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짓기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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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라락.


밤을 꼬박 새우며 만든 서류가 바람을 만난 꽃잎처럼 휘날린다.

아침마다 바쁘게 북적이던 사무실은 싸늘한 적막에 휩싸였다.

누구는 놀란 표정.

누구는 그럴줄 알았다는듯 고개를 젓는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그 중심에는 싸늘한 눈빛의 여자와 날리는 서류들을 보며 어쩔줄을 몰라하는 남자가 있었다.


"얀붕."


"네, 네..."


"정말 이정도 밖에 못하겠어?"


"죄,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서로 감정 상하게 하지 말잔 말이야. 제발 똑바로 좀 하면 안될까? 응?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아...알겠...습니다..."


입으로는 '부탁'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전혀 부탁이 아니었다.

얀붕이라 불린 남자는, 그녀에게 다시 써오겠다고 말하며, 황급히 떨어진 서류를 줍기 시작했다.

참으로 불쌍한 녀석이다.

사내에서의 그의 평가였다.

어느새부턴가 얀붕은 얀순 부장에게 제대로 찍혀있었다.

그 시기는 얀붕이 입사하고 이제 막 세달이 넘어가던 즈음.

얀순은 점차 얀붕에게 폭언과 폭력을 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업무 능력이 부족해서?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사원은 몇 없었다.

얀붕은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는 편이었다.

안좋은 소문?

얀붕의 사내 관계는 원만하다.

물론 말이 원만한 편이지 사실 이렇다 할 만큼 그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얀순이 얀붕을 이토록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내의 모두가 의문이었지만, 그들은 굳이 캐지 않았다.

언제 사람 싫은 것이 타당하고 마땅한 이유가 있겠는가?

그저 싫으니까.

그냥 마음에 안들어서.

동료들은 그리 생각하며 애써 관심을 지운다.

괜히 부장의 눈에 찍혀, 불똥이 튈 바에 지금 이대로가 그들에게는 나은 것이다.

그것이 얀붕에게 더 큰 상처가 된다는것 조차 무시하면서.

얀순은 땅에 떨어진 서류들을 줍고있는 얀붕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억지로 감정을 추스르지만, 얀붕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화가 나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억울하겠지.

화가 나겠지.

그가 내민 서류는 제법, 괜찮게 정리가 되어있는 편이었다.

핵심을 짚는 점도 뛰어나고, 마무리도 깔끔했다.

얀순을 제외한 모든 동료들이 '나쁘지 않네'라며 고개를 끄덕일 수준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얀붕에게 잘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잘했기에, 그 노력에 대한 기대를 부숴버리면 어떤 반응일까 궁금했다.

얀붕은 좋은 상사를 만났다면 더 높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상사는 좋은 상사가 아니었다.

항상 고압적이고, 폭력적이다.

그녀는 주변의 동료들에게 언제나 완벽함을 요구했다.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가 누가됬던 거침없이 폭언을 하기 일쑤였다.

그녀 밑에 일하면서 눈물을 쏟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녀 때문에 그만두는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다.

모두가 그녀를 두려워 하고 피했다.

하지만, 회사는 그녀의 폭정을 방치했다.

확실히 그녀의 능력은 뛰어나니까.

또, 그녀의 윗선이 누군지 아니까.

아무리 그녀의 인성이 개차반이라 해도 결국은 핏줄과 능력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라는 것이다.

얀순또한 언제나 자신이 어른 답지 못하다는 사실을 종종 인지하고는 한다.

어린애 장난처럼, 괴롭히며 상대의 반응을 즐기는 그런 유치하면서도 잔인한 장난.

가끔씩 마음에 드는 신입을 천천히 괴롭히며, 그 반응을 즐기는 것은 그녀의 고약한 취미였다.

물론, 그런 신입들은 얼마지나지 않아 모조리 퇴사해버렸지만.

하지만 얀순은 개의치 않았었다.

장난감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서류를 다 주운채 터덜터덜 돌아가는 얀붕을 보며 얀순은 조소를 흘렸다.

최근 들어 가장 오래 버티는 장난감이다.

길어봤자 한달을 채 못갔는데 얀붕은 꽤나 오랫동안 버티고 있었다.

이유가 있는것일까?

얀순은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얀붕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이 들었다.

그녀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인사기록을 찾아 천천히 얀붕의 이력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히죽거리며 잔인한 미소를 띄운다.

얀붕은 어떻게 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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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늘상과도 같이 야근을 하던 직원들도 밤이 늦자,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간다.

어느덧 남은 사람은 얀붕과 얀순.

퇴짜맞은 서류를 다시 처음부터 정리하는 탓에, 얀붕의 야근은 길어지고 있었다.

차츰 차츰 눈이 감긴다.

영양제 드링크나 카페인으로도 떨칠수 없는 탈력과 수면욕이 그를 괴롭혔다.

오늘 내에 마치지 못한다면, 또 혼날텐데...


"잘 하고 있어?"


"ㄴ, 네?! 네! 그렇습니다!"


피곤에 찌들은 얀붕의 귀에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은 얀순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언제 온거지?

깜짝 놀라 우당탕 거리며, 겨우 몸을 바로 세우는 얀붕의 옆에 얀순이 짜게 식은 눈으로 서있었다.

나도 모르게 졸아버린건가.

낭패감이 밀려오며, 얀붕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가오는 것 조차 모른채 꾸벅꾸벅 졸고있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며, 얀붕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피곤한가 봐?"


"아닙니다!"


"침이나 닦고 말하지?"


그 말에 얀붕이 저도 모르게 입가를 훔친다.

하지만 그녀의 말과는 달리 침이 묻어나오지는 않았다.

황당한 눈으로 얀순을 쳐다보자, 얀순의 눈이 어느새 빙긋 반달을 그린다.

거짓말이구나.

그제서야, 깨닫는다.


"회사 생활 꽤나 편해졌나봐? 내 앞에서 졸기도 하고 말야."


"그...저, 죄송합니다."


"그래서?"


"네?"


"죄송하면, 뭐 행동이라도 보여야지. 말만 죄송하다면 다야?"


...

언제나 억지스러운 패턴이다.

일에대한 능력은 인정하고 싶을 만큼 논리적이면서, 얀붕의 앞에서는 초등학교도 못들어간 철부지 어린애와 다름없다.

무턱대로 달려들어 억지로 까며, 자신에게 굴종을 강요한다.

어느덧 일년 가까이 얀순에게 고통받던 탓에 어느정도 그녀의 말투, 행동 하나 하나조차 뜻을 파악할수 있는 수준의 얀붕이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폭언.

최근 들어서는 손찌검까지 하고 있다.

비록, 뺨을 맞거나 같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얀순은 검지손가락으로 얀붕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얀붕의 자존심을 무참히 도려낸다.

즐기고 있겠지.

얀붕은 늘상처럼 귀와 마음을 닫은채, 그녀의 비난을 들으며 쳐다본다.

구제불능의 썅년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평가로서 얀순은 나름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는 여자였다.

스물 후반이었나.

긴 머리를 우아하게 묶어 올려, 원숙미를 뿜어내지만, 의외로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허리는 잘록하면서, 가슴은 의외로 풍만하다.

사무실에만 있는 주제에 처지는 부분은 없고 꽤나 관리를 하는듯 얼굴에는 윤기가 잘잘 흐른다.

이상적인 몸.

얀순의 겉은 썩 얀붕의 취향이긴 했다.


'속은 구정물 같은 년이지만.'


반쯤 죽은듯 퀭한 눈으로, 그녀를 마음으로 죽인다.

얀붕은 얀순이 자신을 처음 괴롭힌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의외로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처음엔 그저 실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에도 다음날에도 까이자, 의문을 품었다.

내가 뭘 잘못한걸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얀순은 언제나 영양가 없는 말로, 억지스럽게 꼬투리를 잡아 얀붕을 깔아뭉개기 바빴다.

그러길 한 달정도 지나자, 얀붕은 깨달았다.

얀순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저 자신이 장난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걸 깨닫자 얀붕은 얀순을 참으로 역겹다고 생각했다.

이딴 거지같은 회사 당장에 때려치우고 싶었다.

돈이라도 적게 줬으면..

얀붕은, 언제나 괴로울때면 집에 있는 동생들을 생각했다.

부모없는 새끼.

엄마없는 년.

동생이 학교에서 들은 말이었다.

모두 사실이다.

얀붕의 부모는 얀붕이 고등학생 무렵 사이좋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개처럼 다뤄지고 있으면서도 바득거리며 버티고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얀순은 그것도 모르고, 점차 그를 험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얀붕이 썩은 동아줄을 쥔채, 필사적으로 오르고 있는데도.

그 발악을 마치 재밌는 놀이라도 되는양, 다리에 매달려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찌직 찌지직.

무언가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네 인사 기록 봤어."


찌직 찌지직...

위태롭다.

몸이 흔들린다.

얀붕의 퀭한 눈에서 자그마한 불꽃이 인다.


"정말 한심해서 눈물이 다 나더라고. 어떻게 이 회사 들어온거야?"


방해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이 빌어쳐먹을 진창에서 구르고 있는데...

찌지직...

얀붕의 눈에 무슨 변화가 깃들고 있음에도 얀순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둘 밖에 없겠다 아주 작정하고 가열찬 목소리로 얀붕에 대한 원색적인 비판만 쏟아놓을 뿐이었다.

그저 얀붕의 눈물을 보고 싶어서.

꼴사납게 울면서, 끅끅대는 그 비참함을 맛보고 싶어서.

눈을 내리깐채, 묵묵히 듣고 있는 얀붕을 보며 잔뜩 오해한다.

머지 않았어.

곧 무너질거야.

이제 곧.


"백으로 들어온거야? 하지만 너..."


그 말만은 하지마.


"부모도 없잖아."


툭.

끊어졌다.


짜악!


큰 소리가 사무실을 울린다.


털썩.


얀순의 몸이 무너지듯 쓰러진다.

얀순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뺨이 얼얼하다.

어벙벙하여,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 얀순을 얀붕이 내려다 보았다.

돌아간 얼굴을 돌려 눈을 마주한다.

그제서야, 얀순은 얀붕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분노.

모멸.

혐오.

가증.

증오.

짜증.

이루말할 수 없는 폭력적인 감정이 그의 눈에서 불타고 있었다.

이런 걸 기대한게 아니었는데.

왜 울지 않는거야?

왜 빌지 않는거야?

왜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거지?

옥이야 금이야, 곱게 자라 안하무인으로 커온 얀순이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씹어발길듯이 노려보는 그 눈에 얀순은 단 한번도 느낄수 없었던 어떤 감정을 느꼈다.

완벽하게 살아오면서 올라갈 줄만 알던 그녀가.

언제나 상대를 내려다보는데 익숙하던 그녀가.

지금 가장 밑바닥까지 곤두박질 쳐, 올려다 보고 있다.

그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당황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곧 이성을 앗아간다.


"너, 너...너!"


남들 앞에서 말 한마디조차 더듬대지 않던 그녀의 입술이 파들거린다.

충격이 너무 커서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얀붕은 얀순이 일어날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여버릴거야...너, 내가 죽여버릴거라고!"


후들거리는 무릎을 부여잡고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다.

얀순의 눈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표독스럽다.

하지만 그녀가 완전히 일어남과 동시에 얀붕의 손이 다시 그녀의 뺨을 쳐냈다.


짜악!


"꺄아아악!"


처음은 얼떨떨해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두번째에는 새된 비명이 터져나왔다.

충격이 큰 탓에 부들거리며 움직이지 못하는 얀순을 보며, 얀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씨발년아."


욕이었다.

아주 담담하지만, 씹어발기듯이 내뱉는 말은 멍한 얀순의 머리를 뒤흔든다.

활활 타던 분노는 어디가고, 두번의 폭력만에 공포라는 감정이 드리운다.


뚜벅 뚜벅.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옆으로 날아간 얀순에게 얀붕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구둣발 소리가 들릴때마다 얀순의 심장이 세차게 뛴다.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그녀의 발악하는 외침을 무시하고 앞으로 다가온다.

말을 듣지 않는다.

모든것이 통제에 벗어났다.

얀붕은 그녀의 틀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것이 얀순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머리가 완전히 헝클어지고, 입안은 잔뜩 터져 피가 나온다.

시궁창처럼 썩어있는 속과 같은 모습이 되어있다.

얀붕은 그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오만하던 눈은 어디가고 자신을 마치 괴물보듯이 하는 그런 표정도 나름 신선하다.

얀붕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얀순의 머리채를 잡아 눈을 마주한다.


"꺄읏..."


머리채가 뜯겨나가던 말던 상관하지 않는다.

하루만에 끝날테지만, 얀붕은 아마 그녀가 평생 잊지 않을 놀이를 가르쳐주려고 했다.

진짜 아픔이 뭔지.

진짜 폭력이 뭔지.

이미 끊어진 이성의 끈을 다시 이어봤자, 너무 늦었다.

회사에서 잘리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다만 얀붕은 설령 인생의 나락에 떨어지더라도, 혼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년만큼은.

인간의 감정을 도려내서라도,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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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순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처음 가르쳐준 얀붕.

그 다음엔 얀순에게 절망을 맛보여주려고 맘껏 유린함.

하지만 유린당하면서 새로운 감정을 느낀 그녀가 얀붕에게 집착하기 시작하는게 2편의 내용이 될 예정.

회사 갖다 와서 씀.

댓 감사함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