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가 창을 두드린다. 담배냄새에 찌든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품에 안겨든 동생을 밀어내던 나는 전날의 피로에 영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신체적으로도 힘들지만, 가라앉은 기분 때문에 더욱이 탄성을 되찾기 어려운 아침이다. 어제 하루를 돌아보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저점을 찍은 날이 아닐까 싶었다.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물고 쓸데없는 공상을 하며 킥킥대는 하루 일과도 우천취소되었고, 알람이 울리기도 전 애매한 시각에 잠에서 깨버렸다. 나는 꼬물꼬물 배 쪽으로 머리를 드미는 동생의 이마를 꾹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제 늦게 들어왔던데... 안 피곤해?"


"눈이나 뜨고 그런 소리를 하시지."


"좀만 더 잘래..."


머리를 슬슬 쓰다듬어주니 이내 다시 옆으로 고꾸라져 고른 숨소리를 낸다. 잠에 취해있다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어젯밤 포차에 다녀온 일은 들키지 않은 모양이다. 허기사 올해엔 술집은 커녕 회식 자리에도 다녀온 적이 없으니.


이빨자국이 남은 목덜미에서 묻어나온 루즈와 알콜 섞인 침냄새에 아침 첫 일과를 샤워로 결정했다. 소애도 이미 알 건 다 알 나이라지만 내 가족만큼은 하나 때 묻지 않았을 거라는 헛된 기대를 품는 게 사람 심리인 법이다.




***




보일러 켜고 들어오는 걸 깜빡했다. 하는 수 없이 한겨울에 냉수를 한 가득 끼얹으며 어제 하루를 회상하기로 한다. 


평소와 같이 점심 메뉴를 하나 하나 물어가면서 그 망할 놈의 아메리카노를 사러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러내서는 계약 연장이 힘들겠다 통보했다. 회사 내부 사정이 안 좋아졌느니, 나 정도면 더 좋은 회사를 구할 수 있겠느니. 이리저리 말을 돌리긴 했지만 결국 퇴직한 헌터나 에스퍼에 비해 일반인은 연비가 떨어지니 한 번에 갈아치우겠다는 소리였다.


무기계약직 전환이라는 소리에 임직원 아들놈 대리기사 역할까지 해보고, 사회성 떨어지는 딸내미 친구 노릇까지 해줬더니만 당장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니 이게 무슨 소리냐며 호소해보기도 했지만, 애초에 인사팀 말단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이리 말하라니까 고대로 말하는 거겠지. 졸지에 백수가 되어 점심부터 회사를 나선 나는 퇴직금 봉투를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당장 처음 든 생각은 여자를 안는 것이었다. 살갗 냄새나 맡으면서 부비적거리다보면 아무래도 저녁까지는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문득 든 소애 생각에 잘못을 저지른 어린 아이같은 기분이 되어 바로 학을 뗐다. 그렇다고 일자리가 사라진 날에 선물을 산답시고 돈을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우선 식당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한참동안 돌아다니던 내가 들어간 곳은 후미진 골목 사이 대낮부터 인부들이 술판을 벌여대고 있는 식당이었다. 식당 밖에서 술판을 벌이는 덕에 안쪽은 더없이 조용한 분위기였고, 구석에서 조용히 자작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곳으로 보였다.


꽁치 몇 마리에 소주만 들이키며 앞날을 고민하던 와중 공사장보다 더 시끄럽던 바깥은 조용해지고 나는 졸지에 대낮부터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이상한 녀석이 되어버렸다. 2시간 가량을 앉아있던 나를 쳐다보는 사장의 시선이 축객에 가까워지던 그 때, 내 반대편 테이블에 지희가 앉았다.


나보다 곱절은 우울해보이는 표정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다 술을 시키는 모습에 흥미가 동한 나는 슬쩍 그녀의 앞으로 가서 앉았고, 자신감이 무색하게 어색한 대화를 나누다가.


술이 계속 들어가니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되다가...


몸을 못 가누게 되어 사리분별을 못 할 정도로 취한 나는 거리낌없이 음심을 풀어 모텔방이나 잡고 쉬었다 가자며 진심 섞인 농을 던졌고, 나와 비슷한 상태였던 지희도 꼬부라진 혀로 교태를 부리며 내게 달라붙었다.





그게 어제 하루의 일과였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끝맛이 괜찮은 재수 없는 하루처럼 보이겠지만, 하룻밤 만남으로 끝났어야할 지희와 전화번호를 교환해버렸다.


... 마주보고 누워 나눴던 대화에서 발을 뺐어야 했는데. 그 놈의 살냄새가 뭐 그리 좋다고.


그녀가 그 인적 드문 골목의 식당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는 가족들과의 다툼 때문이었단다. 겉모습부터 제법 귀티가 나서 이쁨받고 자랐겠구나 싶었는데,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곳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 웃겼던 나는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해서 웃었다.


볼을 부풀리며 불퉁한 표정으로 침대에 드러누워있던 지희는 주섬주섬 옷을 벗는 내 모습에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토마토가 되어 당황하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아랑곳 않고 껍질을 벗겨내가며 일을 다 치뤄냈는데, 글쎄 이 아가씨가, 22살 먹고서 사회 경험은 커녕 남자 경험도 없었던 것이었다. 감도가 좋아 몇 번 슥슥 만져주는 것이 전부였는데 뽑혀나온 것에 피가 한가득 묻어나오자 오히려 울고 싶은 것은 내가 되었다.


하던 일을 마저 다 치루고 두 배로 복잡해진 심경으로 천장의 얼룩을 세던 나와 다르게, 지희는 갑자기 무에 그리 좋은 일이었는지 내게 착 달라붙어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목덜미에 깨물린 자국도 그것이었고, 내 폰을 뺏어들어 자기 번호로 전화를 건 것도 그 일환이었고.


그렇게 어제 하루 동안 고민해야할 일이 크게 2가지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