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XX년 01월 01일 -

 

 머저리가 돼 가는 것 같다. 매일 같은 출근길, 항상 똑같은 업무. 변함이 없는 퇴근길. 출근에 쫒겨 애써 청하는 잠마저도. 모든 게 판에 박힌 듯 같아서 이제는 눈을 감고도 일상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신정에는 쉴 수 있다고 들었는데, 자정을 넘겨 퇴근을 해버리면 그 당일을 쉬어도 휴일이 아니라는 게 내 지론이다. 애초에 노동법도 그리 돼 있는데.

 덕분에 여자친구와 함께 신정을 맞이하기로 한 약속도 깨버렸다. 그걸 달래는 것도 만만찮은 고역이었다.

 액운 하나로는 충분치 않다는 게 하늘의 뜻인 듯, 늘 지름길로 애용하던 좁은 골목길에서 웬 낯선 여자와 부딪혀버렸다. 그거 뿐이면 말도 안했지. 그 여자가 이 얼음장같은 날씨에 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었던 게 아닌가. 덕분에 바지가 축축한데다 시려서 진지하게 감기를 걱정했다.

 세탁비는 준대서 연락처는 일단 남겼는데, 기대도 안한다. 오늘도 피곤했다.


- 20XX년 01월 08일 -


 연말연시 내내 숙취가 따라다니는 나날을 보내다보면 내가 사회인이 됐음을 실감한다. 어제는 어디의 동창회, 저번주는 어디의 동호회, 내일은 어디고 오늘은 어디였던가. 이럴 때마다 캘린더 어플에 항상 무언가를 적어 놓는 나의 습관을 칭찬해주고 싶다.

 그러고보니, 지난 번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녀한테서 연락이 왔다. 일단 세탁비 영수증을 찍어 보내줬더니 바로 입금을 해줬다. 동시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기프티콘을 보내왔다. 나도 커피를 마실 거면 핫보단 차라리 아이스가 나으니 다행이긴 했다.

 사실, 거기서 끝났으면 그냥 일상의 작은 사건이었겠지만, 괜찮으면 밥 한 끼 할 수 있겠냐며 대화가 이어졌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뭐지, 살다보니까 나도 이런 걸 겪는구나.


- 20XX년 02월 14일 -


 여자친구로부터 발렌타인 선물을 받았다. 풋풋한 시절에 나에게 주었던 것처럼 수제에 온갖 치장을 다 갖다 붙인, 그런 정성스러운 선물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시간이 흐르면 다 그런 거라 생각했다.

 근데 참 신기한 게. 집에 도착하면 먹으려고 가방에 넣어 놨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옛날이라면 죄책감에 고개도 들지 못했을 텐데 그냥 무덤덤하게 '돈이 아깝다.' 라는 느낌 밖에 들지 않았다.

 사랑이 식어버린 걸까. 아직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함께 식사를 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녀, 줄여서 아아녀에게서 또 기프티콘이 왔다. 글쎄, 발렌타인이라며 베스킨라빈스 교환권을 보내왔는데.

 내가 아이스크림을 참 좋아하기는 하지만 굳이 찾아 먹기에는 아직까지는 추운 날씨가 아닐까.


- 20XX년 03월 26일 -


 어느새인가, 깨달아보니 생각보다는 날씨가 푸근해졌다. 외투를 정리하고 가디건을 꺼냈다. 꽃들도 고개를 들기 시작해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아녀의 직장과 내 직장이 근처라는 사실을 알게된 후부터, 그녀와 나는 생각보다 자주 만나 놀기 시작했다. 의외로 이야기도 잘 통하고 취미도 맞는 부분이 많아 생각 이상으로 즐겁게 보내고 있다.

 오늘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함께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주변 공원을 산책했다.

 함께 공원 곳곳 피어난 꽃들을 둘러보았다. 그 와중에, 갑작스레 꽃 몇 송이를 꺾더니 자신의 귓등에 꽂고는 온갖 예쁜 척을 다 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웰컴투동막골이냐며 한바탕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귓등에 꽂은 꽃들로부터 무당벌레가 몇 마리 떨어졌는데, 빨리 떼어내달라며 허둥대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그녀의 모습에, 조금 그리움을 느꼈다.


- 20XX년 04월 01일 -


 어릴 때도 귀찮았지만 사회 생활을 하며 더욱 귀찮아진 일이 있는데, 바로 만우절이다.

 유쾌한 척을 하고자 어거지를 쓰며 웃기지도 않은 이상한 농담을 던져대는 아저씨들의 비위를 맞추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절대 아니지만 굉장한 자괴감이 든다.

 여자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헤어지자고. 아니, 사실 만우절이란다.

 학생 때도 하지 않은 시덥잖은 농담을 지금 와서 해버리면 어쩌자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도통 의미를 모를 아쉬움이 일었다.


- 20XX년 04월 25일 -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와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사랑을 나눈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헤어지자는 소리를 들었다.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되돌아보면 길었다, 10년은 되지 않았을까? 솔직히 진지하게 결혼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 매번 현실이란 벽에 계산기를 두드리며 프러포즈를 뒤로 미루기는 했어도, 그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앳됐던 우리가, 이제는 완전히 변해버렸구나.

 순수했던 우리가, 이제는 완전히 물들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쉽지 않을까.


- 20XX년 05월 15일 -


 당연하다 생각한 일상을 잃은 후폭풍은, 생각보다 뒤늦게 찾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소한 물건 하나에도, 전 여자친구와의 추억이 서려 있다. 플래시백되듯 그 때의 기억이 자꾸만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그냥, 상실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걸 채울 수만 있으면 뭐든 좋다고 생각했다.

 가정의 달을 맞아 같이 고기를 먹자는 뜬금없는 아아녀의 부름에 달려나간 것도 그러한 타산 때문이었을까.

 함께 웃고 떠들고, 그렇게 함께 술을 마시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를 안았다.

 침대에는 파과의 흔적이 선명했다.

 내가 잠깐 미쳐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구나.

 내가 미친놈이다.


- 20XX년 06월 01일 -


 아아녀에게 연락이 왔다. 퇴근 후에 함께 식사를 하자 그랬다.

 이전의 그 사건 이후, 잡담을 빙자한 의례적인 연락은 자주 나눴지만 이렇게 또 얼굴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퇴근 후에, 나와 그녀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파스타집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에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고백은 언제 할 거냐며, 설마 처음을 가져가곤 도둑놈처럼 내뺄 셈이었냐며.

 생각보다 당당하고 의연한 그녀의 모습에 놀라움을 느끼다가도, 어느새인가 도망만 치고 있던 나의 모습을 깨달아 깊은 자책감에 빠졌다.

 계획에도 없던, 갑작스럽고 급조된 나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 나는 도대체 무엇을 꺼려했던 거지?

 그녀라면.

 다시 한 번 불타오를 수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 20XX년 07월 20일 -


 그녀와의 연애는, 잊고 지내왔던 많은 것들을 일깨웠다.

 예를 들면, 나날이 깊어지는 사랑이나 끊임없이 그녀에 대한 생각만을 거듭하는 나 자신의 모습.

 오늘은 50일을 기념해, 커플링을 준비했다. 출근이 겹쳐 많은 일을 하진 못했지만, 크게 감동한 눈치였다.

 그래도 이걸로는 부족하다며, 기어코 8월달에 휴가를 맞춰 같이 여행을 떠나야 된다는 그녀의 어리광에.

 그냥,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 20XX년 08월 27일 -


 해외여행은 좀 부담된다며, 굳이 강원도를 가자고 졸라대던 그녀의 의향에 맞춰 이번 여행의 행선지는 강원도로 결정됐다.

 비행기표와 숙박비는 전부 내가 부담해도 괜찮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그 돈으로 동거할 집이나 같이 사자며 수줍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크게 두근거렸다.

 그녀가 오래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져왔다. 다이어리를 만들어 때때로 사진을 살펴보는 게 취미라더니, 이번 여행도 사진을 잔뜩 찍으려는 속셈인가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평생토록 잊지 못할 추억을 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20XX년 09월 16일 -


 전 여자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갑작스레 네 생각이 났다고, 잠깐 만나주면 안 되겠냐고.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며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끈질긴 그녀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간단한 외투를 걸친 뒤 거리로 나섰다.

 생각해보면, 어느새인가 또 날이 추워졌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 달리 꽤 수척해져 있었다.

 함께 술잔을 나누며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은 감정 속에는, 한 때의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은 것들이 몇몇 있었다.

 그렇게 술병이 차곡차곡 쌓이고, 밤이 깊어질 무렵, 자리를 파하고자 일어섰을 때.

 그녀가 갑자기 내게 키스를 해왔다.

 다시 시작하면 안 되겠냐고, 멀어졌던만큼 너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면서.

 취기가 오른 걸로는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로부터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수만가지의 감정을 느꼈지만.

 나는 거절했다.

 지금은, 더 소중한 사람이 있으니까.


- 20XX년 10월 10일 -


 아니다.

 뭔가 잘못됐다.

 이건 아니다.


- 20XX년 11월 24일 -


 수사에 원활한 협조를 하기 위해서.

 사실, 그보다 더 이상 직장에서의 눈치를 견뎌내기 어려워서 퇴사를 결정했다.


- 20XX년 12월 03일 -


 결국 나는 혐의 없음으로. 사건은 살인과 자살로 종결되었다.

 최근 집보다 더 나들은 경찰서로부터, 연락이 와 한 가지 물건을 받았다.

 집에서 발견된 건데, 한 번 읽으실 필요가 있겠다며.

 나는 요 몇 달, 수천번이고 되뇌었던 그 물건의 첫 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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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ry - 下 ( https://arca.live/b/yandere/9571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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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작임 나머지 지금 쓰는 중