무릇 동기 없는 행동은 존재하지 않기 마련이니, 이는 누군가 지휘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아닌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누군가 포미더블의 방에 들어가 물건을 훔친 뒤, 지휘관의 방에 숨겨놓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차라리 지휘관이 훔쳤다는 가설이 더 확률이 높았다.


“설마, 그럼 정말로 지휘관님이…….”


몇 번이나 부정했으나, 나오는 답은 하나였다. 포미더블의 음반을, 지휘관이 훔쳤다.


대체 왜?


의문이 따라오지만, 그 이상으로 고민이 따라왔다. 이 상황에서 그녀는 어떤 행동을 보여야 할까. 막막했기 때문이다.


말해야 하나, 아니면 주인님께 먼저 물어야 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아.”


그렇게 양껏 고민하던 그 순간, 고개 숙인 그녀에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굳이 입술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벨파스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그림자와 눈동자를 교차했다.


“……실례합니다. 주인님.”


“…….”


그리고 말했다. 드물게 표정을 찡그리고 있는 자신의 주인님에게.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와 동공을 맞대는 바로 그 찰나에, 내 머리에는 정확히 세 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첫 번째는 당연히 당황, 그가 왜 여기 있을까. 인기척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건 그렇고 이 음반의 정체는 그럼 대체.


이 혼란스런 와중에도 생각은 또다시 분열하여 머리를 아프게 했다. 참, 내가 이토록 생각이 많았나 문득 떠올릴 정도였다.


당황 다음은 놀람, 제아무리 당황했다 한들, 그가 자기 바로 앞까지 오는 순간까지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방심이라는 단어와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즉, 나 자신의 실수보다는 평소 그가 기척을 지우고 움직이는 것에 능하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그냥, 버릇일 수도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역시 의문, 작금의 사태에 대한, 순수한 의문.


마주한 눈동자는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무덤덤함을 연기한 가면일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 연관이 없어 반응이 없는지는 몰랐지만, 우선 물증으로 따지자면 전자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단정 짓지는 않았다. 사건이 터졌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단연 사실관계 파악이니까.


오해일 수도 있는 거다. 주운 음반을 찾아 돌려주려는 데 시간이 나지 않아 방에 박아뒀다든지, 아니면 그냥 우연히 같은 음반을 샀을 수도 있고.


때문에, 그 답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건 당연히.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주인님.”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가 긍정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늘 그랬듯, 그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걸음걸이와 함께 소파에 걸터앉았다.


나 역시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는 위기지만, 또 기회라는 걸.


“이 물건, 어디서 났는지 여쭈어봐도 좋겠습니까?”


살살 긁어보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핵심, 나는 그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훔쳤어.”


“……네?”


하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더, 솔직했다.


“도벽이 있거든.”


친절히 설명까지 덧붙여줬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솔직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게 대체 뭘까.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아니, 이런 상황에 저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원래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은 한 적, 아니, 우선 원주인이 누군지는 아십니까?”


참, 이 남자 앞에서는 말을 더듬는 일이 유독 많아지는 것 같다. 


“포미더블, 일러스트리어스급 3번함.”


“……잘 알고 계시네요.”


의외라 해야 하나, 이름과 상세 사항을 외운 건 고사하고, 그의 목소리에는 미미한 죄책감이 묻어나왔다.


“그럼, 미안하다는 생각은 하셨나요.”


그렇기에, 과연 그 죄책감이 연기인지 아닌지, 조심스레 떠보기로 했다.


나는 이전에 결론 내렸다. 성실하지만 성실하지 않으면서,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분명 나쁜 마음으로 저지른 행동은 아닐 거다. 순수히 자기 의지로 막을 수 있으면 병이 아니니까.


“…….”


다만, 이번에는 대답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 무의미한 시간에, 나는 어느새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


아니, 착각했다.


저 침묵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돌려주려는 생각은 하신 적 있습니까.”


“……하아.”


“주인님?”


재차 질문이 날아간 순간,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당황한 내가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짜증나.”


“네?”


“오해하지 마. 기어코 옛 버릇 못 고친 내가 싫다는 소리니까.”


드문 감정표현이었다. 평소라면 분명 반가워했겠지만, 그 역정이 자기 자신을 향했다는 점에서는 조금 안타까웠다.


하지만 덕분에, 내 머릿속에는 순간 번개가 내리쳤다.


“그럼, 이 물건을 훔친 건 고의가 아니었고, 미안해하고 있었을뿐더러, 언젠가는 돌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받아들여도 좋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의문과 미래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서로에게 득만 되는, 말 그대로 윈윈 게임.


“이건 제가 조용히 제 자리에 돌려놓겠습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지만, 그 대신 저와 일주일에 한 번씩 대화를 나누는 겁니다.”


일종의 거래였다. 나는 그의 잘못을 함구하고,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는다.


“……나 같은 놈이랑 말 섞어서 뭐 하게.”


“그냥, 아무 주제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이왕 하는 김에 옛 버릇도 고치고요.”


더불어, 행동 교정까지.


도벽은 신경증, 천천히 풀어나간다면 분명 고칠 수 있을 거다.


“……이렇게 하면, 대체 네가 무슨 이득을 보는 건데?”


하지만 그는 아직도 의심의 끝을 놓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물론,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유였고.


“간단하죠. 주인님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저는 주인님께 다가갈 겁니다.”


“뭐?”


“아,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은 그의 심정을 강하게 대변했다. 그와 나 사이의 정보의 차이에서 비롯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나는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모항 내에서 주인님에 대한 여론은 상당히 호의적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소통을 거부하는 주인님의 성향 탓에, 저희는 대화를 나눌 기회 자체가 없었고요.”


그의 지휘 능력과 큐브 적성 능력은 굉장히 뛰어나다. 전 지휘관의 상태가 구제 불능인 까닭에 대비되는 이유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아도 엄청난 수준이다.


가까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와 친목을 도모한다면, 분명 이 모항 내에 긍정적인 영향만을 갖고 올 거다.


“…….”


분명 이득만 되는 거래일 텐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아 고민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저것이 단지 허세일지, 혹은 무언가가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여태껏 보여준 행동거지를 보아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라 조심스레 예측했다.


“동전 던지기.”


“네?”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자.”


그리 말하며, 그는 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보였다.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걸까. 동전은 손때와 함께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굳이 동전 던지기로 정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앞면, 뒷면, 빨리.”


“……앞면으로 하겠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제 와 새삼스럽게 그런 부분을 지적하는 건 조심스레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이해한다 한들 납득은 못 할 것 같았으니까.


“아.”


그렇게 동전을 던지려는 바로 그 순간, 그는 손을 헛디뎌 동전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나는 동전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으나, 그는 품에서 또 하나의 동전을 새로 꺼내 보였다.


그리고는 챙, 변색된 동전에서 나는 맑고 청량한 소리. 참 모순적이었다.


하늘을 거닐던 동전은 그대로 그의 손등 위로 안착했고, 그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엎어놓은 손을 들어 동전을 확인했다.


“축하해. 약속은 지키고.”


결과는 앞면, 축하한다는 말을 끝으로, 그는 떨어트린 동전을 주워 들곤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대화의 끝을 알리는 행동이었다.


“아,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하지만 나는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아있었다. 사실 첫 만남 때부터 해야 했을 중요한 말이지만, 타이밍을 놓쳐 여태껏 꺼낼 순간만을 기다렸다.


“주인님이라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지난번 자연스레 넘어가긴 했지만, 아직 확답받지 못했으니까.


“……맘대로 해.”


“네.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렇게 끝, 주인님은 조용히 눈을 감았고, 나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다. 아, 물론 음반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얻은 게 많았다. 비록 비즈니스적인 관계지만, 그와 가까워져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사심은 아니다. 연심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그에게 접근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 우리 로열 네이비를 위해서.


하지만 어떤 까닭일까. 슬쩍 올라간 내 입꼬리는 어느새 옅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동전을 놓쳐 당황하는 모습은 조금 귀여웠을지도 모르겠네요.”


짫은 한 마디도.






***





여기는 다시 지휘관. 벨파스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시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와 달리 웃음 짓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다른 감정을 품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


그저 조용히, 품에서 양면이 같은 동전 두 개를 꺼내 보일 따름이었다.











-똑똑.


“실례합니다. 주인님. 들어가도 좋겠습니까?”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와 약속한 바로 다음 날 아침, 나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물론 이쯤 되면 그냥 일상이었다.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나는 의연하게 문 틈새로 비추는 빛을 확인했고, 이내 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 그를 마주했다.


비록 키는 작을지언정, 제복 안에 가려진 몸은 꽤나 거칠었다. 흉터도 몇 개 있었고, 이리저리 발달한 잔근육이 특히……?


“……시, 실례했습니다.”


잠깐의 정적, 정신을 차린 나는 빠르게 문을 닫아버렸다.


“…….”


많이 당황스러웠다. 이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있지만, 보자마자 문을 닫지 않고 그의 몸을 감상한 나 자신이 너무나 어이없었다.


드디어 기회를 잡았는데 어쩌지, 설마 이것 때문에 대화를 거부하진 않겠지, 그나저나 생각보다 몸이 좋네, 흉터는 또 왜 저리 많을까. 걱정되게. 그래도 나름…….


“……핫.”


시작은 걱정이었으나, 갈수록 불순한 생각으로 바뀌었다. 미련하고 멍청한 자신을 잔뜩 채찍질한 후에야, 나는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들어와.”


끼익, 문이 열리며 들려온 소리, 그가 처음으로 나를 부르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지만, 발은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멈춰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방 안으로 들어와 다시금 그와 시선을 마주했고, 재빨리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맨날 허락 안 받고 들어오면서 뭘 새삼스럽게.”


칭찬일까. 욕일까. 참으로 오묘한 대답을 내뱉은 그는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음과 동시에 하늘을 향해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외모는 앳되었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저 눈동자가 그랬다.


검었다. 동공이 검다는 뜻이 아닌, 그 눈동자 아래 깃든 어둠이 검었다.


가늠할 수 없었다. 뭐든 간에.


“그래서, 뭐 할 거야.”


“……아.”


다시금 그 어둠에 빨려 들어갈 뻔한 바로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는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이야기를 나눠야죠.”


“어떤 걸로.”


“우선 차부터 내리겠습니다.”


대화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대화 예절이다. 혹시나 차가 없을까 걱정했지만, 전 지휘관이 잔뜩 쌓아 올린 기호품 덕에 나름 괜찮은 수준의 차를 우려낼 수 있었다.


또한, 기호품이 참으로 깨끗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주인님은 기호품에 전혀 관심 없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여기.”


차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평소와 같은 뭐든 간에 흥미 없다는 표정이 나왔다. 나름 안타까워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부정적인 반응이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맛은 좀 어떻습니까.”


“처음 먹어봐서 모르겠네.”


“……? 홍차가 처음이시라고요?”


“이게 홍차구나.”


적잖게 당황스러웠다. 로열 네이비에서 살면서 홍차가 처음이라니,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큼, 그럼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당황을 가다듬으며 내뱉은 말이다. 의문은 여전하지만, 지금은 우선순위가 있으니.


“취미는 있으십니까.”


“클래식 감상.”


“상당히 고풍스러운 취미군요. 그럼 좋아하는 음식은 뭡니까.”


“육류, 비싼 거.”


“그럼 반대로 싫어하는 음식도 있으십니까?”


“조개류, 특히 굴.”


“이유를 여쭤봐도 좋을까요.”


“그냥, 나랑 안 맞아.”


“……그럼 반대로 저에게 궁금한 건 없으신가요? 뭐든 좋습니다.”


“없어.”


참 수동적이었다. 대화를 툭툭 끊어버리는 맥락 없는 화법은 덤이고.


아예 대화에 관심이 없는 걸까 생각했지만, 만약 그랬다면 애초에 이 거래를 수락조차 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즉, 반대로 그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주제를 꺼낸다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우선으로 떠오르는 건 방금 말한 취미인 클래식 감상이 있지만, 길게 끌고 갈 얘기는 아닐뿐더러 가까워지는 데 너무 오래 걸릴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면 역시.


“도벽을 버릇이라 말씀하셨는데, 그럼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훔치셨다는 뜻입니까?”


“…….”


기분은 나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그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 떠올린 방법이 이거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지난번 말씀드렸듯, 교정하기 위해서는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애초에 적당한 명분도 존재했고.


그는 자신의 도벽을 원망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늘 감정을 감추던 사람이 갑작스레 입을 뗄 리가 없지 않은가.


“이거 때문에 내 인생이 이 꼴이 됐거든.”


실제로, 적중한 모양이다.


자신의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원망스러운 눈으로 자기 손을 바라보는 그 모습에는 역한 분노까지 느껴져, 나를 놀라게 했다.


“……혹시 그 이유까지 여쭈어봐도 좋겠습니까.”


“……뭐?”


“죄송합니다.”


실수였을까. 그는 표정을 찡그리며 역정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사과를 덧붙였고, 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나를 가장 먼저 찾아온 거도 분명 너였지, 이유가 뭐야.”


“네?”


“이렇게 계속해서 나를 찾아오는 이유가 뭐냐고.”


탁, 손에 들린 찻잔을 강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찌나 강한지, 마신 차보다 책상에 쏟아낸 양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말씀드렸습니다. 가까워지기 위해서라고.”


“너도 상부가 시켰어? 응? 어떡해서든 설득하래? 나라를 위해서 한 몸을 바치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모르는 척하지 마. 구역질 나오니까.”


“……주인님?”


분노는 차츰 커져 그를 잡아먹고, 나를 잡아먹고, 이 공간을 잡아먹었다. 말릴 새도 없었다.


“인질까지 잡아놓고 열심히 하기를 바라는 거야? 내 인생을, 내 모든 걸 가져가 놓고 이 짓거리까지 해야 해?”


“그게 무슨…….”


“너도 똑같아. 알면서 그러는 거잖아. 대충 대답하니까 속을 긁는 것도, 웃는 척 속으로는 모략을 꾸미는 것도, 전부 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곧 동요의 크기이자, 내 마음이었다. 나는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까닭에, 대체 어떤 이유로 분노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믿었는데, 너는 그놈들이라 다르다고 믿었는데…….”


“주인님 우선 진정을…….”


“……진짜 싫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이내 힘없이 주저앉았다. 아까와 대비되어 처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은 너무나 가련해.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같잖은 동정심 때문일까. 아니면 저 분노의 시작이 결국 나였다는 점에서 나온 죄책감일까.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아무래도, 그는 내 생각보다 마음에 상처가 많은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입니다.”


그리 말하며, 나는 고개를 숙여 사과의 뜻을 전했다. 원인을 제공한 건 나고, 잘못한 것도 나였으니까.


“……나가.”


“…….”


“……나가라고.”


하지만, 닿지 않은 걸까. 그는 조용히 나가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실례했습니다.”


결국 나는 방을 나섰다. 거절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





“……하아.”


어두운 밤, 유독 잠이 오지 않은 깊은 밤. 그에 걸맞은 어두운 한숨을 내뱉으며,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너도 상부가 시켰어? 응? 어떡해서든 설득하래? 나라를 위해서 한 몸을 바치래?’


차가워진 머리는 분석에 용이했고, 덕분에 나는 오늘 그와 대화에서 얻은 정보를 분석하며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인질까지 잡아놓고 열심히 하기를 바라는 거야? 내 인생을, 내 모든 걸 가져가 놓고 이 짓거리까지 해야 해?’


그는 상부에 무언가 인질을 잡혔다. 그것도 인생과 비견 될 정도의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조심스레 예상하건대, 그 원인은 도벽일 것이다. 그의 입으로 인생을 이렇게 만든 원인이라 말했으니까.


따라서 도벽을 고치고 싶었고, 교정시켜준다는 나를 믿어 방으로 불렀지만, 격한 자극에 분노. 그리고 역정.


“…….”


많이 미안했다. 남의 치부를 찌르는 건 굉장히 죄스러운 행위였으니까.


또한, 그가 걱정되었다. 그 불안한 정신 상태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현재 많이 힘들어보였으니까.


“다음에 만나면 꼭 사과드려야겠어요.”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차향이 좋네요. 지난번보다 더 능숙해진 거 같아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번 쿠키도 참 잘 구워진 게…….”


“그나저나, 지휘관님은 이번 다과회에도…….”


평소라면 그 어떤 때보다 집중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귀뿐만 아니었다.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눈도, 차의 향기를 맡는 코도. 다과를 먹는 입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인질까지 잡아놓고 열심히 하기를 바라는 거야? 내 인생을, 내 모든 걸 가져가 놓고 이 짓거리까지 해야 해?’


예의에 잔뜩 어긋나는 행위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저 조용히 그를 떠올릴 뿐이었다.


처음엔 의문이었지만, 이제는 안타까움이었다. 보여주는 행동과 몸에 있는 상처, 그리고 무언가를 인질 잡혔다는 말로 미루어보아, 순탄한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그의 치부를 들쑤신 내가, 너무나 원망스러웠고, 그에게 미안했다.


대놓고 말했는데, 주인님이라 불러도 좋겠냐고 말했는데, 하는 행동은 미개하기 짝이 없어 한숨만 나오고, 접근한 의도조차 불순해 역겹다.


물든 걸까. 뭐든 간에 자신의 이익밖에 생각하지 않던 그 구제 불능의 오물에게.


“……까드득.”


절로 이가 갈렸다. 그와 동류로 취급된다는 게 너무나 불쾌한 까닭이었지만, 그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더 컸다.


“벨파스트씨? 지금…….”


“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모든 시선은 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온 탓일까. 아니면 이 가는 소리가 너무나 컸던 걸까.


“오늘 무슨 일 있는 거야? 어제부터 표정이 안 좋던데.”


“……아닙니다 폐하. 즐거운 분위기를 망쳐서 죄송합니다.”


“……그래.”


곧 중재되어 다시금 웃고 떠드는 시간이 돌아왔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


끝까지.





***




다과회가 끝나고, 이제는 개인의 삶으로 돌아갈 시간, 나는 말 없이 걸음을 옮긴다.


본래라면 내 방으로 가야했다. 그게 맞으니까.


하지만 의지와 몸은 반대로, 내 다리는 지휘관실로 향하고 있었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은 잔뜩 쌓여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었다.


사과해야하나, 도리어 역효과로 돌아오는 거 아닐까. 아니, 그럼 대체 무슨 말을.


생각에 잡아먹혀 다리는 느려지고, 시야는 차츰 흐려진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똑똑히 들어오는 것 두 가지.


지휘관실이라 적혀있는 멋들어진 명패와 문틈 아래로 흐르는 붉은…….


“……주인님?”


눈이 번쩍 뜨인다. 다리는 빨라진다. 심박 또한 빨라진다.


지휘관실 문틈 아래 흐르는 붉은 액체는 나를 각성시키는데 충분했다. 생각할 겨를 도 없이, 나는 달려가 즉시 문을 열어젖혔다.


“주인님!!!”


-쾅!!!


“……주인님?”


그리고 문 바로 앞에 앉아있던 그를 기절시키고 말았다.


“……아.”


그제야 시야에 들어온다. 깨진 와인병, 바닥에 걸레, 그리고 문에 머리를 부딪혀 눈을 감고 있는 그.


“…….”


아무래도, 사과할 것이 늘어난 모양이다.




***




“……아.”


“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이제는 나름 익숙해진 목소리와 함께, 그는 눈을 뜬다. 반겨주는 것은 새하얀 천장과 걱정하는 사람의 얼굴.


“…….”


상황 파악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어쩌다 보니 와인병을 찾아 정리하던 도중 손을 헛디뎌 바닥에 떨어트리고, 그걸 닦아내다가 의식이 끊겼다.


“죄송합니다.”


“……너구나.”


머리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통증과 미안해하는 사람의 표정, 그리고 깨끗이 청소된 방이라는 추가적인 정보, 사실관계 파악은 끝났다.


“핑계는 대지 않겠습니다. 급하게 문을 열다 주인님의 머리를 찧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문을 왜 열었는데.”


날아온 질문에, 벨파스트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지만, 숨길 수는 없는 노릇, 이내 입을 열어 그에게 말했다.


“문틈으로 흘러나온 액체가 피인 줄 알고 그만…….”


“……큭.”


“아.”


질책받을 각오를 짊어지고 꺼낸 말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놀랍게도 웃음을 참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에 살짝 당황한 벨파스트는 그만 얼빠진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그래도, 나름 걱정했다는 거네. 고마워.”


그리 말하며, 지휘관은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았다. 정확히 그의 맞은 편이었다.


“……미안해.”


“네?”


“그냥, 어제 소리지른 거.”


“……아.”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당황과 의문, 그리고 당혹이 표정에 그대로 묻어나왔지만, 그중 가장 거대한 건 단연 놀람이었다.


그냥, 놀라웠다. 누가 봐도 내 잘못인데, 어째서 사과를 하는 건 그일까. 


“표정 그리 하지 말고, 할 말 없어?”


“……그럼, 홍차부터 내오겠습니다.”


때문에 감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 번이나 자신을 용서해준 그에게.




***





“보통 수면 시간은 어떻게 되십니까.”


“유동적일 때가 많지만, 기본은 10시에 자서 6시.”


“모항에서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그냥 여기 있다는 사실이 불편해.”


“그럼 저희에 대해 불편한 점은 딱히 없으십니까.”


“별로, 생각 없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지휘관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물론 평범한 대화라고 하기에는 약간 어폐가 있었지만, 그래도 지난날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


그렇기에, 벨파스트는 궁금했다. 갑작스레 날 선 태도를 줄인 그 까닭이.


하지만 또 걱정되었다. 이 또한 그의 치부가 아닐까. 행여나 지난번의 과오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


-삐비빅! 삐비빅!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그의 휴대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깐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전화기를 바라보더니, 이내 미소를 그렸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자연스러운 미소인지라, 벨파스트로서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어떤 이유에서 웃으셨는지 여쭤봐도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생각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웃음은 대체로 행복의 감정,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다. 즉,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것에 웃고 우는지 알아야 하는 필요가 있는 뜻이었다.


“……그냥, 가족.”


“……아.”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로서는 충족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와 동시에, 벨파스트는 생각했다. 오늘 기분이 좋은 이유도 필히 가족과 연관 된 일이라고.


“오늘 재밌었어. 머리에 혹은 나겠지만.”


“……죄송합니다.”


“됐어. 그런 걸로 뭘.”


이제 끝내자는 말, 와중 모순된 발언에 잠시 눈을 감았지만, 벨파스트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얻은 것이 참 많았기 때문이다.


기분도 풀렸고, 재미있었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도 좋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의 웃는 모습을 보았다는 거다.


솔직히 말해, 썩 귀여웠다. 안 그래도 앳된 외모와 작은 키 때문에 약간 신경 쓰였는데, 웃으니 그런 모습이 배가 되었다.


“마치 소동물같이…….”


핫, 짧은 소리와 함께 벨파스트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소리를.


“후우…….”


한숨을 크게 내뱉으며, 그녀는 오늘도 메이드의 마음가짐을 복기했다.





***





“아무리 내가 없었다고 한들, 이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완파된 그들의 의장을 보며, 검은 장발로 한쪽 눈을 가린 거대한 여성이 작게 읊조렸다. 타박은 아니었고, 그저 의문이었다.


“로열 네이비의 수준은 잘 알고 있다. 처참하지.”


그녀는 조용히 생각했지만, 납득할 수 없었다. 로열 네이비는 본디 약자였으니까.


물론 개개인의 능력은 얕볼 것이 아니었지만, 지휘가 문제였다. 일 전에 현장 지휘를 나왔을 때 본 그 쪽 지휘관의 모습은 격은 고사하고 지휘도 떨어지는 한량이었으니까.


“반대로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보이는 것들이 전부 그대로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바뀌었음을 의심하는 건 어떨까요?”


이번에는 로즈 골드색 머리에 붉은 브릿지가 인상적인 여성이 입을 열었다. 인자한 웃음과 더불어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존댓말, 분명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모든 조건은 충족한 말솜씨였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에게서는 무언가 위험하다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겠구나.”


그리 말하며, 여성은 슬쩍 미소를 그렸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그가 이야기를 나눈 시간도 많아졌다. 오가는 문장 하나하나 머릿속에 되새기며, 나는 그에 대한 사실을 여럿 알아낼 수 있었다.


우선 첫 번째, 그는 세상만사 모든 일에 신경 안 쓰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색하지 않을 뿐, 속으로는 엄청 신경 쓰고 있었다.


사실 어느 정도 낌새가 있긴 했다. 그가 정말로 아무것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이었다면 음반을 훔친 일을 숨긴다는 빌미로 대화하는 것도 통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두 번째, 그는 기본적으로 폭력을 혐오했고, 지휘관이라는 자리에 걸맞지 않았다.


누군가 다치는 것도,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것도, 천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휘관이라는 자리는 어찌 되었든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결국은 자기 사람들을 전장에 내보내야 하는 입장이다.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어째서 지휘관이라는 자리를 탐탁잖아 했는지.


가련했다. 대체 얼마나 큰 인질을 잡혔기에 그토록 싫어하는 지휘관이라는 자리를 붙잡고 있는 걸까. 의문 또한 따라왔지만, 물어보는 행위 자체가 실례인 것을 알고 있기에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츰 마음의 문이 열려간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벨파스트. 이거.”


“네. 주인님.”


바로 이런 식으로.


정확히 이틀 전이었다. 그가 나에게 서류를 넘겨주기 시작한 때가.


할 일이 늘어난 거지만, 기쁘기 그지없었다. 늘 혼자 지내던 그가 누군가를 믿는다는 행위였으니까.


그뿐만 아니었다. 나 말고, 다른 이들에게도 슬쩍 거리를 좁히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기뻐한 건 다름 아닌 다이도였다. 늘 주인님에게 버려졌다며 이따금 눈물 흘리기도 한 그녀였으니까.


“다이도급 네임쉽 다이도. 맞나.”


“……주인님?”


놀라운 반응이었다. 단지 이름을 확인하는 시간에 불과했지만, 다이도는 기뻐 쓰려졌고, 덕분에 당황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소문은 모항 내에도 금세 퍼져나갔다. 다만, 아직 다과회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건 참으로 아쉬웠다.


비서함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사실상 나였다. 그의 곁에 가장 오래 있는 건 단연 나였으니까.


그 점이, 썩 마음에 들었다.


“벨파스트?”


“아, 네 부르셨습니까.”


“이게 뭐야.”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니, 정확히 사쿠라 엠파이어라고 적혀있었다.


“저희 로열 네이비와 꽤 자주 충돌하는 세력 중 하나입니다. 지난번 격퇴하신 메탈블러드와 마찬가지로요.”


“지난번? 언제?”


“주인님의 첫 지휘 말입니다.”


예상대로라 해야 하나, 그는 관심이 없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나쁜 기억을 한시 빨리 지워버린 걸 수도 있고.


“……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싶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는 모습은 참으로 귀엽기 짝이 없어, 나도 모르게 싱긋 웃어버리고 말았다.


최근 이런 일이 잦아졌다. 분명 비즈니스적인 이유로 접근했지만, 요즘에는 내 개인적인 사심의 비중이 컸다.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즐거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주인님이라는 사람 자체가 썩 귀여웠으니까.


앳된 외모, 작은 키, 그와 반대되는 행동은 참으로 이질적이지만, 또 어울렸다. 약간 퇴폐적인 듯 어두운 눈은 덤이고.


특히, 가끔 키가 작아 무언가를 꺼내달라 하는 모습은 그 절정이었다. 팔을 뻗어 낑낑대다 이내 포기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모습은 참으로…… 아아.


“벨파스트.”


“……핫. 네, 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우리 나가야 해.”


“네? 그게 무슨…….”


“저거, 안 보여?”


그리 말하며, 그는 저 멀리를 가리켰다. 그 작은 손끝으로 시선을 돌리니, 붉게 물든 네 글자가 나를 반겼다.


“……공습경보?”


“준비해.”





***




“슬슬 보이네요.”


우연의 일치일까. 우리를 공습한 것이 사쿠라 엠파이어라는 사실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검붉은 여우와 희푸른 여우, 아무래도 최근 로열에 새 지휘관이 부임했다는 소문이 퍼진 까닭에 직접 행차한 모양이었다.


“반갑네요. 여러분.”


아카기, 여러 갈래로 나뉜 사쿠라 엠파이어의 수장 중 하나이자, 흉악하기 짝이 없는 그녀가 우리에게 손을 흔든다.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예전이었으면 몰라도, 우리에겐 이제 주인님이 있으니까.


“……저게 아카기야?”


다만, 걱정되는 부분은 있었다.


“꼭 현장으로 나오셨어야 하나요?”


일러스트리어스의 걱정 어린 목소리였고, 내 마음을 대변한 목소리였다. 현장 지휘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그가, 갑작스레 현장으로 나온 건 우리에게 있어 크나큰 걱정거리였으니까.


물론 장점도 존재하지만, 지금은 그저 불안할 따름이었다.


“후후후, 당신이 지휘관님이군요. 첫 만남이지만, 느껴져요.”


“별로.”


“아니요. 알 수 있어요. 우리는 반드시, 다음번에도 만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냥, 지금 물러나면 별말 안 할게. 저리 가주면 안 될까.”


폭력을 싫어하는 성품 때문일까. 서로가 유효 거리 내에 들어왔음에도 그저 조용히 대화를 나눌 뿐, 주인님은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그저, 여러모로 불쾌할 따름이었다.


“주인님. 명령을.”


때문에 나는 그의 정신을 다잡았다. 가혹하다 말 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는 전장이니까.


“…….”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전원, 의장 전개.”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




무난하다 못해 일방적이었다. 사쿠라 엠파이어는 큰 피해를 입었고, 우리는 대체로 멀쩡했다.


본디 전술안이 뛰어난 그였지만, 현장 지휘는 그의 전술을 더욱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즉, 굳이 현장으로 나온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뜻이었다.


“후후후…… 역시, 역시 대단하시네요. 지휘관님.”


붉은 눈동자가 그를 향한다. 꽤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녀, 아카기는 여전히 기세를 잃지 않은 채 그를 바라봤다.


기괴했다. 둘은 이제 첫 만남일 텐데, 그녀의 눈에서 묻어나오는 건 어째서인지 익숙한 사람을 대하는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언니, 슬슬.”


“아아, 그렇지.”


“저들이 물러납니다! 추적할까요?”


“…….”


무언가 대화를 주고받은 둘은 이내 물러서기 시작했다. 좀처럼 오는 기회가 아닌 만큼 나는 주인님께 의견을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만나죠. 지휘관님.”


아카기가 한 마디 덧붙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저 멀리 사라지는 그녀의 몸에 생긴 상처를 안쓰럽게 바라볼 따름이었다.




***




“……이상하네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전투가 끝나고, 일러스트리어스가 조용히 읊조렸다. 근심과 탄식만이 잔뜩 깃든 그 얼굴이 너무나 가련하기 짝이 없어, 나는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제 손수건이 사라졌네요. 어디서 떨어트리기라도 한 걸까요.”


“……손수건이요?”


“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떨어트린 걸까요. 발치를 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는 게 슬프네요.”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느새 주인님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니까.


“……저, 저는 잠시.”


탁탁탁, 빨라지는 발걸음. 불현듯 스쳐 가는 생각, 불안한 마음.


“주인님.”


벌컥, 노크도 없이 문을 여는 나.


“…….”


또다시 버릇을 고치지 못한 그.


손에 들려있는 하얀 손수건과 함께, 옅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였고,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 평소보다 더 어둡고, 칙칙할뿐더러, 깃든 감정마저 어두웠다.


마음 또한 그러했다.


“……벨파스트.”


“네. 주인님.”


“……벨파스트.”


“네. 주인님.”


“벨파스트.”


“네. 주인님.”


무겁다.


“나 어떡해.”


“사과하면 됩니다.”


“사과로 끝날 일일까.”


“적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죠.”


마음이 무겁다.


“그렇게나 다치게 했는데도?”


“…….”


착각했다. 그가 사과하고 싶은 대상은, 하나뿐이 아니었다.


도벽은 신경증, 참지 못하는 극단적인 욕구는 불안한 심리에서 비롯된다.


“……차라리 내 손으로 했다면 나았을 텐데, 비겁하게 뒤에서 명령만 내리고, 나는 안전한 곳에서 지켜보고, 뻔뻔하게 돌아오고.”


“그게 지휘관입니다.”


그 불안한 심리는, 자책감이자 여린 마음, 극단적으로 폭력을 꺼려하는 그의 천성.


“나는, 나는 이거 하기 싫은데.”


“그것이, 지휘관입니다.”


“……하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


탁, 몸을 일으킨 주인님은 볼품없는 발걸음과 함께 사라졌고, 이내 일러스트리어스가 손수건을 찾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참, 만감이 교차할 따름이었다.











칠흑이 양껏 도래한 어두운 밤은 무릇 감성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은 자신의 치부마저 가려주지 않을까. 모두가 자고 있으니 지금이라면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을까. 사람들은 착각하고는 한다.


나도 그랬다.



***



사쿠라 엠파이어와의 교전으로부터 3일 후, 모항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이를 달리 말하면 고요하다는 뜻이었다. 지휘관은 이따금 벨파스트를 통해 말을 전할 뿐, 다른 이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는 일은 여전히 극단적으로 적었고, 지휘관실을 나오는 일도 전무했다.


다과회 초대는 여전히 거부했다. 그나마 벨파스트가 슬쩍 주제를 꺼낸 적도 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들 체념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는 게 체감되었으니까.


그 증거로, 벨파스트의 휴대폰에 이런 문자가 오지 않았는가.


-시간 있냐.


“…….”


벨파스트는 휴대폰에 온 문자를 읽고, 즉시 화면을 닫았다.


물론 무시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냥, 답장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 것이 그 까닭이었다.


“주인님.”


순식간에 지휘관실로 도착한 벨파스트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 그를 불렀다. 이제는 아예 노크도 하지 않았다.


“……왔네.”


“주인님?”


그리고 마주한다. 살짝 상기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를.


살짝 눈동자를 굴린 벨파스트는 이내 책상 위에 난잡하게 어지럽혀진 술병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의 얼굴이 어떤 이유로 붉어졌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얼마나 드셨습니까.”


“그냥, 적당히.”


적당히라고 말하긴 했지만, 책상 위에 올려진 술병은 적지 않았다. 허나 취했다고 치부하기에는 무언가 어폐가 있다는 것도 사실. 벨파스트는 조용히 그의 안부를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소파에 앉아 그녀를 바라볼 뿐, 그게 전부였지만, 벨파스트는 멍청한 여자가 아니었다.


저 자리는,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 앉던 자리였으니까.


벨파스트는 조용히 반대편에 앉았다. 평소와 같았지만, 평소와 달랐다.


“……궁금한 거 많지 않아?”


“……네?”


지휘관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꽉 막혀있어 하늘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만족스러운 것이 있는지 이내 슬쩍 입꼬리를 올려 자신의 기분을 표현했다.


“뭐든 좋아.”


“…….”


벨파스트는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봤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전 지휘관이 양껏 돈칠 해놓은 어여쁜 대리석 바닥.


“……정말, 뭐든 상관없습니까?”


긍정은 침묵의 형태로 돌아왔고, 벨파스트는 가만히 아파했다. 그가 가슴앓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폭력을 싫어한 그, 지휘관이 되기 싫어한 그, 하지만 지휘관이 될 수밖에 없던 그.


여려 사건이 뒤섞여 그의 가슴을 후볐을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삼 일 전까지만 해도 심하게 마음고생하며 신경증까지 도지지 않았는가.


참 안쓰러웠다.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또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또 알고 싶었다.


“주인님의 과거와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알고 싶습니다.”


“……헤.”


보듬어주고 싶었으니까.


지휘관은 조용히 술을 한 잔 더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알코올에 뇌는 차츰 굳어갔지만, 아이러니하게 심박은 더욱이 빨라졌다.


그리고 탁, 책상 위로 잔이 올라가는 소리.


“로열 네이비는 귀족의 나라라며 떠받들고 자축하지만, 모든 사람이 귀족은 아니야, 그 아래를 뒤받치는 평민도, 바닥에서 허우적대는 천민도, 심연에서 발버둥 치는 거지도 있지.”


벨파스트는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그다음에 이어질 말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으니까.


“그 거지가, 바로 나고.”


“…….”


“내 인생의 첫 기억은 저 빈민가 뒷골목에서 물건을 훔치던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거든.”


“그럼 그때 말한 버릇이 바로…….”


“그래. 살려고 생긴 버릇이야. 그냥, 살고 싶어서…….”


지휘관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지만, 기뻐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그는, 분명 슬퍼하고 있었으니까.


“난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인데…….”


더없이 슬퍼 보이는 표정과 함께, 그는 조금 옛 기억을 꺼내놓았다.



***



더럽고 역겨워 나라에서도 멀리하는 곳, 법보다는 칼부림과 주먹이 가까워 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 뒷골목 시궁창.


나 역시 그중 일부였다.


부모에 대한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를 버렸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얼굴도, 추억도, 애정도 없다.


딱히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들 또한 사람이니, 분명 이유가 있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오빠.”


다만, 내 동생까지 여기 두고 간 것에 대해서는 잔뜩 원망한다.


여기는 지옥이었다. 힘과 칼, 그리고 추잡한 사람들만이 존재하는 뒷골목에 우리가 설 자리는 없었다.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누군가를 때리기에는 힘도, 의지도 부족했다.


누군가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우리는 나약했고, 그들은 강했으니까.


배를 곯는 건 일상이었다. 썩은 사과를 주워 먹다 배탈 나고, 흙탕물을 마시다 토하고, 고열에 아파 쓰러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택한 건 물건을 훔치는 일이었다. 이따금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 호위를 거동해 귀족이 찾아온 그날,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훔쳤다.


물론 들켜서 죽도록 맞았다. 어린애라며 봐주겠다는 듯 선심 쓰며 물러나긴 했지만, 그게 팔 하나 부러트려 놓고 할 소리인가.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동생을 배불리 먹였으니까.


추잡한 행동에 불과했지만, 나는 살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동생을 더 좋은 곳에 살게 하고 싶었다.


동생은 이런 더러운 곳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나보다 더 여리고, 심성이 고우며, 다른 이를 생각하는 마음도 곱절이었다.


때문에 동생은 더욱 힘들었다. 그나마 손재주라도 뛰어난 나와 달리, 느리고, 약했으니까.


“……오빠. 미안해.”


“아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내가 미안하지.”


하지만 원망한 적은 없다. 우리는 가족이고, 나는 이 여린 아이를 책임져야 할 마땅한 의무가 있었으니까.


동생도 내 고생을 알고 있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눈과 발목이 잔뜩 부어있기 일상이었으니까.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어하는 동생이 내 절도를 묵과한 것은.


늘 색다른 방식으로 둘러대긴 했지만,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내 동생은 머리가 좋았으니까.


그나마 시간이 지날수록 능숙해져 내 동생이 열 살쯤 될 무렵에는 들키는 일이 없어지다시피 했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현실을 깨달을 나이였으니 의미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비겁한 변명이긴 하지만, 나는 결국 내 동생에게 더러운 일 하나 안 시키고 무사히 키웠으니까.


더러운 일은 내가 전부 도맡았다.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기만하고, 동생마저 속이려 들고.


참 이기적이고, 역겨워 모순적이지만, 오직 그것만이 내 길이었다.


마음이 꺾일 것 같으면 동생을 보곤 했다. 나 없이는 절대 살아갈 수 없는 이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의지를 다졌다.


분명 이 아이가 어른이 되면 좋은 일을 하며 멋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리라 믿었다. 동생은 예쁘고, 똑똑하고, 심성 또한 고왔으니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은 이토록 비루하더라도, 언젠가는 사람같이 살기를 꿈꾸며 나는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저년 잡아! 저년이 범인이다!!!”


“아, 아니에요! 저, 저는 그냥…….”


동생이 웬 미친년한테 누명을 쓰기 전에는.


모순적이고 이기적인 나와 달리, 동생은 이타적이고 선했다. 때문에 지나가던 귀족이 흘리던 물건을 주워 그에게 돌려주려 했고, 우리 잘나신 귀족님은 그걸 절도라 착각해 동생을 후려 패기 시작했다.


도와주는 어른은 존재하지 않았다. 재밌는 일이 생겼다는 듯 저 멀리서 관망할 뿐,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내가 재빨리 뛰어들었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그냥 맞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


“이게 무슨 물건인 줄 알아? 감히…… 감히…….”


“카학…….”


빡, 뻐억, 빠직, 으지직, 사람 몸에서 나선 안 될 소리. 내 몸에서 천천히 울려 퍼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


그래도 괜찮았다. 그냥 이렇게 끝내는 걸로 만족했다. 내가 여기서 맞는다면, 동생은 더 이상 억울한 책임을 묻지 않아도 되니까.


“오, 오빠…….”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온몸에 피멍이 든 동생이 눈에 들어왔다.


“……아.”


성한 곳이 없었다. 다리와 팔은 부러지고, 눈은 잔뜩 부어 있었다. 얼굴과 다리를 집중적으로 밟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사람의 가슴이 이토록 빨리 뛰는 것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과 어느덧 느껴지지 않는 통증은 단 하나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빠드득.”


격한 분노에 이를 악물고, 그 격한 힘에 이빨이 부러지고, 격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지만, 격한 감정에 몸은 벌벌 떨린다.


지금 나를 밟는 사내가, 내 동생을 때려 팬 사내가, 내 동생에게 누명을 씌운 저 사내가 너무나 밉고, 역겨워 싫어서.


나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눈에 들어왔다. 사내의 주머니 속에 있는 반투명한 흰색 정육면체가.


“이 쓰레기 같은 계집 때문에!!! 가난하면 평생 여기서 살 것이지! 뭘 훔치려고 해?”


그리고, 참지 못했다.


무언가를 훔치는 건 능숙했다. 격한 아드레날린에 통증이 적응될 무렵, 나는 자세를 바꿔 사내의 주머니에 있는 정육면체에 손을 뻗었다.


예상은 이러했다. 손으로 큐브를 잡고, 다리를 걸어 넘어트린 다음 뒤통수에 한 방. 그럴싸했다.


그리 생각하며, 사내에게서 정육면체를 빼앗은 바로 그 순간.


-삐이이!!!


“……어?”


“뭐, 뭐야!”


흰색 정육면체, 성정 큐브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을 뿜어냈다.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미친 듯이 광채를 쏟아내는 정육면체, 그 빛에 눈이 멀어 움직임을 멈춘 사람들.


그 아래 홀로 움직이는 나.


난잡한 상황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머리는 세차게 돌아갔다. 침착해서가 아닌, 그냥 본능이었다.


아니, 바보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몸이 아프지 않았다. 부러졌을 다리는 어느새 멀쩡히 붙어있었으며, 잔뜩 부어버려 앞이 보이지 않았던 눈은 저 멀리 쓰러져있는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오빠!”


동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록 나처럼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지만, 목소리를 내뱉을 힘도 남아있지 않던 동생은 정확한 발음으로 나를 불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즉시, 나는 동생을 업어들어 그대로 도망쳤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내가 배운 건 없어도 멍청한 건 아니었다. 지금 상황은 현실과 상당히 어긋나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무작정 달렸다. 끝없이 달렸다. 발바닥에 피가 잔뜩 배어 나왔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과 억울함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우리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부모님은 대체 왜 우리를 두고 간 걸까. 나는 왜 이런 곳에서 배곯으며 살아야 할까. 내 동생은 대체 무슨 죄일까.


이럴 거면 태어나지 말걸,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됐을 텐데. 차라리, 그냥, 그냥.


“오, 오빠……?”


그런 내가 정신을 차린 건 동생의 가녀린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쳐 지나갔을 때였다. 나는 그제야 걸음을 멈춰 섰고,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격한 통증을 인지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참 푸르렀다. 이 자리에 더러운 건 우리 둘뿐, 세상은 참으로 깨끗했다.


“……돌아가자.”


우리가 설 자리가 아니었다.


동생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떨리는 손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에 나도 모르게 멈춰 설 뻔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괜찮아. 오빠가 어떻게든 할게.”


그냥 이렇게, 불안감을 넘겨받는 게 최선이었다.


조용히 보금자리로 돌아온 우리는 눈을 감았다. 많은 일이 있었기에, 둘 다 지친 까닭이었다.


난잡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 수 없었다. 활활 타오르던 살의와 복수심은 하늘로 날아간 지 오래였고, 그냥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막막함만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냥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이 비루한 삶을 사는 것도 허락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




“찾았다.”


“……하.”



불안한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멋들어진 정장을 입은 사내 여럿이 우리를 찾아와 반겼으니까.



그들의 손에는 친절함이 묻어나왔지만, 표정은 딱딱하기 그지없어 더더욱 불안했다. 선택지는 없었다. 그들의 손에 이끌려 외딴 건물로 들어갔고, 난생처음 보는 화사한 시설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 같은 거지들은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공간이었다. 깨끗하고, 깔끔했으니까.


건물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씻고 옷을 갈아입는 일이었다. 참, 며칠 만에 보는 물인가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에게는 이것이 일상이라는 게 더욱이 사무쳤다.


“오, 오빠.”


그렇게 깨끗이 씻고 나오니, 동생이 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어지간히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탁, 동생의 뒤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사내가 그때 본 흰색 정육면체를 건넸다.


“이걸 잡아봐라.”


“……읏!”


잡을 필요도 없었다. 그 정체불명의 물건이 우리와 가까워지는 순간, 그때와 비슷한 격렬한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으니까.


“좋아. 확실하군.”


툭,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린 사내는 우리에게 빵과 우유를 던졌다. 선심 쓴다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은 것이, 너무나 역겨워 구역질을 참아냈다.


“먹지 마.”


“……응.”


목마르고 배고팠지만, 입에 대지는 않았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고 배웠으니까.


“……큭, 마음대로 해라.”


그 말을 끝으로 사내는 방을 나갔다. 동생은 불안감에 몸을 벌벌 떨었고, 나는 그런 동생을 조용히 안아줬다.


“괜찮아. 오빠가 어떻게든, 어떻게든 할게.”


다짐이자 내 인생이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동생만은 나보다 좋은 곳에서 살게 하기, 가족으로서의 마지막 양심.


“내가 어떻게든…….”


“그래. 네가 해야 하는 일이지.”


“……누, 누구야.”


이번에는 흰색 가운을 입은 여성이 들어왔다. 적개심에 한 걸음 물러서니, 그녀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너무 그러지 마. 좋은 소식만 갖고 왔으니까.”


“…….”


“자, 앉아 봐. 설명해줄 테니.”




***





설명은 길었지만,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우선 이름도 모르는 나를 찾아낸 건 그리 어렵지 않다고 했다. 뒷골목에서 무언가를 잘 훔치는 꼬맹이는 흔하지 않았으니까.


그다음은 흰색 정육면체에 대한 설명.


정육면체, 그러니까 성정 큐브는 미지의 에너지이자 나라의 미래라 했다. 성정 큐브에는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고, 이를 통해 태어난 무언가를 함선 소녀라 부르는데, 그들이야말로 나라를 지키고 국력을 강화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존재라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건 그 큐브의 적성도가 높은 인간이자, 모든 것을 통솔할 지휘관의 존재.


함선 소녀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들로서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 큐브 적성도가 높은 인간이 지휘하는 것과 함선 소녀들끼리만 움직이는 것은 가히 하늘과 땅 차이.


그리고, 그 큐브에 대한 적성도가 기괴할 정도로 높은 것이 바로 나, 되시겠단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데.”


“후후, 멍청한 것 같지는 않던데, 아니면 일부로 모르는 척하는 걸까?”


여성은 불쾌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걸어왔다. 뒤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내 뒤에 있는 건 동생,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할 생각 없니?”


“없어.”


“……어째서지?”


조금의 고민도 없이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니, 거짓 가면이 벗겨지고 그녀의 본색이 드러났다. 그 싸늘한 목소리에 절로 오한이 서렸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한 걸음 다가갔다.


“그 지휘관인가 뭔가 하는 게 된다면, 결국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거잖아.”


“상관없잖아. 너는 다치지 않고, 네 손을 더럽히지도 않는데.”


“……그래서 더 역겨운 거야.”


까드득, 그녀의 이가 갈리지만, 입은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덤덤하게, 나는 내 할 말을 이어갔다.


“자기 손을 더럽히기 싫어서 남의 손을 더럽히는 거랑 뭐가 달라? 나는 그런 거 하기 싫어, 나는 안전한 장소에서 맘 편히 바라보고, 결국 전장에 서는 건 그 함선 소녀 애들이라는 거잖아.”


“……하아.”


“……됐지? 이제 우리를 돌려보내 줘.”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빠악!


“커억…….”


“오, 오빠!”


복부에 느껴지는 통증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저 여성은 정확히 내 명치를 걷어찼고, 나는 꼴사나운 모습으로 엎드려 가쁜 숨을 내쉬었다.


“남의 물건 훔쳐 살던 거지새끼가, 꼴에 신념은 있다 이거야? 참…… 같잖아서.”


“흐으…… 그래도…… 싫어…….”


“……그래. 그럼 넌 하지 마.”


“꺄악!”


“자, 잠깐!”


쓰러진 나는 저 멀리 눕혀두고, 여자는 동생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북받친 분노에 얼굴은 붉어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네 오빠가 하기 싫다니까. 네가 해라.”


“자, 잠깐만!!!”


“왜, 하기 싫다며.”


그리고 철컥, 총이 장전되는 소리, 겨눈 건 내가 아닌 동생.


“하, 할게. 그러니까 동생만은…….”


같잖은 신념은 1분도 지나지 않아 꺾였다. 신념보다는 내 동생이 소중했으니까.


“아니야. 하지 마. 얘 시키면 돼.”


“내, 내가 할게. 그냥 내가, 아니,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헤.”


휙, 여성은 동생을 대충 내려놨다. 그 즉시, 동생은 나를 끌어안았고, 나는 최대한 살의를 담아 그녀를 바라보는 게 최선이었다.


“후후, 그래.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치는 일도 나쁘지 않으니까. 역시 현명하네. 그런데…….”


“꺄악!!!”


“뭐, 뭐 하는 거야!”


“이건 보험.”


“오, 오빠…… 괜찮아. 괜찮으니까…….”


“하지마…… 하지 말라고!!!”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여럿이 동생을 그대로 데려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애써 웃으며 나를 안심시키려는 동생에게 손을 뻗는 것.


그게 전부였다.





***




“그렇게 강제로 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열심히 구르다 여기까지 온 거야. 어때? 궁금한 건 전부 풀렸지?”


“…….”


“아쉬워, 이 버릇만 없었어도, 그 망할 놈의 큐브를 만질 일도 없었을 텐데.”


벨파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애꿎은 바닥을 내려다보는 게 전부였다.


가슴이 격하게 아려웠다. 정확히는 그를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죄스러워, 감히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참고로 동생은 연락이 안 돼. 혹시 내가 도망칠까 보험이란다. 잘살고 있다고는 하는데…… 그냥 연락하지 말고. 알아낼 생각도 하지 말래, 아, 그래도 편지는 보내면 경유해주겠다더라.”


탁, 마지막 술잔을 내려놓은 그가 쓸쓸히 읊조림과 동시에 휴대폰을 보여줬다. 경유 완료. 일주일이나 지난 문자였다.


지난번 보고 미소 지은 문자가 바로 저것이라, 벨파스트는 눈치챌 수 있었고, 또 아파했다.


그냥 모든 게, 너무나 미안했다.


“죄송합…….”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하지만 사과마저 가로막혔다. 지휘관은 그저 씁쓸한 미소를 그릴 뿐, 그녀의 사과를 원치 않았다.


“그래도 확실히,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는 이게 낫네.”


“주인님?”


“웃어.”


그와 동시에, 지휘관은 휴대폰을 들어 벨파스트 바로 옆에 섰다. 그녀가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그는 망설임 없이 셔터 버튼을 눌렀다.


-찰칵.


“이거 쥬스타그램에 올려도 되지? 한번 시작해보려고.”



“……네.”


갑작스레 찍은 탓에 어벙하게 나왔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때문에 벨파스트는 그 사진이 더없이 만족스러웠고, 또 다짐했다.


“주인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탁, 그의 손을 맞잡는다. 차갑지만, 상관없었다.


“제가 당신에게 가까워지려 한 이유는, 그저 비즈니스적인 이유였습니다.”


“알고 있었어.”


“그렇기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역겨워 말하기 힘들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내 마음이고, 이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이렇지 않고서는, 그가 안쓰러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선언합니다. 제가 당신을 가까이하는 이유는, 그저 제 사적인 감정입니다. 욕심이라 불러도 좋고, 위선적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물론 그를 개인적으로 원한 건 한참 전부터지만, 입 밖으로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웃었고, 나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의 힘든 일, 고된 일, 하다못해 잡다한 일이라도, 전부 저에게 맡겨주세요. 저는, 저는 당신의 메이드, 당신이 힘들면 기대어도 좋고,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다짐한다. 앞으로는 그의 힘이 되기로, 이 고난 속 유일한 안식처가 되기로.


“그게, 제 최선이니까요.”


“……그럴 필요 없고, 그냥, 이대로만 있어 줘.”


쥬스타그램에 업로드를 마친 지휘관은 벨파스트의 품에 안기며 그대로 잠들었다. 그녀는 슬픈 미소와 함께 그를 끌어안았고, 한참이나 이어졌다.




***




“아하. 이렇게 생겼구나.”


쥬스타그램에 업로드된 지휘관의 사진을 보며, 거대한 여성이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그녀의 취향에 딱 맞아떨어지는 외형인 까닭이었다.


“후후, 곧 만날 일이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아가.”









그날 이후, 벨파스트는 지휘관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작은 키는 어린 시절 제대로 먹지 못해 생긴 발육 부진이고, 그와 반면 되는 나름 탄탄한 체구는 사관학교에서 훈련으로 얻은 것.


처음 우리를 멀리한 이유는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학습한 것과 반발심에서 비롯된 맹목적인 거부.


업무 또한 마찬가지, 죽어도 하기 싫은 것과 더불어 강제로 시킨 일이라는 거부감에 최대한 대충 하려 하지만, 막상 신변을 모르는 동생 때문에 할 일은 전부 했다는 점에서 더욱이 짠하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벨파스트는 다짐했다. 이 불쌍한 사람의 기댈 곳이 되어주자고, 타고나길 여리게 태어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했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던 이 자그마한 아이를 감싸주자고.


그녀의 마음이 닿은 걸까. 지휘관이 속마음을 털어놓은 바로 다음 날. 벨파스트는 공식적으로 그의 비서함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는 이들은 있었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사실상 비공인일 뿐이었지, 벨파스트는 비서함과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공인과 비공인은 하늘과 땅 차이, 덕분에 벨파스트는 비서함의 권리와 함께 여러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주인님. 일어나세요.”


“…….”


이런 식으로. 


보기 힘든 그의 잠든 모습, 사실 그의 모습을 보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여튼 각설하고, 오전 6시, 일을 시작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에 도착한 벨파스트는 망설임 없이 방에 들어와 조심스레 그를 깨웠다.


예전에는 노크라도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도 않았다. 그냥 말없이 문을 열고, 슬쩍 미소를 그린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평소라면 준비를 마치거나 하다못해 샤워라도 하고 있어야 할 그였지만, 아직 눈을 뜨지 못했으니까.


“주인님?”


“…….”


벨파스트의 목소리에도 그는 일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순간 당황한 벨파스트가 그를 흔들어 깨울 뻔했지만, 살포시 들려오는 옅은 숨소리를 듣곤 이내 그만두었다.


이대로 깨워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벨파스트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걸 택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으니까.


잠든 그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조용히 생각했다. 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일전에 들려준 이야기를 되새기며, 벨파스트는 오늘도 의지를 다졌다. 


기구하고 불쌍한 운명을 타고난 불쌍한 아이다. 참으로 어리고 여려, 가여운 아이다. 부디, 이 아이에게는 앞으로 행복만이 가득하길 기원한다.


“…….”


참 어여쁜 기도와 동시에, 벨파스트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저 앳된 외모, 그러니까 어른이라고는 믿지 못할 귀여운 얼굴에 그녀는 눈을 떼지 못했다. 늘 표독스럽고 세상만사 귀찮다는 눈을 하고 다니지만, 지금만큼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귀엽고 순해 보이는 두 눈꼬리.


그뿐이랴, 겪은 고생이 무색하게 잡티 하나 없는 부드러운 피부와 오밀조밀 모여있는 눈 코 입, 칙칙해 보이지만 또 새로운 은발 곱슬머리까지.


어쩜 이리 귀여울까.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만진다. 그동안 받아온 스트레스 때문일까. 생각보다는 푸석했다.


배배 꼬기도 하고, 살짝 잡아당기기도 하고, 혹은…… 잠시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음…….”


하루에 머리를 두 번씩이나 감아서 그런가, 부드러운 향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머리를 여러 번 감는 건 그리 좋지 않은데, 나중에 일러둬야겠다.


다음은 눈, 다른 남자들보다 살짝 긴 속눈썹과 날카롭지만 또 날카롭지 않은 눈매.


처음에는 성깔이 있을 것 같았지만, 이젠 그냥 귀엽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애초에 그 성깔도 거짓된 모습이었고.


벨파스트는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올렸다. 참으로 부드러운 것이, 이대로 한 두 시간 정도는 만져도 상관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저 입, 불그스름한 작은 입술에 내 입술을 올릴 수 있다면 과연…….


“……핫.”


“……벨파스트?”


쿠당탕, 벨파스트는 현실로 돌아옴과 동시에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당황한 그녀는 뒷걸음질 치다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고, 그 소음에 지휘관은 눈을 떴다.


“이, 일어나셨습니까. 주인님.”


“……으.”


대충 손을 흔들어 보인 지휘관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옅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벨파스트가 대체 왜 자기 방에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씻고 올게.”


그리고 탁, 욕실의 문이 닫히고, 벨파스트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지금 대체…….”


당황과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 또한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그녀는 본인 스스로 굉장한 자제력과 절제력을 갖고 있다 자부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고작 뺨과 머리칼을 탐하는 행위에 사뿐히 깨져버리고, 심지어는 입술마저 노렸다.


의문, 큰 의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랑하냐, 라고 묻는다면 한참을 고민했지만, 아니라 답할 수 있었다. 벨파스트는 애초에 그에게 불순한 의도로 접근했으니, 그럴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후우.”


옅은 한숨을 내뱉은 벨파스트는 몸을 일으켰다. 우선 방 정리를 하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깨끗한 생각은 깨끗한 공간에서 나온다. 물론 이 방이 더럽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가만히 있으면 끝없이 몰려오는 생각의 늪에 뒤엉켜 영영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아. 그녀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청소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방이 비교적 깔끔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벨파스트의 집중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 더 컸다.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잡념이 없는 행동은 곧 최적의 결과를 내놓는다. 하나의 선순환이었다.


하지만 그 선순환의 가장 큰 문제는 순환이 끝날 경우, 찾아오는 거대한 공허감과 함께 그것을 메꿀 무언가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


방 정리를 끝내고, 벨파스트는 조용히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개인 방 겸 지휘관실로 사용하는 탓에, 이 공간에는 그의 흔적이 너무나 많았다.


서재를 빼곡히 채운 클래식 음반은 둘째치고, 보이지 않은 곳에 숨겨둔 작은 인형, 그리고 갈아입을 옷까지.


오직 그의 흔적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 자리는 오직 그의 공간이었다.


때문에, 벨파스트는 조금 낯선 감정 하나를 느끼고 있었다.


무어라 뚜렷이 정의할 수는 없었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으니까.


하지만, 해소할 방법은 알 것만 같았다.


조심스레 침소로 다가간 벨파스트는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예쁜 핑크색이 눈에 띄는 작은 병을.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향수였다. 그녀가 선호하는 물품이자, 지금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의 정체.


밖으로 나간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모항 내에서는 오직 그녀만이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다르게 말한다면, 이 향기는 그녀의 향기, 벨파스트의 향기라 말할 수 있었다.


“……후후.”


옅은 미소를 그려 보인 그녀는 지휘관의 베개에 망설임 없이 향수를 뿌렸다. 이로써, 이 베개는 벨파스트의 흔적이 남게 되었다.


단순하다 못해 유치한 행위였지만, 벨파스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과 만족감을 느꼈다. 아까의 알 수 없는 감정은 증발해 하늘로 날아간 지 오래, 미소는 차츰 커졌다.


그 커진 미소 이상으로, 욕망은 더욱더 커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옷장을 열어 지휘관의 제복을 꺼냈고, 향수를 꺼냈다.


살짝 거리를 두고, 칙, 이제 이 제복에는 그녀의 흔적이 남았다.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오직 그만이 가득한 공간에, 이제 벨파스트라는 이름이 남아 함께할 것이다.


-치치익.


샤워기가 꺼지는 소리. 벨파스트는 이내 미소를 지우고 제복을 바깥에 두었다. 이제 곧 옷을 갈아입은 그가 자신의 흔적이 남은 옷을 입는다고 상상하니, 참으로, 참으로 기분 좋았다.


그리고 끼익, 문이 열린다. 대충 가운을 걸쳐 입은 지휘관이 나오고, 그녀는 눈동자를 굴린다.


“나 옷 좀 줄 수 있어?”


“아, 네. 여기 있습니다.”


타이밍도 좋아라, 그녀는 꺼내둔 제복을 그에게 넘기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솔직히 말하면 옆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니, 우선은 그를 배려하기로 했다.






***






그 뒤로는 평범한 업무가 이루어졌다. 지휘관은 늘 그랬듯 서류를 보며 골머리를 썩였고, 벨파스트는 옆에서 조용히 그를 도왔다.


참으로 만족스러운 일상이었다. 앞으로 이런 나날만 펼쳐진다면 지휘관도, 벨파스트도 둘 다 즐거이 행복하게 지냈을 것이다.


“……사쿠라 엠파이어가, 투항한다고요?”


“응. 여기로 온다는데?”


당연하게도, 붉은 여우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의문에 의문, 그리고 의문을 거듭한 상황에 벨파스트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 어떤 방향으로 생각해보아도 전혀 납득할 수 없었으니까.


사쿠라 엠파이어는 사사건건 충돌해오던 사이였다. 더불어 그 충돌의 결과는 대부분 패배였으니, 벨파스트는 생리적으로 그들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후후후, 반가워요. 지휘관님.”


때문에, 벨파스트는 작금의 사태를 마주하며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격통을 참아내야만 했다.


“……네가, 아카기?”


지휘관이 두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이미 알면서도 재차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실제로 몰라서 던진 질문이었다.


여러 사유가 겹쳐 억지로 업무를 외면해왔던 만큼, 그는 자신이 무슨 진영의 누구와 대체 어떤 이유로 싸우는지 모른 채 단순히 일만 해왔으니까.


“그렇다. 지휘관. 아카기와 카가다. 잘 부탁하지.”


“……그래 뭐.”


이를 반대로 말한다면, 별 악감정도 없다는 뜻이었다.


“자, 잠깐만요. 주인님. 저들은 사쿠라 엠파이어입니다. 여태껏 저희와 충돌하고, 싸워온…….”


벨파스트가 당황하며 그를 부른다. 아카기는 슬쩍 조소를 그렸고, 카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저기서 그냥 진행하래.”


지휘관은 하늘로 향해 검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본디 현명한 편인 벨파스트는 그것이 무엇을 비유하는지 눈치챘고, 그가 상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통탄스러웠다. 앞으로 저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야 하는 벨파스트 본인으로서도, 그 어떤 명령도 거부할 수 없는 그의 모습도.


“지난 일은 잊고, 잘 부탁드려요. 벨파스트씨.”


분명 미소를 그리며 손을 뻗는 아카기였으나, 벨파스트에게는 그저 비웃음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실제로 비웃음이기도 했고.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여기서 거절하고 날뛰어봐야 결국 피해를 보는 건 지휘관이었으니까.


“……네. 잘 부탁드려요. 아카기씨.”


장갑에 가려진 도드라진 핏줄, 오직 그것만이 전부였다.





***




“운명이에요. 지휘관님과 저는 운명이라고요.”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1대1 상담 도중 아카기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도통 이해하기 힘든 말에 지휘관이 의문을 그리자, 그녀는 지휘관의 손을 맞잡았다.


“첫 만남 때부터 느꼈어요. 지휘관님과 저는 운명이라고!”


“……운명?”


“네! 바로 맺어질 운명 말이죠!”


확신만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에는 미미한 광기마저 느껴졌다. 지휘관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고, 아카기는 더욱이 큰 미소를 그렸다.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겪은 본능이었다. 수없이 많은 경험으로 갈고닦아진 하나의 감.


하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위험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정확히는 그녀의 눈빛에 가득 찬 확신이, 이상하리만치 따듯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카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란 사실을.


“난 운명 같은 거 별로 안 믿는데.”


“믿게 되실 거예요. 분명히.”


“……응. 그렇구나.”


툭툭, 펜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그는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다 재치고,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하나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기깔나게 싸우다가 항복해서 여기로 합류한 이유가 고작 나 때문이라고?”


“고작이라뇨. 지휘관님이 얼마나 뛰어나신 분인데, 바깥에서 본인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모르시나요? 반쯤 망해가던 이 모항을 살려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평가받을만해요.”


“그럼 내 능력을 보고 왔다는 건가?”


“아뇨아뇨. 능력은 둘째죠. 그냥, 그냥 지휘관님 때문에 온 거에요.”


지휘관은 벽을 보고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칭찬만이 돌아온다. 평소 자존감이 높지 않은 그로서는 약간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음…… 근데 너희 우리 애들이랑 사이 안 좋다며, 그래도 괜찮아?”


“후후후, 상관없답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카기는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끈적한 욕망과 애정, 그리고 사랑을 담아 지휘관의 뺨을 다잡았고, 이내 속삭였다.


“앞으로 저를 빼고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건, 조금 자제 부탁드려요? 후후훗.”


물론 별 반응이 있지는 않았다. 세상 고생해온 지휘관에게 있어, 이런 일은 딱히 두려운 축에도 속하지 못했으니까.


“아, 부탁 하나 해도 될까.”


그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했다. 손과 발을 가만두지 못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뭐든지요~”


거절할 이유도, 도리도 없는 아카기는 당연히 승낙했고, 지휘관은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뗐다.


“그……꼬리 만져봐도 돼?”


“아하♪”


초롱초롱한 눈빛과 함께 나오는 답지 않은 귀여운 목소리. 아카기의 눈가가 호선을 그렸다.


늘 로열 네이비의 아가씨들만 보던 지휘관의 입장에서, 아카기는 참 흥미롭고 신비한 존재였다. 특히나 저 꼬리가.


아카기 또한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다. 첫 만남 때부터, 그는 꼬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여기요. 얼마든지 만지셔도 좋답니다?”




“……실례할게.”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묻어나왔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조심스레 아카기의 꼬리에 손을 뻗은 지휘관은 이내 부드러운 감촉에 놀랐고, 아카기의 눈을 마주했다.


웃고 있었다. 아니, 웃는다는 걸로는 무언가 부족했다. 마치 자신의 무언가를 충족한 듯한 그녀의 표정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렇게…… 꽉 끌어안으셔도 좋아요.”


그리 말하며, 아카기는 9개의 꼬리로 지휘관을 덮쳐버렸다. 잠시 당황한 지휘관이었지만, 이내 그 포근함에 휩쓸려 금방 잊어버렸다.


난생처음 겪는 신비하고도 편안한 기분, 지휘관은 분명 즐거워하고 있었다.


“……신기해.”


“후후, 그렇죠?”


아카기는 자연스레 지휘관을 눕혔다. 꼬리 하나는 머리를 받치고, 일곱 개는 몸을 감싸고, 남은 하나는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평소 수면 시간이 적었던 지휘관은 자기도 모르게 졸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졸리다면, 이대로 주무셔도 상관 없답니다. 이 아카기가 곁을 지키고 있을테니, 지휘관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


늘 무거운 책임감을 달고 살아온 그에게 와닿은 걸까. 몸을 일으키려던 지휘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듣고 팔에서 힘을 빼버렸다.


그리고는 하나, 둘, 셋. 시간이 지날수록 지휘관의 눈은 차츰 감기기 시작했고,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쎄액, 쎄액, 울려 퍼지는 규칙적인 숨소리.


“후훗, 후후훗, 후후훗.”


조용히 울려 퍼지는 아카기의 웃음소리.


“……하.”


끼익, 하고, 벨파스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


“어머, 안녕하세요. 로열 메이드의 메이드장님.”


“…….”


벨파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리고 적의를 잔뜩 담아, 그녀를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


“지금은 지휘관님이 주무시니, 조금 이따 찾아오시는 게 어떨까요?”














불안했다. 너무나 불안했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불안감은 뇌리에 박혀, 벨파스트를 마구 괴롭혔다.


사쿠라 엠파이어는 영악하고, 또 교활했다. 비록 얼굴은 웃고 있을지언정 그 아래 감춰진 본심 결코 깨끗하지 않을 것이라,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벨파스트는 아카기가 지휘관에게 무슨 수작을 부릴까 걱정되었고, 불안은 곧 생각으로 이어져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까. 약하고 여린 지휘관님의 마음을 후벼파는 못된 짓을 하지 않을까. 혹시나 지휘관님을 해치거나 하지는…….


탁,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벨파스트는 어느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빨리, 최대한 빨리, 그 교활한 여우가 지휘관님께 감히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빨리.’


터벅터벅, 다급한 걸음걸이는 곧 그녀의 마음속에 내제된 불안감의 크기, 감히 상담실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벨파스트의 손은 이미 문고리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끼익, 문을 연 그녀가 마주한 광경은.


“지금은 지휘관님이 주무시니, 조금 이따 찾아오시는 게 어떨까요?”


아까와 마찬가지로 양껏 조소를 그린 아카기.


“…….”


정확히는 조소 그린 그녀의 꼬리에 파묻혀 편안히 눈을 감은 지휘관의 모습.


수없이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지만, 가장 큰 감정은 단연 ‘불쾌’였다. 저 추잡하고 역겨운 사쿠라 엠파이어의 품에서 잠들어있는 지휘관의 모습이 너무나 불쾌해, 감히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시는 거죠? 주인님에게 감히 무슨…….”


그렇기에 벨파스트는 불쾌감의 근원인 아카기를 지휘관으로부터 때어놓으려 했다. 저 가증스럽고 역겨운 존재를,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한 거다.


물론, 아카기는 그녀의 말을 순순히 따라줄 인간이 아니었다.


“언성을, 언성을 높이지 마세요. 벨파스트씨. 지금 상황이 안 보이시나요?”


“……뭐라고요?”


갑작스레 검지를 치켜올리며 내뱉은 소리였다. 그 어이없는 모습에 벨파스트가 의문을 제기하자, 아카기는 올렸던 검지를 슬쩍 아래로 내려 답을 대신했다.


“주무시고 계시잖아요. 지휘관님이.”


“…….”


맞는 말이었다. 지휘관은 지금 아카기에게 안겨 그 어떤 때보다 편안한 표정으로 잠을 청하고 있었으니까.


벨파스트도 한 번 본 적 있는 표정이었다. 일전에 술을 마신 뒤, 자기 품에 안겨 잠들 때의 그 모습.


“……네. 주무시고 계시네요.”


그렇기에 더없이 짜증 났다.


자신은 저런 표정을 보는 데 거의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어째서, 저 교활한 여우는 사실상의 첫 만남부터 대체 왜.


분명, 저 표정은 나만이 알아야 하는 건데.


“그러니, 주인님의 비서함인 제가 직접, 방으로 옮겨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비켜주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분노를 잔뜩 머금은 목소리였다. 당장이라도 저 여우를 쫓아내고 싶지만, 그랬다간 그가 깨어날 것이 자명한 상황인지라, 벨파스트는 최대한 억누르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당연히 그 사실은 아카기도 알고 있었고, 아카기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벨파스트도 알고 있었다.


“후훗, 후후후.”


조용히 눈을 감은 아카기는 지휘관을 감싼 채로 몸을 일으켰다. 과거 로열을 공격하던 그 흉포함은 어디로 간 건지, 그녀의 손길은 부드럽다 못해 자애로웠다.


그리고 조용히, 아카기는 감은 눈꺼풀을 치켜올려 벨파스트와 눈을 마주했다. 이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붉은색, 푸른색, 상반되는 둘의 눈동자가 뒤섞인다. 분노와 여유, 정색과 웃음, 로열 네이비와 사쿠라 엠파이어.


달라도, 너무나 다른 두 존재, 절대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두 여자, 하지만 그 아래 본질은 똑같은 하나.


아카기는 웃고, 벨파스트는 더더욱 표정을 굳힌다. 시간은 흐르지만, 둘의 시간은 여전히 멈춰 흐르지 않는다.


“제가, 직접 옮길게요. 메이드장님은 저기 소파라도 정리하는 게 어떨까요?”


유독 ‘제가’라는 단어를 강조한 아카기가 말했다. 배려를 빙자한 모욕적인 발언에, 벨파스트는 약간 거친 말을 내뱉었다.


“헛소리하지 마시죠. 이런 일은 당연히 비서함인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이쯤되면 서로 존댓말을 유지하는 게 기적이었다. 벨파스트의 장갑에 가려진 핏줄은 도저히 셀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아카기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흐음…….”


“……읏.”


아카기가 조심스레 꼬리를 하나 거두니, 지휘관의 옅은 신음이 울려 퍼졌다. 벨파스트의 동공이 살짝 커졌고, 아카기는 눈가에 호선을 그렸다.


“아무래도 전부 치워버리면 그대로 깨실 것 같은데 말이죠. 최근 굉장히 피로해 보이시는데, 상관없으신가요?”


“…….”


응당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지휘관은 최근 많아진 업무량 덕에 오늘 늦잠을 자버릴 정도였으니까.


더불어 잠든 그를 깨운 건 다름 아닌 그녀 본인, 그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정해졌다. 아카기는 지금 행하는 행동에 명분을 얻었고, 벨파스트의 말을 무시할 권리를 얻었다.


“후후후, 메이드장이라는 사람이, 주인님의 안전과 기분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리 말하며, 아카기는 다시금 꼬리를 덮었다. 지휘관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고, 벨파스트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여기서 더 밀어붙여봤자 우기기밖에 안 될 거다. 벨파스트는 그 사실을 깨달았고, 아카기는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당연하지만, 방을 몰라서 제가 가지 못할 거라는 핑계는 대지 마세요. 아주 짙은 냄새가 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탁, 아카기가 한 걸음 내디딘다.


“그쪽의 향수로도 감출 수 없는,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


벨파스트는 이를 강하게 악물었다. 치부를 들켜 부끄러운 게 아니라, 반박할 말이 없어 얌전히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초라해,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냥 싫었다. 이제 확신했다.


눈앞의 교활한 여우와는, 앞으로도 평생 가까이할 수 없을 거란 사실을.


“그럼, 먼저 갈게요.”


그 말을 끝으로, 아카기는 저 멀리 사라졌다.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는 경쾌하기 짝이 없었고, 또 모욕적이었다.


-쾅!!!


“하아……하아…….”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던 벨파스트는 지휘관이 사라지기 무섭게 책상을 내리쳤다. 함선 소녀의 압도적인 힘에 책상은 가루가 되어버렸지만, 벨파스트는 자기감정을 다스리느라 바빴다.


불쾌하고, 밉고, 싫었다. 감히 사쿠라 엠파이어에게 그를 빼앗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잠든 지휘관은 그녀의 품에서 편안함과 안정을 느끼고 있었고, 그건 벨파스트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짜증나, 싫어, 역겨워, 가증스러워, 불쾌해.’


불안감에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도리어 패배를 인정하는 것만 같아 더욱이 싫었다. 분명 이동하는 내내 그 가증스러운 미소와 함께해야 했을 테니.


“……사쿠라 엠파이어.”


박살난 책상을 청소하며, 벨파스트는 조용히 생각했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뭔가 필요하다고.





***





“후훗, 후후훗.”


어지간히 즐거운 모양일까. 지휘관을 침대에 조용히 눕혀놓고 방으로 돌아온 아카기는 연신 웃기 바빴다. 평소 보여주던 불안정하고 무언가 흔들리는 그런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행복해 그려 보인 순수한 미소였다.


“그래서, 만족스러운 대화였습니까. 언니.”


“그럼, 우리 카가도 빨리 지휘관님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텐데. 재워버린 탓에 그러지 못한 게 참 아쉽네.”


아카기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들뜬 목소리완느 달리 카가는 영 관심이 없는 듯 대답 대신 눈을 감았고, 아카기는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어찌나 귀여우신지……아아. 정말, 평생 이 아카기 곁에 두고 싶어, 아무한테도 양보하지 않을 테야.”


“정말 투항하고 여기로 올 정도의 가치가 있는 남자인가?”


“카가도 곧 알게 될 거란다. 지휘관님의 가치를.”


그녀의 확신 어린 말에도, 카가는 별생각 없다는 듯 방을 나섰다. 사라져가는 카가의 모습을 보며, 아카기는 그저 조용히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나라의 위상과 위세를 높이기 위해, 상부는 지휘관에게 사쿠라 엠파이어를 무조건 받아들일 것으로 명령했다.


상부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미증유의 사태였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였던 존재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다? 수락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물론 그들이 고개를 숙인 이유가 단순히 지휘관 때문이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말 그대로 조금일 뿐, 윗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을 받아들였을 때 얻는 이익에 눈이 먼 것도 있지만, 어차피 지휘관은 상부에게 있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으니 딱히 의미 없다고 생각한 거다.


그렇기에 우리 잘 나신 윗사람들은 지휘관에게 추가로 한 가지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자, 지휘관님. 여기 말차랍니다? 방금 막 다린 것이니, 한 번 입에 대보심이…….”


“지휘관, 코트 소매가 구겨졌지 않은가, 잠깐 기다려 봐라.”


“……응. 고마워.”


사쿠라 엠파이어가 모항에 빠르게 자리 잡도록, 정확히는 그들의 목적인 지휘관과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하루에 최소 시간을 정해 붙어있기를 명령한 거다.


덕분에 아카기와 카가, 그리고 사쿠라 엠파이어 세력은 지휘관과 빠른 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에 대해 별 신경 쓰지 않던 카가조차 어느새 그와 떠들기를 즐길 정도로, 굉장히 급진적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이 지휘관과 가까워질수록 로열 네이비 내부에서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이 상부에서 떨어진 명령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대체로 이건 좀 너무하지 않냐는 의견이 주류였다. 최근 들어 그나마 나아졌으나, 평소 지휘관의 모습은 남들에게 하등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이미지였으니까.


로열의 함선소녀들은 그가 상부의 명령도 가볍게 무시할 것이라 믿었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떤 때보다 상부의 명령을 열심히 따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적잖게 실망한 이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 이 난잡하고도 혼란한 상황을 아울러 본 벨파스트는, 가슴이 아려왔다.


아니, 정확히는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그를 변호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지휘관의 아픈 과거를 꺼내놓아야 하기에 벨파스트는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넌지시 지휘관님이 상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무슨 이유라도 있지 않을까요. 하며 슬쩍 변호의 말을 꺼내 보아도, 여론을 뒤집기에는 중과부적, 딱히 나아지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뜨겁고 아려 답답했지만, 지금 그녀의 오장육부를 쑤시는 건 따로 있었다.


“아카기, 꼬리 만져도 돼?”


“……우후후, 당연하지요.”


너무나 가까워진 둘의 거리, 미소 짓는 아카기, 그리고 그런 아카기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지휘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자꾸만 지끈거리고, 뜨겁고, 부글거려 도저히 참을 수 없고, 저 여우가 미워서, 싫어서, 자꾸만 화가 나서.


가증스럽고 역겹다. 짜증 나고 울분이 터진다. 주인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든 것도 화나는데 그 빈 자리를 채우려고 하는 저 교활한 여우가 너무나…….


“……하아.”


옅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부여잡는다. 최근 들어 이런 식으로 감정에 휩쓸리는 일이 잦아져, 자꾸만 자신을 잃고는 한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그날, 교활한 여우가 지휘관님을 품에 안고 가는 걸 눈앞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했을 그때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날 이후로 마음속 깊이 다짐했으니.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 본디 냉철하단 소리를 들어왔었는데, 나도 많이 달라진 걸까.


후우, 다시금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어 올리니, 지휘관과 그 여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


스멀스멀 기어 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또다시 잡아먹힐 뻔했지만, 재빨리 정신을 붙잡았다.


그래. 괜찮다. 어차피 나는 저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비장의 카드를 손에 쥐고 있으니.


조심스레 휴대폰을 켜 쥬스타그램, 그중에서도 주인님의 계정으로 들어간다. 접속하는 즉시 나를 반겨주는 사진 하나, 나와 그가 나란히 찍힌 사진.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아무것도 없는 계정에 존재하는 건 오직 나와 그 단둘, 더없이 만족스러운 상황.


이뿐이랴, 그의 아픔을 품어줄 수 있는 것도 오직 나 하나다. 언뜻 보기엔 그냥 무뚝뚝해 보이지만, 그는 아직 작고 여리고, 약한 아이니까.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걸음을 옮긴다. 마음속 잔뜩 들끓던 무언가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차피 밤에는 그와 단둘이 있을 명분이 생기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띠링.


그렇게 다짐하며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휴대폰에 알람이 울렸다.


“…….”


난데없이 날아온 알람은 곧 불안으로 이어졌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화면을 켰고, 이내 표정을 와락 구기게 되었다.


그의 쥬스타그램에, 다른 사진이 올라왔으니까.


“하…….”


그나마 여우가 아닌 일러스트리어스와 주인님. 정확히는 멍하니 있는 주인님을 기습적으로 촬영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무언가 답답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가슴을 찔러,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





그토록 바라던 밤이 되었지만, 기분은 여전했다.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으니까.


이 가라앉은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는, 그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했다. 정확히는 그에게서 사쿠라 엠파이어를 떨어트려 놓아야 했다.


내 기분이 이토록 불쾌한 이유는 분명 사쿠라 엠파이어 때문, 문제의 근원을 때어놓는다면, 분명 괜찮아질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아마 지금 시각에는 지휘관실에 있을 것이라, 나는 단언했다.


“실례합니다. 주인님.”


이젠 노크도 없었다. 살짝 들뜬 마음과 함께 문을 열었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던 바로 그 순간, 바로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제 잘못입니다. 제발…… 제발 다이도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아니, 네 잘못 아니니까. 상관없어. 괜찮아.”


커피를 쏟아 자책하는 다이도와 무뚝뚝한 듯 다정하게 그를 위로하는 주인님의 모습, 참 바람직한 모습이자, 예전이라면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나는 아까와 비슷한, 아니, 완전히 같은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답답한 가슴, 지끈거리고, 짜증 나고, 울분이 터진다.


아까 사쿠라 엠파이어가 주인님께 수작을 부릴 때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느끼는 감정조차 동일했다.


그래. 나는 분명 로열에서 주인님을 욕할 때 짜증이 났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를 원망하는 그들이 미웠고, 싫었다.


이는 사쿠라 엠파이어가 그의 곁에 머물 때 느끼는 감정과 완벽히 동일했다. 특히나 그 여우가 수작질을 부릴 때, 그리고 아까 쥬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을 볼 때도…….


“……아.”


바로 그 순간, 내 머리에 번개가 내리쳤다.


사쿠라 엠파이어가 그의 곁에 있어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냥, 다른 여자가 그의 곁에 있는 게 불편했던 거다.


쾅, 하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과 함께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가슴은 뻥 뚫렸고, 나를 그토록 괴롭혀온 격통은 차츰 희미해져 이내 증발해버렸다.


왜 몰랐을까. 내 가슴을 찌르는 격통의 정체는 바로 질투였다는 걸.


그 여우년이 주인님께 꼬리치는 것에 질투하고, 일러스트리어스가 그와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에 질투하고, 다이도가 그에게 위로받는 사실에 질투한다.


질투는 원망의 감정, 그 원망이 비롯된 까닭은 바로.


“아, 왔구나. 벨파스트.”


눈이 번쩍 뜨인다. 귀가 열린다. 이 세상에는 오직 나와 그만이 존재한다.


번쩍 뜨인 눈으로 그를 마주한다. 활짝 열린 귀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뻥 뚫린 코는 그의 체취를 맡는다.


아아, 그래. 내가 느끼는 질투의 근원, 내가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이유는.


저 작고, 여리고, 나약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지켜주고 싶고, 가녀리고, 무르고, 아픈 과거를 가진 저 작은 아이가 내 품에 안겨 말했으니까. 그냥 이대로만 있어 달라고.


그러니까. 저 작고 가녀린 아이는, 오직 나만을 향해 말했다. 나만을, 나를, 나에게, 나한테, 나를 향해, 부탁했다.


그렇기에 저 아이는, 내 작은 아이는, 나의, 나만의, 오직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네. 반갑습니다. 나의 주인님.”


오직, 나만의, 작은, 주인님.


미소를 그린다. 가슴 아래 가득 채운 애정에, 불안과 근심은 더 이상 자리가 없었다.


도리어 차분해졌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진실에 다다르니,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없다.


생전 처음 느끼는 아찔한 감정이지만,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이게 바로, 사랑이구나.











“벨파스트. 무슨 일 있었어?”


보통 말을 하는 것보다는 듣는 걸 선호하는 그였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이는 그가 벨파스트를 편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있지만, 실제로 그녀의 행세가 많이 달라진 이유가 더 컸다.


사쿠라 엠파이어, 정확히는 아카기가 온 이후, 벨파스트는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냉철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눈치 없단 소리를 많이 듣던 시리우스조차 알 수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랬다. 벨파스트는 불안해하며 불쾌해했고, 이는 곧 행동과 표정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 불안이라는 감정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고, 도리어 평온하다 못해 완전히 표백된 것처럼 보여, 지휘관으로 하여금 조금의 걱정을 가져왔다.


“아니요. 별일 없었습니다.”


“……아니. 묘하게 차분해진 느낌이라.”


“굳이 따지자면 자신에게 조금 더 솔직해진 걸까요. 정말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단호하다 못해 싸늘한 느낌이 드는 대답에 지휘관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굳이 더 파고들 이유도 없고.


“아, 그나저나 나 슬슬 다과회에 한 번 가보려는데, 괜찮을까?”


대신 조금 좋은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상부의 명령 때문에 사쿠라 엠파이어에게 과도한 관심을 쏟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가 마침내 다과회에 참가할 의사를 내비친 거다.


나름 기념적인 소식, 평소의 벨파스트라면 분명 굉장히 기뻐했을 것이다.


“……아뇨. 이번 다과회는 영 별로일 겁니다. 개인적으로 추천해 드리고 싶지는 않네요.”


평소의 그녀라면.


벨파스트는 조용히 생각했다. 만약 그가 다과회에 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분명 귀엽고 여린 사람이니,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을 거야. 거기에 지휘관이라는 특수성도 있는데, 아마 여러모로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해.’


물론 그가 쿠키를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감상하는 건 더없이 행복하겠지만, 그건 오직 나만이 봐야 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다른 곳에 보내고 싶지 않아, 어째서 이 작은 아이를, 나만의 작은 주인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해야 하는 거지?


“……그래. 그러지 뭐.”


잔뜩 뒤틀린 발상 아래 나온 결론이었지만, 그 내막을 모르는 지휘관은 가볍게 수락했다. 벨파스트를 믿고 있기에 나온 대답이었다.


“대신이라기엔 조금 뭐하지만, 홍차를 내오겠습니다.”


“알았어.”


그리 말하며, 지휘관은 늘 하던 대로 대충 소파에 누웠다. 어차피 업무가 다 끝난 이상 추가적으로 무언가를 할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탁, 벨파스트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지휘관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솔직히 말해, 로열 네이비에겐 미안한 일이 너무 많았다. 상부의 명령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최근 들어 소홀히 대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불만이 많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별 신경 안 쓴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는 건 사실인지라, 그리 맘 편한 건 아니었다.


특히 벨파스트가 그랬다. 이름만 비서함이지, 제대로 된 일은 전부 아카기나 카가가 도맡고, 그나마 밤이 되어야 이렇게 둘만의 시간을 가졌으니까.


때문에 언제나 무시로 일관하던 다과회라도 참석하려 했지만, 벨파스트가 비추천하니 뭐, 그게 맞겠지. 지휘관은 생각했다.


처음으로 과거를 털어놓은 사람인 만큼, 그에게 있어 벨파스트는 이 모항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첫 만남이 조금 기괴하긴 했어도, 이젠 아니니까.


“하아…….”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니, 이제는 한숨이 나왔다. 그냥, 여러모로 싫었기 때문이다.


내려놓고 싶었다. 평생 간직해온 무거운 책임감을.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냥 모든 걸 내려놓고 편히 살 수는 없는 걸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무언가를 짊어지고 살아왔다. 물론 마땅한 책임이었지만, 너무 무거웠다.


쉬고 싶다. 힘들다. 그냥 아무나 나를, 누구라도 좋으니까 나를.


안아줬으면 좋겠다.


“홍차, 나왔습니다 주인님.”


허무와 탈력, 그리고 허탈감 아래 춤추던 지휘관을 부른 건 역시나 벨파스트였다.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고, 홍차와 책임감을 들어 올렸다.


“……응. 고마워.”


“…….”


티 나지는 않았지만, 벨파스트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그에게서 고맙단 말을 들은 게 얼마 만일까. 아니, 연속으로 들어도 기뻤을 거다.


그녀는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그의 얼굴을 살폈다. 참 귀여워, 저도 모르게 품에 껴안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색깔이 좀 붉네, 오늘은 좀 다른가 봐.”


“네.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내렸으니까요.”


지휘관은 대답 대신 홍차를 입에 대었다. 한마디 대답보다는 이게 더 확실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홍차가 지휘관의 목구멍을 넘어가는 그 순간, 벨파스트는 슬쩍 웃어 보였다.


“웃네.”


“후후, 메이드로서 주인님이 내온 음식을 드셔주시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죠.”


평소보다 더 점잖은 듯 깊은 미소를 지은 벨파스트는 조심스레 입을 손가에 가져다 댔다. 웃음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어지간히 기쁜 모양새였다.






***





“……흐아.”


순식간에 홍차를 비워버린 지휘관은 천장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한숨은 평소보다 배는 무거웠다.


다만, 벨파스트의 시선은 깨끗이 비워버린 컵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지휘관의 얼굴과 컵을 번갈아 바라보며, 무언가 만족한 듯 자기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벨파스트.”


“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나 잘 할 수 있을까.”


“…….”


“……아.”


벨파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지휘관을 자기 무릎에 눕혔다.


“제가 드릴 말씀은 딱히 없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시니까요.”


그리고는 슥, 벨파스트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약간 곱슬기가 도는 탓에  튀어나온 부분도 있었지만, 딱히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힘드실 때마다, 위로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


지휘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아픈 가슴을 달랠 뿐이었다.


“주인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냥, 이렇게만 있어 달라고.”


머리를 쓸던 그녀의 손이 조금 내려가 뺨에 도달한다. 따듯한 온기가 그의 차가운 뺨에 이어진다.


그녀의 온기가, 지휘관에게 닿는다.


“그러니, 주인님께, 오직 저의 주인님께, 저는 언제나 기댈 곳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벨파스트.”


“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약간 물기 어린 목소리, 벨파스트는 입꼬리를 올렸다.


“……벨파스트.”


뭔가 마음에 얹히는 게 있는 걸까. 지휘관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벨파스트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가 오직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에 약간 흥분했지만, 역시 잘 참아냈다.


“……나 좀 안아줘.”


“얼마든지요.”


마침내, 지휘관이 입을 떼고, 벨파스트는 그를 강하게 껴안는다.


꽈아악, 워낙 큰 가슴 덕에 지휘관에게 부드러운 감촉과 동시에 여체의 향기가 물씬 풍겨왔지만, 그보다는 사람의 냄새가 난다는 게 크게 다가왔다.


“알고 있어요. 뭘 하든 간에, 어차피 주인님은 여기로 오라는 사실을.”


지휘관은 말없이 벨파스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렇기에, 지금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





“우후후, 지휘관님. 반가워요. 오늘도…….”


이튿날, 손에 서류를 잔뜩 든 지휘관이 문을 열고 나가기 무섭게 아카기가 나타났다. 잔뜩 홍조가 달아오른 모습을 보아, 그와 만남을 말 그대로 학수고대 해온 모양이었다.


“네. 반갑네요. 아카기씨.”


“…….”


바로 옆에서 같이 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녀, 그러니까 벨파스트는 무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지휘관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대체 왜, 두 분이 같이 나오는 걸 까요.”


“비서함의 업무니까요. 조금 이른 아침부터 찾아간 탓일지 모르겠네요.”


아카기에게는 아니었다.


비웃음, 저건 분명 비웃음이었다. 웃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 벨파스트는 아카기를 비웃고 있었다.


여유마저 느껴졌다. 일전에 보여주던 불안과 근심이 아닌, 오직 여유.


“……그래요. 상관없어요. 자, 그럼 지휘관님? 어서 이쪽으로…….”


“아, 오늘은 벨파스트랑 볼 일이 있어서, 미안해.”


“……네?”


“말 그대로입니다. 우연히도 저와 지휘관님이, 그것도 단둘이서, 볼 일이 있네요.”


시시각각, 아카기의 표정이 썩어들어간다. 애써 웃고 있다만, 소용없었다.


다만, 지휘관은 보지 못했다. 바쁜 탓에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미안해, 오늘은 정말로 바빠서, 나중에 보자.”


탁, 지휘관과 벨파스트는 빠르게 발을 옮긴다. 아카기는 멍하니 그 둘을 바라봤고, 벨파스트는 이내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동자를 섞었다.


입 모양만 조용히 움직여 말한다. ‘내. 꺼, 야.’


그리고 아까와 다르게, 가능한 한 최대의 멸시를 담아 그녀를 크게 비웃는다.


“……하.”


둘은 곧 사라졌지만, 아카기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청소’할 필요가 있겠네.”














“세이렌의 완전 소멸 확인. 상황 종료입니다.”


-수고했어.


무뚝뚝한 듯 부드러운 한마디와 함께 지휘관은 눈을 감았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하아…….”


자조 섞인 한숨이 방을 가득 메운다. 혼자 있는 탓에 공간은 넓었지만, 자조와 자책감, 그리고 자괴감은 그 이상으로 충분했다.


손을 들어 쥐락펴락, 앳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거친 손을 가진 그는 조용히 생각했다.


오늘도 다른 누군가의 손을 더럽혔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뼛속 깊이 사무친 폭력에 대한 혐오는 커지면 커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타고난 천성을 고칠 수 없는 까닭에, 지휘관은 한숨을 내뱉었다.


차라리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한 성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못된 생각이지만 차라리 내가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하는 걸 즐기는 성격이었다면….


“아니.”


작은 체구에 걸맞지 않은 단호한 목소리였다. 만약 옆에 벨파스트나 아카기가 있었더라면 필히 놀랐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그건 아니야.”


이유 없는 폭력은 무언가를 훼손시키며 누군가를 상처 주는 행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그런 걸 즐기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 옳지 못한 행위니까.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평생 가까워지지 못 하리라, 나는 다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적어도 우리 애들은 그런 기색이 없어 보이니까.


다시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지휘관은 마음속에 여러 인물을 그려냈다. 많이 별나고 뭔가 숨기는 건 많아 보여도, 적어도 자신 앞에서 폭력을 즐기는 행위를 보여준 적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 만약, 누군가 사적인 감정을 참지 못해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면, 조금 실망할 것 같아 약간 슬퍼졌다.


그와 동시에, 참으로 모순적인 자신을 비난했다. 누군가의 물건을 훔치며 살아간 놈이 폭력은 싫다며 손가락질하는 모습이라니, 참.


그뿐이랴, 그날 들끓어 오르는 살의를 참지 못해 강제로 이 자리에 앉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누가 누구를 교화하고 욕하고 실망하는가.


“……참, 싫다.”


생각은 이렇지만, 근본을 바꿀 수 없었다. 본인부터가 글러 먹었지만 결국 자신은 폭력은 안 된다며 헛짓거리를 할 거고, 누군가가 폭력을 저지른다면 실망을 감출 수 없을 거다.


“……그만, 그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조를 멈추기 위해 지휘관은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발걸음은 처량하기 짝이 없었지만, 무사히 얼굴에 물을 끼얹을 수 있었다.


차가운 물을 맞아서 그런가, 아니면 몸을 움직여서 그런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는 건 분명했다.


최근 도벽이 줄어든 것이 그나마 나은 소식이었다. 정신이 나름 안정되어서 그런가, 일전처럼 대형 사고를 치는 일은 많이 없어졌다.


이는 벨파스트와 아카기의 도움이 컸다. 특히 벨파스트가.


다만, 둘의 사이가 영 좋지 않다는 건 나라도 알 수 있었다. 이 역시 특히나 벨파스트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나야 별 신경 안 쓴다만, 아무래도 사쿠라 엠파이어와 로열 네이비는 꽤 앙숙인 관계였다니까. 악수 한 번으로 끝날 사이는 절대 아니겠지.


“그나저나, 로열 네이비는 이글 유니온 말고 우호가 없었나, 갑자기 햇갈리네.”


억지로 관심을 꺼둔 탓에, 나는 국가간에 관계에 대해 전무했다. 그나마 연이 있는 이글 유니온 말고는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여태껏 싸워온 존재가 사쿠라 엠파이어라는 것도 벨파스트를 통해 알았을 정도니까.


“으…….”


나라에 관련된 귀찮은 생각을 해서 그런가, 이젠 머리가 아려왔다. 열심히 할 이유도, 명분도, 그리고 마음도 없으니 이내 그만두고 소파에 누워버렸다.


푹신하다. 아늑하다. 따듯하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모든 걸 내려놓는 날이, 어깨에 잔뜩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날이 정말 찾아올까. 나는 평생 여기서 썩어야 하는 걸까.


그나마 사람들과 섞여 나아졌다만, 너무나 싫다. 여기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혐오스럽다.


동생이 보고 싶다. 그날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우리 잘나신 윗사람들은 내 희생 덕에 잘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얼굴도 못 보게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그냥, 다 싫다.”


모든 걸 내려놓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침내 내게서 모든 책임이 사라진 바로 그 순간에, 누군가 나를 안아줬으면 좋겠다.


“지휘관님? 아카기에요. 혹시 들어가도 좋을까요~”


눈을 감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목소리, 물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들어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


“실례할게요. 지휘관님.”


역시나.


물론 싫다는 뜻은 아니었다. 벨파스트만큼은 아니지만, 아카기도 나름 믿을만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지휘관이었으니까.


“지휘관님. 이 아카기의 활약을 보셨나요? 부디, 부디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움찔, 지휘관의 몸이 약하게 떨렸다. 아카기가 함재기로 모든 걸 파괴하는 모습을, 지휘관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파멸적이었다. 아카기는 MVP를 받아도 손색없었으며, 말 그대로 승리의 일등 공신이이라 불러도 무방했다.


때문에, 지휘관은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잘 봤어.”


지휘관에게 있어 이 말이 최선의 답이었다. 사실 대답도 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아카기를 지시한 건 바로 본인, 욕해봤자 누워서 침뱉기란 사실을 본인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후후, 역시 그렇죠?”


하지만 지휘관에게 나름 칭찬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한 걸까. 아카기는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아홉 개의 꼬리가 요동친다. 가만히 눈을 감은 지휘관을 보며, 그녀는 충족감과 만족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정말, 지휘관님의 지휘 능력은 대단한 거 같아요. 제가 여기 온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언제나 감탄하게 된다니까요?”


칭찬이었지만, 그에게 있어 지휘 능력은 딱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분은 아니었다. 지휘관은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아아, 정말 다행이에요. 지휘관님을 만난 건, 역시 운명이 맞아요.”


“그럼 다행이네.”


와중, 북실거리는 아카기의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의 지휘관이라면 꼬리를 만져도 되느냐 물었겠지만, 여러 생각으로 기분을 잡친 오늘은 아니었다.


“아, 지휘관님. 부탁 하나 드려도 좋을까요?”


“어떤 거.”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아카기가 눈가에 호선을 그리며 질문을 던졌다. 지휘관은 당연히 승낙했고, 아카기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전력 체크를 하기 위해 로열 네이비와 연습전을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말이야 번지르르하지, 그냥 최근 벨파스트의 행적이 마음에 안 들어 한 판 싸우고 싶다는 뜻이었다. 겸사겸사 다른 해충도 처리하는 건 덤이고.


그녀는 본디, 질투가 많았으니까.


“아니, 안 돼.”


“지휘관님?”


“싸우지 마. 그런 거 싫어.”


하지만 돌아오는 건 유례없이 싸늘한 목소리, 처음 듣는 차가운 목소리에 아카기의 동공이 심하게 축소되었다.


“안 그래도 싫은데, 우리끼리 또 그래야 해?”


“……아하.”


순간 당황한 그녀였지만, 짧은 문장 세 개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눈치가 빨랐으니까.


하지만 그 찰나에, 아카기는 더더욱 재밌는 생각을 해버렸다.


“제가 실언을 해버렸네요.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은데 굳이 치고받고 싸우며 감정의 골을 넓힐 필요는 없죠. 후훗, 역시나, 참 현명하셔.”


“…….”


그러고는 잠시 정적, 지휘관은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숨소리만 내뱉었다.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 호흡을 깊이 내쉰다는 증거였다.


아카기는 그런 모습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행여나 자신의 흥분된 숨소리의 그에 날숨이 묻히지 않도록 조심스레 가다듬었다. 이런 모습을 본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우후후, 조용히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귀여워. 보는 것만으로도 화상 입을 거 같아…….”


도리어 욕망을 배출하기 시작했지만, 지휘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라?”


“쌔액……쌔액…….”


정확히는 잠들어서 반응하지 못했다는 것이 옳았다.


“후후후, 참, 피곤하시면 미리 말씀하시지.”


활짝 웃어 보인 아카기는 지휘관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솔직히 말해 이 상태 그대로 아무도 모르는 외딴곳에 숨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어떻게든 참아냈다.


역시 본인의 선택을 받는 것보다 짜릿한 건 없으니까.


그러고는 침대로 직행, 역시나 무릎 위에 눕혀두곤 깨어날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는 것도 분명 행복하겠지만, 지금은 재밌는 일을 구상해야 하니 시간이 없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저만의 지휘관님.”


그 말을 끝으로 탁, 문이 닫히고, 그녀는 조용히 머리를 굴린다.


“지휘관님은 폭력, 정확히는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걸 싫어하시니까…….”


하나, 둘, 셋. 퍼즐이 짜 맞춰지고, 그녀는 비릿한 미소를 그린다.


“후후훗, 재밌겠네.”














“……휴가?”


-그래. 이 정도로 고생했으니, 한 번 쉬어도 좋네.


늙은이 특유의 쭈글쭈글한 목소리는 내 마음도 쭈글쭈글하게 만든다. 특별히 선심 쓴다는 듯 날아오는 저 말투가 특히나.


억지로 앉혀놓곤 저게 할 소린가. 마음속 격한 무언가가 양껏 끓어오르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나저나, 아직도 평어인가? 지금 자네가…….


그나마 은근슬쩍 말을 놓아 소소한 복수를 하며 심신을 달래는 게 전부였다. 추잡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이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수고해.”


그리고 탁,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생각 없이 던진 말은 아니다. 저들이 내 동생을 인질 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나를 귀중한 인재로 여긴다는 뜻이니까.


실제로 고분고분 적당히 선만 안 넘으면 날 막 대한 적은 없다. 거기에 이젠 무시할 수 없는 위치까지 올랐으니까. 동생을 들먹였다간 괜한 반발심만 더 키운다는 걸 모르는 인간도 아니고.


물론 그래봤자 엄연히 명령받는 입장인지라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지금쯤 꺼진 화면을 보며 열심히 분개하고 있을 거다. 자기보다 최소 두 배는 어린놈에게 반말 듣고 말도 끊겼으니 기분 잔뜩 잡쳤겠지.


특히 우리 잘 나신 윗사람들은 격식 차리기를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니까. 아마 세 배는 기분 나빠할 거다.


“하하…….”


난잡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열심히 자기 위로했더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이대로 한 삼 년만 반복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럴 순 없었다.


대신 기껏 얻은 휴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잠깐 머리를 굴렸으나, 딱히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생각나는 게 있다면 메탈 블러드에 가서 맥주라도 조금 먹어보고 싶었다.


원래 술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 탄산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메탈 블러드 산 맥주는 뭔가 다르다 들었으니까.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그냥 여기 있기 싫었다.


“흐아…….”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게 현실인데 열심히 살아야지.


다만 한 가지 고민되는 건.


“벨파스트랑 같이 가자 해야하나.”


여러모로 고마운 게 많은 사람이다. 벨파스트한텐 받은 게 참 많았으니까.


매일 아침 찾아와주는 것도 고마웠고, 늘 맛있는 홍차를 타 주는 것도 고마웠고,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도 고마웠다.


특히 최근 조금 불안정하다가 다시 침착해졌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연락이라도 한 번…….”


그리 말하며 휴대폰을 찾으려 몸을 일으켰지만, 어째서인지 보이지 않았다.


“……뭐지.”


아무래도 직접 나서야 할 모양인가 보다.





***





요즘 벨파스트는 기분이 좋았다. 표정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정말 좋았다.


우선은 지휘관과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게 그 첫 번째, 사쿠라 엠파이어 특별 관찰 기간이 끝나니 로열 네이비와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고, 자동으로 벨파스트와 말을 섞은 시간이 늘어난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벨파스트는 공식적으로 그의 비서함이고,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 아카기가 맹추격해오고 있다고는 하나, 그동안 둘이 함께 보낸 시간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최근 들어 아카기, 그러니까 벨파스트의 표현을 살짝 빌리자면 교활한 여우 년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거다.


눈엣가시인 존재였다. 감히 순진한 지휘관님 옆에 붙어 꼬리질 하는, 못되고 교활하고 역겹고 짜증 나고 가증스럽고…….


큼, 벨파스트는 헛기침과 함께 정신을 다잡았다. 섣불리 감정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하면,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부터 사쿠라 엠파이어에 대한 명목적인 증오를 드러낸 게 실수였다. 아카기를 싫어한다는 걸 들킨 순간부터, 그녀의 행동은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질투로 비칠 따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벨파스트는 주도권을 잡았고, 앞으로는 이 관계가 역전될 일은 영영 없다고 생각했다.


-띠링!


“어머.”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는.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주워들었지만, 그 행동의 대가는 처참했다. 지휘관의 쥬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을 본 벨파스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렸고, 이내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쿠당탕, 휴대폰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잔뜩 깨져 있었다.


“이 교활한 여우 년이…….”


까드드득, 이를 강하게 악문 벨파스트가 휴대폰을 주워 들 새도 없이 급한 발걸음을 옮긴다.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려 했지만, 이건 명백히 선을 넘었다.


머리끝까지 열 뻗친 벨파스트는 그녀를 찾으러 나섰다. 주인님을 우롱한 그 망할 년을.






***





“그래 카가, 그 멍청한 메이드는 곧바로 들여보내고, 지휘관님은 조금 시간 끌다 신호 주면 조심스레 들여보내 줘.”


“……알겠습니다. 언니.”


그리고 탁, 전화가 끊긴다.


“후훗, 후후후.”


음험한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단연 아카기였다. 사라진 지휘관의 휴대폰을 조작하며, 그녀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쥬스타그램을 올린 것도 그녀였고, 지휘관의 휴대폰을 훔친 것도 그녀였다. 벨파스트를 격분하게 한 사진의 정체는 재밌는 계획을 떠올린 그녀가 다시 방에 들어가 찍은 사진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계획된 행동이었다. 휴대폰을 훔쳤다는 걸 들켰을 때 받을 질책은 너무나 두려웠지만, 돌아올 보상이 너무나 거대했기에 그녀는 이런 짓을 벌였다.


전부 계획대로 진행 중이었다. 지휘관은 지금쯤 휴대폰을 찾아 나섰을 테니, 아마 이리로 올 거다. 아카기는 생각했다.


정확히는 벨파스트를 찾아 나설 거다. 그의 행동 원리는 무언가 일이 생겼을 때 홀로 해결하지 못하면 벨파스트를 찾아가곤 했으니까.


그리고 벨파스트는 분명 이리로 올 거다. 정확히는 그녀, 아카기를 찾으러.


조금, 아니 꽤 많이 질투 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상관없었다. 아니, 도리어 감사했다. 계획이 더욱 수월해졌으니까.


“후후훗, 후후후.”


아카기는 도저히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토록 쉽게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으니까. 더불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정확히는 그 메이드년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니, 기분이 안 좋을래야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여기 계셨군요.”


“어머~ 메이드장님이 여긴 어떤 일이시래요?”


생각하기 무섭게 등장한 그녀. 아카기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화답했고, 벨파스트는 표정을 구겼다.


방에 들어온 벨파스트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두 개의 휴대폰, 평소보다 배는 여유로운 목소리.


“지금 이게, 무슨 수작일까요.”


정리는 끝났다.


“어머, 무슨 문제라도?”


“지휘관님의 휴대폰을 훔쳐놓고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군요. 지휘관님이 이 모습을 봐야 하는데.”


“후후후, 오해가 있는 거 같아요. 그냥 잠시 빌린 건데, 너무 과민반응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은 없나요? 지적이고 냉철한 척 열심히 던 데,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신가보네~”


“말도 많으시군요. 사쿠라 엠파이어는 행동이 무서워 혓바닥이 긴 게 특징이었나요? 당장 내놓으시죠. 지휘관님의 휴대폰.”


상호 존대로 존중하는 듯했으나,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아카기는 웃고 있었지만, 벨파스트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눈동자에 서린 적의는 둘 다 동일했다. 살의와 질투, 그리고 분노가 정확히 삼분할 된 그것은 지휘관이 있다면 절대 나오지 않을 무언가였다.


“역겨워 죽을 것 같으니 제발 여기서 사라지면 안 될까요? 지휘관님도 기뻐하실 거 같은데 말이죠.”


주변 공기는 차츰 서늘해진다. 벨파스트는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디뎠고, 둘의 사이가  약간 좁혀졌다.



“내가 할 말인데. 누가 누구한테 역겹다니, 착각도 유분수지.”


주변 공기가 차츰 얼어붙어 간다. 아카기는 조심스레 한 걸음 내디뎠고, 둘의 사이가 약간 좁혀졌다.


그리고 동시에 탁, 둘은 이내 지척에 도달한다.


“자꾸 주인님 앞에서 꼬리 흔들지 마세요. 가증스러워 토 나오니까.”


“천박한 가슴 들이대면서 지휘관님 유혹하는 년이 할 말이야? 그나마 지휘관님이 냉정해서 다행이지, 참. 창녀가 따로 없네.”


“그쪽이 할 말일까요? 주인님만 보면 신나서 꼬리 흔드는 게 개새끼가 따로 없던데.”


“후후, 사람은 자기가 결핍된 부분을 욕하기 마련인데, 거울 보고 침 뱉는 중이구나.”


이젠 격식도 사라졌다. 벨파스트는 거칠게 머리를 넘기며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아카기는 최대한 크게 미소 그려 보였다.


“무섭나 봐? 굴러들어온 돌한테 통째로 빼앗길까 봐. 비서함이라는 년이 무능하니 이 꼴이지.”


빠지직, 메이드로서의 자부심을 공격당한 그녀의 마음속 무언가가 박살 난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아카기는 쐐기를 박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어 그 사진을 보여줬다.


“너는 이런 거 못 해봤잖아.”


잠든 지휘관의 볼에 조용히 키스하는 그 사진을.


“……하.”


이내 툭, 하고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는 그녀의 마음속에서만 울린 소리였지만, 차츰 뒤바뀌는 표정을 보며 아카기도 그녀의 마음속 무언가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짝!!!


“읏…….”


그리고 짝, 분노를 참지 못한 그녀가 아카기의 뺨을 후려치는 소리.


어찌나 강하게 때렸는지, 아카기는 입술이 터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바닥과 하나가 된 아카기는 쉽사리 몸을 일으키지 못했고, 벨파스트는 몸을 숙여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감히 주인님을……!”


“……후후. 고마워.”


“……뭐?”


하지만 벨파스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작스레 감사 표현을 내뱉은 그녀를 보며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빠직, 하고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설마, 제발.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을 붙잡아 뒤를 돌아본다. 설마, 아닐 거야. 이건 아니야.


“……크큭.”


아카기의 조소, 열려 있는 문. 낯익은 인물.


“……벨파스트?”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지휘관.









지휘관은 폭력을 싫어했다.


싫어하다 못해 증오했다.


증오하다 못해 혐오했다.


행하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





싸늘한 정적, 그 위를 춤추는 세 명의 사람.


“…….”


“주인님. 이건 제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흔들리는 동공은 비단 지휘관만의 것이 아니었다. 벨파스트는 그 이상으로 흔들리는 동공과 목소리를 갖고 있었으니까.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머리는 세차게 돌아간다. 작금의 사태에 최선의 답을 내놓으려 열심히 생각을 거듭하지만, 나올 리 없었다.


이 망할 여우가 주인님의 휴대폰을 훔쳐 이상한 사진을 올렸어요. 결국 감정을 참지 못한 제가 그만 무력을 사용해 버렸네요. 이딴 답을 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여우의 꾀는 너무나 간악했다. 지금의 벨파스트는 그 누가 보아도 가해자였고, 사적인 감정을 참지 못해 폭력을 사용한 무식한 인간이었다.


“으읏…….”


하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못한 아카기는 쐐기를 박기로 했다. 옅은 신음 한 번, 짧지만 강렬했다.


“……아.”


마침내 입을 뗀 그는 아카기를 향해 힘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벨파스트가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닿을 리 만무했다.


지척에 도달한 지휘관은 이내 천천히 손을 뻗어 아카기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어찌나 강하게 맞았는지,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뿐이랴, 살짝 부어있는 뺨은 입 내부에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마 안쪽에도 피범벅일 것이라, 지휘관은 생각했다.


“…….”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지휘관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벨파스트를 응시했다. 그녀가 어떻게든 해명하려 했지만,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으리란 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뒷말은 이어지지 못한 채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지휘관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벨파스트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답은 없었다. 그 어떤 말을 내놓든 역효과다. 우선은 상황을 벗어나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벨파스트는 이렇게 생각했고, 곧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제가 책임지고 의무실로…….”


“아냐. 내가 할게.”


그녀가 뻗은 손이 무색하게 말과 함께 끊겨버린다. 지휘관의 부축을 받아 아카기는 몸을 일으켰고, 저 멀리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카기는 슬쩍 고개를 돌려 조소를 짓는 걸 잊지 않았다. 일전 받은 그대로.


“아카기. 괜찮은가?”


어느새 가세한 카가까지. 벨파스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작은 방에 홀로 남은 벨파스트는 입술을 깨물며 애꿎은 발치만 바라봤다.


두말할 여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





“아카기. 괜찮아?”


“네. 별일 아니에요.”


입 안에서는 잔뜩 피 맛이 났지만, 달콤했다. 정확히는 완벽한 승리와 그 과실인 지휘관의 걱정이 너무나 달콤해, 아카기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홀로 남은 그 메이드년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는 거다.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를 악물까. 화낼까. 아니면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구를까.


사실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즐거이 감상할 자신이 있었으니.


“다 왔어.”


어째서 행복한 시간은 찰나처럼 느껴질까. 그와 몸을 맞대고 있는 지고의 시간은 금세 끝나 버렸고, 아카기는 침대에 누워야 했다.


“카가. 치료를 부탁해도 될까. 잠깐 혼자 있고 싶어서.”


“문제없다 지휘관.”


“미안해.”


걱정 어린 눈빛을 잔뜩 보낸 지휘관은 이내 미안하다는 말투와 함께 사라졌다. 탁, 문이 닫히고, 아카기는 가면을 벗는다.


“후후후, 참. 잘했어 카가.”


“…….”


아카기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픔 이상으로 얻은 것이 너무나 많아, 이 정도 고통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았다.


“아아, 그 망할 메이드년. 이제 분수를 알았겠지?”


비릿한 미소와 함께 아카기는 대충 지혈을 마치고 약을 발랐다. 사실 인간은 아득히 초월한 함선 소녀인 그녀에게 이 정도 상처는 정말 별일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 열등한 년한테 맞았다는 점에서 기분이 썩 불쾌했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무언가를 얻었으니 딱히 상관없었다.


“그런데 카가. 표정이 왜 그러니?”


잘 생각해보니 그가 떠난 이후로 카가는 단 한마디도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을 뿐, 그 점에 의문을 품은 아카기는 질문을 던졌고, 카가는 이내 입을 열었다.


“……뭔가. 뭔가 불안해서 말입니다. 그냥 뭔가가.”


“걱정하지 말렴. 지금을 노려 확실하게 잡으면…….”


“아뇨. 그게 아니라. 지휘관은 지금 그 메이드를 의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카가의 진지한 목소리에 아카기의 웃음이 멈췄다. 그녀의 불안이 무엇인지, 어림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휘관의 마음고생도 적잖을 텐데, 뭔가 안 좋은 일이…….”


“……그쯤 해둬. 카가.”



“……네. 알겠습니다. 언니.”


아카기는 불안을 묻어두길 택했다. 지휘관의 마음속 상심은 자신이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4일 휴가?”


오만한 생각이었다.





***





“후후후, 지휘관님. 실례할게요.”


발단은 이러했다. 방에 들어박힌 메이드년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아카기가 이른 아침부터 지휘관의 방을 급습한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방에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머무는 공기마저 차가워,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와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책상 한가운데 있는 편지 한 장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아카기가 재빨리 주워 드니,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미안해. 혼자 있고 싶어서. 휴가 좀 쓸게.


간결하지만, 치명적이었다. 아카기는 무심코 표정을 구겼고, 손에 들린 편지도 구겨졌다.


“……하.”


싸늘한 한숨이 방을 가득 메웠지만,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





이른 아침 메탈 블러드 항구, 한 사내가 깊은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긴다.


당연하게도, 그는 지휘관이 맞았다.


휴가를 사용한 지휘관은 본래 가보고 싶어 했던 메탈 블러드로 몸을 옮겼다. 일전에 벨파스트와 갈까 생각했지만, 지금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교차했다. 벨파스트가 그럴 리 없는데, 하지만 분명 벨파스트가, 근데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길래 그런 거지. 내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게 맞나.


복잡하게 얽히는 생각은 꼬이고 꼬일 뿐,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듭 그를 괴롭히는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지휘관은 잠시 머리를 식혀야 한다고 판단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해도 늦지 않으니까.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계였다. 애초에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지휘관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물론, 아무리 열심히 합리화 해도 도망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휴가는 접수됐고, 그는 메탈 블러드에 도착했는데, 어쩌겠는가.


“흐아…….”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뱉은 지휘관은 정처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충동적으로 온 만큼, 계획이 존재할 리 없었으니까.


그렇게 하염없이 터벅, 걸음을 옮긴다. 타고난 행세가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사람 자체가 초라해서인지, 걸음마저 구차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꺄악! 도둑이야!”


바로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고개를 든 지휘관에 들어오는 건 정확히 세 장면이었다. 재빨리 도망치는 소매치기범, 들고 있던 가방을 빼앗겨 멍하니 바라보는 거대한 여인. 그리고 소매치기를 목격하고 소리치는 젊은 여성까지.


난잡했다. 오자마자 목격한 광경이 이거라니. 나도 참 기구하구나.


그리 생각한 지휘관은 도망치는 소매치기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탁탁탁, 그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이내 지휘관과 부딪힌다.


바로 그 찰나, 지휘관은 자신의 특기를 살렸다.


탁, 본인은 눈치채지도 못했다. 능숙한 손길로 가방을 빼앗은 지휘관은 한숨을 내뱉었고, 소매치기는 가방 줄만 들고 저 멀리 사라졌다.


“이거, 그쪽 거 맞죠?”


옅은 한숨을 내뱉은 지휘관은 주인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여성에게 다가가 가방을 건넸다. 평소 경어보단 평어를 선호하는 그였지만, 이 여자는 왠지 경어를 써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거대했다. 말 그대로 거대했다. 키가 컸고, 머리 위에 쓴 챙 모자가 컸고, 키 차이 덕에 바로 눈앞에 보이는 가슴마저 컸다.


물론 비단 거대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그냥 본능적으로 존대해야 할 것만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훗, 참.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보답이라도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괜찮습니다.”


“사양할 필요 없단다. 여기는 처음 같아 보이는데. 내가 안내해 줄게.”


가볍게 거절하려 한 지휘관이었지만, 두 번째 제안은 꽤나 혹했다. 메탈 블러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정말 딱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결국 지휘관은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런 모습이 썩 귀여워 보여서일까. 조용히 웃어 보인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럼, 이제부터 그로세라고 부르렴, 아가.”





 

 



“아가……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아무리 어려 보인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더불어 우린 이제 첫 만남인데.

 

“아, 그래. 그런 것 보다는 이름을 묻는 게 우선이겠지. 이름이 뭐니, 아가.”

 

하지만 무슨 말을 하든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여러 인간군상을 봐온 내 감이 그렇게 말했다.

 

100%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거기에 솔직히 말해 저 여자, 그러니까 그로세씨와 굳이 입다툼 하기도 귀찮았고.

 

“벨.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요.”

 

“……이름을 말하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해도 좋단다.”

 

그래도 왠지 이름은 알려주기 싫었다. 심술은 아니었고, 그냥 싫었다.

 

“후후, 그래. 어차피 별 상관없지. 자, 가자꾸나 아가.”

 

“……아, 예.”

 

어차피 의미도 없었다.

 

 




 

***

 

 


 

컸다. 참 컸다. 내가 워낙 작은 탓에 나보다 큰 사람들은 질리도록 봐왔지만, 그로세씨는 그중 최고였다.

 

180? 190? 잘 모르겠다. 아무튼 컸다.

 

그래서 참 애매했다. 정면을 바라보면 가슴을 바라보는 모양새가 되고, 그렇다고 올려다 보기엔 목이 너무 아팠다.

 

“……그만 하세요.”

 

“후훗, 미안하구나 아가. 너무 귀여워서 말이야.”

 

더불어 그로세씨는 자꾸만 내 손을 잡으려 했다. 오늘 첫 만남인데 이러는 것도 이상했지만, 신장 차이가 워낙 큰 탓에 보기에도 영 이상했다.

 

마치 장 보러 나온 엄마와 사춘기가 와서 싫은 티 팍팍 내는 중학생 아들의 모습. 우리의 관계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메탈 블러드에는 어쩐 일이니?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맥주 먹어보고 싶어서요.”

 

“맥주? 아직 아가가…….”

 

“보기엔 이래도, 성인 맞습니다.”

 

짜증에 찌든 목소리였지만, 솔직히 별로 화나진 않았다. 애초에 그럴 기운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이젠 익숙했으니까.

 

그나마 앳된 티를 벗기 위해 운동을 좀 했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키는 작았고, 얼굴은 어린 시절부터 바뀐 게 없어 그대로, 결국 포기했다.

 

“미안하구나 아가. 괜히 콤플렉스를 쑤신 것 같아 영 마음이 편치 않네.”

 

“익숙해요.”

 

사과의 뜻이 날아왔지만, ‘아가’라는 단어를 고수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참, 왜이리 모순적일까.

 

“대신 밥이라도 한 끼 사줄게. 이럼 좀 나으려나?”

 

“그냥 적당한 식당 하나 추천해주시고 끝내죠. 솔직히 말하면 별로 유쾌하게 만난 인연은 아니잖아요?”

 

“아니지, 어차피 이 가방은 네가 없으면 잃어버렸을 물건이야, 그러니 이 가방 안에 있는 돈은 전부 너를 위해 사용해도 상관없단다.”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야. 정말 괜찮단다. ”


논리적이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은 그런 대답이었다. 이유야 있다만, 그래도 조금 일방적인 호의였으니까.

 

그래도 뭐,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

 

 

 

“마, 맛있어요.”

 

“역시 그렇지? 자, 하나 더 먹으렴.”

 

맛있었다. 그냥 소시지와 빵이었지만, 평소 먹던 것과 궤를 달리했다.

 

물론 벨파스트가 해준 음식이 맛없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소시지의 본고장을 따라올 수 없다는 거지.

 

“자, 아~ 해보렴. 아~”

 

“……제가 무슨 애도 아니고, 됐습니다.”

 

“후후, 거절하는 모습도 참 귀엽구나.”

 

그로세씨는 참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 자꾸 음식을 먹이려 한다거나 자기 음식을 덜어주는 등, 나를 챙겨주려 하는 게 느껴졌다.

 

물론 부담스러웠다. 우리가 이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그로세씨의 애정은 아직 무겁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상했다. 기껏 가방을 찾아줬다는 이유로 이런 애정을 보이는 게 말이나 될까. 따지고 보면 의심부터 해야 할 상황이다.

 

“일단 일단 밥부터 먹죠. 아직 시간 많으니까요.”

 

“……음. 아냐아냐,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단다.”

 

“네? 그게 무슨…….”

 

“새겨 두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야.”

 

그로세씨는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내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줬다. 당황해 몸을 뒤로 뺐지만, 한참이나 늦은 행동이었다.

 

“참, 놀라는 모습도 귀여워서.”

 

“놀리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된다면 참 미안하구나.”

 

“아, 아뇨. 미안해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조금 힘을 주고 말하니, 이번에는 우울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당황한 나는 팔을 내저으며 황급히 변명했다.

 

“시, 실망하지 마세요. 그런 거 아니니까.”

 

살짝 고개를 숙인 그로세씨의 모습을 보니 도리어 내가 미안했다. 그래도 길을 알려주고 밥도 사준 사람인데, 어느정도 장단은 맞춰줄 걸 그랬나. 생각도 들었다.

 

“아~”

 

“……?”

 

“아~ 하렴. 아가.”

 

비릿한 미소, 어느새 고개를 든 그로세씨의 입가에는 비릿한듯 자애로운 미소가 들어 차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거하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것에 불과했다.

 

“설마, 또 거절하는 거니? 자, 아~”

 

“……아.”

 

그냥 체념했다. 차라리 여기서 한 번 하고 끝내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입을 살짝 벌리고 있으니 입 안으로 음식이 들어왔다. 따듯했고, 또 부드러웠다.

 

음식 말고 그로세씨의 손길이.

 

“어때, 맛있니? 아가.”

 

반짝반짝, 답지 않게 잔뜩 빛나는 두 눈동자, 실망시키기는 싫었다.

 

“……네. 맛있네요.”



“아아, 참. 이토록 귀여워서는.”

 

참 애정 어린 눈빛, 동생이 보내던 애정과는 뭔가 다른, 그런 눈빛이었다.

 

그 애정 어린 눈빛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물론, 결코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

 

 

 

“그럼 식사대접 감사했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볼게요.”

 

“벌써 떠나려는 거니?”

 

“네. 가방 건의 보답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해서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뱉은 말이었다. 처음에는 영 탐탁지 않았지만,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특히 어른에게 받는 애정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지금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더 이상 민폐를 끼칠 순 없었으니까.

 

“괜찮은데, 그러지 말고 조금 더 같이 있자 꾸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솔직히 말해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아하.”

 

나름 수긍한 걸까. 그로세씨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침음을 흘렸다.

 

“네. 그럼…….”

 

“그럼 하나만 묻자, 앞으로 어디로 갈 거니?”

 

“딱히 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치안이 안 좋은데. 정말 홀로 다녀도 괜찮겠니?”

 

“제 몸 하나 간수 할 줄은 압니다.”

 

“무장한 사람들이 습격하면 어쩌려고.”

 

“그럼 그냥 죽죠 뭐.”

 

“으음……”

 

별 생각 없었다. 돈 많은 여행객을 납치한다는 소리는 자주 들었지만, 어차피 자기 몸 지킬 정도는 됐고, 정 안 되면 그냥 죽어도 상관 없었으니까.

 

“혹시 클래식 좋아하니?”

 

“……네?”

 

“마침 독주회 티켓이 두 장이나 있거든. 시간 괜찮으면 같이 가지 않을래?”

 

“……아. ”

 

“어머, 얼굴에 화색이 도는구나.”

 

표정을 감추지 못한 걸까. 그로세씨는 다시금 미소를 그렸다.

 

“굳이 억지로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지금 아가와 함께하려는 건, 그저 순전히 내가 즐거워서니까.”

 

“그, 그치만…….”

 

“네 눈이 너무나 쓸쓸해보여서 그래. 성인이라 해도 아직 어려 보이는데, 지금 네 눈에 깃든 쓸쓸함은 아가가 가질 법한 건 아니거든.”

 

“…….”

 

“아가. 외로워 보여, 애초에 혼자서, 그것도 계획없이 이곳에 온 거라면, 무언가 기분전환을 위해서가 아니겠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전부 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애써 강한 척하지 않아도 좋아. 힘들면 잠시 어른한테 기대고 쉬어가렴.”

 

그로세씨의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했다. 자신만만했으며 또 여유롭고, 부드러웠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어른스러웠다.

 

벨파스트나 아카기가 어리다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 달랐다. 뭔가, 더, 나를 안아줄 것만 같은 느낌.

 

그 말이 내 심금을 흔든 까닭일까. 아니면 사람의 인연이 필요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심신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했던 걸까.


 “손, 잡아도 좋을까요.”


나는 무심코, 말해버리고 말았다. 


“후후, 얼마든지 좋아. 아가.”


그로세씨는 웃었다. 여태껏 지은 미소 중 가장 환하게 웃어 보인 그녀는 나에게 손을 뻗었고, 나 또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더없이 따듯했다.

 

 

 

 

 






“표정이 영 좋지 않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니?”


“……뭔가 느낌이 이상해요.”


“응? 뭐가?”


“누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어요.”


뒤통수가 따가웠다. 괜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냥 뭔가 불안했다.


일종의 본능이다. 어린 시절 고되게 살아가며 습득한 감각, 대체로 정답이었다.


“기분 탓이겠지, 너무 신경 쓰지 말렴 아가.”


 대답은 부드러운 목소리, 단지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로세씨는 내 마음을 안정시켜줬다. 그래, 대체로 맞는 거지, 언제나 맞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로세씨는 직업이 뭐예요?”


그렇게 애써 외면하며 주제를 돌렸다.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고.


“내 직업?”


“네. 그로세씨는 평소 무슨 일을 하세요?”


문득 떠오른 의문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따지고 보면 지금은 평일의 대낮, 대부분의 직장인은 활보할 수 없는 시간이었으니까.


물론 그로세씨가 뭐 무직이라거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 안목과 관록은 나로 하여금 뭔가 기대감을 가져다줬으니.


“아, 내 직업 말이지.”


입가에 손을 옮긴 그로세씨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했다. 직업을 말하는 데 고민할 까닭이 있나? 하고 의문이 들 찰나에, 그녀의 입이 열렸다.


“지휘자. 그래, 지휘자란다.”


“지휘자……? 저, 정말요?”


“어머, 흥분했구나.”


“저, 저. 처음 봐요. 그로세씨 엄청 멋진 사람이었구나…….”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대단한 연주자를 통솔하는 지휘자라니, 상상만 해도 대단했다.


더불어 나는 평소 클래식을 즐겨 듣는 편이었으니까. 그 감정은 배가 되었다.


“후후후, 아가. 눈이 반짝거려. 클래식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네, 네! 저는 특히 바이올린이…… 아.”


너무 신난 걸까. 한창 바이올린의 멋진 점을 나열하는 순간, 내 입꼬리가 하늘을 뚫을 정도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너무 신났죠?”


“아냐 아냐. 정말, 정말 귀여웠던 걸.”


“……아.”


그로세씨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커다랗고 따듯해,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아아, 참 귀여워라. 아가.”


“애, 애 취급하지 마세요.”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었다.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뭔가 마음속부터 따듯해지는 느낌.


“사춘기려나. 그래, 뭐 상관없지.”


그리 말하며, 그로세씨는 가늘고 긴 손을 뻗었다. 역광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그녀의 손은 더더욱 눈부시게 느껴질 따름인지라,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후후, 가자꾸나, 아가.”


“……네.”



감은 눈과 함께 천천히 더듬거리며 그로세씨의 손을 맞잡는다.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건만, 어째서 이리 따듯하게 느껴질까.






***





그 뒤로는 평범한 시간, 정확히는 내가 누려보지 못한 시간이 흘러갔다.


“연주는 어땠니, 아가.”


“어, 엄청 재밌었어요. 베이스는 말할 것도 없고……특히 피아노, 피아노가 엄청 엄청이었어요.”


“푸훗…… 엄청 엄청이 뭐니.”


“아, 아 그러니까…….”


“아니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좋아.”



일평생 시궁창에서 굴러다니고 어른이 돼서는 새장에 갇힌 나로서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한.



“이게 뭐예요?”


“캔디 애플이란다. 한 번 먹어 봐.”


“……딱딱해요.”


“후후후, 그러니.”



평생 즐겨보지 못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데 그로세씨는 어떤 곡 제일 좋아하세요?”


“나? 흠…… 굳이 따지자면 역시 베토벤 교향곡 9번이지.”


“아, 합창 교향곡이요? 저도 잘 알아요! 기존의 형식적 틀을 깨트린 순수 기악곡으로서의 교향곡이라는 장르적 경계를 완전히 무너트린 획기적인 파격이었다고, 책에서 봤어요!”


“참, 우리 아가가 이토록 교양이 깊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구나.”


너무나, 즐거웠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만큼 빠르게 흘러가는 건 없다. 찰나처럼 느껴질 정도의 시간은 어느새 밤이 되었고,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무슨 걱정이라도 있니? 아가.”


“걱정은 원래 있었어요.”


“어머, 마음속에 묻어둔 게 많은 아이였구나.”


“…….”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털어놓아도 좋아. 그러기 위해 있는 시간이니까.”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약간 회의감도 들었고, 의문 역시 따라왔다.


“일단 감사 인사부터 할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란다. 오늘 아가와 함께한 시간, 참으로 즐거웠단다.”


“……그래서 아쉬워요.”


아쉬웠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끝난다는 게 너무나 아쉬워, 실망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제가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또, 한순간 고민거리를 잊어버린 나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었다.


그로세씨와 돌아다니며 나는 내 책임을 잊어버렸다. 늘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전부 내려놓은 채로 생각 없이 놀아난 거다.


난 지휘관이다. 동생을 위해 책임을 갖고 일해야 하는데, 내가 이토록 즐겁게 놀아나도 되는 걸까.


더군다나 나는 도망친 거다. 벨파스트와 아카기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고 무서워 도망친 건데.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흐음…….”


“지, 지금 무슨…….”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며 잠시 고민하던 그로세씨는 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순간 당황스러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여기가, 많이 무겁네.”


“네?”


“짊어진 게 참 많아 보인다고.”


“…….”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닌,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이상했다. 그로세씨 앞에만 서면 발가벗겨지는 기분, 무슨 생각을 하든 들키는 느낌이 들어 참 오묘했다.


“그러고 보니 묻지 않았구나, 아가는 직업이 뭐니.”


“아, 제 직업이요?”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결의를 다졌다. 딱히 숨길 이유도 없었고.


“믿지 못하시겠지만, 군인이에요.”


“아냐. 아가의 말이라면 뭐든 믿어.”


“……그거 감사하네요.”


조용히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애꿎은 허벅지를 두드렸다. 툭툭, 하고 노크하지만, 마음속 묵힌 체증은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


“그냥, 저는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 이렇게 놀아나도 되나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그래서 토해내기로 했다.


“인제 와서?”


“네. 우습지만 이제 와서요.”


“…….”


묵혀낸 고민을 대신 받아낸 그로세씨는 잠시 고민했다. 너무 무거운 질문을 던진 걸까. 약간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하나, 둘, 셋. 오가는 말 하나 없이 계속 시간이 흐르지만, 결코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더더욱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 그로세씨는 입을 열었다.


“왜 혼자 책임을 지려 하는 거니.”


“……네?”


“아가는 혼자가 아니야.”


그리 말하며, 그로세씨는 양팔을 벌려 보였다.


“내가 있잖니.”


“……저, 저희 만난 지 하루도 안 됐어요. 그런데 대체 왜.”


떨리는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눈가에는 어느새 살짝 눈물도 고였으며, 꽉 쥔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가. 솔직해지렴.”


바로 그 한마디가, 내 가슴을 꿰뚫었다.


사람을 원했다. 나를 안아줄 사람을 원했다. 지친 나를 안아줄 사람을 원했다.


때문에 일부로 바닥에 누워 벨파스트의 시선을 끌었다. 그래 놓고 두려워 친해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갔다. 나를 봐줄 사람은 안아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술을 핑계로 속마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벨파스트는 너무나 무서운 짓을 해버렸다. 아카기의 뺨을 때린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흉맹스러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갔다. 상사로서 부하를 책임져야 하지만 휴가를 핑계로 도망갔고, 지휘관의 책임을 내버려 둔 채 도망쳤고, 나라에서 도망쳤다.


그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나는 솔직하지 못했다. 외롭다. 내 기댈 곳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책임지기 싫다. 평생 짐을 짊어진 어깨는 이젠 다 닮아버려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안아줬으면 좋겠다.


“자, 안기렴.”


“…….”


그래서 깊이 안겼다.


따듯하고, 아늑하고, 부드럽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 뭐든 책임지지 않아도 좋아,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아도 좋아.”


들리는 목소리 역시 매한가지였다.


“때로는 쉬어가도 좋으니,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정말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저한테,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건데요. 저희 오늘 처음 만난 건데.”


“의심하지 마. 이 세상에는 나쁜 어른만 있는 게 아니니까.”


잠시 목이 메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하든 물기에 잡아먹혀 제대로 전달 되지 않을 것도 뻔했다.


“……고마워요.”


그래도 이 말은 하고 싶었다.













“으…….”


옅은 신음과 함께 눈을 뜬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따듯함과 포근함, 그리고 부드러운 감촉.


……부드러운 감촉?


“아, 일어났구나, 아가.”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는 내 머리를 불안으로 지배했다. 설마, 아니겠지, 안 되는데.


끼리릭, 잔뜩 굳은 고개를 돌려 걱정을 확신으로 바꾼다. 참 부자연스러운 몸짓이었지만, 날 껴안고 있는 여성은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그, 그로세씨?”


“그래. 불렀니 아가.”


웃고 있는 그로세씨, 잔뜩 당황한 나, 그 아래 같은 이불, 같은 베개, 같은 침대.


“…….”


“많이 피곤했겠지, 몸이든, 정신이든 간에 말이야. 이해해. 걱정하지 말렴.”


“아……아아…….”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는 막힌다. 이미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옷은 저기 잘 개어두었단다. 그냥 자기엔 너무 불편해보여서, 뭐 그리 조이는 옷을 입고 있니.”


슬쩍 고개를 돌려 예쁘게 개어진 옷을 보고,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 내 모습을 바라본다. 


얇은 셔츠에 반바지, 딱히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잘 때 편히 입는 건 당연한 거고, 딱히 부끄러운 차림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아……그, 그게…….”


다시금 고개를 들어 그로세씨를 마주한다. 보이는 건 입가에 드리운 여유로운 미소, 감정을 알 수 없는 노란색 눈, 그리고.


“그로세씨는…… 대체…….”


“아, 이거 말이니?”


그로세씨는 슬쩍 이불을 들춰 몸을 드러냈다.


속옷만 입어 아슬아슬한 본인의 몸을.


“난 잘 때 다른 게 있으면 불편해서 말이야.”


“시, 실례했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귀 끝까지 빨개진 나는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고, 그로세씨는 그저 조용히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





“정말 괜찮다니까?”


“아, 아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얼굴을 붉히는 게 전부일 뿐,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로세씨도 약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날 처음 만난 남자를 같은 방에서, 그것도 같은 침대에서, 속옷만 입고 같이 자는 걸까.


“오해하지 말렴. 아무나 들인 게 아닌, 아가가 너무 귀여워서 챙긴 거니까.”


“아, 아니…….”


내 속마음을 읽는 걸까. 이쯤 되니 머리도 살짝 아려왔다.


“그, 그래도 안 돼요. 아직 그런 사이도 아닌데 남자를 방에 들이다니, 이, 이건 그로세씨가 이상한 거예요!”


“후후, 남자라, 우리 귀여운 아가도 역시 남자라는 걸까.”


“당연하잖아요! 제가 키가 작고…… 얼굴이 앳되긴 해도 엄연히…….”


“아하, 그래……?”


비릿한 미소를 지은 그로세씨가 말했다.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낀 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붙잡혔다.


“왜, 왜 그러세요?”


“후우…….”


“흐읏……!”


내 얼굴을 붙잡은 그로세씨는 아무 말 없이 내 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갑작스레 들어온 간지럽고 뜨거운 느낌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고, 그로세씨는 더더욱 깊은 미소를 그렸다.


“자, 잠깐만요. 잠깐…… 히익……!”


그로세씨는 내 귀를 살짝 깨물어 또다시 바람을 불어 넣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아찔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꼴사나운 소리를 마구 쏟아냈다.


온몸이 찌릿찌릿한 느낌, 얼굴이 붉어진 건 말 할 것도 없고, 힘도 풀리기 시작했다.


“후후, 지금 모습만 보면 여자아이가 따로 없는데 말이야.”


힘 풀려 쓰러지는 몸을 받아준 건 역시나 그로세씨였다. 화낼 힘도 없었다. 그냥 조용히,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하지, 하지 마세요…….”


혓바닥이 풀리지 않은 게 참 다행이었다. 제대로 몸도 못 가누는 상황에 발음까지 꼬였으면 그보다 꼴사나운 게 없을 테니까.


“보기 좋아. 이젠 감정 표현도 솔직해졌고.”


“…….”


생각해보니 또 그랬다. 내가 이렇게 감정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었나. 분명 조용하고 절제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어쩌면 이게 내 본모습이지 않을까. 좋은 가정에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부모님과 함께 지냈더라면 나는 이런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 그래도 또 하면 화낼 거예요.”


“그것도 궁금하구나. 화내는 아가는 얼마나 귀여울까.”


그래도 결론은 하나였다. 그로세씨는 그냥 웃으며 넘겨버렸지만 말이다.


“으……아무튼 그러지 마세요.”


“그래. 유의할게.”


이쯤 되니 뭐 때문에 언성을 높였는지 기억도 안 났다. 나는 슬쩍 몸을 일으켰고, 그로세씨는 귀엽다는 듯 조용히 지켜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가자꾸나.”


슬쩍 손을 뻗으며 꺼낸 말이었다. 나 역시 저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왠지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 그로세씨와 있으면 따듯하고 행복할 거다. 나는 무심코 그로세씨께 존재하지 않던 어머니를 투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저, 그로세씨, 정말 감사해요. 이렇게나 잘 챙겨주시고, 막 안아주시고, 좋은 곳도 소개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후후, 인사는 됐어. 거듭 말하듯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그런데, 오늘은 저 혼자 다니고 싶어요.”


“……그게 무슨 소리니.”


“말 그대로예요. 그냥, 그냥 혼자 다니고 싶어서요.”


그로세씨의 곁에 있으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아도 좋고, 더불어 안아주시기까지도 한다.


분명 믿을 만한 사람이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의지가 아닌 의존이 돼버린다.


책임을 내려놓는 건 좋다. 다만, 영원히 내려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말 감사해요. 그로세씨 덕분에 책임을 내려놓고 즐기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흐음.”


그로세씨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나, 둘, 셋.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입을 연다.


“그래. 아가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네. 정말 감사해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허례허식 따위가 아닌, 마음속 깊이 우러나온 진심이었다.


“아, 대신 이거 드릴게요.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품에서 슬쩍 종이를 꺼내 전화번호를 적었다.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니까.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지.


“그래. 응, 다치지 말고.”


“아…….”


발걸음을 옮기기 바로 직전, 그로세씨는 마지막으로 나를 안아주셨다. 이 상태로 영영 있고 싶었지만, 나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뗐다.


“정말 감사드려요. 꼭 연락해 주세요.”


“그래, 잘 가렴. 아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린다.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그 이상으로 가볍다.


이토록 편안했던 적이 있던가. 단연코 없을 것이다.


“아, 맞아.”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잊어버린 걱정이 생각났다. 빠르게 휴대폰을 꺼낸 나는 벨파스트와 아카기의 이름을 찾아 눌렀다.


-말없이 떠나서 미안해. 돌아가면 할 말이 많아. 늘 고마워.


그래. 이게 응당 맞는 일이지.


발걸음이 더 가벼워졌다.




***




“그래. 응, 다치지 말고.”


떠나는 지휘관을 보며, 그로세는 끝까지 미소를 그렸다. 저 짧은 다리가 아장아장 움직이는 것이 너무나 귀여운 까닭이었다.


“……생각보다는 강한 아이구나.”


하지만 그가 시야에서 사라진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미소를 지워 버렸다.


당근으로만 끝내면 서로에게 참 좋았을 텐데,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래도 아직 아가인 만큼 예쁜 기억만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 생각한 그로세는 품을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그녀는 우선 말없이 지휘관의 번호를 저장했고, 알 수 없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뚜, 뚜, 신호음이 세 번도 채 울리지 않았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로세를 반겼고, 그녀는 미간을 꾹꾹 눌러대며 입술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채찍이 필요할 거 같아.”


-흐음…… 그런가요?


그로세와 마찬가지로 상대방도 약간 아쉽다는 듯 말끝을 흐렸지만, 그 아래 깔려있는 기대감은 숨길 수 없었다.


-뭐 사실 저야 좋죠. 아시잖아요? 저는 아름다운 게 부서지는 걸 좋아하잖아요. 


“지독한 악취미지.”


-아아…… 기대돼요. 과연 우리 지휘관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눈물을 뚝뚝 흘릴까요? 조용히 벌벌 떨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


그로세는 다시금 미간을 눌렀다.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해 약간 불안했기 때문이다.


“아까 껴안으면서 GPS를 달아놨어. 그리고 아가는 감이 예민하니까 조심해. 어제도 들킬 뻔했잖아.”


-놀랐어요. 역시 지휘관이라는 걸까요?


“그렇겠지, 아무리 우리가 없었다고 해도 그 하찮은 것들을 데리고 완승을 거둘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그래요. 네. 아마 금방 만날 거에요. 그럼 이만 수고하세요. 그로세씨.


“그래. 고생하거라. 론.”


여인은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로세는 말 없이 끊어진 전화기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서 있었고, 슬쩍 읊조렸다.


“그리고 아가도.”










“…….”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그저 조용할 따름이다.


방은 난잡했고, 혼란스러웠다. 살짝 타협하면 어느 정도 봐줄 만 했지만,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하면 또 달랐다.


이 방은, 완벽 초인 메이드라 불리는 벨파스트의 방이었으니까.


벨파스트는 지휘관이 떠난 이후, 정확히는 그에게 폭력을 행하는 걸 들킨 이후로, 방에 틀어박혀 버렸다.


그 누구도 그녀를 꺼낼 수 없었다. 일러스트리어스와 워스파이트가 자주 찾아오곤 했으나, 닫힌 방문을 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벨파스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하고.


그와 가장 먼저 만난 것도 나였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나눈 것도 나였다. 가장 먼저 좋아한 것도 나였다.


하물며 가장 먼저 그를 껴안은 것도 역시 나였다.


그 또한 나에게 기댔다. 나를 의지했다. 나에게 말했다. 이대로만 있어 달라고.


평생 그리할 자신이 있었다. 평생 그를 지지하며 나약하고 어린 그의 옆에 서 있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대체 왜.


당신은 나를 향해 그런 표정을 지은 걸까.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심지어는 꿈에도 나온다. 처음 보는 당신의 공포 어린 표정은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대체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걸까.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그 여우년인데, 나는,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냥, 당신의 곁에서 어슬렁거리는 금수 하나를 처리하려 한 건데.


물론 그가 폭력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건 잘 알고 있다. 타고난 천성과 더불어 살아온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이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교활한 여우년이 당신을 잡아먹을 게 뻔했다. 그 여우년한테 빼앗길 게 뻔했다.


내 것을.


“흐흐……흐흐흐.”


끝없는 고뇌 끝에 그녀는 합리화를 시작했다. 마침내 이른 것이다. 부정의 경지로.


부정했다. 잘못을 부정했고, 자신의 실수를 부정했다.


방어기제였다. 모든 책임을 아카기에게 돌려버리지 않으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버리면 앞으로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후후……후후후……흐흐흐……흐…….”


광인처럼 웃어 보인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올려 메시지를 확인했다. 비록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영영 볼 수 없을 거라 했던 그의 말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말없이 떠나서 미안해. 돌아가면 할 말이 많아. 늘 고마워.


“저도……저도 할 말이 많아요.”


끼리릭, 산발이 된 머리와 함께 그녀가 몸을 일으킨다. 부자연스럽고 끊기는 행동은 마치 고장 난 인형을 연상시켰다.


어느 정도 맞긴 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고장 났으니까.


“나만의 주인님.”


벌컥, 문이 열린다.







***






“……아아. 지휘관님.”


“언니.”


“걱정돼. 걱정돼. 어떡하지? 카가, 지휘관님은 괜찮으실까? 이상한 사람을 만나 다치시진 않을까? 아아…… 너무나 걱정되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아카기는 심란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떠난 이후, 늘 이랬다.


그녀가 불안에 떨며 지휘관을 부르고. 카가는 그것을 말린다. 처음엔 적잖게 당황한 카가였지만, 이젠 일상에 가까워져 금방 적응했다.


하지만 지휘관의 부재를 금세 적응한 카가와 달리, 시간이 지나도 아카기는 그렇지 못했다. 불안에 떨며, 혹시나 그가 다치지 않을까 자구만 나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 지휘관은 나약하고 지켜줘야 할 존재였다. 첫 만남 때부터 느낀 운명이자, 자신의 짝.


때문에 조금 화도 났다. 어째서 자신을 두고 홀로 떠난 걸까. 비록 돌아온다고 하지만, 이건 지휘관의 잘못이 맞다. 아카기는 생각했다.


“지휘관님. 너무해요. 이 아카기를 두고 떠나시다니…… 아카기의 마음에 이토록 큰 상처를 남기시다니.”


아프고, 불안하고, 화가 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직은 괜찮았다.


그녀는 조용히 휴대폰을 들어 올려 메시지를 보았다. 지휘관이 보낸 짧은 한마디를.


-말없이 떠나서 미안해. 돌아가면 할 말이 많아. 늘 고마워.


“……후훗.”


그녀는 웃었다. 고맙다는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 상처를 녹여버렸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다만, 그것과 별개로 지휘관의 잘못은 조금 교정할 필요를 느꼈다.


“벌은 받으셔야 할 거 같아요.”


때문에 조용히 읊조린다.


“나만의 지휘관님.”






***






“춥다.”


메탈 블러드가 유독 쌀쌀한 걸까. 아니면 혼자 남아서 그럴까. 오늘은 왠지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은 따듯했다. 벨파스트도, 아카기도, 그리고 그로세씨도 하나 같이 전부 나를 안아줬으니까.


조심스레 가슴에 손을 얹는다. 따듯함을 느끼며 이내 미소를 그린다.


“히히.”


내가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나,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멈추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고, 곧 식당에 들어왔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니 여러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먹는 사람도 있고, 가족과 함께 먹는 사람도 있고, 가지가지였다.


솔직히 말해 가족과 먹는 사람들이 약간 부러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뭐. 나도 이젠 혼자가 아닌걸.


“……괜찮아. 응.”


먹고, 거리를 구경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힌다. 마음의 상처는 차츰 아물어 그 자리를 안정과 경험이 대체한다.


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흐른다. 해는 어느새 부끄러워 제 모습을 감춰버렸고, 달의 시간이 도래했다.


“……예쁘다.”


항구에 앉아 조용히 달을 바라본다. 비록 보름달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참 예뻤다.


“…….”


조용히 입을 닫고 생각에 잠겨 마음에 그림을 그린다. 나를 생각해준 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안정을 찾는다.


‘주인님의 힘든 일, 고된 일, 하다못해 잡다한 일이라도, 전부 저에게 맡겨주세요. 저는, 저는 당신의 메이드, 당신이 힘들면 기대어도 좋고,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벨파스트의 얼굴을 그린다. 나를 향해 기대어도 좋다고 말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자, 지휘관님. 여기 말차랍니다? 방금 막 다린 것이니, 한 번 입에 대보심이…….’


‘지휘관, 코트 소매가 구겨졌지 않은가, 잠깐 기다려 봐라.’


나를 자꾸만 챙겨주던 아카기와 카가의 얼굴을 그린다. 다리에 힘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의심하지 마. 이 세상에는 나쁜 어른만 있는 게 아니니까.’


마지막으로, 나에게 어른의 따듯함을 알려준 그로세씨의 얼굴을 그렸다.


“……헤헤.”


이젠 입 밖으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슬쩍 몸을 일으킨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무래도 여행을 끝마칠 시간이 온 것 같다.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되찾았으니 이젠 더 남아있을 이유도 없었으니까.


“좋아. 그럼 이제…….”


바로 그 순간. 내 등골에 태어나 처음 느끼는 아찔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흉악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말단 부위부터 시작한 이 끔찍한 느낌은 이내 내 몸을 지배해버렸다.


본능, 본능이었다. 나약한 동물이 위험한 무언가를 만났을 때 느끼는 본능.


학습한 건지, 아니면 타고난 건지는 몰랐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나는 한시 빨리, 이 자리를 떠야 한다.


“…….”


티 내면 안 된다. 최대한 자연스레, 조금 전 그린 미소를 유지한 채 그대로 걸음을 옮긴다.


터벅터벅,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내 불안의 증표였다. 어린 시절 얻은 기술로 천천히 발을 움직이지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기는 외딴곳이었다. 사람이 잘 오지 않았고, 분명 나 혼자여야 했다.


“……후후후,”


그래. 분명 그래야 하는데.


걸음을 멈추며 두 눈을 감는다. 하나, 둘, 셋. 크게 심호흡하고, 눈앞에 여인에게 묻는다.


“……혹시 나한테 볼일이라도 있어?”


“네. 아주 많이요.”


경어, 미소가 잔뜩 들어찬 얼굴, 나긋나긋한 목소리.


로즈골드색 단발에 붉은 브릿지,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 불가능한 외모.


육감적인 몸매, 여유로운 얼굴.


그 아래 잠든 흉악한 기운.


“반가워요. 론이라고 해요.”


첫 만남이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위험하다고.






 

 



공포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감정이다.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터득한 하나의 방어기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생물의 가장 큰 욕구는 단연 생존이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두려웠다. 저 여자가, 그리고 저 여자를 보고 공포를 느끼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후후, 떨고 계시네요?”


참 고혹적인 목소리였다. 이는 인상적인 눈웃음과 더불어 상대방의 호의를 사기 좋은 모습이라 할 수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저 소름 돋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말 그대로 본능이었다. 내 본능이, 저 여자를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할 말 없어.”


“제가 할 말이 많아서 그래요. 혹시 이름을 여쭤봐도 좋을까요?”


“할 말 없다고.”


“그러지 마시고요. 정말, 고대해온 순간이라 그러니까.”


벽을 보고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하든 통하지 않으리란 걸 깨달은 것도 이때쯤이었다.


“자, 다시 한번 물을게요. 성함이 어찌 되시나요?”


“…….”


천천히 머리라도 굴리고 싶었지만, 눈꺼풀을 여닫는 순간마다 한 걸음씩 다가오는 모습을 보곤 이내 그만두었다. 벌써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세 걸음 남짓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벨,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흐음. 역시 가명인가요.”


너무 같잖은 대답이었을까.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틈을 노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날까 생각했지만, 의미 없는 행동임을 깨달아 곧 그만두었다.


“그래요. 벨, 벨. 네. 벨씨. 저희 잠깐 이야기 좀 나누지 않을래요?”


“……아니. 싫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순수하게,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갈색 눈에 깃든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금 한 걸음 다가왔고, 나는 조용히 동전을 하나 꺼내 보였다.


“동전 던지기, 동전 던지기는 어때.”


“동전……던지기요?”


“그래. 네가 이기면 순순히 네 뜻을 따라줄게. 대신, 내가 이기면 날 그냥 보내주는 거야..”


“흐음…….”


옅은 침음과 함께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미소를 그렸다. 긍정의 표시였다. 나는 가만히 심호흡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입을 열었다.


“앞면 뒷면, 네가 골라.”


“어머, 친절하셔라…… 그럼 뒷면으로 할게요.”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꺼낸 동전이 뒷면밖에 없는 동전이라는 사실이.


하늘이 도운 게 분명했다. 안정을 되찾은 난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은 후 동전을 튕겼고, 챙, 하는 금속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동전은 하늘을 날았다.


빙글빙글, 돌고 도는 동전의 답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핑계를 얻게 된 난 안심했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너, 너…….”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론이 동전을 낚아챘다.


“……헤에.”


손에 쥐어진 작은 동전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슬쩍 고개를 돌린다. 작금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주변에 사람이 있나 없나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양면이……같네요.”


“……오, 오지마!!!”


처음 듣는 위협적인 목소리, 이성은 한 줌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 버렸고, 나는 곧바로 도망치려 발을 돌렸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이게 뭘까. 저 여자는 대체 뭐고 대체 왜 나를 노리는 걸까.


아니, 그 와중에 동전을 낚아채는 저 정신 나간 신체 능력은 또 뭐지. 애초에 도망칠 순 있는 걸까.


“……후후. 저를 보고도 도망치려고 하다니.”


끔찍한 결론에 도달하니 이번엔 끔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이 들리지 않는 게 희소식이었지만, 곧 이어지는 목소리는 나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설마,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요오~?”


그렇게 쾅, 돌로 된 바닥이 무너지는 소리.


“커헉……!”


다시 한번 쾅, 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온몸이 끔찍한 격통에 비명을 지르지만, 입은 조용했다. 상상조차 못 할 격통에 말 문이 막힌 까닭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희미한 의식 아래 슬쩍 눈동자를 굴려 나를 제압한 그녀를 바라보는 것.


“잠시 주무세요. 아프게 한 건 사과드릴게요.”


그리고 하나도 미안해하지 않은 표정을 지은 그녀를 보며 공포에 떠는 것, 그게 전부였다.






***











-오빠, 오빠.


“…….”


-오빠……일어나. 일어나야 해…….


“……아.”


-오빠, 위험해…….











“허억……!!!”


쾅,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다. 격한 몸짓에 조금 큰 소리가 나긴 했지만,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어머,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주변 겹겹이 쌓인 방음판이 소음을 전부 잡아주고 있었으니까.


“차는 뭘 드시나요. 커피? 녹차? 원하시는 거 있으면 빨리 말씀해주세요.”


“……내가, 내가 할 말이야.”


“네? 그게 무슨…….”


“나한테 원하는 게 뭐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빨리, 빨리 말해.”


농익은 공포를 감추고 눈동자에 적의를 심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수단이었다.


이토록 두려운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동생이 끌려갈 때 비슷한 감정을 느끼긴 했지만, 그때는 동생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두려웠던 거고, 지금은 순수하게 나 자신의 신변에 공포를 느꼈다.


“후후, 급하셔라. 일단 않아 보세요. 저희는 나눌 이야기가 참 많으니까요.”


끝끝내 미소를 고수하는 건 대체 무슨 의도일까. 알 수 없지만, 우선 저 여자의 심기를 건드려선 하등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저항의 의지를 모두 잃어버린 난 얌전히 그녀, 그러니까 론의 맞은 편에 앉았다. 우리 둘 사이에 있는 건 낡디낡은 나무 책상, 그게 전부였다.


“…….”


조용히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가만히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두려워 온몸이 벌벌 떨리지만, 어떻게든 참아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아, 후우, 하아, 후우, 노골적으로 거친 호흡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침묵이라 부르기엔 약간 애매했지만, 그래도 싸늘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아, 죄송해요. 공포에 질려 벌벌 떠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그만…….”


“뭐……?”


“취미 비슷한 거예요. 제일 좋아하는 건 따로 있지만, 이런 것도 나름 즐겁답니다?”


저게 정녕 사람이 할 말인가. 다른 생명이 공포에 질린 걸 보며 만족감을 느끼다니.


이 시점에서 확신했다. 저 여자는 정상이 아니라고.


“후후, 그러니까. 제가 왜 벨씨를 여기까지 데려왔냐 물으셨죠?”


마침내 들어온 본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언어 대신 행동을 택한 이유는 괜히 입을 뗐다간 벌벌 떨리는 목소리 밖에 나오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 둘, 셋. 시간이 흐른다. 나에겐 두려움이, 그녀에게는 즐거움이 가득한 시간 끝에 나온 대답은, 나를 여기까지 끌고와 내뱉은 그녀의 목적은.


“좋아해요. 벨씨.”


참, 터무니 없었다.


“…………뭐?”


“말 그대로예요. 좋아한다고요.”


상식을 초월한 대답이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그녀의 말이 진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옅게 홍조를 그린 그녀의 얼굴은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를 연상시켰다. 거짓이라 생각되진 않았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대체 왜?”


당혹감, 두려움, 그다음은 의문이었다. 우리는 지금 처음 만났는데 대체 왜.


“우리는 지금 처음 만났어, 상식적으로, 상식적으로 그 찰나에 사랑에 빠지리라 없잖아,”


더불어 그녀는 날 미행했다. 애초에 그 첫 만남이라는 것도 뒤틀리기 짝이 없었는데, 대체 어떤 이유로 나를 좋아한다는 거지, 하나도 납득할 수 없었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한참 전부터 쭈욱, 당신을 바라봤으니까요.”


“……설마.”


“그래요. 뭔가 이상함을 느끼셨었죠? 그게 바로 저였답니다?”


그로세씨와 있을 때 느낀 불쾌한 감각의 정체는 바로 그녀였던 거다. 기껏 문제에 답을 적었지만, 하나도 기분 좋지 않았다.


“아아, 어찌나 귀여운지, 참, 저도 모르게 껴안고 싶었다니까요?”


양손을 뺨에 올려 보이며 얼굴을 붉힌다. 모든 의문이 짜 맞춰짐과 동시에 소름이 돋는다. 나는 한참 전부터 이 여자에게 미행당했던 거고, 이는 곧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여줬다는 소리다.


걱정됐다. 혹시나 그로세씨가 험한 꼴을 당하시지 않을까. 물론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긴 하지만, 이 여자는 그 이상으로 위험했다.


“그, 그러니까. 나를 좋아해서 이런 짓을 한 거라고?”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할 일도 있어서 말이죠.”


그리고 탁, 조심스레 손을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허나 얼굴에 깃든 홍조는 빠지지 않아 도리어 이질적인 느낌을 풍겼다.


“자, 대답해주세요 벨씨. 당신의 대답은 뭔가요. 제 진심 어린 고백에 당신은 뭐라 답해 주실 건가요.”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친다. 어째선지 붉게만 느껴지는 그녀의 갈색 눈이 나를 응시한다.


호흡은 진즉에 망가졌다. 너무나 긴장한 탓에 혈액 순환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손발마저 저렸다.


뭐라 대답해야 할까. 아니, 무슨 대답을 하든 내가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벨파스트 나 어떡해, 나, 나, 나, 너무 무서워.


아니, 벨파스트가 아니어도 좋아, 아카기, 카가, 그로세씨, 저, 저 어떡해야 하죠?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이 여자를…….


생각이 마비 된다. 눈 앞이 흐려진다. 공포에 잠식된 육체는 마음마저 망가진다.


“자, 어서. 대답해주세요.”


그리고 들어오는 압박, 머리가 빙글빙글, 호흡조차 잊어버려 뇌는 산소 부족, 손발은 축축해져 입술마저 말라온다.


정신은 이미 반쯤 놓아버렸다. 나, 나, 나, 너무 무서워.


“벨씨……? 빨리…….”


“……시, 싫어.”


“아하.”


“……아.”


또다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무심코 진심을 말해 버리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호흡의 자유를 되찾았고, 그대로 책상에 고개를 박아버렸다.


목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곧 다가올 폭풍에 조용히 의지를 다졌지만, 떨려오는 손발은 전혀 잦아들지 않았다.


“……후후.”


“아, 아니. 그러니까…….”


“후후, 아뇨. 상관없어요. 정말로.”


그리고 들려오는 웃음소리, 황급히 고개를 들어 론에게 해명하려 했지만, 돌아오는 건 웃음과 다정한 말투.


-쾅!!!


그리고 압도적인 폭력.






 







론과 함께하는 지금, 그가 실낱같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둘 사이에 나무 탁자, 그러니까 서로를 가로막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별거 아니지만, 그 별거 아닌 상황이 지휘관에게는 큰 안정감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0과1은 엄연히 다른 법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나무 탁자가 세로로 쪼개진 지금, 지휘관의 얼굴이 새파래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아, 아아.”


이제 론과 지휘관,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진짜 대화를 시작할 시간이다.


“아, 혹시 겁먹으셨나요. 죄송해요. 고의는 아니니, 부디 이해해주시길 바랄게요.”


지휘관은 대답 대신 조용히 몸을 떨었다. 공포에 잠식된 신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사고조차 마비된 까닭이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겁먹어 머릿속이 새하얘진 그였지만, 이젠 그조차도 아니었다. 그냥 무(無)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아, 그 표정, 참 귀엽네요.”


그런 지금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론은 슬쩍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부드럽고, 다정하고, 또 상냥하지만, 그 아래 깃든 파멸적인 폭력은 그녀를 이루는 근간이자 근본이었다.


그녀의 고운 손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의 얼굴을 구석구석 훑는다. 눈, 코, 입. 하다못해 귀까지, 모든 자리를 스쳐 지나가며 그를 느낀다.


얼어버린 지휘관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그리고 조용히 가쁜 숨을 내쉴 뿐, 그게 전부였다.


“콱, 하고, 깨물어버리고 싶을 만큼.”


그래서 참지 못했다.


-콰직!


“흐앗……!!!”


론의 날카로운 이빨이 지휘관의 귓불을 씹는다. 뚝뚝, 비릿한 피가 흐르고 지휘관의 얼음이 깨져 마침내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너, 너…….”


천천히 손을 뻗어 격통의 근원지로 손가락을 뻗은 지휘관은 이내 론의 입술에 옅게 묻어있는 선혈의 주인이 누구의 것인지 깨달았다. 두려움은 한층 커졌다.


막상 론 본인은 편안한 미소를 그리며 손가락으로 선혈을 닦아냈다. 붉다 못해 소름 돋지만, 론에게는 그저 다정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요…… 그 표정이에요. 그 얼굴이, 두려워 공포에 질린 그 얼굴이…… 저를 원망하는 듯 보이는 그 눈빛이!!! 저를…… 저를 완성시켜요…….”


몸을 배배 꼬며 자기 몸을 껴안은 론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목소리에 결여 된 상냥함은 그녀의 본성이 드러났다는 걸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무언가를 부수며 쾌락을 느끼는 그녀의 변태적인 본성이 마침내 드러난 거다.


“아름다운 게 부서지는 걸 볼 때 얼마나 기분 좋은지 아세요? 이 짜릿한 느낌이, 제 몸을 지배하는 이 아찔한 기운이…… 얼마나 대단한지, 벨씨가 아실까요?”


“그, 그딴 거 몰라!!!”


지휘관은 깨달았다. 그녀는 폭력 그 자체라고, 그토록 두려워하며 혐오하고, 증오하며 역겨워하던 폭력의 덩어리라고.


폭력을 즐기는 이들도 이따금 봐왔지만,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녀는, 론은, 그냥 폭력을 의인화한 존재였다.


“괜찮아요. 오늘 알려드릴 테니까.”


“오, 오지 마. 나한테 오지 마…… 제발…….”


때문에 지휘관이 꼴사나운 소리와 함께 뒷걸음질 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고, 동공은 떨리다 못해 흐려지고, 입술은 바짝바짝 마른다.


허나 당연하게도, 도망칠 순 없었다.


“자, 지휘관님. 해보세요. 지금부터 제 목을 조르는 거예요. 알았죠?”


힘 하나 안들이고 지휘관을 붙잡은 론은 그의 작은 손을 맞잡아 자기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애써 고개를 저으며 거부하려 한 그였지만, 선택지는 하나였다.


포개진 두 손이 론의 목으로 움직인다. 보기에도 얇아 가녀린 목이지만, 그녀에게 망설임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지휘관님…… 이렇게…… 이렇게…….”


꾸드드득, 억센 손과 여린 손이 목을 조여온다. 차츰 가빠지는 호흡에 사고조차 마비되지만, 그녀는 더없이 기뻐하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하아……흐으…… 흐으…….”


정확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즐기고 있었다. 망가진 그의 얼굴, 호흡을 제한당한 그녀보다 더 가쁜 그의 호흡. 그리고 표정에 물든 공포.


……더없이 사랑스럽다.


이대로 기절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손에 더더욱 힘을 주기 시작했고, 지휘관의 얼굴은 더더욱 찡그려졌다. 즐겁고 행복하며 실로 유쾌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지휘관의 표정이 크게 바뀐다.


“그만해!!!”


콱 하고, 지휘관이 그녀의 손을 내친다. 그와 동시에 론은 호흡의 자유를 되찾았고, 더 없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너 피 나잖아…….”


걱정 어린 그의 표정을 보고, 그녀는 놀라다 못해 경악했다.


천천히 손을 뻗어 목을 살짝 만진다. 손에 끼워진 날카로운 장갑에 눌린 연약한 피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안절부절, 그의 표정에 자리 잡은 건 공포가 아닌 근심과 걱정.


나를 위한 근심.


나를 향한 걱정.


나를 향한……동정심.


“이게 대체…….”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가학성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선하고 숭고한 인간이라고 한들, 가학성이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어린아이가 작은 곤충이나 동물을 괴롭히는 일은 너무나 흔하지 않은가, 작은 곤충의 다리와 날개를 뜯는 그들의 목적은 단순한 쾌락,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는 본능이다. 고대로부터 각인 된 인간의 습성이자 본질, 부정할 수 없다.


하물며 자신을 상처입힌 사람이라면, 자기를 납치하고, 아프게 하고, 정신적으로 괴롭게 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복수를 하고 싶은 게 당연한 심리다.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싶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 아이는, 여리고 어려 나약한 이 아이는, 공포에 질려 벌벌 떠는 이 아이는.


“아아…… 아아…… 아아……!!!”


어찌 이리 상냥한가!


“벨! 벨! 벨!!! 어찌 이리 상냥한 거죠? 당신 성품의 끝은 어디죠? 대체, 대체,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거죠?”


본능이 몸을 지배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그의 위에 올라타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작고, 부드럽고, 고생해 상처가 많은 그의 목, 나를 향해 걱정 어린 목소리를 내준 그 목을 움켜쥐며 나는 지고의 쾌락을 느낀다.


“커헉……크흑…….”


숨을 쉬지 못해 캑캑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아랫배가 울린다, 쿵쿵, 난생처음 느끼는 아찔한 감각이지만, 알 수 있었다. 이는 사랑이라고.


“벨! 벨! 벨!!! 저 어떡하죠? 당신이 사랑스러워요! 더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워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멀리서 볼 때는 그냥 귀여운 아이였다. 가까이서 볼 때는 그냥 상냥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납치해 강제로 대화를 나누니 상냥하고 귀여워 호감 가는 아이였다.


그리고 지금은, 사랑하는 아이였다.


“말해주세요! 저, 저, 저, 어떡해야 하죠? 당신이 좋아서 미칠 것 같은데, 이토록 상냥한 당신의 품성에 반해 미칠 거 같은데!!!”


“크흡……케엑…….”


“아, 아아…… 죄송해요. 이렇게 하면 말씀을 못 하시겠죠? 자, 풀어드릴 테니, 말씀해주세요.”


파랗게 질려버린 그의 얼굴을 보며 한 줌의 이성을 되찾았다. 조심스레 손의 힘을 빼니, 기침과 함께 그는 호흡을 되찾았다.


“흐으……하아…….”


추했다. 눈물과 콧물 범벅된 얼굴에 평소 보여주던 무감정한 모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으극, 헤윽, 아윽……케흑…….”


이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모습, 너무나 가여워 무심코 안아버릴 뻔했지만, 격렬히 치솟은 감정에 선을 넘어버릴 뻔한 그녀였지만,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자, 지휘관님. 저는 여기까지예요. 아프게 한 건 사과드릴게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끼익, 문이 열린다.


“자, 여기로 나가세요.”


“흐으……?”


사람보단 짐승에 가까운 대답이었지만, 론은 이해했다. 저건 의문이라고.


“이런 걸로 거짓말은 하지 않으니 믿어주세요.”


평정심을 되찾은 론은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 취미는, 방생이거든요.”


“무, 무서워…….”


마침내 인간의 언어를 되찾은 지휘관은 벌벌 떨리는 몸을 이끌어 문으로 이동했다. 론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웃고 있었고, 지휘관은 두려워했다.


탁, 지익, 탁, 지익, 걷기보단 기어가는 것에 가까운 그 움직임은 지휘관의 마음 그 자체였다. 걸레짝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문밖으로 나간 그 순간, 론은 조용히 읊조렸다.


“참, 사랑스러워라.”






***






“우웨엑……우에엑…….”


밖으로 탈출한 지휘관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속을 게워 내는 일,. 극도의 공포로 온몸이 망가져 버린 탓이다.


대충 입을 닦아낸 후, 지휘관은 어두운 밤거리를 홀로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시선은 오직 바닥만을 향할 뿐이었다.


“흐으……흐으…….”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뭐야.


저 정신 나간 여자는 뭐지, 나는 대체 왜 이런 꼴을 당하는 거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내가 저 여자에게 무슨 피해를 줬길래, 나는, 대체, 왜.


“하흐……헤으……흐으……하아……흐윽…….”


도와줘, 도와주세요. 나무나 도와주세요.


벨파스트, 도와주세요. 아카기, 살려주세요.


아니야, 아니야, 그 둘은 여기 없어, 나는 여기 혼자 왔어, 여기는 아무도 없어. 여기는 내 편이 없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그, 그로세씨…… 도, 도와주세요.”


제발, 아무나 나를. 나를…….


“……힘들어 보이는구나, 아가.”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더없이 반가운 목소리.


“아, 아아…… 아아아……!!!”


“아가. 뭔가 힘든 일이 있니?”


내 구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