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한물 간 작곡가
아니. 애초에 뜬 적이 없기에 한물 갔다고 표현하기도 힘들겠지.

그림이든, 글이든, 음악이든, 춤이든
예술이란 건 본디 독창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지녀야 명작이다.

독창성만을 중시한 채 대중의 이해를 등한시 한다면
자기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 하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고

대중성만을 중시한 채 자기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지 못한다면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고, 흔하디흔한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는 대중의 이해를 바라기 위해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되느니
차라리 우물 깊숙한 곳의 개구리가 되기로 했다.

클래식같은 서양음악을 전공했지만
만들고자 하는 건 실용음악이다.

유튜브를 통해 대중들에게 자기 음악을 공개하면서도
자기 음악을 듣지 않는 대중들은 무지몽매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사람들의 관심과 성원을 바라는데
정작 자신은 대중들의 취향이나 인식을 고려하지 않는다.

멍청한 자신을 바꾸기보단, 우매한 민중들을 욕하며
MIDI에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 음표를 그린다.
 
채 50명도 되지 않는 구독자들에게서
광고수익이 나올 리 없다.
동영상엔 흔한 그림이나 움직이는 영상도 없이
단색 화면에 남자가 만든 BGM만 깔린다.

그 옛날 가수 유재하가 단 1장의 앨범만으로도 전설로 평가되듯
‘음악’만 좋으면 사람들이 들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좋아하는 가수들은 많다.
클래식을 전공하던 시절, 이미 한물 간 가수인 서태지의 음악에 홀린 듯 빠져들었다.
복고열풍을 타고 방영되던 90년대 배경 드라마에서 나오던
녹음상태도, 송출음향도 거지 같았던 ‘난 알아요’가 그의 뇌리를 후려 갈겼다.

음악을 찾아보고, 가수를 찾아내고, 최신곡부터 조금씩 과거로 넘어와
‘울트라맨이야’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X-Japan의 히데를 모방했다는 비난성 댓글을 발견한다.
이미 완벽한 태지빠가 되어 버린 남자는
감히 어떤 새끼가 우리 형님을 욕보이는지 알기 위해
X-Japan을 찾아보았고
응당 그렇듯 요시키와 히데의 음악에 빨려 들어갔다.

대학에서 매일 같이 연주해야 했던 1천 년 전 작곡가들의 음악을 내팽개치고
현대 음악을 존재하게 만든, 명반이라고 하지만
한물 간 가수들의 대중가요를 듣는다.

김광석, 송창식, 신해철, 사랑과 평화….
X Japan, 범프 오브 치킨
엘비스 프레슬리, Queen, 마이클 잭슨
그리고 가락밖에 모르던 Let It Be를 떠올리고선 비틀즈와 존 레논에게 도달했을 즈음엔
대학은 때려치다 시피 한 상태가 되었고
남자의 음악관은 괴상하리만치 비틀어져 있었다.

자기 우상처럼 되고 싶고
그들과 같은 독창적이고 개성 넘치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
평생을 배운 건 1천년 전 교회나 궁정에서 연주되고
지금도 예술의전당에서 울릴 법한 음악인데

그 기술과 감성을 가지고 만드는 대중음악이라….
남자의 음악은 독창성은 넘쳐났지만, 대중성을 내다 버렸다.

“하아..썩을”

돈이 없다.
부모님과 의절하기까진 이효리의 10분 이라는 노래보다도 빨랐고
하물며 찬송가도 아닌데, 컴퓨터로 MIDI나 찍는 놈에게 하늘에선 빵을 내려주지 않는다.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나?”

본디 예술은 배고픈거라던가
전공을 살리고, 그대로 대학을 졸업했더라면
부모님의 알선을 받아 시립교향악단의 말석이라도 꿰찻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의 서양고전음악에 대한 재능은
그 자신을 굶어 죽이지 않을 정도다.

이제 와서 독일의 귀머거리가 만든 3중주니 4중주니 하는 음악을 거들떠보기도 싫다.
자신에게 있어서 음악의 아버지는 이름만 신성한 로마제국의 흰머리 가발쟁이가 아니다.

신경질적으로 클릭질을 하다가
AI의 추천 영상이 한 여자의 영상을 틀어 준다.

우타이테라고 하나?
남이 만든 음악을 훔쳐 가듯 홀라당 가져가선
자기 노래 인 것처럼 불러제끼는 모지리들.

음악에 대한 이해 하나 없이
부르는 것에만 치중하는 가사 재생기 같은 놈들.

그마저도, 노래를 부르는데 자신이 없으면
2D로 된 캐릭터를 앞세우거나 코스프레를 하는데 열중하는 얼치기들.

그런 아마추어 여자 가수 한 명이
남자의 음악을, 출처도 표시하지 않은 채
가사까지 마음대로 붙여서 부르는 영상을 올린다.

자신보다 구독자수가 10배는 많아 보이지만.
그래봣자 500명 남짓.

지금까지 올린 영상들도 대부분 커버 음원인데.
어쩌다가 남자의 음악까지 당도했는지 알 길이 없다.

"하하.. 이 썩을년이"

남자는 입으로 욕을 내뱉는다.
이 멍청한 아마추어 가수는 저작권이 뭔지도 모를 거고 상도덕도 없다.

당장에라도 신고버튼을 눌러 영상을 내리게 만드는 건 쉽지만.
남자의 입에선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처음으로 생긴 자기 팬이다.
들어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불러 주기까지 했다.

남자의 음악인 줄 모르는.
아니, 남자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댓글로 음악을 칭찬한다.

"이 새끼를 어떻게 조지지?"
입으로 계속해서 욕지거릴 내뱉으면서
남자는 여자의 영상을 하나씩, 하나씩 시청한다.

—--

"야, 너지? 내 노래 훔쳐 간거"
편의점 여자 직원에게 1+1 커피를 구매하며
남자는 이야기를 건넨다.

"ㅇ…예?"

"다 알고왔다고. 유튜브에 노래 불러서 올리는 거, 내 노래 훔친거,
 구독자수 500명. 영상 수 23개, 여기 화면 봐봐. 이 채널, 너잖아"

남자는 여자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밀며
속사포같이 단어들을 쏟아 낸다.

카툰 랜더링이 적용된 3D모델링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더라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개인정보를 숨기고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방송하다보면 알음알음 개인사를 꺼낸다.

어떤 일하는지, 어떤 손님이 왔다 갔는지,
요즘 어떤 음식을 먹어 봤는지. 어딜 다녀왔다던지. 주변에 어떤 프랜차이즈가 입점했다던지.

흔하고 간단간단한 정보라도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장소는 끽해 봐야 전국에 1~2군데 뿐이다.

하물며, 유튜브로 우타이테나 하는 놈들이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제대로 된 의식주를 영위할 리 없다.

집과 근무지를 오갈 뿐인 하루
유일한 취미생활은 방송을 하거나
노래를 불러 유튜브에 송출하는 것.

자신 또한 이런 생활하기에
상대방이 어떤 생활을 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저기… 손님. 무슨 말씀이신지….
 물건 구매 하지 않으실거면 나가주세요"

여자는 모르는 일인 듯한 표정이다.
유튜버들이 괜히 신상을 숨기고 방송하는 게 아니다.

"이거 영상 보이지? 마지막에 올린 거 말이야..
저작권으로 신고버튼 하나 누르면 노란딱지가 아니라 영상 자체를 지워 버릴 수 있어.
어떡하나. 지금까지 올린 영상들 중에 가장 조회 수가 많이 나온 건데…

네 영상 아니라면 상관없지?"

여자의 앞에서 보란 듯이
신고버튼을 향해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인다.

만약 이 편의점 직원이 아니라면
누르든 말든 진상 손님을 내쫓으려 할 것이고
그땐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1+1 커피 중 하나를 건네줄 것이다.

남자의 가방 속에는 그렇게 구매하게 된
삼각김밥, 탄산음료, 과자가 한가득 담겨 있다.

이번에도 이 여자가 아니라면
주변에 다른 편의점 2~3군데를 더 들쑤시고 다닐 예정이다.

"잠깐만요!!"
여자가 순식간에 남자의 스마트폰을 가로막는다.

"하하. 정답이구만"

"......원하는 게 뭐예요?"

"많지. 요 앞에 무인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

“왜 대답이 없어? 신고할까?”

“아 알았어요. 갈게요”

남자는 계산을 마친 1+1 커피 중 하나를 계산대에 올려 둔 채로
건너편 카페를 향해 유유히 걸어간다.


—------

“저기…요”
다음번 근무자에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조심조심 무인카페를 향해 들어온 여자.

“저, 왔는데요”
남자는 구석 자리에 앉아서 머리를 뒤로 젖힌 채다.
남자를 계속해서 불러본다.


“흐..흠흠. 저 왔다니까요”
아무리 불러도 남자는 반응조차 없다.
오히려 무슨 음악을 듣는지, 귀에 이어폰을 꼽은 채 잠들어 있다
아저씨들이나 쓰는 유선 이어폰…

“도대체 뭔 음악을 듣는 거야”
연결된 스마트폰을 두드려본다.

7080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도 어려운 옛날노래들
원히트 원더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이름없는 가수들
90년대 음악들이 그나마 최신노래라고 할 법 하다.

어이가 없는 여자는 다음 곡으로 넘기자
여자가 부른 남자의 노래가 재생된다.

“뭐..뭐야, 내 노래도 있어?”

“네 노래가 아니라, 내 노래겠지”
그제야 잠에서 깬 남자.
이어폰을 빼고선 남은 편의점 커피를 홀짝인다.

“저.. 저기. 그게. 그 유튜브 채널은 제가 아니라 제 친구가 하는 거거든요.
 편집하고 음향만 조금 도와주는 거라…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여자는 이제 와서 되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시끄러운 소리 하지 말고. 너, 나랑 동업하자”

“제가 노래 부른 거 아니라니까요. 제 친구가…”

“음악은 내가 작곡한다. 앞으론 영상에 작곡가로 내 이름 꼭 올리고,
작사랑 노래는 네가 해. 유튜브 채널은 네걸 이용하고, 내 채널은 삭제한다.
수익은 5:5. 대신 넌 내 노래만 불러서 올린다.”

“작사도 내가 하고, 노래도 내가 부르고, 채널도 내꺼 쓰는데 뭔 반반이에요!!”


남자의 횡포에 참지 못한 여자가 드디어 폭발한다.
방금까진 ‘친구가 했다. 자기가 아니다.’ 발뺌을 하느라 바빳는데
이젠 앞뒤, 인정사정 볼거 없이 남자에게 달려든다

남자는 그제야 승부에서 이겼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꼬우면, 영상 내리던가”
남자는 여자의 최신 유튜브 영상에, 신고버튼을 가리킨다.

“으으으…”


여자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움츠러든다.
이만큼 채널을 키우기 까지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그럼, 동업자가 되었으니까. 나도 질문을 좀 하지”


남자는 언뜻 공정해 보이는 계약을 강제로 성사시키고
여자에게 질문을 건넨다.

노래는 어디서 배웠는지
남자의 음악은 어디서 듣게 되었는지
왜 수많은 곡들 중에서 남자의 음악을 선택한 것인지
남자는 쉬지 않고 질문을 가한다.

“하나씩. 히나씩만요.
어릴 때 교회에서 성악을 했어요.
저도 어쩌다가 관련 영상으로 나온 걸 들어 본건데
그냥, 좋아서 불러봤어요.

멜로디도 다 있는데 가사는 하나도 없어서
직접 써다가 붙여 봤을 뿐이에요”

”...”


여자의 대답을 듣게 된 남자가
도리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저...저기요? 저도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그…잠깐만…”


남자가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대화를 거부한다.


양손을 가리던 입은 이내 얼굴 전체를 감싼다.
손으로 가려지지 않는 코끝부분과 양쪽 귀만 여자에게 보인다.


그리고 그곳은…


“뭐야, 푸흡. 부끄러워요?
자기 음악을 남한테서 감상 듣는 게 처음이기라도 해요?
푸하하하하하

귀에 코끝까지 다 빨개져가지곤
온갖 센 척은 다 하더니만
바보같네요. 푸흡”

“잠깐만, 잠깐이면 되니까”

형세가 역전되어
얼굴조차 들지 못 하는 남자의 앞에서
여자는 연신 손가락질을 하며 놀리기 바빴다.

—------

8개월.

남자와 여자가 동업을 시작한 지
단 8개월 만에
구독자 10만 명을 달성하게 되었다.

여자가 8개월 동안 부른 노래의 수만 해도 족히 10곡
앨범으로도 만들 수 있는 많은 곡이다.

그것도 예전처럼 남이 만든 음악을 커버하는 게 아니라
모든 노래들이 남자가 작곡하고, 여자가 작사한 것이다.

당연히 그 시각은 순탄치 않았다.
남자가 곡을 만들어 오면
여자가 가사를 만들어오고
곡의 방향성과 녹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지금 말 다 했어?!”

“다 했어요! 여기서 뭘 더 고치라는거예요! 고칠거면 여기 음정이나 고치라구요!”

“내 음악은 완벽하다고”

“완벽은 무슨. 지가 유희열인 줄 알아”

“야!”

“자꾸 야야 거리지 마요! 나이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지금처럼 소리를 지르고, 서로를 비난하고
싸우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

첫 곡을 내놓을 때만 해도 기대 반 근심 반이었다.
남자가 만들어 놓은 멜로디에
여자가 심도깊게 가사를 생각하고
여자의 가사를 생각하면서 남자가 반주를 고쳐나간다.

녹음실을 빌려서 여자가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고
녹음된 소절 하나하나를 남자가 이어 붙였다.

노래가 완성된 걸 참지 못하고 바로 업로드 하려는 남자를 말리고
여자가 자기 캐릭터를 활용해 간단한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유튜브에 업로드와 동시에 여러 커뮤니티에 홍보도 했다.

첫 음악을 올리고 나서
남자의 원룸겸 작업실에서 두 남녀는 곯아떨어졌다.

이튿날 새벽에,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남자를 여자가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빨리 일어나서 이것 좀 봐봐요!!”

“아…잠좀… 너만 못 잔거 아니잖아…”

“쫌!! 나이 먹은 아저씨같이 굴지 말구요!!!”

“알았어 알았어”

여자는 연신 컴퓨터 화면을 가리킨다.
노래를 올린 지 단 하루 만에
여자의 채널 구독자 수는 4배나 올라 2천 명이 되었고
조회 수도 지금까지 올린 영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

“지…진짜죠? 이거?”

“...”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진정해. 잠깐만”
남자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댓글 창을 바라본다.

쓸데없는 광고글
여자의 목소리가 좋다
얼굴이 궁금하다
작곡가가 누구냐
퍼가요~
노래가 별로다
노래는 괜찮은데 가수가 못부른다.
얼공해라
오팬무
다음 곡은 언제나오나

수많은 댓글들을 남자가 하나씩 하나씩 바라본다.
읽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저번처럼, 귀와 코끝이 새빨갛다.

“... 무슨 호빵맨도 아니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남긴다.

남자는 화면을 바라보면서 웃고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웃는다.

세 번째 곡이 올라갈 때 즈음엔 구독자 수가 만 명을 바라보았고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욕심이 생겼다.

여자가 일하는 동안 남자는 곡을 만들고
남자가 일하는 동안 여자는 가사를 쓰고
둘 다 쉬는 날엔 의견을 나누고 녹음을 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안 해! 내가 다시는 당신이 만든 노래 부르나 봐라!”

“뭐? 곡 써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해야지, 니가 노래 잘불러서 인기 있는 줄 알어?”

“아. 그러시면, 그 잘난 실력으로 노래 자알 부르는 가수 찾아 보시던가요”
 
“뭐? 말 다 했어?”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요? 같은 말만 반복한다고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아?!!”

남자의 원룸 겸 작업실에서
서로 엉키고 섥히고 소리지르고 타박하기를
노래 한 곡당 평균 한 번을 반복했다.

싸우는 패턴은 지리멸렬할 정도로 똑같다.
남자의 노래에 여자가 군말 없이 가사를 써 오면
남자가 여자의 가사에 감놔라 배놔라 한마디씩 거든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가 여자가 짜증을 내면
남자가 눈치 없이 뭐가 힘드냐며 타박을 한다.
한계를 넘은 여자가 남자의 곡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지적하고
자존심이 상한 남자가 화를 낸다.

싸움이 격해지면…

“어디가? 녹음 안할 거야?!”

“안 해요! 내가 다시는 노래 부르나 봐라!”
여자가 남자의 작업실 겸 원룸을 박차고 나온다.
감정이 상한 남자도 여자를 붙잡지 않는다.

스트레스가 몰려오는데 어찌할 바를 모른다.
남자는 담배를 피우지도,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
그럴 돈이 있으면 녹음실을 빌리고,
여자의 방송용 마이크를 사는 데 써야 한다.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음악을 관두었거나
아니면 서양고전음악으로 밥벌이를 하느라 바쁘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아랫집에서 올라올 지, 윗집에서 내려올 지 모른다.
키보드를 내리치고 싶어도, 새로 살 돈 따위 없다.

고개를 들어서 빨간 머리의 서태지 브로마이드를 쳐다본다.
완벽주의자인 서태지는 노래를 만들 때
수정도, 녹음도, 음향작업도 수 만 번을 다시 한다고 한다.

안다.
자신은 브로마이드에 그려진 자기 우상이 아니고
하나의 노래를 붙잡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할 시간도, 능력도 없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서 틀린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자세론, 지금과 같은 인기를 구가하지 못할 것이다.
작업실 한 켠에 위치한 실버버튼을 한번 쓱 쓸어만지고
남자는 여자가 던져 버리고 간 가사를 집어 든다.

빨간색과 파란색 펜으로 온갖 수정문구가 덕지덕지 발라져서 알아보기 힘들다.
남자는 머리를 한 번 긁적인다.
MIDI를 틀어, 멜로디에 맞추어 가사를 읊어본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을 머리를 부여잡고
여자가 써놓은 가사에 맞추어
멜로디를 바꾸고, 반주를 붙여나간다.


—------

구독자가 10만이라고 해도, 수익은 변변치 않다.

영상의 수가 적은데다가, 각종 부대비용도 많이 생기고
라이브 방송을 할 정도로 시간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마저의 수익도 남자와 절반씩 나누면
여자에겐 달에 오십만원도 채 되지 않는 돈이 떨어진다.

방금까지 싸우고 윽박을 지르고 나왔어도
먹고살기 위해서 편의점에서 바코드를 찍고
물건을 진열한다.

손님에게 응대를 하는 와중에도 머리가 뒤죽박죽이다.
매번, 매번 이런다.
조금의 성질머리도 참지 못해서
화를 버럭 내고는 뛰쳐나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 또한 남자가 잘못한 것이지만
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며 뛰쳐나왔지만
꿈도, 생계도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유지하기 힘들다.
얼떨결에 가사를 쓰고 노래를 하는데
남자의 음악이 아니면 맞추어 부르기가 쉽지 않다.

어릴 때 성악을 했다 한들
자기 실력은 옥주현에 미치지 못했고
아이돌 그룹의 센터 가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친절하게 대해주면 좀 좋아?”

여자는 무거운 생수더미를 냉장실로 밀어 넣으며
불만을 토로해낸다.

매번 이렇다.
4번째 노래를 올릴 즈음에도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도망쳐 나온들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를 식히고, 다시 들어가서 담판을 보든
다시 가사를 하루 종일 고치든 해야 한다.

정신력의 소모가 크다

쓸데없는 생각하면서 창고 정리를 마치고
손님을 응대하고 계산을 하고.
비는 시간엔 멍하니 정신력을 온존한다.

자투리 시간까지 할애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쏟기엔
사람으로서 할 짓이 못 된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8시간 남짓의 시간이
오히려 여자에겐 휴식 시간이다.

"하아… 들어가기 싫다"

1시간 뒤엔 교대 근무자가 온다.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돈까지 벌 수 있는
꿀 같은 휴식 시간이 끝나간다.

"크흠. 계산"

"...일하는 데는 찾아오지 말라니까요"

한눈을 판 사이에, 몰래 편의점으로 들어온 남자가 1+1 커피를 내민다.

"그게 아니라…"

"하아. 당신이랑 말싸움 할 체력도 없고,
 가사 원하는 대로 고쳐서 갈 테니까.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둘래요?"

"고칠 필요 없어."

"아까는 고쳐오라고 난리더만
 이제 와서 왜 또 딴소리야!!!

 사람 속 뒤집는 게 그렇게 좋아요??!"

"아니…그게…"

"시작할 때부터 그랬어. 당신은 자기 할 말만 하고. 내 이야기는 들어 주지도 않고"

"미안"

"사과 참 짧네요. 그거 알아요?
 나 줄려는 척 1+1 상품만 사는 거
 진짜 없어 보여요"

"..."

남자가 계산도 하지 못한 커피를
카운터에 내려놓지도 못한 채 쭈뼛거린다.

"하아… 그냥 좀 가요. 가사 고쳐줄 테니까"

"시간 날 때 이거 들어"
남자는 음원이 담긴 USB를 여자에게 내민다.
카톡이나 메일로 보내면 될걸
굳이 저장매체에 담아서 건네는 게 아저씨 같다.

남자는 커피를 다시 진열용 냉장고에 집어넣고
터덜터덜, 작업실 겸 원룸으로 향한다.

계산대엔 USB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여자는 저장매체를 들어, 매장 바닥을 향해 집어던지려다, 이내 포기한다.



협업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필수다.
협업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필수다.
협업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필수다.


남자에겐 배려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지만
자신마저도 남자처럼 굴 수는 없다.
여자도 유튜브용 아마추어 가수가 아니라
제대로 된 가수가 되고 싶다.

정신력의 소모가 크다.
못 이기는 척, 스마트폰에 USB를 연결하고
남자가 저장해온 음악을 튼다.

한나절 전에 옥신각신했던 멜로디의 도입부가 재생된다

"하아… 도대체 뭘 들어 보라는 건지"

혼잣말이 끝나기 무섭게
멜로디가 조금 다르고, 반주가 풍성하게 붙었다.

그리고 반주에 맞추어,
여자가 써 온 가사를 남자가 읊는다.

그래, 읊는다.
남자는 음대를 나왔다는 게 믿기지도 않을 정도로 노래를 못부른다.

아. 졸업은 안 했다 그랬나?

음정도 안 맞고, 박자도 반박자 안 맞다 겨우 빨라진다.

여자가 써 온 가사의 심상에 맞추어
여자가 일하는 동안 멜로디를 고치고
직접 불러서 녹음까지 해온 것이다.

"...뭐야. 나만 또 나쁜 년 같잖아"
저작권이고 뭐고 남자의 노래를 훔친 것도 여자였고.
화해를 청하러 온 남자를 내쫓은 것도 여자였다.

"에이 씨"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새벽엔, 사람이 감정적이고 센치해지나보다.

아, 싸이월드에나 나올 법한 옛날 표현.

"아저씨랑 같이 일하니까 나도 아저씨가 되나 봐"

남자가 부르는 남자의 노래를 틀어놓고
결국 음정이 틀리는 부분에서
여자가 피식 한번 웃는다.

교대근무자 오고 나면
1+1 커피를 사서
남자의 작업실에 들려야겠다고 생각한다.

—----

그렇게 11번째 곡을 올리고 나선
남자는 앨범작업을 한다며 새로운 곡을 쓰지 않았다.

여자는 구독자가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간간이 라이브 방송을 틀어
이제는 수만 명의 팬들과 소통을 한다.

"다른 노래 안 부르냐구요?
안 돼요 안 돼요, 작곡가님하고 약속한 것도 있고
저작권 걸리면 큰일 나요"

여자의 목소리로 듣고 싶은 노래를
사연과 함께 신청곡으로 올리는 팬들이 많지만
여자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대신 남자의 노래를 신청곡으로 올릴 때면
MR도 없이 한소절 한소절 마이크에 대고 흥얼거린다.

"작곡가님은 남자냐구요 여자냐구요?
아. 아무도 못 봤겠구나.
비밀이에요~❤️"


카툰 랜더링 3D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고
귀여운 포즈로, '쉿'하는 자세를 취한다.

"음악중심에서 섭외 안 들어오냐구요?
음.. 아직 음저협에 음원등록도 제대로 안 해서 힘들어요.

작곡가님이 앨범제작 마치면 그때 할 거니까
많이 구매해주셔야 해요?

구독 좋아요. 감사합니다~"

30여분 뒤, 여자는 컴퓨터를 끄고
기지개를 한번 편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보컬트레이닝과
혹시나 방송에 나올 때를 대비한 다이어트 뿐이다.

남자가 굳이 작업실엔 안 와도 된다 했지만
여자는 편의점 폐기 간식을 챙겨서 남자에게 향한다.

협업은 배려에서…크흠.

어쨌든 한쪽만 죽어라 일하는 건 불공평하다.

"작 곡 가 님~. 작업은 잘되가요?"
이제는 남자의 원룸 비밀번호도 알고 있다.
녹음이라도 있는 날엔 철야작업이 한창이여서
화장실엔 여자의 칫솔이, 수납장 비닐봉지엔 여자의 속옷과 잠옷이 있다.

예컨대. 프리패스다. 찾아가는데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다.

크흠. 여자와 남자는 사무적인 관계일 뿐이다.
폐기간식이 그것을 증명한다.
연인 사이라면 수제간식이라도 챙겼겠지.

여자는 요즘 남자의 작업실을 찾아갈 때면
잡생각이 많아진다.

"아니. 잘 안 된다. 녹음도 다시 해야 할까 봐"

"아 또 완벽주의자 납셨네. 그냥 예전에 녹음한 거 써요"

남자가 앉아 있는 의자 뒤편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기댄다.
철야작업을 한 듯, 남자한테선 쩐내와 땀내가 나지만.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녹음실 빌려야 하니까,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우리 남은 돈 있어요? 나도 이번 달은 좀 빠듯한데…"

수익금이 5:5라면
투자금도 5:5다

앨범 제작을 하기 위해선
음원 등록비
음저협 가입비
음원판매업체에 내야햘 선수금
들어갈 돈이 많다.

"광고 음악 하나 따냈어.
 이거 만들고 나면. 숨통이 트일 거야.

 내가 내 맘대로 한 거니까, 넌 비용걱정 안 해도 돼"

"...네?"

"내가 하고 싶어서 재녹음 하는 건데,
 너는 와서 노래만 불러 주면 돼.
 뭐 하러 비용까지 부담하려 그래"

"아니.. 그거 말구요. 뭘 따냈다구요?"

"광고 음악. 어디 홈쇼핑에 BGM으로 쓰일 거라드라."

"저도, 노래 불러야 하나요?"

"뭣 하러. BGM이니까 가수는 필요 없지"

필요 없지
필요 없지
필요 없지
필요 없지 필요 없지 필요 없지
필요 없지 필요 없지 필요 없지
필요 없지 필요 없지 필요 없지

여자의 뇌리에 맴도는 문구

"그거, 하지 마요. 돈은 제가 어떻게든 준비해 올게요.

"돈이 뭐 심으면 풀떼기마냥 자라냐?"

"하지 마요. 우리 약속했잖아요"

"뭔 소리야. 무슨 약속했다는 거야"

"당신이 만든 음악만 내가 부르기로 약속했잖아요.
 지금, 내가 부르지도 않을 노래를 만들겠다는 거예요?
 나는 그 뒤로 한 번도 다른 사람 노래 부른적 없는데?"

그제야 남자가 의자를 돌려 여자를 바라본다.
처음 보는 표정이다.
화낼 때, 짜증 낼 때, 방송할 때, 밥 먹을 때
곯아 떨어졌을 때, 웃을 때, 정산금 들어왔을 때

그 어떤 때에도 보지 못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아니. 그건…"

"계약이잖아요. 수익금 5대 5로 나눈다고.
당신이 나한테 밀어붙였던 조건"

"말이 그렇단 거지. 음원 등록 안할 거야?"

"할 거예요. 광고 음악에 손대기만 해 봐.
 등록서류에 서명이고 뭐고 하나도 안할거니까"

여자는 남자에게 최후통첩을 날려놓고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차가워진 머리를 잠시 덮어두고.
카메라를 켜고, 모션트래킹 장비를 착용한다.

화가 난다면 화가 나는데
왜 화가 나는지 조차 자신도 모르겠다.

배신감인가?
자신은 그깟 계약 지킨다고 매번 신경 써 왔는데
남자는 고려조차 하지 않고 다른 음악을 만든다.

소외감인가?
자신은 남자가 없으면 부를 노래조차 이젠 없는데
남자는 여자가 없어도 노래를 만든다.

예전처럼 남자에게 짜증이 나는 것도 아니다.
차갑게 머리가 식고, 두뇌 회전이 빠르고, 이성적이다.

그래, 그깟 돈을 위해서라면
어디까지 추해질 수도 있어.

음악을, 남자와 음악을 해야 해.

"여러분. 긴급방송이에요.
글쎄 음원작업하는데, 돈이 똑 떨어져 버렸지 뭐예요.

소속사? 알잖아요. 여러분이 제 소속사인 거.
헤헤…  자체출원이라구요.

그래서 녹음실 빌릴 돈 모일때까지
여러분이랑 같이 방송할 거예요.

일을 더 하라구요?
여기서 더 알바를 늘리면, 노래 할 시간도 없는걸.

아 아냐 아냐.
구독자분들을 호구로 본다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은 방송 봐서 좋고
나는 앨범 낼 수 있어서 좋고
누이좋고 매부좋고
님도보고 뽕도따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아저씨 같은 표현 쓰지 말라구요?
우이 씨 너 누구야. 넌 채금 일주일이야. 나빴어(농담)

구독 좋아요 감사하구요
후원해주면 앨범 출시가 조금은 빨라질지도 몰라요~.

자, 저도 작곡가님이랑 이야기하다가
급하게 방송 튼거라 뭘 할지 모르겠는데…

항아리게임?
폴가이즈?
저보고 게임 방송 하라구요?
흐음, 저는 게임 잘 못 하는데.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쉬운 게임이니까
괜찮다구요?


그러며언…


네?
깨면 5만원?
하다가 소리 안지르면 10만원?
깰 때까지 방송하면 50만원?

여러분. 저 게임 스트리머 아니라
가수예요 가수.

… 그래도 쉽다니까 '켠김에 왕까지' 목표로 해볼까요?"

여자의 결말은 뻔하다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게임을 꺼버리기까지 5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그날 방송에서 하루 녹음실 대여료는 벌 수 있었다.

—--

일간 인기 87위
순위표에 이름을 걸치는 데 성공했다.

독립음악
인디 앨범 치고는 괜찮은 성적이다.
앨범제작비에 얼마가 들었는지 계산하지 않아서 손익분기점을 넘었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남자도 여자도 굶어 죽지 않았고.
다음 앨범제작비까지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뭐... 손실은 아닐 거다.

음악방송엔 초대받지 못했다.
대신 여러 기획사에서 여자에게, 그리고 남자에게 투자를 권유했다.

음향설비도, 홍보도, 제작 노하우도 공유해줄 테니 자기 소속사로 들어오라는 게 주요 골자다.

남자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정중히 거절한다.
여자는 남자 없이 단독계약도 제의 받았지만
단칼에 계약을 거절한다.

유튜브 2인조 인디밴드.
건반도 기타도 베이스도 드럼도 MIDI 소프트웨어가 하고

그 남자 작곡
그 여자 작사

옛날 영화제목같은 느낌으로.
밴드명도 여자의 유튜브 캐릭터 이름이 전부다.

"그래서. 이게 뭐예요 지금"

"뭐. 할 말 있어?"

"할 말은 당신이 나한테 있을 텐데요."

"별거 아냐. 과로. 링겔 맞고 그럼 돼"

"간호사 선생님은 아니라는데요"

"하아... 여기 병원은 개인정보보호도 없나?"

"장난치지 말고. 설명해요. 심각하니까"

"방금 한 말이 맞아. 과로, 불규칙한 식사, 불규칙적 생활, 결과는 뻔하지"

"그래서 어디가 아픈데요? 퇴원은 얼마나 걸리는데요?"

"걱정 하지마, 다음 앨범에 지장 없게 할 거니까"

"지금 앨범 이야기가 나와요?!!"
결국 참지 못한 여자가 병실에서 소리를 지른다.

다른 환자와 보호자가 여자를 힐끔 쳐다본다.

"쫌 조용히 조용히. 다른 분들도 계시잖아.
그러지 말고, 이거 노래 들어봐봐. 전주하고 멜로디 부분은 나왔는데.
후렴은 가사가 나와야 할거 같아."

남자는 여자에게 USB를 하나 건넨다.
여자는 구닥다리 방식을 선호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아무도 쓰지 않는 유선 헤드폰에 DAC까지 꼽아가며 음악을 감상하는 남자의 완고함이 좋다.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자가 아니라 자기 음악과 타협하는 배려심이 좋다.

하지만.
팔에 링거를 꼽고선 환자복을 입은 채로
자신은 하지 못하는 가사와 노래를 위해서
여자에게 굽실거리는 이 모습은…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로선 견디기 어려웠다.

"약속해요"

"말만 해. 내가 다 들어 줄게"

"그 굽실거리는 것 좀 그만 해요!
당장 내일이라도 죽는 사람인 것처럼 하면
듣는사람 미쳐 버릴 거 같으니까!"

"..."

"좋아. 딱 두 가지만 말할게요"

"뭐야. 아까 그건 약속 아니었어?"

"잠자코 듣기나 해요. 다 들어 준다면서요!"

"..."

"조용하니 좋네.

첫째로. 나한테 거짓말하지마요.
숨기고 싶은 건 숨겨도 되고.
말하기 싫은 건 말 안 해도 되지만.

거짓말 만큼은 하지 마요"

"내가 언제 거짓말 했ㄷ"

"좀 듣고 있으라니까!"

"..."

"성질 뻗쳐서 정말.

두 번째로. 나 가수생활 오래할 생각 없어요.
딱 60살 까지 하고 은퇴할 거니까.

그때까지 나랑 음악해요.

대신, 난 당신 전속 가수로
평생 당신 음악만 부를 게요"

"..."

"대답. 지킬 수 있죠?"

"..."

"지킬 수 있죠???"

"그래 60살까지. 해 보자"

"좋아요!"


여자는 남자의 대답을 듣자
USB를 챙기고.
남자에게 진한 입맞춤을 남기고
병실을 빠져나온다.

"..."

병실에 남겨진 남자는
한참을 굳어서 가만히 앉아만 있다.

이내, 겨우 정신을 차린다.
노트북과 헤드폰을 꺼내 들고선
다시 작곡을 시작한다.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

그 뒤로, 남자와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나누지 않았다.

남자의 퇴원까진 2달이 걸렸다.
여자는 매일 같이 남자의 병문안을 갔다.


남자가 음악을 만드느라 과로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규칙적인 운동을 구실 삼아서 병원 주변을 산책하고.
여자가 써 온 가사와 녹음해온 음악을 같이 평가하고
남자가 만든 멜로디를 가져가길 반복한다.

남자가 퇴원 수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하자.
여자는 병원 30분 거리의 24평 아파트로 그를 안내했다.

침대가 있는 안방이 하나.
남자의 작업실겸 여자의 방송실이 하나
옷방 겸 다용도실이 하나
화장실이 하나.
거실과 주방이 합쳐진
전형적인 3LDK 아파트.

여자가 방송으로 모은 돈과 음원판매수익.
그리고 대출을 영혼의 2/3쯤 끌어모아서
남자가 통원치료하기 가까운 곳으로 방을 구했다.

남자의 원룸에 있던 짐들은
남자의 의견도 구하지 않은 채 모두 옮겨져 있었다.

남자는 별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와 동거를 시작한다.

아침에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면
같은 아침 식사를 먹고
여자는 남자의 약을 챙겨 주고

남자가 작곡을 하는 동안
여자는 작사를 하고

남자가 가사를 검토하는 동안
여자는 남자의 멜로디로 노래를 연습하고

작업비가 떨어지면
여자가 방송을 틀고
남자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헤드폰을 쓰고

하루에 한 번, 규칙적인 운동을 이유로
두 손을 맞잡고선 주변 공원을 산책하고

남자가 병원에 진료를 보러 가면
여자는 밀린 집안일을 해치우고
약을 타온 남자에게 양말 거꾸로 벗지 말라며 타박을 한다.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고, 이따금 몸을 겹치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하지 않는다.

예전에 비해서 작업속도가 월등히 느려진다.
두번째 앨범의 첫 곡이 완성될 때까지 6개월이 넘게 걸렸다.

그 다음곡은 1년이 걸렸다. 남자가 3개월 정도 입원을 해야 했다.
남자는 병명을 알려주지 않는다. 여자는 구태여 남자에게 캐묻지 않는다.

세번째 곡을 녹음할 땐, 남자가 수술을 한 번 받았다.
병원비 때문에 여자가 방송하는 날이 많아진다.

병간호를 해야 해서, 예전처럼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한다.
그나마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데 여자는 안도감을 느낀다.

남자가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다, 다시는 병원에 갈 일이 없다고 말한다.
약봉지에 약을 한가득 담고 와서 하는 말이 거짓말 같았다.
그래도, 여자는 남자를 믿었다.

둘이서 같이 작곡을 하고
둘이서 같이 작사를 하고
둘이서 같이 녹음을 하고.

천천히, 둘만의 시간을 녹여내서
음악을 만들어 나갔다.

대중의 이해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평단의 관심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이 노래에 담길 수 있도록…

남자는 여자와의 약속을 지켰다.

남자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병원은 갈 필요가 없었고.
4번째 곡의 녹음을 마치기 전에
남자는 잿가루가 되었다.

의사는 여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래도, 환자분께서 3년이나 버티신 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너무 괘념치 마세요"

물론,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 본래 남자가 시한부 1년짜리 인생이었다는 사실도.

"거짓말쟁이야… 약속한다면서…."
남자의 영정사진 앞에서 까무러치기를 반복한다.
같은 말만을 계속 되뇌이며 혼이 빠져 버린 인형처럼 앉아 있다.

몇 년 동안 의절한 자식에게서 처음 들려온 소식이
아들의 죽음인걸 알게 된 남자의 부모는
여자를 부여잡고 울고 윽박을 질렀다.

"네년이냐? 아들한테 헛바람을 불어넣은 딴따라년이 네년이냐고!"

"내 아들 살려내! 니년이 죽인 거야. 네가 내아들 죽인 거라고!!!"

"그깟 천박한 음악 한다고. 지 몸까지 망쳐가면서… 니년 때문에 우리 아들이!!!!"

여자의 면전에 대고 폭언과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남자의 영정만을 바라본 채 굳어 있다.
부모는 이내 남 탓을 하는 걸 그만두었다.
그런다고 죽은 남자가 살아나지 않을 테니까.

발인을 마치고, 잿가루가 된 남자를 납골당에 집어넣었다.
유골함 옆에 첫번째 앨범 하나를 같이 봉한다.

남자의 부모는, 여자에게 USB를 하나 건넨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 몰래 준비한,
그리고 의절한 자기 부모를 설득 시키기 위한 최후의 역작.

애초에 작업속도가 빠른 편에 속했던 남자가 늦어지게 된 이유는, 굳이 건강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끝까지 아저씨 같기는."

여자는 혼자 남게 된 24평 아파트에서
컴퓨터에 USB를 꼽는다.

그 안에는 32개의 음악과, TXT파일이 있다.
음악은 후렴부분까지 완성된 음악도 있고.
반주도 없이 멜로디와 코드만 있는 음악도 있다.

시티팝도 있고
신디사이저가 잔뜩 들어간 사이버 펑크도 있고
발라드도 있고
신나는 댄스곡도 있고
잔잔한 포크송이나 R&B도 있다.
모두 장르가 다르지만, 남자가 작곡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성격이 비슷하다.

TXT 파일엔 한 줄의 문구가 적혀 있다.

[1년에 한 곡 씩, 가사는 부탁해]

여자의 나이가 28살이니
32개의 곡을 마칠 즈음엔 60살이 될 것이다.

"뭐야… 멜로디만 있는 건 어떡하라구"
여자는 남자가 남겨 준 유품 앞에서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

음원 차트 5위.

1위부터 4위까진 대형 소속사에 속한 아이돌그룹이 가져갔으니, 솔로가수중에선 1위다.

여자의 2번째 앨범은 대중의 관심도 높았고
전문가의 평가도 좋은 축에 속했다.

이제는 3D 캐릭터를 쓰지 않는다.
음악방송에서 섭외가 들어오면, 직접 무대 위에 오른다.

1년에 한 곡씩
유튜브에 음원을 먼저 공개한다.
10곡이 쌓이면 앨범으로 제작한다.
그리고 내년에 출시할 다음 곡의 가사를 쓰고, 녹음을 한다.

남자의 미완성된 음악을 위해 작곡을 공부한다.
시간이 모자라지만 무리하지 않는다.
규칙적인 식사, 운동, 그리고 건강검진은 빼놓지 않는다.

60살 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건강하게 있어야 한다.

10곡 중 인기가 있는 곡은 끽해야 한 두곡이다.
나머지 8곡은 팬들이나 찾아듣거나, 그마저도 잊혀진다.

여자는 남자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 대중들이 무지몽매하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인터넷 방송을 켜지 않는다.
잘나가는 곡 3~4개만 있으면, 먹고사는데,
다음 음악을 준비하는데 부족하지 않다.

가끔 기획사에서 제안이 들어오지만 거절한다.
다른 작곡가가 만들어 준 음악을 부를 생각도 없거니와.
남자가 남겨 준 음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생각도 없다.

유튜브 영상은 점점 더 단조로워진다.
남자와 다니며 찍었던 풍경사진 몇 장을 배경으로, 여자의 음악을 덧입힌다.

음악만 좋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 들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어디에다 홍보를 하지도 않는다.
팬들과 소통하지도 않는다.

그냥. 1년에 하루
남자의 기일날에 맞추어 새로운 음악을 올리길 반복한다.

사람들은 저렇게 차갑고 신비주의적인 여자가
이런 구구절절한 사랑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걸 신기해 한다.

대중들은 작곡가가 죽었는지 조차 모른다.
매년 남자의 이름이 작곡가로 명기되어 있다.

여자의 나이는 38살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새 작업이 힘들기만 하다.


수 천 번 가사를 썼다 지우고
녹음도 수 백번을 반복하지만
남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의문만이 남는다.

아직 절반도 오지 못했다. 22곡이나 남았다.


빨리, 남자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